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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도 200주년 신약 마르코 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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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흥보 [peters1] 쪽지 캡슐

2003-02-12 ㅣ No.68

 

 

신약 마르코 복음 해제

 

 

-정양모, 한국 천주교회 200주년 기념 신약성서2 마르코 복음서, 분도출판사, 1981

 

 

 

1. 필자

네 복음서를 집필한 사람들은 자신들의 이름을 밝히지 않고 그냥 작품만 내놓았다. 그들은 작품을 중요시했을 뿐 필명은 대수롭게 여기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시대가 흐르면서, 가짜 복음서들을 배격하고 참 복음서들을 옹호할 필요성과 복음서들을 서로 구별할 필요성이 생겨 비로소 필자를 거론하게 되었다. 누가 우리 복음서를 집필했는지 처음으로 밝힌 사람은 소아시아 지방에 있는 히에라폴리스의 주교 빠삐아스였다. 그는 130년경에 사망했는데, 평소에 요한 원로로부터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고 했다. 즉, 마르코는 베드로의 통역이었는데 베드로가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에 관해서 가르친 것을 기억나는 대로 충실히 기록했다는 것이다.(에우세비오스, 교회사 3,39,15; 참조 3,39,17)

  신약성경에는 요한 마르코라는 인물이 열 번 나오는데 요한은 이스라엘식 이름이고 마르코는 로마-그리이스식 이름이다. 그는 어머니 마리아와 함께 예루살렘에 살았으며 그 집에 그리스도인들이 모이곤 했었다(사도 12,12). 바오로와 바르나바는 그를 안티오키아로 데려다가(12,25) 45-49년경의 일차 전도여행을 함께 했는데(13,5)마르코는 도중에 전도를 그만두고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버렸다(13,13). 이에 바오로가 그를 못마땅히 여긴 나머지 50-52년경의 이차 전도여행 때 다시 채용하지 않자 마르코는 바르나바와 함께 키프로스섬으로 가 전도했다(15,37-39). 그러나 53-58년경의 삼차 전도여행때, 좀더 정확히 말하자면 바오로가 에페소에서 감옥에 갇혀 있을 때 마르코는 바오로 곁에 있었다(필레 24; 골로 4,10). 그런가 하면 바오로가 순교한 다음 그 제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 쓴 2디모 4,11에서는 바오로가 디모테오에게 마르코를 데려오도록 부탁한 적이 있었다 한다. 끝으로, 60년대 초엽 로마에서 집필된Ⅰ베드 5,13에서는 마르코가 베드로의 일행으로 로마에 있었다 한다.

  빠삐아스가 전하는 말과 신약성경에 나오는 말들을 근거로 하여, 바오로의 협조자요 베드로의 통역이던 마르코가 우리 복음서를 집필 했다는 통설이 나오게 되었다. 그러나 우리 복음서를 자세히 검토해 보면 필자는 바오로나 베드로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지 않은 것같다. ① 마르코 복음서에는 바오로 특유의 낱말, 소재, 사상이 거의 없다. ② 마르코 복음서에 수록된 예수의 말씀은 50년대 아니면 60년대에 편찬된 예수 어록의 말씀보다 많이 변질되었다. 따라서 베드로가 전한 예수의 말씀을 그대로 기록했다고는 보기 어렵다. 또한 마르코 복음서에 수록된 치유 이적사화나 구마 이적사화, 논쟁사화나 대담사화 역시 목격자 베드로가 바로 전한 이야기라 할 수 없다. 사실 그 사화들은 대부분 그리이스 사화 양식을 따라 엮어져 있는데 이는 오랜 전승과정을 거쳐 가능했던 것이다.

  결론적으로, 편의상 마르코가 필자였다고 할 뿐이고 사실은 누가 우리 복음서를 집필했는지 밝힐 수 없는 실정이다. 그렇지만 복음서를 눈여겨보면 복음사가의 됨됨이는 더러 알 수 있다. 다음 항목에서 자세히 거론하겠거니와 그가 히브리어와 아랍어, 그리고 유대인들의 풍습을 안 사실로 미루어 복음사가는 유대계 그리스도인이었다. 그는 도량이 넓은 인물인지라 민족주의적 사고방식에서 벗어나 온 인류의 구원을 부르짖었다. 온 세상(14,9) 모든 민족이(13,10) 복음을 믿어 다 함께 기도할 것이라 했다(11,17). 한걸음 더 나아가 유대인들보다는 오히려 이방인들이 복음의 축복을 받을 것이라고까지 했다(12,9). 그런가 하면 시로페니키아 부인(7,28)과 로마 백부장(15,39)을 신앙인의 본보기로 내세우기도 했다.

 

2. 독자

마르코 복음사가는 명백히 이방계 그리스도인들을 상대로 복음서를 집필했다. 그러기에 그가 히브리어나 아랍어를 수록한 경우에는 거의 언제나 그리스어로 번역해 놓았다(3,17; 5,41; 7,11ㆍ34; 14,36; 15,34). 또한 이방인들에게는 생소한 유대인들의 관습을 풀이해 주었다(7,3-4; 14,12; 15,42).

  복음사가는 이방인들의 생활상을 참작하기도 했다. 예로 로마인들의 관습을 따라 밤을 사등분하고(6,48; 13,35), 그리이스 동전을 로마 동전으로 환산하며(12,42), 아내에게도 이혼할 권리를 인정한 로마-그리이스 법률을 거론했다(10,12).

 

3. 집필 장소, 연대 및 범위

빠삐아스는 집필 장소에 관해서 분명하게 말하지는 않았지만 로마를 꼽은 것 같다(에우세비오스, 교회사 3,39,17). 그의 영향으로 마르코 복음서는 로마에서 집필되었다는 통설이 생겼다. 이 설을 반대할 근거도 없지만 지지할 근거도 희박하다. 집필 장소로 갈릴래아, 데카폴리스, 시리아, 소아시아 또는 그리이스를 꼽는 수가 있는데 죄다 부질없는 상상이다. 복음사가가 강조한 보편적 구원론이 이스라엘에서보다는 해외에서 성립될 수 있었다고 본다면 마르코 복음서는 이스라엘 밖에서 집필되었으리라는 막연한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다.

  집필 연대는 13장 해설에 따라 달라진다. 여기에는 성전이 파괴되고 예루살렘이 초토화되리라는 말이 있는데(1-2ㆍ14-23절) 이 말이 장차 닥칠 비극을 예고하는 예언이냐 아니면 이미 닥친 비극을 서술하는 보도이냐에 따라서 복음서의 집필 연대가 달라진다. 사실 유대인들이 로마제국의 압제에서 벗어나려고 66-70년에 독립전쟁을 일으켰으나 실패하여 70년에 예루살렘과 성전이 파괴되었다. 이 비극은 이스라엘 백성의 민족독립 염원과 로마제국의 막강한 위력을 헤아리는 사람이라면 미리 예상할 수도 있었다. 만일 13, 1-2ㆍ14-23의 말을 예언으로 본다면 복음서는 70년 이전에 집필되었겠고 반대로 보도로 본다면 70년 이후에 집필되었겠다. 현재 신약학계에서는 두가지 설이 팽팽히 맞서고 있다. 그러므로 마르코 복음서는 막연히 70년경에 집필되었다고 하는 것이 가장 현명하리라. 그러나-솔로몬의 지혜조차 통하지 않는 경우가 있는 법, 13장을 풀이하자면 좋건 싫건 두 가지 설 가운데 하나를 택하지 않을 수 없다. 선택을 강요당하는 상황인지라 여기서는 부득이 70년 이전 집필설을 따랐다. 곧, 복음서는 독립전쟁 직전 아니면 초기에 집필되었다는 설을 따랐다.

  마르코 복음서는 본디 16,8로 끝맺음이 매우 어색하다. 그래서 2세기의 독자들이 긴 결문(16,9-20) 또는 짧은 결문을 만들어 덧붙였다. 자세한 것은 해당 대목 해설을 보라.

 

4. 전승과 양식

마르코 복음사가는 무(無)에서부터 복음서를 창작한 사람이 아니고 초대교회의 전승을 물려받아 편집한 사람이다. 그가 전해 받은 전승요소 가운데서 우선 초대교회의 신조를 들어야 한다. 당대 교회의 신조는 크게 두 가지 모습을 띠고 있다. 하나는 예수의 정체를 밝히는 신조요 또 하나는 예수의 구원사건을 밝히는 신조인데 이제 하나씩 살펴보고자 한다.

 

1) 예수의 정체

  (1) "하느님의 아들". 구약성경에서는 하느님과 가까운 이들을 "하느님의 아들"이라 했는데, 예를 들면 천사, 이스라엘 백성, 이스라엘 임금, 이상적 임금 메시아(2사무 7,14; 시편 2,7; 89,27-28; 110,3), 이스라엘 의인을 그렇게 불렀다.

  예수님은 하느님을 "압바"라 불렀고(마르 14,36) "아들"로 자처했으며(12,6; 13,32; 마태 11,27=루가 10,22) "나의 아버지"와 "여러분의 아버지"를 구별하셨다. 예수께서는 독보적인 의미로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자아의식을 지니셨던 것이다.

  그럼 초대교회에서는 어떤 뜻으로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들로 신봉했을까? 예루살렘 모교회에서는 부활하신 예수를 하느님의 아들로 받들었다(로마 1,3-4; 사도 13,33). 시간이 흐르면서, 전에 수난하신 예수(갈라 2,20; 로마 8,32; 참조 마르 14,61; 15,39) 그리고 장차 재림하실 예수(1데살 1,9-10; 참조 마르 8,38; 14,61)를 하느님의 아들로 섬기기도 했다. 해외 유대계 그리스도인들은 한걸음 더 나아가, 예수는 하늘에 선재(先在)하다가 이 세상에 파견되셨다고 믿고 바로 그런 분을 하느님의 아들이라 하였다(갈라 4,4-5; 로마8,3).

  마르코는 초대교회의 네 가지 신자용법(神子用法) 가운데서 선재ㆍ파견 용법만 빼고 다른 용법은 물려받은 것 같다. 마르코 복음서에는 "하느님의 아들" 존칭이 꼭 일곱 번 나온다(1,1ㆍ11; 3,11; 5,7; 9,7; 14,61; 15,39; 참조 1,24; 8,38; 12,6; 13,32). 복음사가의 신자관 (神子觀)은 다음 항목 "편집사상"에서 상세히 다룰 것이다.

  (2) "그리스도"와 "다윗의 아들". 그리스도는 히브리어 메시아 (=기름 부음을 받은 사람)를 그리이스어로 의역한 존칭. 이스라엘에서는 임금 즉위식 때나 제관 임관식 때 머리에 기름을 부었기 때문에 임금이나 제관을 메시아라 일컬었다. 그리고 장차 이스라엘을 이상적으로 다스릴 성군을 메시아라 했다. 그는 다윗의 가문에서 태어나리라는 통설로 말미암아 "다윗의 아들"이라고도 한다(2사무 7,12-16; 시편 132,17). 미래의 메시아, 곧 다윗의 아들은 정치적 인물이라는 점을 유의할 것이다.

예수님은 분명히 정치인이 아니셨다. 따라서 평소에 한 번도 메시아로 자처하지 않으신 것 같다. 그리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에는 그분이 다윗의 아들로 행차하는 양 군중이 환성을 질렀지만(11,10) 예수님은 별 반응을 보이지 않으셨다. 최고의회에서 심문을 받으실 때에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메시아로 자처했을 가능성이 있을 뿐이다. 이처럼 정치와는 거리가 먼 인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결국 국사범으로 처형되셨다(15,2ㆍ9ㆍ12ㆍ18ㆍ26ㆍ32).

예수님이 죽으시고 부활하신 다음에 예루살렘의 그리스인들은 서슴없이 그분을 메시아로(마르 8,29; 사도 2,36; 1요한 4,2)또는 다윗의 아들로(로마 1,3-4) 받들었다. 십자가와 부활 사건으로 말미암아 예수께서 정치적 인물이 아니셨다는 사실이 분명히 드러났으므로 아무런 거리낌없이 그런 존칭들을 예수께 드릴 수 있었다. 마르코 복음사가는 초대교회로부터 두 가지 존칭을 물려받았다. 그는 "하느님의 아들"과 같은 뜻으로(1,1; 14,61-62) "그리스도" 존칭을 애용했으나 "다윗의 아들" 존칭만은 다소 경원시한 것 같다(12,35-37). 마르코 복음서에는 "그리스도" 존칭이 일곱 번(1,1; 8,29; 9,41; 12,35; 13,21; 14,61; 15,32), "다윗의 아들" 존칭이 네 번(10,47ㆍ48; 12,35ㆍ37; 참조 11,10)나오는데 복음사가의 메시아관은 다음 항목 "편집사상"에서 상세히 다룰 것이다.

  (3) "인자". 그밖에도 복음사가가 초대교회로부터 물려받아 애용한 존칭으로 "인자"가 있다. 마르코 복음서에 열 네 번에 걸쳐 나오는 이 존칭의 용법을 분류하면 이승에서 활약하신 인자(2,10ㆍ28), 수난하고 부활하신 인자(8,31; 9,9ㆍ12ㆍ31; 10,33ㆍ45; 14,21 두 번ㆍ41), 재림하실 인자(8,38; 13,26; 14,62)로 대별된다. 인자 존칭의 묵시문학적 유래와 그리스도교적 수용과정에 관해서는 2,10 각주 ㉩참조.

 

2) 예수의 구원사건

예수의 구원사건을 열거하는 초창기 신조 (信條=信仰告白文=信經=宣布文)보면 한결같이 그분의 죽음과 부활을 강조한다(1데살 4,14; 사도 4,10). 이는 핵심적 구원사건이다. 이와 같은 내용을 보강하여 예수께서는 죽으시고 묻히셨으며 부활하시고 나타나셨다고 하는 신조도 있다(1고린 15,3-4).그런가 하면 죽음과 부활에다 재림을 추가하는 수도 있다(1데살 1,9-10).

  마르코는 초대교회의 이런 신조들을 물려받아 복음서를 집필할 때 가장 중요한 대목마다 원용했다. 예로, 예수께서는 세 번에 걸쳐 당신의 죽음과 부활을 분명히 예고했다고 한다(8,31; 9,31; 10,33-34). 또한 실제로 그분은 죽으시고(15,33-41) 묻히셨으며 (15,42-47) 부활하시고 나타나셨다고 하는데(16,1-8),이는 1고린 15,3-4의 신조를 사화로 엮은 것이다. 특히 천사의 전갈 내용(16,6-7)은 1고린 15,3-4의 신조와 놀랄 만큼 비슷하다. 그런가 하면 그는 예수 재림 신조의 영향을 받아(1데살 1,9-10), 인자의 내림도 강조했다(8,38; 13,26; 14,62).

  마르코는 초대교회로부터 예수의 말씀, 그리고 예수의 행적에 관한 사화도 물려받았다. 그런데 초대교회는 거의 한 세대 동안 말씀과 사화를 입에서 입으로 전했을 뿐 도대체 기록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주로 어떤 기회에 예수의 언행을 거론했을까? 비신도들을 상대로 복음을 선포하거나 옹호할 때, 그리고 신도들 가운데서 설교하고 교리를 가르치며 예배를 집전하고 생활규범을 지시할 때 그 말씀과 사화를 전했을 것이다. 이제 구전요소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짤막한 말씀이나 사화가 대부분이다. 어쩌다 종말론적 가르침처럼 긴 말씀(13장), 수난사화처럼 긴 이야기(14-16장)도 있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예외적인 현상에 불과하다. 그렇다고 해서 마르코가 단편 전승만 수집했느냐 하면 그렇지는 않다. 전승자들이 구전과정중에 단편 전승들을 모아 집성문을 만든 예가 가끔 있기 때문이다. 실례는 각주에서 지적할 것이다. 또 한 가지 유의할 것은 초창기 그리스도인들이 말씀과 사화를 일정한 틀에 맞추어 전했다는 사실이다. 곧 이어서 중요한 양식 몇 가지를 소개할 것이다. 구전과정은 그렇다 치고 구전을 수집하여 기록한 경위는 어떠했을까? 마르코보다 10-20년 앞서 어느 무명인이 예수의 말씀만 수집하여 "예수 어록"이란 책을 펴냈다. 아깝게도 이 책은 분실되고 그 내용 일부만 마태오와 루가 복음서에 전재되어 전해 온다. 마르코는 예수 어록을 접하지 못했다. 그는 구전으로 전해 온 단편적인 말씀과 사화, 또는 그 집성문을 수집ㆍ정리해서 70년경에 책을 펴냈으니 이것이 교회사상 첫 복음서이다.

 

3) 예수의 말씀

사화 가운데도 말씀이 많이 들어 있으나 그것은 사화 부분에서 다룰 것이다. 여기서는 상황이 전연 명시되지 않은 말씀만 양식별로 구분하겠다.

  (1) 비유. 우선 이야기의 흐름이 매우 자연스럽다. 그리고 한 가지 뜻을 전하려고 한 이야기이기 때문에 그 큰 뜻만 파악하면 그만이다. 마르코 복음서에는 다섯 가지 비유가 수록되어있다(4,3-9ㆍ26-29ㆍ30-32; 13,28-29ㆍ34-36).

  (2) 우화. 언뜻 보면 비유와 비슷하나 사실은 다르다. 우선 이야기 자체가 부자연스럽고 억지가 많다. 그리고 본시 여러 가지 뜻을 전하려고 한 이야기이기 때문에 되도록 많은 뜻을 찾아내야만 한다. 이를 일컬어 우의적 해설이라 한다. 마르코 복음서에 우화는 단 한건(12,1-12).

  (3) 우의적 해설.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 (4,3-9)를 초대교회에서는 우화로 착각한 나머지 우의적인 해설을 내렸다(4,13-20).

  (4) 단절어. 일명 토막 말씀. 전연 발설상황을 밝히지 않고 말씀만 전한 경우가 많은데 여기서는 몇 가지 예만 들겠다(2,21-22; 3,23-29; 4,11-12ㆍ21-25; 7,15; 8,15ㆍ34-38; 9,1ㆍ35ㆍ36-50a; 10,-11ㆍ15ㆍ31ㆍ43-44; 11,22b-25; 12,38-40; 13,30ㆍ32)

  (5) 유행어. 단절어의 일종. 신도들 입에 자주 오르내린 단절어로 변체가 많은 것이 특징이다(9,35=10,43-44; 10,31).

  (6) 상징어. 역시 단절어의 일종. 간결한 비유라 할 수도 있다. 여기에는 상징적 표현이 들어 있기 때문에 상징의 뜻을 찾아내야 한다(2,21-22; 3,23-26ㆍ27; 4,21ㆍ24; 8,15; 9,42-50a; 11,22b-23).

  (7) 묵시록 소품. 일차 유대전쟁 (66-70년) 직전, 초기 또는 직후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짤막한 묵시록이 유행했으며 마르코는 13장을 집필할 때 그것을 이용했으리라는 학설이 있다. 만일 이 설이 옳다면 묵시록 소품은 13,5-27 또는 5-31과 비숫한 내용을 갖추었을 것이다.

 

4) 예수 사화

  (1) 상황어. 단절어와는 달리 발설상황이 명시된 말씀이 있는데 이를 상황어라 한다. 상황묘사로 시작해서 말씀으로 끝맺는다. 마르코는 상황어를 여러 편 모아 수록했다(2,15-28; 3,20-21+31-35; 8,10b-12ㆍ31-33; 9,38-39; 10,13-16ㆍ28-30ㆍ41-45; 12,41-44; 13,1-2).

  (2)논쟁. 예수의 상대가 적의를 품고 그분의 처신이나 가르침에 반론을 제기한다. 그러나 그분을 한 번도 당해내지 못한다. 논쟁은 열 편 가까이 수록되어 있다(2,1-12ㆍ15-17ㆍ18-20ㆍ23-28; 3,1-6; 7,1-7ㆍ9-13; 10,1-9; 11,27-33; 12,18-27). 그 가운데는 치유 이적사화 테두리 안에서 논쟁이 전개되는 수도 있고(2,1-12; 3,1-6), 상황어 테두리 안에서 전개되는 수도 있다(2,15-17ㆍ18-20ㆍ23-28).

  (3) 대담. 언뜻 보면 논쟁과 비슷하다. 그러나 대담의 경우에는 상대가 반론을 제기하지 않고 예수를 떠보거나 그분의 가르침을 받으려는 것이 특징이다. 대담은 네 편 이상 수록되어 있다(10,17-22ㆍ35-40; 12,13-17ㆍ28-34).

  (4) 소명사화. 예수님의 이러저러한 상황에서 누구누구를 보고 당신의 제자가 되라고 명하시니 즉각 예수를 따랐다는 이야기. 전형적인 소명사화는 세 편 수록되어 있다(1,16-20; 2,14; 3,13-15; 참조 10,17-22). 소명사화 이외에도 제자들에 관한 사화가 여러 편 있다(3,16-19; 6,7-13; 10,35-45).

  (5) 이적사화 무려 18편이나 수록되어 있다. 구마 이적사화 4편(1,21-28; 5,1-20; 7,24-30; 9,14-29), 치유 이적사화 8편(1,29-31.40-45; 2,1-12; 3,1-6; 5,24-34; 7,31-37; 8,22-26; 10,46-52), 소생 이적사화 1편(5,21-23+35-43), 자연 이적사화 5편(4,35-41; 6,30-44.45-52; 8,1-9; 11,12-14+20-21).

  (6) 수난사화. 일찍이 예루살렘 신도들은 일관된 수난사화를 엮었으니 이 사화야말로 가장 오래된 것일뿐더러 또한 제일 긴 것이기도 하다. 마르코가 복음서를 집필할 때 전해 받은 수난사화는 어디서 시작하여 어디서 끝맺었을까? 그 범위를 두고 여러 학설이 있는데 줄잡아도 체포되신 때부터 빈 무덤을 발견했을 때까지의 이야기는 들어 있었을 것이다.(14,32-16,8).

 

5. 편집사상

예수는 하느님의 아들ㆍ그리스도ㆍ다윗의 아들ㆍ인자라는 신조, 예수는 전에 죽으시고 부활하셨으며 장차 재림하시리라는 신조, 그리고 그분이 공적으로 활약하시던 때 하신 말씀과 행적에 관한 전승을 채집하여 마르코는 교회사상 처음으로 70년경에 복음서를 집필했다. 복음사가는 우리네 식의 작가는 아니고 오히려 편집자 또는 편찬자였다. 그는 자기 나름대로 작품의 범위와 구조 따위를 구상하고 또한 사상을 정립하여 복음서를 집필하기에 이르렀다. 신약학계에서는 1950년대부터 이제까지 복음사가의 편집과정과 편집사상을 밝히려는 노력을 계속하여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다. 이제 편집사적연구 결과를 대충 소개하겠다.

 

1) 범 위

예수는 이승에 탄생하기 전에 영원으로부터 저승에 계셨다는 선재(先在) 신조가 50년대에 집필된 바오로의 서간에 분명히 들어 있다(갈라 4,4-5; 필립 2,6; 로마 8,3). 또한 예수의 수태, 탄생, 성장에 관한 이야기(마태 1-2장; 루가 1-2장)도 복음서 집필 당시에 약간은 나돌았을 것이다. 그러나 마르코는 예수의 선재와 사생활에 관해서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다. 어디 그뿐인가. 마태오, 루가, 요한에 여러 편 수록된 예수 발현사화를 마르코도 더러는 알고 있었을 터인데 어느 하나도 수록하지 않았다. 마르코는 오직 요한 세례자의 출현부터(1,2-8)빈 무덤 발견까지의(16,1-8) 예수의 활약상을 기록했을 따름이다.

 

2) 구 조

  (1) 갈릴래아 활동기 (1-9장). 예수께서는 세례를 받으실 때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자신이 "하느님의 사랑하는 아들"임을 깨닫는다(1,11). 영특한 귀신들도 예수의 정체를 눈치챈다(1,24; 3,11; 5,7). 그러나 우둔한 사람들은 그분이 누구신지 한동안 알아보지 못한다. 다만 갈릴래아 활동이 끝날 즈음에야 비로소 베드로가 예수는 "그리스도"시라고 고백하고(8,29), 이어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이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예수는 "하느님의 사랑하는 아들"임을 알게 된다(9,7). 그러나 스승이 함구령을 내리는 바람에 제자들은 예수의 정체를 다른이들에게 알리지 못한다(8,30; 9,9).

  (2) 상경기(10장). 예수 일행이 예리고에서 떠나갈 때 바르티매오라는 소경이 예수님을 향하여 "다윗의 아들"이라 외친다.

  (3) 예루살렘 활동기 (11-16장). 입성하실 때 군중이 "우리 아버지 다윗의 (이제) 오는 나라는 축복받으소서"라고 외친다(11,10). 그런가 하면 최고의회에서 심문을 받으실 때 예수 친히 "찬양받으실 분의 아들, 그리스도, 인자"로 자처하신다(14,62). 끝으로 백부장이 숨을 거두는 예수를 두고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한다(15,39). 요컨대 예수님은 갈릴래아에서 활약하실 때는 당신의 정체를 숨기시고(소위 "메시아 비밀") 예루살렘에서 고난을 받으실 때에야 비로소 당신의 신분을 드러내셨다는 것이다.

 

3) 기독론

  사람들이 예수를 이해하는 과정을 좀더 자세히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예수는 놀라운 인물.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행적을 본 갈릴래아 사람들은 놀라와했다. 그것은 그 가르침의 내용이나 방식이 율사들과는 아주 달랐기 때문이요 또한 그분이 정신적ㆍ육체적 병을 기적으로 고쳐 주셨기 때문이다.

  ● 1,22ㆍ27: "사람들은 그분의 가르침에 매우 놀랐다. 그분은 율사들과는 달리 권위를 지닌 분으로서 그들을 가르치셨기 때문이다. …모두 몹시 놀라 서로 캐어 물으며 말했다. '이게 웬일이냐? 권위 있는 새로운 가르침이다. 그분이 더러운 영들에게 명령하니 그들도 그분에게 복종하는구나!'" 가파르나움 회당에서 설교하고 미친 사람을 고쳐 주시자 군중이 보인 반응이다.

  ● 4,41: "그들은 크게 겁을 먹고 두려워하면서 서로 말했다. '도대체 이분이 누구인데 바람과 호수조차 이분에게 복종할까?'"풍랑을 가라앉히신 기적을 보고 제자들이 보인 반응이다.

  ● 6,2: "많은 사람들이 듣고 매우 놀라서 말하였다. '이 사람한테 이런 일이 어디서 내렸을까? 이 사람한테 내린 지혜는 어떤 것일까? 그의 손으로 기적들조차 이루어지다니?'" 나자렛 고향 사람들이 예수님의 설교와 타향에서 행하신 기적 소문을 듣고 보인 반응이다.

  (2) 예수는 예언자.

  갈릴래아 사람들은 예수님의 놀라운 말씀과 행적을 보고 그분을 예언자로 여겼다.

  ● 6,14-15: "헤로데 왕이 (예수의 소문을) 들었다. 그분의 명성이 알려졌던 것이다. 사람들은 (그분에 대해서) '요한 세례자가 죽은이들 가운데서 살아난 것이니, 그래서 그에게 기적의 힘이 솟아난다'고 하였다. 다른이들은 '그는 엘리야이다'라고 하고, 또 다른이들은 '그는 예언자들 중의 어느 한 분과 같은 예언자이다'라고 했다."

  ● 8,27-28: "예수와 그분의 제자들은 필립보의 가이사리아(근처) 마을들을 향하여 떠나가셨다. 그런데 그분은 길에서 당신 제자들에게 물어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합디까?' 하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그러자 그들이 그분에게 '요한 세례자라고도 하고 다른이들은 엘리야라고도 하며 또 다른이들은 예언자들 중 한 분이라고도 합니다' 하였다."

  (3) 예수는 메시아 - 하느님의 아들.

갈릴래아 민중은 예수를 예언자로 여겼으나 제자들만은 한걸음 더 나아가 그분이 메시아요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알아보았다. 이는 베드로의 메시아 고백과 예수 변모사화에 잘 드러난다. 그러나 제자들은 예수의 정체를 다른 사람들에게 알릴 수 없었다. 예수께서 함구령을 내리셨기 때문이다(8,30: 9,9).

  ● 8,29: "그분이 그들에게 '그러면 여러분은 나를 누구라고 하겠습니까?' 하고 물으시니 베드로가 대답하여 '당신은 그리스도이십니다' 하고 그분에게 말하였다."

  ● 9,7: "구름이 일어 그들을 감싸고 그 구름에서 소리가 났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4) 예수는 수난하고 부활할 인자(예고).

  제자들이 당신 신분을 알게 되자 예수께서는 그들에게만 당신의 수난과 부활을 세 차례 예고하신다(12,6 참조). 예고에는 매번 "인자" 존칭이 들어 있다. 이 존칭은 마르코 복음서에 열 네 번 나오는데 그중 아홉 번은 예수 수난 및 부활과 관련되어 있다.

  ● 8,31: "예수께서는 그들을 가르치기 시작하셨으니, 곧 인자는 마땅히 많은 고난을 겪고 원로들과 대제관들과 율사들에게 버림을 받아 죽임을 당했다가 사흘 후에 다시 살아나야 한다는 것이었다."

  ● 9,31: "그분은 당신 제자들을 가르치시며 그들에게 '인자가 사람들의 손에 넘겨지고 사람들은 그를 죽일 것입니다. 그는 죽임을 당했다가 사흘 후에 다시 살아날 것입니다'라고 하셨던 것이다."

  ● 10,33-34: "보다시피 우리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고 있습니다. 그러면 인자는 대제관들과 율사들에게 넘겨질 것입니다. 그들은 그에게 사형을 선고하고 그를 이방인들에게 넘겨 줄 것입니다. 그리고 그를 조롱하고 그에게 침을 뱉으며 그에게 채찍질을 하고 죽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사흘 후에 다시 살아날 것입니다."

  (5) 예수는 수난하는, 하느님의 아들 - 메시아, 그리고 재림할 인자.

  수난 과정중에 예수의 정체는 환히 드러난다. 우선 예수 친히 최고의회에서 당신의 신분을 밝히고 임종 순간에 또한 백부장이 예수의 정체에 관한 신앙을 고백한다.

  ● 14,61-62: "…대제관은 그분에게 질문하여 '당신이 찬양받으실 분의 아들 그리스도요?' 하고 그분에게 말했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말씀하셨다. '내가 (그)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인자가 전능(하신 분)의 오른편에 앉아 있으며 또한 하늘의 구름에 싸여 오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 15,39: "그분을 마주 보고 거기 서 있던 백부장이, 그렇게 (소리지르면서) 숨을 거두시는 것을 보며 말했다. '참으로 이 사람은 하느님의 아들이었다.'"

 

  예수께서는 평소에 당신 신분을 숨기시다가("메시아 비밀") 수난하고 부활하는 가운데 비로소 드러내셨다는 것이 마르코의 기독론이다. 왜 복음사가는 이런 기독론을 전개했을까? 역사상 예수의 인품과 업적을 올바로 알아듣는 법을 제시하려고 그렇게 한 것 같다. 인간적인 예수의 정체와 사건을 바르게 이해하려면 초대교회 신조에 명시된 기독론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것이다. 위에서 보았거니와 신조의 내용은 예수의 정체이거나(하느님의 아들,그리스도, 인자 등. 4, 1) 참조) 또는 예수의 구원사건이다(주로 죽음과 부활. 4, 2) 참조). 이런 내용의 신조를 믿으면 인간적인 예수의 인품과 업적을 바르게 알아들을 수 있고, 믿지 않으면 저 예수의 청중과 제자들처럼 곡해하기 마련이라는 것이다.

 

4) 메시아 비밀과 관련된 소재

  (1) 함구령

  예수님은 평소에 당신 신분이 드러나는 것을 꺼리셨다. 어쩌다 어느 누가 당신의 정체를 알아차린 때에는 곧 함구령을 내린다.

  ● 귀신들에게 내린 함구령(1,24ㆍ34; 3,12).

  ●  기적으로 치유된 이들에게 내린 함구령(1,44; 5,43; 7,36; 8,26).

  ● 제자들에게 내린 함구령(8,30; 9,9).

  (2) 제자교육

예수께서는 제자들만 있는데서 말씀하거나 행동하신 적이 많다. 제자들에게만 당신의 죽음과 부활을 예고하신 사실에 특히 유의할 것이다. 제자교육 대목은 다음과 같다(4,10-25ㆍ34; 4,35-41; 5,37-43; 6,45-52; 7,17-23; 8,14-21ㆍ27-38; 9,1-13ㆍ28-50; 10,10-12ㆍ23-45; 11,20-25; 13장; 14,22-25ㆍ32-42).

  (3) 제자들의 몰이해

  여러번에 걸쳐 제자들을 따로 교육시켰건만 그들조차 예수를 도무지 이해하지 못한다. 제자들의 몰이해는 다음 대목에 뚜렷이 드러난다(4,13ㆍ40; 6,52; 7,18; 8,17-21ㆍ32; 9,6ㆍ10ㆍ32ㆍ33-35; 10,24ㆍ26ㆍ32ㆍ35-45; 14,32-42ㆍ43-45ㆍ50ㆍ66-72).

 

5) 십자가 추종

예수의 삶은 종국적으로는 부활에 이르는 삶이지만 우선은 십자가의 죽음으로 가는 삶이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수난과 부활에 곤해서 첫번째 예고(8,31-33)를 하신 때부터 제자들에게 십자가 추종을 강력히 요구하신다. 마르코가 그처럼 십자가 추종을 강조한 것은 집필 당시 박해를 받던 신도들로 하여금 끝까지 신앙을 간직하도록 격려하려는 것이었다(10,29-30; 13,9-13 참조).

  ● 8,34-35: "어느 누가 내 뒤를 좇아오려거든 자기 자신을 부인하고 그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합니다. 사실 제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요, 〔나와〕복음 때문에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입니다."

  ● 10,38: "…그대들은 내가 마시는 잔을 마실 수 있으며 내가 받는 세례로써 세례를 받을 수 있습니까?"

  ● 10,41-45: "…여러분 가운데서 크게 되고자 하는 사람은 여러분을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여러분 가운데서 첫째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모든이의 종이 되어야 합니다. 사실 인자는 섬김을 받으려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섬기고 또한 많은 사람을 대신해서 속전으로 자기 목숨을 내주러 왔습니다."

 

6. 의의와 현실성

1) 예수의 공생애에 관심을 갖다

1세기 그리스도인들은 한결같이 예수의 죽음과 부활과 재림을 믿었다. 이는 구원사건을 내용으로 하는 신조에 분명히 드러난다. 그런데 죽으신 분은 예수이요 부활하신 분은 그리스도이며 재림하실 분은 인자라고 흔히 일컬었으니, 우리 신앙의 조상들은 어제의 예수와 오늘의 그리스도와 내일의 인자, 이렇게 삼차원적인 분을 받들었다 하겠다. 삼차원적 기독론의 특징은 예수의 생애와 사상에 관심을 갖지 않고 죽음으로 새로운 차원의 삶을 누리게 되셨다는 점에 집착한 것이다. 거의 일방적으로 인간적 예수보다는 초월적 그리스도를, 이승의 예수보다 저승의 그리스도를. 역사상 예수보다 신앙상 그리스도를 무척 중요시한 셈이다. 사도 바오로는 50-60년 사이에 집필한 여러 서간에서 이 노선을 따라 자신의 신학을 확립했다. 그런데 초월적 그리스도를 중요시한 것까지는 좋지만 일방적으로 강조하다 보면 기독론이 신화와 비슷해질 위험이 매우 크다. 이 위험을 방지한 사람이 바로 마르코이다. 마르코는 신조에다 예수께서 공생애중에 하신 말씀과 행적을 덧붙여 교회사상 처음으로 복음서를 집필했던 것이다. 그 결과 예수는 신화적 모습을 벗어나 살과 피를 지닌 구체적 인물로 드러나게 되었다. 그리하여 초창기 신도들이 신조를 따라 받들던 삼차원적 기독관을 마르코는 한편 계승하고 또 한편 확대시켰다. 곧, 신조에서는 "어제의 예수" 범주 속에 십자가의 예수만 꼽았는데 마르코는 공생애의 예수까지 "어제의 예수" 속에 포함시켰던 것이다. 그러므로 마르코가 환생한다면 틀림없이 우리에게 이렇게 충고할 것이다. 철저하게 하느님과 인간을 위하시다가 처절하게 돌아가신 어제의 예수를 되새기고, 부활하여 은밀히 현존하시는 오늘의 그리스도를 섬기며, 환히 재림하실 내일의 인자를 기다리는 그리스도인이 되라고. 마르코의 가없는 공덕은 철저하게 하느님과 인간을 위해 사신 "구체적 예수"를 우리에게 제시한 것이다.

  그러나 "구체적 예수"를 올바로 알아들어야 한다. 서기 27-30년 사이에 활약하신 예수의 인품과 업적이 마르코 복음서에 곧바로 드러난다는 뜻이 아니다. 역사상 예수는 직접적으로가 아니고 간접으로 드러날 뿐이다. 사실 마르코는 역사상의 예수를 뵙지도 못했고 예수의 생애와 사상을 객관적으로 서술할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는 유대계 그리스도인들과 이방계 그리스도인들이 전한 예수 전승을 모아 주관적으로 복음서를 집필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복음서에는 여러 예수관이 함께 들어 있는 셈이다. 우선 복음사가가 편집사상으로 채색한 예수, 다음으로는 유대계ㆍ이방계 교회가 신조로 윤색한 예수가 있고 역사상의 예수는 그 속에 숨어 계신다. 밤 까기 같다고나 할까. 우선 밤송이를 까고 이어서 삽피와 보늬를 벗겨야 비로소 하얀 속살이 드러나는 식이다. 이제 복음서가 객관적 예수전이 아니라는 엄연한 사실을 두고 사람마다 느끼는 바가 다를 것이다. 사실만을 찾는 사람이라면 허탈감에 사로잡힐 것이다. 반대로 사실도 사실이지만 의미를 찾는 사람이라면 여러 가지 에수관을 담고 있는 복음서를 개관적 예수전보다 훨씬 더 소중하게 여길 것이다. 어쨌든 예수의 직제자들, 유대계ㆍ이방계 그리스도인들, 그리고 복음사가들은 객관적 예수만을 전하거나 기록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스승을 화석화할 마음이 없었다. 오히려 그들은 예수의 말씀과 사화를 입에서 입으로 전하면서 또는 그 전승을 모아 복음서를 집필하면서 끊임없이 예수의 교훈과 처사를 재해석하고 현실화했던 것이다. 그들에게 예수께서는 사라진 현자가 아니라 현존하는 주님이셨던 것이다.

 

2) 예수의 사생애에 무관심하다

50-60년 사이에 여러 서간을 집필한 사도 바오로, 비슷한 시기에 "예수 어록"을 엮은 편집자, 그리고 70년경에 역사상 처음으로 복음서를 펴낸 마르코는 예수의 사생애에 아무런 관심도 보이지 않았다. 예수 수태ㆍ탄생ㆍ피신ㆍ소년기 설화는 비교적 늦게 80년대에 편찬된 마태 1-2장에만 수록되어 있다. 이 현상은 무엇을 뜻하는가? 1세기 그리스도인들은 한 세대 동안 예수의 사생애에 거의 무관심했다는 것이다. 사사로운 예수를 거론하지 않고도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사사로운 예수를 거론하지 않고도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의 사생활과 나아가서는 마리아의 사생활을 둘러싼 그 처절했던 신학논쟁들을 돌이켜볼 때 서글픈 느낌마저 든다. 남의 사생활을 침범하지 않는 것이 도리일진대 예수나 마리아의 사생활도 너무 따지지 말고 모르는 듯 덮어두는 것이 신앙 건강에 유익하리라.

 

3) 오늘도 오해받는 예수

마르코에 의하면 이스라엘 백성은 예수의 정체를 도무지 파악하지 못했다. 그런가 하면 여러번 예수님에게 특수교육을 받은 제자들조차도 죽으시고 부활하시리라는 말씀을 알아듣지 못했다.  

  그럼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를 올바로 이해하는가? 예수, 도대체 누구신가? 예수, 무엇을 하셨고 하시며 하실 것인가? 라는 질문을 신도들에게 했다고 하자. 분명히 대답할 수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아마도 가물에 콩 나듯 드물 것이다. 훌쩍 신앙 휴가를 떠난 이들이 아니라 꼬박꼬박 수계하는 이들을 두고 하는 말이다. 매주 설교를 듣고 때때로 신앙 재교육을 받건만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몰이해는 가시지 않는 것만 같다. 예수 그리스도는 예나 이제나 그리스도인들에게서조차 푸대접을 받고 있는 셈이다. 그리스도인아, 자신을 살펴보라, 그대는 어제의 예수를 되새기고 오늘의 그리스도를 섬기며 내일의 인자를 기다리는가를, 오롯하게 압바를 섬기고 이웃을 아끼다 끔찍하게 돌아가신 예수를 따르고 본받는가를, 임에게 믿음과 바람과 사랑을 쏟으며 나날의 삶을 꾸려 가는가를, 임이 외치신 말씀은 복음이요 이룩하신 일은 구원일진대 복음 따라 기쁘게 구원 따라 홀가분하게 살아가는가를. 임을 찾아 나서자. 찾고 또 찾고 지치도록 찾아 보자. 그러나 임과의 만남은 제 힘만으로는 안되는 일, 따라서 임의 힘을 빌고 싶은 마음 또한 간절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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