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레지오

2005년 11월호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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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지오마리애 [legio] 쪽지 캡슐

2005-10-25 ㅣ No.33

 <너는 내 운명>

 

세상을 지배하는 필연적인 힘, 또는 그 힘으로 말미암아 일어나는 일들ꡑ- ꡐ국어사전ꡑ에는 ꡐ운명ꡑ이 이렇게 정의되어 있습니다. 우리 신자들의 말로 바꾸면 ꡐ하느님의 섭리, 또는 그 섭리에 따라 닥쳐오는 일들ꡑ쯤이 되겠지요.

영화나 문학작품에서 남녀간의 사랑을 ꡐ운명ꡑ으로 표현하는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닙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얼굴도 알지 못했던 누군가가 갑자기 마음속 깊이 들어와 그를 위해 목숨을 내어 주더라도 아깝지 않게 되어버리는 ꡐ영혼의 떨림!ꡑ 이 벅찬 사랑의 감동을 어찌 ꡐ운명ꡑ이 아닌 ꡐ우연ꡑ으로 격하시킬 수 있겠습니까? 그야말로 ꡐ운명적인 사랑ꡑ이란 말이 딱 들어맞지요. 그러나 가만히 따져보면 사랑도 꼭 운명적이지만은 않은 듯합니다. 죽자고 좋아하던 이들이 몇 달이 채 못가서 헤어지는 일들이 좀 흔합니까? 한 쌍이 결혼할 때 세 쌍이 갈라서는 게 요즘의 세태이고 보면, ꡐ(남녀간의) 사랑ꡑ을 ꡐ섭리ꡑ요 ꡐ운명ꡑ이라고 부르기엔 하느님께 죄송하지요.

그런데 결코 그렇지 않다고 강변하는 영화가 있습니다. 신예 박진표 감독의 ꡐ너는 내 운명ꡑ이 그것입니다.

영화의 줄거리는 다소 통속적입니다. 사랑에 배신당하고 시골의 ꡐ티켓다방(차 배달과 매춘을 함께 하는 퇴폐 찻집)ꡑ으로 내려온 ꡐ은하(전도연 분)ꡑ를 보고 첫눈에 반한 노총각 ꡐ석중(황정민 분)ꡑ이 그녀에게 지순한 구애를 한 끝에 결혼에 성공합니다. 그러나 은하의 옛 동거남이 찾아오면서 불행은 시작됩니다. 그 남자로부터 은하가 벗어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석중은 애지중지하던 젖소까지 팔고… 석중에게 너무 큰 빚을 진 은하는 사랑하는 이의 곁을 떠나 사창가로 향합니다. 하지만 불행의 늪은 깊고도 치명적이었습니다. 은하가 에이즈에 걸렸다는 사실이 밝혀진 것이지요. 그러나 석중은 그녀의 병에 아랑곳하지 않고 사랑을 찾아 나섭니다. 끝내 보건 당국에 적발된 은하는 에이즈 보균자가 매춘을 했다는 죄목으로 2년형을 살게 됩니다. 석중이 자신을 잊도록 하기 위해 면회를 거부하는 은하… 하지만 석중의 사랑은 조금도 식을 줄 모르고, 마침내 둘은 다시 ꡐ운명적인 사랑ꡑ을 확인합니다. 세상의 손가락질도 죽음을 부르는 불치병도 ꡐ서로가 운명인 두 사람ꡑ을 갈라놓을 수 없었던 것이지요.

ꡐ그것이 알고 싶다ꡑ의 다큐멘터리 PD 출신인 박진표 감독은 어찌 보면 신파 같은 이 얘기를 과장 없는 투박한 영상으로 ꡐ진짜같이ꡑ 그려냅니다. 감독은 석중의 대사를 통해 사랑을 이렇게 말합니다. ꡒ그녀가 나를 보고 웃으면 가슴이 멈춰버릴 것 같은 것ꡓ, ꡒ세상에서 제일 행복하게 해주겠다고, 내가 지켜주겠다ꡓ고 크게 외치는 것, ꡒ나랑 살아줘서 너무 고마워, 아니 너무 사랑해ꡓ라고 말하는 것, ꡒ죽을 때까지가 아니라 죽어서도 사랑한다ꡓ고 다짐하고 그 약속을 지키는 것, (사랑이 떠난 뒤에) ꡒ못해준 게 너무 많다ꡓ며 통곡하는 것. 사랑은 따져 묻지 않고, 심지어 그것이 운명이냐 아니냐도 전혀 궁금해하지 않고, ꡐ날것의 마음ꡑ 그대로 움직이는 거라고 영화는 얘기합니다.

ꡒ뭐가 그렇게 복잡해요? 그냥 안 보면 맨날 생각나고, 맛있는 거 먹으면 같이 먹고 싶고… 그래요, 저는 당신을 사랑한다고요.ꡓ

순박한 시골청년 석중은 사랑에 토를 달지 않습니다. 그녀가 창녀이건 에이즈에 걸려 곧 죽을 사람이건 그에게는 아무런 상관도 관심도 없는 일입니다. 그저 사랑하는 ꡐ은하ꡑ가 없으면 자신도 살 수 없다는 사실, 그 ꡐ절박한 영혼의 움직임ꡑ대로 죽을 힘을 다해 사랑할 뿐이지요.

여주인공 은하는 영화 초반부에서 버릇처럼 ꡐ진정?ꡑ이란 말을 입에 달고 다닙니다. ꡒ정말 그래? 진정?ꡓ ꡒ그런 뜻인 거지? 진정?ꡓ… 이런 식이지요. 은하는 ꡐ석중ꡑ의 구애를 받으면서도 마음속으로 사랑에 대해서 끊임없이 반문합니다. 마치 ꡐ내가 진짜 네 운명이니? 진정?ꡑ 이렇게 거듭 물어보듯이 말입니다. 그러나 둘의 사랑이 완성되어가는 영화의 중반 이후 은하의 대사에선 습관처럼 하던 ꡐ진정?ꡑ이란 말을 들을 수 없습니다. 석중의 질박(質朴)한 사랑 앞에 사물의 진위를 따지는 이런 류의 단어가 더 이상 필요치 않게 된 것이지요.

운명 같은 사랑은 결국 추호의 의심도 없이 사랑을 그 자체로만 받아들일 때, 그러니까 ꡒ너는 내 운명이니? 진정?ꡓ 하는 물음 따위를 아예 가슴에 품지 않게 되었을 때 비로소 완성되는 것이라고… 영화는 관객과 그렇게 공감합니다.

이 작품에서 가장 흥미로운 장면 중 하나는 석중과 은하가 영화 ꡐ봄날은 간다ꡑ(허진호 감독, 이영애․유지태 주연)를 관람하는 부분입니다. 2002년 개봉작 ꡐ봄날은 간다ꡑ는 떠나가는 연인에게 던진 ꡒ사랑이 어떻게 변하니?ꡓ라는 대사로 당시 젊은이들의 가슴을 울렁이게 했던 수작입니다. 박진표 감독은 자신의 영화 안에서 ꡐ봄날은 간다ꡑ의 그 명대사 부분을 그대로 보여줍니다. 그리고 3년 전 ꡐ봄날은 간다ꡑ가 제기한 물음에 대해 주인공 석중으로 하여금 ꡐ단호하게ꡑ 답하도록 합니다.

어유- 사랑이 어떻게 변해요?ꡓ

그렇습니다. ꡐ너는 내 운명ꡑ은 ꡒ사랑은 결코 변하지 않는다ꡓ는 믿음을 강요(?)하는 영화입니다. ꡐ불변하는 사랑ꡑ에 대한 철석같은 믿음만이 ꡐ내 사랑ꡑ을 ꡐ운명ꡑ으로 승화시킬 수 있다는 ꡐ사랑학의 오랜 정석ꡑ을 기교를 배제한, 그래서 더 진정성이 두드러지는 그림들을 통해 집요하게 주입합니다.

이 영화의 영어 제목은 의외로 ꡐYou are my destiny(너는 내 운명)ꡑ가 아니라 ꡐYou are my sunshine(너는 나를 비추는 햇살)ꡑ입니다. 햇살이 깃든 세상은 원래의 자기 빛깔이 무엇이었든지 오직 순백의 한 가지 색깔로 영롱합니다. 햇살이 주는 따스한 백색은 굴곡진 세상의 모든 어둠을 품어 안아 오로지 지금 이 순간의 눈부심만을 가슴에 담도록 인도합니다. 어느 날 불현듯 닥쳐온 우리들의 사랑 역시 햇살과도 같습니다. 둔감했던 인생에 빛으로 찾아온 ꡐ나의 사랑ꡑ을 최선을 다해 ꡐ살아내는ꡑ 일, 사랑 이외의 다른 어떤 것에도 눈 돌리지 않고 오직 사랑 그 자체만을 신뢰하며 거듭거듭 다시 사랑하는 일… 그런 ꡐ운명 같은 사랑의 역사ꡑ가 오늘 우리들의 척박한 현실 위에 햇살처럼 펼쳐지기를 기도합니다.

_변승우․명서 베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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