월간레지오

2005년 11월호 [훈화]1,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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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지오마리애 [legio] 쪽지 캡슐

2005-10-25 ㅣ No.34

[형제애의 성사인 성체성사 ]

 

훈화1]

우리는 모두 부모에게서 육신을 받아 가지고 태어났다. 그렇게 해서 떨어질 수 없는 핏줄로 얽힌 우리는 가족 공동체를 형성하여 한 지붕 밑에서 한솥밥을 먹고사는 식구로 행세하게 되었다.

그런데 세상에 오신 예수님은 우리에게 이와 같은 식으로 살과 피를 건네주실 수는 없었다. 대신 그분은 죽음을 앞둔, 돌아가시기 전날 저녁 마지막 만찬 때에 성체성사를 세우셨으니, 즉 인류의 대표자들에 해당하는 열두 제자들에게 당신의 몸과 피를 빵과 포도주의 형상으로 먹고 마시게 하신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때부터 줄곧 교회 안에서 예수의 성체를 받아 모시는 특권을 누리게 되었다. 이것이 바로 미사다. 미사는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곤 집에서 혼자 드리지 않는다. 본당이라는 공동체의 한 지붕 아래에서 회중이 함께 하며 사제가 축성한 주님의 몸과 피를 받아 모시는 것이다. 그 공동체는 가정과 흡사한 유비적(類比的) 공동체이다. 표현하자면 가정에서 한솥밥을 먹듯이 성당에서도 같은 빵을 받아 모시는 것이다. 이렇게 신자들은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본당 공동체에 들어가 영성체함으로써 주님께서 주시는 똑같은 음식을 받아 모시게 된다. 이렇듯 신자들은 한 부모 밑에서 태어나 먹고사는 자식들과 크게 바를 바 없다.

예수님이 성체성사를 제정하신 것은 그분을 기억하라는 데도 이유가 있지만, 피를 나눈 형제가 어느 누구보다도 가깝듯이 성체를 모신 신자들은 보다 돈독한 형제애를 서로 나누어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주신 것이다. 크리스천 형제애는 하느님을 아버지로 받아들이는 것이며 인간을 형제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그리스도와의 일치 안에서 새로운 삶으로 거듭난 증거자들로 이 일에 앞장선 모범가들이시다. 

이렇듯 인간이 신자가 되고 형제로 대체될 때 하느님은 아버지로 대체된다. 인간이 성체로 길러지지 못하고 인간으로 만족하는 경우엔 하느님은 서구의 고대사상이나 동양철학에서 말하듯이 그저 일자(一者)나 원질(原質) 아니면 도(道), 성(誠), 무(無), 태극(太極) 같은 것으로만 비치게 된다. 불행하게도 나의 구원을 위해 전적으로 희생되신 인격적 신으로 여겨질 수 없는 것이다.


성체로 양육된 인간이 보이는 인간을 사랑하지 않으면서 보이지 않은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는 없는 일이다(참고, 요한1 4,20). 성찬례가 담고 있는 형제애의 특성을 간과할 때 이러한 인간적 오류는 얼마든지 발생할 수 있다.

인간에 대한 인간 사랑은 하느님에 대한 인간 사랑의 척도이다. 모든 크리스천 수평주의의 타당성은 십자가의 수직주의에 닻을 내리고 있는 까닭이다. 인간이 계속해서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이것을 매번 실제적으로 재생하고 있는 제대상을 멀리하는 경우에는 불가피하게 세상의 힘에 휩쓸려 타락하고 만다. ꡒ나에게서 마음이 멀어져 사람을 믿는 자들, 사람이 힘이 되어주려니 하고 믿는 자들은 천벌을 받으리라ꡓ(예레 17,5).

인간 사랑은 하느님을 향한 예배행위이다. 자기 형제를 사랑하는 자는 법을 완수하는 것이다. 크리스천 형제애는 하느님의 일성과 삼위일체의 사랑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이는 말씀과 성찬의 전례를 담고 있는 미사에서 가장 확연하고 완전하게 드러난다.

성체 안에 계시는 예수님의 희생과 사랑의 행위가 일상생활에 완전히 녹아나 형제적 사랑을 꽃피울 때 하느님은 우리로 인해 영광스럽게 되시고 인간은 하느님에 의해 영광스럽게 될 것이다.

_김현태․루가  신부


훈화2]

오늘도 아름다운 성당에 미사의 시작을 알리는 입당 성가가 우렁차게 퍼집니다.

더우나 추우나 삼삼오오 성당에 들어서는 교우들을 바라보면서 그들 안에서 그들을 이끄시는 하느님의 손길에 경탄합니다. (세상의 많은 향락이 유혹하지만 더 높은 가치를 향해 살아가는 우리 신자들에게 파이팅!)

레지오 마리애 주회합 날은 하루종일 일하고 저녁식사도 못한 듯한 모습으로 작업복을 입은 채, 그러나 표정만은 밝고 환하게 형제 자매님들이 성당에 입성(?)하심에 주님께 감사드립니다. 그들이 행복하게 살아가는 게 보기 좋고, 열심히 자기 자리를 지켜가는 모습이 대견합니다.

이런 곳에서 소임을 하는 저는 행복한 수녀입니다. 저의 행복함을 더해주는 할머니 한 분을 소개할까 합니다.

팔순의 연세, 인생의 고달픔을 다 체험하신 할머니는 성당에서 개설한 노인학교의 학생입니다.

이 할머니는 주위 분들에게 그다지 인기있는 편은 아닙니다. 특별한 재주도 없고, 부드러움도 없습니다. 그래서 늘 혼자입니다. 이런 할머니를 저 또한 무심히 바라보며 많은 할머니들 속에 한 분으로만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길목에서 마주친 할머니는 두 손에 가득 헌 상자를 들고 계셨고, 옆에는 고물이라 할 수 있는 쇠붙이가 널려 있었습니다. 저는 그냥 인사를 하고 바삐 볼일을 보러 떠났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날엔 다른 장소에서 그 할머니의 뒷모습을 멀리서 보게 되었습니다. 여전히 물에 젖어 무거운 헌 상자들을 뒤적거리고 계셨습니다.

뜨거운 한여름이 지나고 개학을 하는 첫날 할머니는 봉투를 내놓으셨습니다.

처음에는 영문을 몰라 봉투의 두툼한 촉감과 새까만 할머니의 얼굴 사이에서 잠시 혼란스러웠습니다. 생계유지를 위해 써야 할 돈이 아닌가 해서…

나중에 안 일이지만 결코 가난한 분은 아니시고 그냥저냥 살 만하시지만 자식에게 의지하지 않고 몸소 노동하여 좋은 일을 하고 싶으셨던 모양입니다.

ꡐ힘든 노인들을 도와주어서 고맙다ꡑ고 한여름 동안 길거리 휴지들을 모아 팔아서 내놓으신 것입니다.

길거리에 버려진 고물을 모으느라 손톱 밑이 새까맣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도 꾀죄죄한 모습 때문인지 늘 맨 뒤에 앉아 수업을 받으시는 그 분은 세상의 척도에 매이지 않았습니다.

돈독(?) 올랐다느니 하는 주위의 입방아에도 주눅 들지 않고 소신껏  자신의  목표를 향해 사시는 분이었습니다.

가진 것 내놓지 않고 입으로만 올리는 빈 기도, 주면 받을 것을 먼저 계산하는 영리함이 아니라 온몸으로 ꡐ땀 흘리는 사랑ꡑ에 헌신함으로써 주님의 삶을 사는 것, 그것이 바로 성체성사에 접근하는 방법이 아닐까?

할머니의 삶을 통해 세상의 눈으로가 아니라 하느님의 눈으로 세상을 따뜻이 바라볼 수 있었습니다.

ꡒ어떤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그날 먹을 양식조차 떨어졌는데 여러분 가운데 누가 그들의 몸에 필요한 것은 아무것도 주지 않으면서 ꡐ평안히 가서 몸을 따뜻하게 녹이고 배부르게 먹어라ꡑ 하고 말만 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ꡓ(야고 2,16)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께서 성체성사의 해를 설정하신 것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수난의 극한 상황에서 당신보다 형제를 더 걱정하신 그 사랑이 이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요구되는 삶이기 때문이 아닐까요? 

세상 끝나는 날까지 형제를 위해 내놓으신 주님 사랑을 기억하고 그 삶을 실천하는 것. 한 알의 밀이 바수어져서 형체는 사라져버렸지만 본성은 살아서 우리 모두에게 나누어져 너와 나를 하나로 묶어버리는… 성체!

그 오묘함이 성체를 모시러 나가는 저를 전율케 합니다.

그러나 오늘 제 자신 그대로 있음이 부끄럽습니다.

아름다운 거제도 앞바다에 바람이 붑니다.

바다의 바람을 잠재우시는 주님과 하나되어 떠나는 인생길에 두려움은 없습니다..

_전종희․마르가리타 수녀


훈화3]

ꡒ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세상 사람들이 그것을 보고 너희가 내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ꡓ(요한13,34~35).

최후의 만찬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신 후 하신 말씀이다.

이 새로운 계명은 우리들에게 무조건적인 사랑의 실천을 몸소 보여주시며 세상 사람들에게 당신과 똑같이 행하라 가르치심은 우리들로 하여금 형제애를 실천하라는 주님의 분부인 것이다. 이 같은 무조건적인 사랑을 실천함으로써 우리들은 예수님의 제자라는 표징이 되는 것이고, 이 표징을 통해서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의 참된 사랑의 가치를 알게 될 것이라는 말씀은 곧 형제애의 성사인 성체성사를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흔히 현대를 일컬어 백색 순교시대라고 한다. 옛 신앙선조들의 목숨을 건 피의 순교가 아니라 세속의 온갖 유혹 속에 살아야 하는 그리스도인들의 생활을 두고 하는 말이다.

세상의 가치관이 물질을 우선시하며 생명의 고귀함은 땅바닥에 내팽개쳐진지도 오래고, 걸신들린 아귀처럼 끝없는 욕심은 내 이웃의 비명을 삼킨 지도 옛날이다. 그런데 나는 참그리스도인으로 사랑의 실천을 지고(至高)의 목표로 살아가고 있는지 다시금 생각해 보게 된다.  

언젠가 매스컴을 통하여 산골에서 알콩달콩 살고 있는 가족 얘기를 대한 적이 있다.

맑은 공기와 하늘, 실개울과 채마밭, 까만 밤하늘의 별빛, 왁자지껄한 열 명의 도토리 같은 아이들이 전 재산인 젊은 부부의 삶이 신선한 충격과 함께 경이로움 마저 느끼게 한 적이 있었다.

내가 굳이 그들의 삶에 흥미와 부러움을 느끼는 것은  전원생활의  어설픈 낭만이 아니라 그들의 생활양식에 온갖 문명의 혜택을 누리고 있는 현대인들은 결코 얻을 수 없는 지혜로움이 가득했기 때문이다.

맏이가 둘째를, 둘째는 셋째 동생을 돌보는 식으로 형제간의 우애는 구성원들의 일상에서 바로 배워지는 것이 꼭 도제 같기도 하였다. 그들이 이웃을 위해 가진 것을 나누어서가 아니라 가정 안에서 풍겨져 나오는 인간애의 숭고함이 사람을 사람답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 일깨워주는 점이었다. 

이웃에 봉사를 한다고 한 것이 결국 자신을 위한 봉사는 아니었는지, 내 가정과 이웃을 편견을 가지고 본 적은 없었는지, 생활 속의 실천을 모토로 하는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나는 얼마나 나눔의 생활에 익숙해 있는가를 돌아보게 했다.

주님의 자녀로 한 번쯤은 묵상해 보았을 십자가상의 예수 그리스도! 과연 우리는 무엇을 묵상하고 실천에 옮겼는가. 내 것을 온전히 내놓지 못하고는 남을 사랑할 수 없음을 몸소 보여주신 그분! 그것도 모자라 미사성제를 통하여 매일 밥으로 오시는 그분의 희생을 통해서도 아무것도 배울 수가 없는 것일까? 온 인류를 위해 인간의 육신을 택하여 오셨고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부활의 생명을 주고 계시는 예수님의 전 생애가 성체성사의 가르침으로 다가오지만 우리들은 그냥 바라만 보고 있지 않은지 깊이 성찰해볼 일이다.

그리스도인의 성사는 무엇인가? 그것은 남을 있는 그대로 끌어안는 일일 것이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모범처럼 남을 형제처럼 여기며 사랑을 실천하는 일이 바로 성체성사를 사는 것이기 때문이다.

비록 주님을 알지 못하는 벽촌의 가정도 평화롭게 형제애적 삶을 사는데, 그리스도인으로 자처하는 내가 그런 성사적 삶을 살고 있는지 부끄러움이 앞선다.

그분의 가르침이 이 세상에 사랑의 표징이 되게 하기 위해서는 가슴속에 간직한 따뜻한 사랑의 불씨를 이웃에게 나누어야 함을 깊이 묵상하고 실천에 옮기자. 그렇게 함으로써 그분의 가르치심인 사랑의 절정에 다가갈 수가 있을 것이다. 

형제애라는 말이 온 인류적 사랑의 한 표현으로 이해가 되어야 함은 우리들도 예수님처럼 살고 죽어야 예수님처럼 부활할 수 있기 때문이다.

ꡒ이제 다 이루었다ꡓ(요한 19,30) 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사랑의 시작을 알리는 또 하나의 성사이듯이, 예수님처럼 실천하며 사는 것이 곧 성체성사의 삶, 참그리스도인의 삶임을 묵상해 보자.

_박종일․프란치스코


훈화4]

누군가 레지오에 대해서 마음이 끌렸다면 틀림없이 그는 평소 성모님을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어느 교구나 본당에서 레지오가 설립되어 활동하고 있으면 그것이 바로 그 교구나 본당에 성모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는 것이 되도록 특별히 노력해야 합니다.

레지오 정신은 성령과의 완전한 친교의 정신임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레지오 단원이 하는 일은 어느 것이나 성령께 한 약속 때문에 마리아와 일치하는 가운데 이루어집니다. 우리들은 성모님의 성령께 대한 친교관계에 확실히 동참하기를 원합니다. 마리아의 정신은 예수님과 단단히 결합되어 있음도 알고 있습니다. 성모님 안에서 예수님과 관련이 없는 것은 진실로 아무것도 없습니다.

미사를 통해 신자들은 하느님의 말씀과 생명의 빵인 성체로 영적인 자양분을 얻고 있습니다. 우리 영혼의 어머니이신 마리아께서는 우리들에게 성체적인 삶을 사는 방법을 일러주십니다. 베네딕토 교황 성하께서는 ꡒ마리아는 성교회의 기억을 온몸으로 체현(體現)하시는 분 - 따라서 교회의 사명을 보여주는 본보기이시다. 즉 말씀이 사는 장소가 되게 하고 말씀을 보존하며 혼돈의 시대에 이 말씀을 안전하게 지키면서, 이를 테면 악의 폭풍우로부터 말씀을 보호하는 모범이시다.ꡓ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레지오 단원은 마리아의 정신 안에서 겸손히 그 자신이, 하느님의 말씀이 생활하는 장소가 되도록 해야 합니다. 레지오 단원은 ꡐ하느님의 말씀ꡑ에 대하여 특별한 사랑을 가져야 하나 이것이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항상 요구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전례에서 말씀이 선포될 때는 이 말씀에 대한 우리들의 사랑은 끝이 없어야 합니다. 우리 레지오의 ꡐ모습ꡑ에서 가장 심오한 측면을 말한다면 그 중의 하나가 교회 전례에 대하여 우리들의 마음을 모은 일치라는 것입니다.

미사의 희생제물 즉 성체가 바로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그리스도 자신입니다. 마리아께서 아드님 예수의 열정과 죽음을 잊어버린다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분은 여기에 동의하셨습니다. 그분은 역시 예수님의 죽음을 아버지 하느님께 봉헌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마리아께서는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의 그 무시무시한 과정만을 기억하시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는지 그 까닭을 소중히 간직하십니다. 성모님은, 아드님이 스스로 십자가에 못 박히는 고난을 겪으면서까지 우리들 하나하나에게 베푸신 지극한 사랑을 목격하신 첫 번째 증인이십니다. 이것이 성체가 성모님의 모성적 사랑에 대하여 갖는 의미일 것입니다. 이 갈바리아 사건(예수님의 십자가 처형 사건)을 깊이 묵상할 때 우리들은 어머니 마리아께 이미 봉헌되었습니다.

성체성사는 갈바리아 사건의 성사적(聖事的) 재현(再現)이기 때문에 성모님은 모든 성체성사에서 언제나 함께하십니다. 물론 성모님은 성체성사가 세워지기 오래전부터 성체성사의 정신으로 사셨습니다. 성모님은 이 세상에 육신의 모습으로 오신 구세주의 실존(實存)을 모신 살아계신 최초의 성합(聖盒)이었습니다. 성모님은 아홉 달 동안 그분의 몸속에 또 마음속에 예수님의 육신, 피, 영혼과 신성을 담고 살았습니다. 즉 ꡒ마리아는 ꡐ성체의 여인ꡑ이며 레지오 정신은 ꡐ마리아의 정신ꡑ이므로 ꡐ성체는 모든 레지오 단원이 하나가 되게 하는 중심ꡑ입니다.ꡓ

금년 성체성사의 해가 시작되면서 나는 모든 레지오 단원들에게 권해볼 만한 한 가지 과제를 생각해 보았는데, 그것은 매일미사와 성찬식에 참례하고 적어도 냉담자 1명을 회두시켜 성찬예식에 함께 참여하는 일입니다. 어느새 연말이 다가오고 있는 이때에 전 세계의 남녀 레지오 단원들에게 ꡐ마리아의 정신ꡑ으로 또 마리아를 사랑하는 마음표현으로 성찬식 참례 결의를 새롭게 해보기를 권고합니다.

프랭크 더프 형제의 초기 사도직 활동 중 한 가지는 매일미사 참여 그룹을 만들고 그 회원을 모으는 일이었습니다. 에델 퀸 자매는 영성체 없이 하루도 살 수 없었으며, 매일 영성체하기 위하여 엄청난 희생을 감수하였다고 고백하였습니다. 매일미사 참여는 알피 램의 영성에서도 역시 중심적인 부분이었습니다. 성체는 교회가 가지는 가장 위대한 보화입니다.

_맥그리거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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