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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시대 카톨릭의 타락한 교황들에 대한 카톨릭의 입장은 어떻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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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보 [solaw] 쪽지 캡슐

2006-03-24 ㅣ No.2709

재가 종교개혁에 대한 구교의 입장에 관한 글을 이번에 써야해서 이렇게 카톨릭 신자분들의 도움을 얻고자 글을 올립니다.

 

종교개혁이 일어난 원인에는 카톨릭 교회의 타락도 그중 하나인데....그를 요약해보면

 

 

부적은 현세에 귀신으로부터 보호를 받는다는 생각이구요

면재부는 현세에 지은 죄를 죽어서 지옥을 가지않을려구 중세 유럽은 크리스찬들이니 돈으로 죄를 지우는거에요

그래서 구교(카톨릭) 신교(기독교)가 생긴거죠

교회의 타락

교황청과 고위 성직자들 교황이나 대주교들은 이들은 종교적인 생활이 아닌 봉건영주의 생활을 했다. 당시에 실재적으로 이들 중에는 Prince-Bishop 이라는 사람들이 있었다. 한 지역의 영주이면서 동시에 그 지역의 감독 주교 역할을 하는 사람으로 6일 동안은 영주이고 주일날은 감독의 역할을 하였다. 이들은 종교적 지도자의 생활이 아닌 영주의 생활을 하였는데 이들은 원래 그들이 영주였기에 자신의 생활 방식을 당연하게 생각했다.그런데 이런 풍토가 특히 주교나 Bishop 같은 고위 성직자들에게 영향을 주었다.그래서 실재로는 단순한 주교인데도 마치 영주와 같은 생활을 해서 교인들에게 지탄을 받게 되었다.

① 교황청

㉠ 교황청의 바빌론 유수기(1309-1377)인 교황청이 아비뇽에서 불란서의 지배를 받던 시기에 여러 가지 부작용이 생겼다. 또한 이로 인해서 생긴 교회의 대분열시기 즉 교황청을 다시 로마로 되돌리려는 노력은 오히려 부작용으로 로마와 아비뇽에도 교황이 있어서 교인들은 누구에게 충성을 해야할지 몰라 유럽은 교회의 대분열의 시기를 맞게 된다. 또한 당시에는 르네상스 교황의 출현도 있었다. 자신을 인문주의자로 자처하는 교황들이 나타났는데 이들은 종교인이라기보다는 세속적인 사람들이었다.

㉡ 실례

ⓐ 니콜라스 5세 - 그는 바티칸 도서관을 건립하고 성 베드로 성당을 건립하고 단장하는 좋은 일도 했지만 이를 위해서 많은 돈을 거두어 들였다.

ⓑ 이노센트 8세 - 자신을 문화인이니 문화적 생활을 해야한다면서 사치와 방종을 일삼았으며 성직자들은 독신으로 사는 것은 고대로부터의 관례였는데 16명의 자녀를 두고 부인도 많이 두었다.

ⓒ 알렉산더 6세(1492-1503) - 교황중에 가장 나쁜 평을 듣는 교황. 사치한 생활과 건축을 한 것으로 많은 돈을 썼다. 부인과 첩이 이미 있는데도 교황이 되고 난 후에도 이에 만족하지 않고 다시 첩을 두기도 했다.또한 돈이 필요하자 세금을 많이 거두어 들였으며 이것으로도 부족하자 성직을 팔아서 돈을 모았다. 그러나 성직도 정해져 있기 때문에 이제는 성직을 임의로 만들어 팔았다. 그러나 이렇게 해서 주어진 성직에는 월급을 주어야 했기에 전 기독교 세계를 향해서 많은 세금을 거두어 들여야 했다.

ⓓ 줄리어스 2세(1503-13) - 루터가 종교개혁하기 직전까지의 교황. 그는 종교적 지도자가 아니라 이름에서 나타나듯이 자기를 황제로 생각하고 베드로나 바울이 그의 이상이 아닌 줄리어스 시저가 자기의 이상이었다. 그는 베드로 성당을 건립시작 했는데 이는 베드로를 기념하는 것이 아니라 헬라의 신(神)인 판테온을 모방한 것이었다.그는 인문주의자이고 고대 희랍 로마시대 문화의 찬양가이고 희랍제국의 찬양가였다.

㉢ 한마디로 종교개혁 직전의 약 2세기간의 교황들은 종교적인 영적인 지도자가 아니 세속적인 군주나 황제와 같은 위치에 있었다.그래서 민중들로부터 지탄을 받았다. 나중에 루터가 종교개혁을 할 때 줄리어스를 향해서 반(半)마귀라는 말까지 사용하였고 교황청을 비판하였다.

② 고위 성직자들(대주교나 주교)

나이 어린 아동에게 고위 성직을 주어서 거기서 나오는 성직록 월급을 받아갔다.(☞ (예)메디치라는 소년은 8세 때 수도원 원장이 되었고 13세 때 추기경이 되었다.) 당시 추기경들도 군주들처럼 사치스럽게 살고 있었다. 사냥, 노름, 잔치 등을 즐겼고 미사는 집전을 하지 않거나 하더라도 아주 무성의하게 진행했다. 독일의 경우 14교구 중에서 오직 1교구에만 성직자가 있었다. 성직자의 부제 즉 성직록을 받으면서 그곳에 살지 않았다. 또한 이러한 부제성직과 함께 복수성직도 성행하였다.이들의 관심은 오로지 놀고 즐기는데 관심이 있었지 성직을 행하는데는 관심이 없었다.

③ 하위 성직자들

그리고 당시 하위성직자들은 지방에 있어서 이러한 여유는 없었지만 무식해서 -미사와 예배때에 라틴어로 했는데 뜻도 모르고 선대의 자기 선생이 가르친 대로 외우기만 해서- 민중들에게 지지를 받지 못했다.

④ 수도원

사치 방종 부도덕의 산실이었다. 남자 수도원은 귀족 집안의 차남이나 삼남의 은신처였다. 당시에 장남은 아버지의 재산을 물려받지만 2째나 3째는 아버지의 영지를 물려받은 길이 없었다.이에 이들을 인근 수도원장에 앉힌다. 그런데 이들은 전혀 수도할 생각은 없지만 수도원이 가지고 있는 막대한 재산 때문에 수도원자인 되었던 것이다. 이러기에 이들이 하는 일은 노름이나 사냥 그리고 술집에 드나드는 일이 전부였다. 또한 수도사와 수녀가 동거를 하고 이렇게 해서 태어난 아기는 어떻게 할 길이 없어 그냥 죽이기도 하였다. 스페인에서는 왕들이 후궁들이 맘에 들지 않으면 수녀원 원장으로 보냈다. 그녀들은 물론 수녀가 되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었다. 또한 수도원들은 많은 토지를 가지게 된다. 그런데 이 많은 토지를 관리하기 위해서 농민들을 고용하게 된다. 그리고 노임도 주지 않았다.그래서 많은 농민들에게 지탄을 받고 불만을 고조시켰다. 이런 종교적 상황속에서 루터가 종교개혁을 부르짖어 교회가 갱신해야한다고 했을 때에 수많은 사람들이 이에 지지할 수밖에 없었다.

 

 

대충 뭐 이런것들이 있던데..이에대해 카톨릭은 인정합니까? 아니면 어떠한 옹호할만한 입장이 있습니까? 면죄부의 오역에 관한건 대충 알았는데 이거에대해서는 별 할말이 없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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