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장동성당 게시판

로마서 14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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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희성 [lhopeter] 쪽지 캡슐

2010-12-21 ㅣ No.2135

 

* 로마서 14장


형제를 심판하지 마라

1 여러분은 믿음이 약한 이를 기꺼이 받아들이십시오. 그러나 여러 견해를 두고 논쟁할 생각으로 그렇게 하지는 마십시오. 

2 어떤 사람은 무엇이나 다 먹을 수 있다고 믿지만, 믿음이 약한 이는 채소만 먹습니다. 

3 아무것이나 먹는 사람은 가려 먹는 사람을 업신여겨서는 안 되고, 가려 먹는 사람은 아무것이나 먹는 사람을 심판해서는 안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를 기꺼이 받아들이셨습니다

4 그대가 누구이기에 남의 종을 심판합니까? 그가 서 있든 넘어지든 그것은 그 주인의 소관입니다. 그러나 그는 서 있게 될 것입니다. 주님께서 그를 서 있게 하실 능력이 있으시기 때문입니다.

5 또 어떤 사람은 어떤 날이 다른 날보다 더 중요하다고 여기지만, 다른 사람은 어느 날이나 다 같다고 여깁니다. 저마다 자기 판단에 자신을 가져야 합니다

6 특정한 날을 중시하는 사람도 주님을 위하여 중시하는 것이고, 아무것이나 먹는 사람도 하느님을 위하여 먹는 것입니다. 사실 그는 먹으면서 하느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리고 가려 먹는 사람도 주님을 위하여 가려 먹으면서 하느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7 우리 가운데에는 자신을 위하여 사는 사람도 없고 자신을 위하여 죽는 사람도 없습니다. 

8 우리는 살아도 주님을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님을 위하여 죽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살든지 죽든지 주님의 것입니다. 

9 그리스도께서 돌아가셨다가 살아나신 것은, 바로 죽은 이들과 산 이들의 주님이 되시기 위해서입니다.

10 그런데 그대는 왜 그대의 형제를 심판합니까? 그대는 왜 그대의 형제를 업신여깁니까? 우리는 모두 하느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11 사실 성경에도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내가 살아 있는 한 모두 나에게 무릎을 꿇고 모든 혀가 하느님을 찬송하리라.’”

12 그러므로 우리는 저마다 자기가 한 일을 하느님께 사실대로 아뢰게 될 것입니다.


형제에게 장애물이 되지 마라

13 그러니 더 이상 서로 심판하지 맙시다. 오히려 형제 앞에 장애물이나 걸림돌을 놓지 않겠다고 결심하십시오

14 나는 주 예수님 안에서 알고 있고 또 확신합니다. 무엇이든지 그 자체로 더러운 것은 없습니다. 다만 무엇이 더럽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그것이 더럽습니다. 

15 그대의 형제가 음식 문제로 슬퍼한다면, 그대는 더 이상 사랑에 따라 살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그대의 음식으로 형제를 파멸시키지 마십시오. 그리스도께서 그 사람을 위하여 돌아가셨습니다. 

16 그러므로 여러분의 그 좋은 것이 모욕을 받지 않게 하십시오. 

17 하느님의 나라는 먹고 마시는 일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누리는 의로움과 평화와 기쁨입니다

18 그리스도를 이렇게 섬기는 이는 하느님 마음에 들고 사람들에게도 인정을 받습니다. 

19 그러니 평화와 서로의 성장에 도움이 되는 일에 힘을 쏟읍시다

20 하느님께서 하신 일을 음식 때문에 그르치지 마십시오. 모든 것이 다 깨끗합니다. 그러나 무엇을 먹어 남에게 장애물이 되는 사람에게는 그것이 해롭습니다. 

21 고기를 먹든 술을 마시든, 그 밖에 무엇을 하든, 그대의 형제에게 장애물이 되는 일은 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22 그대가 자기의 것으로 지니고 있는 신념을 하느님 앞에서도 그대로 지니십시오. 자기가 옳다고 여기는 일을 하면서 자신을 단죄하지 않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23 그러나 의심을 하면서 먹는 사람은 이미 단죄를 받았습니다. 그것이 믿음에서 우러나온 행위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믿음에서 우러나오지 않는 행위는 다 죄입니다.



우리는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합니다. 각 신자들은 그 몸의 지체들이고,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여 한 몸을 이룹니다. 성령은 교회의 영혼이십니다. 성령 안에서 한마음 한 몸이어야 하는 교회 안에 분쟁이 일어나곤 합니다. 그리스도인들 사이의 분쟁은 실제 분열로 이어지기도 하는데, 그 대표적인 예가 한국 개신교입니다. 한국 개신교 역사는 분열의 역사라는 말도 있을 정도입니다. 천주교는 어떨까요? 개신교와 견주면, 상대적으로 천주교는 사도들의 후계자인 주교와 그 협력자인 신부들을 중심으로 굳건히 일치하여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만, 그 속을 들여다보면 여러 이유로 다툼이 있는 곳도 적지 않습니다.


신약 성경에 기록된 초대 교회에도 분열과 다툼이 있었나 봅니다. 그 대표적인 교회가 코린토 교회입니다. 코린토 교회는 “어떠한 은사도 부족함이 없이”(1코린 1,7) 성령의 은총을 풍성히 입은 교회였습니다. 신자들은 신령한 언어를 말하는 은사, 병 고치는 은사, 예언의 은사를 받았습니다. 그런데도 싸움이 심각하게 있었나 봅니다. 바오로 사도는 코린토 신자들에게 보낸 첫째 서간 첫머리에서 이 싸움을 지적합니다. “나의 형제 여러분, 여러분 가운데에 분쟁이 일어났다는 것을 클로에 집안 사람들이 나에게 알려 주었습니다. 다름이 아니라, 여러분이 저마다 ‘나는 바오로 편이다.’, ‘나는 아폴로 편이다.’, ‘나는 케파 편이다.’, ‘나는 그리스도 편이다.’ 하고 말한다는 것입니다”(1코린 1,11-12). 공동체가 커지면서 어떤 지도자를 추종하느냐에 따라 계파가 생긴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가 보시니 얼마나 한심했겠습니까? “그리스도께서 갈라지셨다는 말입니까? 바오로가 여러분을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기라도 하였습니까? 아니면 여러분이 바오로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습니까?”(1코린 1,13)


갈라티아 교회는 신학적인 문제로 내분이 있었습니다. 할례 같은 유다 율법을 준수하여야 구원을 받을 수 있느냐 하는 문제였습니다. 물론 바오로 사도는 “사실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는 할례를 받았느냐 받지 않았느냐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사랑으로 행동하는 믿음만이 중요할 따름입니다.”(갈라 5,6)라고 강조하였습니다.

은혜가 넘치는 교회로 소문이 났던 필리피 교회도 똑똑한 여신도 두 명 때문에 분쟁을 겪었나 봅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에게서 이런 말을 들어야 했습니다. “나는 에우오디아에게 권고하고 신티케에게 권고합니다. 주님 안에서 뜻을 같이하십시오”(필리 4,2).


로마 교회는 어땠을까요? 여기에도 서로 화합하지 못하는 두 파가 있었습니다. 이 문제를 해결해 주려는 바오로 사도의 노력이 로마서 14장에 실려 있습니다. 아름다운 초대 교회들이 왜 그렇게 분쟁과 불화를 겪어야만 했을까요? 그것은 교회 공동체를 이루는 구성원들의 출신 배경을 보면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완전히 상이한 출신 배경, 그것은 유다인 출신과 이방인 출신이었습니다. 문화적 사회적 종교적 배경이 전혀 다른 두 부류의 그리스도인이 로마 교회를 이루고 있다 보니, 분쟁과 불화를 피하기는 무척 어려웠을 것입니다. 유다인 출신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세례를 받았지만, 이전의 율법 준수를 무시할 수 없었습니다. 유다교 율법에 따라 정결한 음식과 부정한 음식을 구분해서 가려 먹었습니다. 레위기 11장에서는 ‘정결한 짐승과 부정한 짐승’을 길게 열거하고 있습니다. 이에 따르면, 돼지나 토끼 고기를 먹으면 안 됩니다. 그 주검에 몸이 닿아서도 안 됩니다. 이러한 규정은 유다인들에게 하느님을 거슬러 부정한 사람이 되지 않도록 늘 조심하게 하였을 것입니다. 일상생활에서, 특히 음식을 먹는 일에서 정결함을 유지함으로써 하느님 백성의 거룩한 정체성을 되새기고 유지하였을 것입니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자신을 거룩하게 하여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무엇이든 땅에서 우글거리며 기어 다니는 것으로 너희 자신을 부정하게 해서는 안 된다”(레위 11,44).


율법에 따라 정결한 음식만을 먹기란 무척 힘든 일인 것 같습니다. 나 혼자만 잘하면 되는 것이 아니라 주변의 협력이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안식일에 잡은 물고기는 부정합니다. 예루살렘에서는 지중해에서 잡은 물고기를 수입해서 먹는 것이 쉬웠겠지만 굳이 갈릴래아 호수(=티베리아스 호수)에서 율법에 따라 잡은 물고기를 선호하였을 것입니다. 여담이지만, 베드로 사도를 비롯한 예수님 시대의 어부들은 하류층은 아니었을 것이라고 합니다. 특히 일곱 명이나 탈 수 있었던 베드로의 배는 값비싼 재산이었을 것입니다. “그 뒤에 예수님께서는 티베리아스 호숫가에서 다시 제자들에게 당신 자신을 드러내셨는데, 이렇게 드러내셨다. 시몬 베드로와 ‘쌍둥이’라고 불리는 토마스, 갈릴래아 카나 출신 나타나엘과 제베대오의 아들들, 그리고 그분의 다른 두 제자가 함께 있었다. 시몬 베드로가 그들에게 ‘나는 고기 잡으러 가네.’ 하고 말하자, 그들이 ‘우리도 함께 가겠소.’ 하였다. 그들이 밖으로 나가 배를 탔지만 그날 밤에는 아무것도 잡지 못하였다”(요한 21,1-3).


로마 신자들 가운데에는 심지어 고기를 먹지 말고 채식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까지도 있었나 봅니다. 바오로 사도는 그런 사람을 ‘믿음이 약한 사람’이라고 지칭합니다. “어떤 사람은 무엇이나 다 먹을 수 있다고 믿지만, 믿음이 약한 이는 채소만 먹습니다”(로마 14,2). 그러나 “아무것이나 먹는 사람은 가려 먹는 사람을 업신여겨서는 안 되고, 가려 먹는 사람은 아무것이나 먹는 사람을 심판해서는 안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를 기꺼이 받아들이셨습니다”(로마 14,3). 유다의 율법 규정들은 예수님이 오신 다음에는 그 역할이 크게 줄었습니다. 예전에는 율법 준수가 구원의 조건이었지만, 이제는 예수님을 믿음으로써 구원을 받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이 강한 사람은 율법 규정들에 크게 얽매이지 않았고, 특히 이방인 출신 그리스도인들은 그런 경향이 더욱 강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유다인 출신 그리스도인들은, 심지어 예수님의 수제자 베드로 사도조차 이전 사고방식에서 벗어나기 어려웠나 봅니다. 이 같은 베드로를 바른 길로 인도하시고자 하느님께서는 특별한 은혜를 베푸십니다. 속된 것이나 더러운 것을 먹지 않겠다던 베드로는 무아경에 빠져 “하느님께서 깨끗하게 만드신 것을 속되다고 하지 마라.”(사도 10,15)는 말씀을 듣습니다.


* 사도 10,9-16: 베드로가 환시를 보다

9 이튿날 길을 가던 그들이 그 도시 가까이 이르렀을 즈음, 베드로는 기도하러 옥상에 올라갔다. 때는 정오쯤이었다. 

10 그는 배가 고파 무엇을 좀 먹고 싶어 하였다. 그런데 사람들이 음식을 장만하는 동안 베드로는 무아경에 빠졌다

11 이어서 하늘이 열리고 큰 아마포 같은 그릇이 내려와 네 모퉁이로 땅 위에 내려앉는 것을 보았다. 

12 그 안에는 네발 달린 짐승들과 땅의 길짐승들과 하늘의 새들이 모두 들어 있었다. 

13 그때에 “베드로야, 일어나 잡아먹어라.”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14 베드로는 “주님, 절대 안 됩니다. 저는 무엇이든 속된 것이나 더러운 것은 한 번도 먹지 않았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15 그러자 베드로에게 다시 두 번째로 소리가 들려왔다. “하느님께서 깨끗하게 만드신 것을 속되다고 하지 마라.” 

16 이러한 일이 세 번 거듭되고 나서 그 그릇은 갑자기 하늘로 들려 올라갔다.


베드로 사도는 또한 유다인과 이방인을 차별하던 옛 생각에서 해방되어 이렇게 고백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시고, 어떤 민족에서건 당신을 경외하며 의로운 일을 하는 사람은 다 받아 주십니다”(사도 10,34-25). 이제 베드로 사도에게 중요한 것은 유다 율법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경외하며 의로운 일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옛 생각과 관습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기에, 바오로 사도가 베드로 사도를 나무란 적도 있습니다. “그런데 케파가 안티오키아에 왔을 때 나는 그를 정면으로 반대하였습니다. 그가 단죄받을 일을 하였기 때문입니다. 야고보가 보낸 사람들이 오기 전에는 다른 민족들과 함께 음식을 먹더니, 그들이 오자 할례 받은 자들을 두려워한 나머지 몸을 사리며 다른 민족들과 거리를 두기 시작하였던 것입니다. 나머지 유다인들도 그와 함께 위선을 저지르고, 바르나바까지도 그들과 함께 위선에 빠졌습니다”(갈라 2,11-13).


[예수님은 새 율법을 선포하십니다. 마태오 복음 5-7장의 산상설교는 유다교 율법의 완성입니다.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마태 5,17).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마태 5,20). 율법도 계명도 거룩하고 영적이고 선한 것입니다. “율법은 거룩합니다. 계명도 거룩하고 의롭고 선한 것입니다”(로마 7,12). 산상설교 가운데 흥미로운 것 하나를 소개하고자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폭력을 포기하라고 하십니다. “누가 네 오른뺨을 치거든 다른 뺨마저 돌려 대어라”(마태 5,39; 참조: 루카 6,29 “네 뺨을 때리는 자에게 다른 뺨을 내밀고, 네 겉옷을 가져가는 자는 속옷도 가져가게 내버려 두어라.”). 그런데 이 말씀은 일종의 비폭력 저항이라는 해석이 있습니다. 오른뺨을 손등으로 치는 것은 노예나 어린이처럼 아랫사람에게 모욕을 주는 것인데, 비록 맞더라도 우리는 동등한 사람이라는 저항의 표시로 왼뺨을 대라는 것이지요.]


바오로 사도는 콜로새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에서도 유다교 율법을 잣대로 신자들을 판단하지 않도록 말도록 이렇게 말합니다. “먹거나 마시는 일로, 또는 축제나 초하룻날이나 안식일 문제로 아무도 여러분을 심판하지 못하게 하십시오”(콜로 2,16). 오늘날 우리가 아무 음식이나 별 거리낌 없이 먹을 수 있는 것도 바오로 사도 덕분이라는 생각도 해 봅니다.


‘아무것이나 먹어도 된다는 의견’과 ‘가려 먹어야 한다는 의견’은 단지 의견 차이일 뿐입니다. 선과 악, 참과 거짓,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닙니다. 옳고 그름의 문제라면 반드시 옳음을 고수해야 하지만, 단지 의견 차이라면 하느님처럼 그대로 받아들이면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를 기꺼이 받아들이셨습니다”(로마 14,3). 의견이 다른 사람을 심판하는 것은 더 더욱 안 됩니다. 하느님만이 심판자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대가 누구이기에 남의 종을 심판합니까? 그가 서 있든 넘어지든 그것은 그 주인의 소관입니다”(로마 14,4). 우리는 심판자 자격이 없을 뿐 아니라 제대로 심판할 능력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람의 겉뿐 아니라 속까지 보실 수 있습니다. 앞뒤 위아래 옆까지 함께 보시며, 현재와 과거와 미래도 꿰뚫어보십니다. 어쩔 수 없이 남을 심판해야 하는 위치에 있는 사람은 심판을 하기에 앞서 참 심판자이신 하느님의 뜻에 부합하도록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기도하고 또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음식을 가려 먹든 가리지 않고 먹든, 어떤 날을 특별히 중요시하건 중요시하지 않건, 그 어떤 경우에도 잊지 않아야 하는 것은 무엇이든 주님을 위해서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특정한 날을 중시하는 사람도 주님을 위하여 중시하는 것이고, 아무것이나 먹는 사람도 하느님을 위하여 먹는 것입니다”(로마 14,6). 소신껏 판단하고, “저마다 자기 판단에 자신을 가져야 합니다”(로마 14,5). 생각 없이, 소신 없이, 믿음 없이 하는 행위는 무책임하고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도 모릅니다. 바오로 사도는 심지어 “믿음에서 우러나오지 않는 행위는 다 죄입니다”(로마 14,23)라고 말합니다.


‘주님을 위하여’라는 말을 남용해서도 안 되겠습니다. 실상은 자신을 위하여, 자신을 드러내기 위하여, 자기 의견을 관철시키기 위해서인데, ‘주님을 위하여’로 포장해서는 안 됩니다. 예컨대, 본당 사목자나 동료 교우의 허물을 공개할 때나, 반대로 그들의 허물을 옹호할 때에 ‘주님과 교회를 위하여’라고 함부로 이야기해서는 안 됩니다. 자신의 분을 못 이겨서 남의 허물을 들추어 망신을 주려는 것은 아닌지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또 분명히 잘못된 것인데 개인적 친분 때문에 오히려 잘못을 지적한 사람이 잘못이라고 하는 것은 아닌지 자문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에게 특별한 날이라고 하면, 주님께서 부활하신 날, 곧 주일이 대표적입니다. 가톨릭 신자라면, 주일과 의무 축일에는 미사에 참여하고, 육체노동을 삼가야 합니다. 그런데 바오로 사도의 말씀을 근거로 제시하면서, 주일을 다른 날보다 중시하는 사람은 ‘믿음이 약한 사람’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어떻습니까? 그러한 주장의 바탕에 무엇이 있는지 알아보아야 합니다. 동기와 목적이 순수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미사에 참여하고 육체노동을 삼가는 것보다 더 거룩하고 중요한 일을 하려는 것이라면 좋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게으름이나 욕망 추구를 합리화하려는 것이라면 용납할 수 없는 주장입니다. 자신의 나약함을 판단의 기준으로 삼고 자신의 주장을 정당화해서는 안 됩니다. 자신을 정당화하면, 자신이 스스로 의롭다고 하면, 하느님 자리가 없어집니다.


루카 복음에 나오는 ‘바리사이와 세리의 비유’(루카 18,9-14)는 두 가지 양심을 보여 줍니다. ‘스스로 만족하는 양심’과 ‘뉘우치는 양심’입니다(요한 바오로 2세, 회칙 「진리의 광채」, 104항 참조). “바리사이는 꼿꼿이 서서 혼잣말로 이렇게 기도하였다. ‘오, 하느님! 제가 다른 사람들, 강도짓을 하는 자나 불의를 저지르는 자나 간음을 하는 자와 같지 않고 저 세리와도 같지 않으니,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저는 일주일에 두 번 단식하고 모든 소득의 십일조를 바칩니다’”(루카 18,11-12). “세리는 멀찍이 서서 하늘을 향하여 눈을 들 엄두도 내지 못하고 가슴을 치며 말하였다. ‘오, 하느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루카 18,13). 이 비유의 결론은 다음과 같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 바리사이가 아니라 이 세리가 의롭게 되어 집으로 돌아갔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루카 18,14). 누구나 소신 있게 판단을 내릴 수 있지만, 그 판단을 판단하시는 분이 계심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판단하시는 분의 기준을 마음에 새겨야 합니다. 그분은 “하늘을 향하여 눈을 들 엄두도 내지 못하고 가슴을 치며”(루카 18,13) 자신을 낮추는 이를 높이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은총을 갈망하는 사람에게 은총을 베푸십니다. 그 갈망이 순수하고 클수록, 더 큰 은총을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남을 심판하는 일은 되도록 피해야 할 일입니다. 모든 것은 하느님 앞에서 밝혀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저마다 자기가 한 일을 하느님께 사실대로 아뢰게 될 것입니다”(로마 14,12). 주님 앞에서 심판받는 것은 남이 한 일이 아니라 자기가 한 일입니다. 그러므로 남의 일을 심판하는 것보다 자신의 일을 올바르게 하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합니다. 주일에 물건을 파는 상행위를 심판하기보다 주일에 물건을 사는 자신의 행위가 과연 주님을 위한 것인지 자문하는 것이 먼저입니다. 또 주일에 물건을 파는 사람은 그 탓을 구매자에게 돌리기에 앞서 자신의 행위가 하느님 나라와 그 의로움에 부합하는 것인지 성찰할 필요가 있습니다. 쉽지 않은 일이지만, 우리가 이렇게 주님의 뜻을 따르려고 애쓴다면 자비하신 주님께서는 그 모습을 기뻐하시고 우리에게 크나큰 은혜를 넘치도록 내려주실 것입니다.


주일 미사에 참여하고 육체노동을 삼가는 것이 단지 신자로서 의무를 때우는 차원에 머물러서는 안 되겠습니다. 율법 준수이건 의무 이행이건 그 종착점은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입니다. “사랑은 율법의 완성입니다”(로마 13,10). 우리에게 베푸신 하느님 사랑을 망각한 율법 준수와 의무 이행은 ‘노예의 행위’일 뿐입니다. “다시는 종살이의 멍에를 메지 마십시오”(갈라 5,1).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을 깨달은 사람에게는 그 모든 일이 주님을 위한 것입니다. “우리는 살아도 주님을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님을 위하여 죽습니다”(로마 14,8).


바오로 사도 시대에 로마 교회 안에는 ‘먹어도 되는 음식, 먹으면 안 되는 음식’ 문제로 참으로 치열한 분쟁이 있었나 봅니다. 로마서 14장 전체가 ‘정결한 음식과 부정한 음식 문제로 서로 다투지 말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음식 문제로 형제를 심판하여 형제를 슬프게 하는 것은 “더 이상 사랑에 따라 살아가는 것이 아닙니다”(로마 14,14). 우리로서는 유다 율법이 금지하는 돼지고기를 먹을 자유도 있고 먹지 않을 자유도 있습니다. 채식을 할 자유도 있고 하지 않을 자유도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이런 문제로 형제를 슬프게 하는 일은 없겠습니다만, 비슷한 일들은 얼마든지 있다고 봅니다. 예컨대, 우리는 주일에 등산할 자유도 있고 하지 않을 자유도 있습니다. 그런데 주일 등산을 하지 않고 기도와 성경 묵상으로 경건한 시간을 보내는 열심한 신자가 주일 등산을 하는 신자를 나무라는 일이 생길 수 있습니다. 주일 등산 때문에 대중교통 종사자들이 일을 해야 하고, 등산객들을 상대로 하는 상인들이 생길 것이기에, 열심한 신자의 태도도 전혀 터무니없는 것은 아닙니다. 주일 등산을 평가할 객관적 잣대를 찾기는 어렵겠습니다. 바오로 사도도 개인적 판단과 소신을 존중하였습니다. “저마다 자기 판단에 자신을 가져야 합니다”(로마 14,6). 이 문제를 해결하는 다른 방법을 제시해 보겠습니다.


한국 개신교는 술과 담배를 금하고 있습니다. 미국 선교사들이 처음 한국에 왔을 때에는 그렇지 않았다고 합니다. 현재 이화여고 자리에 강 정승댁이라는 큰 집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 집에서 일 년에 몇 차례씩 신자들이 모여서 성경 공부 모임(사경회)을 할 때에 휴식 시간에는 술과 담배가 제공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당시는 일제에 나라가 망하기 직전이었고, 젊은이들은 울분을 참지 못하여 술과 담배와 도박에 빠져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자 선교사들은 이래서는 안 되겠다고 판단하였고, 1901년 예수교 장로회에서는 신앙생활 지침서를 만들어 금주 금연을 가르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 지침서에는 7대 강령이 들어 있었는데, 이를 모두 암송하고 준수 서약을 해야 세례를 주었다고 합니다. 7대 강령은 예배 출석, 주일 성수, 부모에게 효도, 일부일처 준수, 식구 전교, 근면 성실, 금주 금연입니다. 술 마시고 담배 피는 사람은 장로가 될 수도 없었습니다. 이처럼 나라를 살리고 민족의 지도자 역할을 수행하려면 술 담배를 하면 안 된다는 확고한 신념이 있었고, 이를 실제 실천하는 수많은 지도자가 개신교에서 배출되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개신교에서 성경에도 없는 금주 금연을 주장하고 있다며, 술 담배의 자유를 누리는 천주교 신자라는 자부심을 갖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개신교에서 금주 금연을 신앙 강령으로 정한 동기를 생각해 볼 때, 다소 숙연한 마음을 갖게 됩니다. 우리가 술 담배를 하는 동기는 개신교의 금주 금연 동기와 비교할 때에 그리 고상하지 않다는 것이지요.


바오로 사도라면 어떻게 생각하실까요? 무엇이나 가리지 않고 먹고 마시는 천주교 신자들을 성숙하고 믿음이 강한 사람이라고 칭찬하실까요? 나라를 걱정하며 민족을 구하고자 금연 금주를 선택한 개신교 신자들을 미숙하고 믿음이 약한 사람이라고 하실까요? 예, 중요한 것은 무엇을 선택하든 ‘주님을 위하여’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살아도 주님을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님을 위하여 죽습니다”(로마 14,8).


‘주님을 위하여’라는 말을 좀 더 생각해 보기로 합시다. ‘주님’은 누구십니까? 성부 성자 성령 모두 주님이시지만, 사람의 몸으로 오셨고 사람의 말을 하셨던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떠올리기로 합시다. ‘주님을 위하여’ 또는 ‘예수님을 위하여’라는 말은, 무엇보다도 예수님처럼 생각하고 예수님처럼 말하고 예수님처럼 행동하는 것입니다. 또 예수님을 본받고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라 사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에 관하여 꽤 많은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분은 사랑이 충만하신 분, 자비를 베푸시는 분, 죄인을 용서하시는 분, 병자를 고쳐 주시는 분, 믿음이 약한 자를 위하여 기도하시는 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최후의 만찬 석상에서 베드로에게 유언을 남기셨습니다. “나는 너의 믿음이 꺼지지 않도록 너를 위하여 기도하였다. 그러니 네가 돌아오거든 네 형제들의 힘을 북돋아 주어라”(루카 22,32). 이러한 말씀이 무거운 짐으로 다가올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행복과 평화와 일치의 길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분쟁과 고통이 공동체를 더욱 괴롭힐 것입니다. 처음에는 억지로라도 해야 합니다. 그러다가 나중에 기꺼이 기쁘게 하게 된다면 하느님 나라에 가까이 이르렀다는 증표가 되겠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저마다 자기 판단에 따라 소신 있게 살아야 한다는 원칙을 이야기한 데 이어(로마 14,6 참조), 형제에게 장애물이 되는 일을 하지 않는 것이 좋다는 원칙을 제시합니다. “고기를 먹든 술을 마시든, 그 밖에 무엇을 하든, 그대의 형제에게 장애물이 되는 일은 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로마 14,21). 예컨대, 돼지고기 먹는 것을 죄로 여기는 사람 앞에서 돼지고기를 맛있게 먹으며 함께 먹자고 권하는 것은 형제에게 장애물이 되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분리될 수 없는 것이기에, ‘주님을 위하여’는 ‘형제를 위하여’와 분리될 수 없습니다. 주님을 위한다고 하면서 형제에게 장애물이 되는 일을 하는 것은 거짓으로 주님을 위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하신 말씀은 우리에게도 적용됩니다. 네 형제들의 힘을 북돋아 주어라”(루카 22,32). “평화와 서로의 성장에 도움이 되는 일에 힘을 쏟읍시다”(로마 14,19). “하느님의 나라는 먹고 마시는 일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누리는 의로움과 평화와 기쁨입니다”(로마 14,17).


먹고 마시는 일이 나쁜 것은 아니지만 먹고 마시는 일에만 관심을 기울이는 사람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갈 자격이 없습니다. 거룩한 것, 영적인 것, 의로운 것을 위해서는 때로는 먹고 마시는 것을 단호히 포기해야 합니다. 그것이 성숙한 신앙인의 모습이며, 특히 형제자매들과 함께 힘을 모아 평화를 이루고 기쁨을 나누는 것은 “하느님을 위한 열매”(로마 7,4)를 맺는 것입니다. 이러한 열매를 곳간에 차곡차곡 쌓는 일이야말로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갈 준비를 갖추는 것이며 하느님 나라에 자기 집을 짓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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