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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25일 과테말라의 성 베드로 베탄굴 up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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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화정 [wjyou57] 쪽지 캡슐

2012-04-30 ㅣ No.2095



축일 4월25일
과테말라의 성 베드로 베탄굴, OFS
San Pedro de S. Josè (Pietro di S. Giuseppe) di Betancur Fondatore in Guatemala
Tenerife, Canarie, 19 marzo 1626 - Guatemala, 25 aprile 1667
Saint Pedro de San Jose Betancur
Also known as : Pedro Betancur, Peter Betancur, Peter of Saint Joseph Betancur, Saint Francis of the Americas
Born : 16 May 1619 at Villaflores, Tenerife Island, Canary Islands, Spain
Died : 25 April 1667 at Guatamala City, Guatamala of natural causes
Venerated : 25 July 1771 by Pope Clement XIV (decree of heroic virtues)
Beatified : 22 June 1980 by Pope John Paul II
Canonized : 30 July 2002 in Guatemala City, Guatemala by Pope John Paul II

 

  성 베드로 데 베탕쿠르트(Petrus de Betancurt)는 1626년 3월 21일(또는 19일) 아프리카 북서부 대서양에 위치한 에스파냐령 카나리아 제도(Canary Islands)에 속한 테네리페(Tenerife) 섬의 빌라플로르(Vilaflor)에서 태어났다. 영웅적인 성덕으로 잘 알려진 그의 생애는 복음에 대한 충실함으로 대변된다. 그는 카나리아 제도의 노르만족 정복자들 중 하나인 후안 데 베탕쿠르트(Juan de Betancurt)의 후손이었지만, 그의 부모와 가족은 매우 가난했다. 그래서 그는 어려서부터 얼마 안 되는 양떼를 돌보는 목동으로 일을 시작했다. 그의 부모는 그가 신앙 안에서 건강하게 자라도록 돌보았고, 어린 베드로는 자연스럽게 깊은 명상적 영혼을 갖고 성장했다. 그래서 그는 소년 시절부터 자신을 둘러싼 모든 것들 안에서 하느님을 보는 법을 배워나갔다.

 

   서인도 제도(West Indies, 오늘날의 아메리카)에서 사는 사람들의 비참한 생활상에 대해 들었을 때, 그는 그곳에 그리스도의 메시지를 전해야 할 강력한 소명을 느꼈다. 그래서 24세가 된 1650년, 성 베드로 데 베탕쿠르트는 자신의 한 친척이 총독의 비서로 일하고 있던 과테말라를 향해 출발했다. 하지만 그가 준비한 돈은 아바나(Havana)에서 이미 다 떨어졌다. 그래서 그는 부두에서 힘든 일을 하며 비용을 지불해야 했고, 또 과테말라시티까지 갈 여비 또한 마련해야 했다. 이렇게 힘든 여정 끝에 그는 무사히 과테말라시티에 도착했다.

 

   당시 너무나 가난했던 그는 하루를 버틸 빵을 얻기 위해 구호품을 나누어주던 프란치스코 수도원 앞에 줄을 서야 했다. 하지만 여기에서 그는 자신을 환대하고 또 일생 동안 그의 상담자가 되어준 유명한 선교사였던 페르난도 에스피노(Fernando Espino) 수사를 만나게 되었다. 페르난도 수사는 그 지방의 직물공장에서 일할 수 있도록 일자리도 찾아주었다. 1653년 성 베드로 데 베탕쿠르트는 그 지방의 예수회 대학에 들어가 사제가 되고 싶어 하는 소망이 자신 안에 있음을 깨달았다. 그래서 그는 산 보르자(San Borgia)에 있는 예수회 대학에 들어갔지만 학업에 자질이 부족해 중도에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하느님의 섭리는 다시 한 번 그를 도와 이곳에서 장차 그의 고해신부가 되어줄 예수회의 마누엘 로보(Manuel Lobo) 신부를 만나게 해주었다.

 

   페르난도 에스피노 수사는 그에게 평수사로서 프란치스코회에 입회할 것을 권유했지만, 그는 하느님께서 자신이 세상 안에 남아 살아가길 원하심을 깨달았다. 그래서 그는 1655년 프란치스코 재속 3회에 입회해 서원하면서 성 요셉의 베드로(Pedro of St. Joseph)라는 이름을 받았다. 이때부터 성 베드로 데 베탕쿠르트는 이루 말할 수 없는 고된 일과 속에서 고통 받는 이들을 위해 자신의 모든 시간을 헌신하기로 결심했다. 그는 인간에 대한 너그러움과 진실한 인류애를 갖고 하느님의 뜻에 자신의 모든 것을 투신하면서 아프리카 출신 노예들과 비인간적인 노동으로 고통 받는 인디오들, 이민자들, 버려진 아이들의 사도가 되어갔다. 그리스도의 사랑에 고무된 그는 모든 이에게 모든 것이 되고자 노력했다. 1658년 그는 한 작은 오두막집을 얻어, 도시의 병원으로부터 버려졌지만 여전히 간호가 필요한 가난한 이들을 위한 병원으로 변모시켰다. 이 병원은 ‘베들레헴의 성모님’으로 명명되었다.

 

   그는 노숙자들을 위한 쉼터와 가난하고 버려진 아이들을 위한 학교를 설립하고 작은 경당도 지었다. 가난한 이들을 돕기 위해 시민들과 교회당국으로부터 모금활동을 펼쳤고, 가난한 사제들의 미사 봉헌을 위해 거리에서 기금을 모금하기도 하고, 이른 시간에 봉헌되는 미사를 위해 기부함으로써 가난한 사람들이 일 때문에 미사에 빠지지 않도록 배려했다. 그는 어린이들의 교육을 위한 시설 안에 작은 경당도 마련했다. 그리고 매년 8월 18일에 그는 어린이들을 모아 프란치스코회 수사들이 바치던 성모님의 칠락 묵주기도를 암송했고, 이 관습은 오늘날까지도 과테말라에서 계속되고 있다.

 

   그는 자신과 뜻을 같이 하는 남녀 젊은이들을 모아 조직했고, 이는 후에 베들레헴 형제회와 베들레헴 자매회로 발전했다. 그는 인간의 삶을 풍요롭게 하기 위해 기도와 절제와 인내에 기초하여 가난한 이들과 병든 이들 그리고 불행한 이들을 위해 봉사하는 활동 사도직을 포함하는 새로운 규칙서도 작성했다. 베들레헴 수도회는 이렇게 설립되었다. 전 생애를 통해 그의 영적 묵상의 중심 주제는 ‘베들레헴의 소년 예수’였다. 늘 가난한 이들 안에서 소년 예수의 얼굴을 보고 그들에게 경건하게 봉사했던 그는 1667년 4월 25일 41세를 일기로 과테말라시티에서 선종해 안티구아(Antigua)에 있는 성 프란치스코 성당에 묻혔다.

 

   성 베드로 데 산 호세 데 베탕쿠르트(Pedro de San Jose de Betancurt)의 시복시성을 위한 심사는 이미 1709년에 시작되었다. 그는 1980년 6월 22일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고, 2002년 7월 30일 아메리카 대륙 순방 중 사목방문을 위해 과테말라를 찾은 같은 교황으로부터 과테말라시티에서 시성되었다. 이로써 그는 과테말라뿐만 아니라 중앙아메리카 출신으로는 처음으로 성인품에 올랐다. 일생 동안 가난한 이들과 함께 살며 그들을 위해 헌신했던 그는 ‘아메리카의 성 프란치스코’로 불리며 존경을 받고 있다. 그의 축일은 성 마르코(Marcus) 복음사가와 겹치는 관계로 전날인 4월 24일에 기념하기도 한다.

 

  참고자료
한국교회사연구소 엮음, 송영웅 옮김, 오늘 성인(성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시성한 성인들) - ‘성 페드로 데 산 호세 데 베탕쿠르트’, 서울(한국교회사연구소), 2014년, 171-175쪽.
(가톨릭홈에서)

 

 

 

 
 [복자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와 함께 읽는 성인전]
성 페드로 데 산 호세 데 베탕쿠르트 - 아메리카의 성 프란치스코

 

프란치스코 제3회 선교회(Franciscan Tertiary Missionary) 회원인 페드로 데 산 호세 데 베탕쿠르트(Pedro de San JOse de Betancurt, 1626-1667)는 테네리페 섬(Tenerife, 스페인령)의 비야플로레스(Villaflores)에서 태어났다. 페드로는 카나리아 제도(Canary Island)의 정복자 후안 데 베탕쿠르(Juan de Betancur)의 후손이었지만, 양치기 소년으로 자나랐다. 그는 젊은 시절 들판과 초원에서 양을 치면서 시간을 보냈으며, 점점 더 기도에 정진하여 그리스도와 더 깊은 일치를 이뤄갔다.

 

페드로가 31세가 되었을 때, 그는 테네리페 섬에서 양을 치던 일을 그만두고 과테말라(Guatemala)로 갔다. 과테말라시티(Guatemala City)에 도착할 때까지 그는 하느님께 대한 깊은 열정으로 길고 몹시 힘든 여정을 소화하였다. 페드로가 과테말라시티에 도착하자 그곳에 살고 있던 프란치스코 수도회 수사들과 예수회 회원들이 그를 따뜻하게 환대하며 친구로 맞아주었다. 페드로는 산 보르자(San Borgia)에 있는 예수회 대학에서 사제가 되기 위하여 공부하였지만, 중도에서 포기하였다. 수도자 생활을 포기한 페드로는 사적 서원을 통해 프란치스코 제3회원(Third Order Franciscan)이 되어 성 요셉의 페드로(Pedro of St. Joseph)라는 이름을 받았다.

 

1658년, 페드로는 신비가로서 이름을 떨쳤던 마리아 데 에스키벨(Maria de Esquivel)이 살던 빈 오두막집으로 이사하였다. 그는 또한, 가난한 사람들을 돕기 위해 베들레헴의 우리 성모님(Our Lady of Bethlehem)이라고 명명한 병원을 설립하고 이어서 그들을 위한 숙소와 학교 그리고 작은 경당을 지었다. 페드로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적절한 의술을 베풀고 그들에게 그리스도교인의 자선을 베풀고자 자신을 따르는, 마음이 너그러운 젊은이들을 모아 베들레헴 호스피탈 기사단(Hospitaller Bethlehemites)을 조직하였다. 그는 과테말라시티의 한 지역에 있는 갈보리(Calvary, 골고타)라고 불리는 건물을 임대하여 그곳에 병원을 설립하고 자신이 세운 여러 자선 단체들을 입주시켰다. 그리고 가두모금을 통해 모은 돈으로 이곳의 운영비를 충당하였다. 페드로는 가난한 지역에 사는 사람들을 위해 경당과 성인들을 공경하는 건물을 짓고자 그 지역을 방문할 때면, 늘 프란치스코 수도회 수도복을 입고 갔다. 그리고 그는 연옥에서 고통받고 있는 영혼들의 구령을 위한 기도를 하자고 호소하였고 그러한 기도를 바치는 것에 스스로 모범을 보였다.

 

사람들로부터 큰 사랑과 존경을 받았던 페드로는 매년 2월 18일, 아이들을 모아 그들과 함께 프란치스코 수사들이 바치는 묵주기도(칠락 묵주, Franciscan Rosary)를 합송하였다. 또한 그는 포사다(Posada) 축제(만삭이 된 성모님과 요셉 성인이 숙소를 찾기 위해 수고하는 모습을 지현하는 행사)를 처음으로 개최했다. 이는 사람들에게 큰 호응을 얻음으로써 남미 지역 전체에 퍼져 나가 오늘날까지도 큰 인기를 끄는 성탄절 행사가 되었다.

 

‘아메리카의 성 프란치스코’라고 불린 페드로는 1667년 과테말라시티에서 선종하였다. 사람들은 페드로를 그리스도의 음유 시인이라고 불렀는데, 이는 수많은 사람이 그를 통해 자신들의 삶을 변화시킬 수 있었으며, 어렵게 살던 사람들은 그의 너그러운 마음 덕분에 많은 도움을 받았기 때문이다. 1709년 그의 시복시성을 위한 심사가 시작되었다.

1980년 6월 22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페드로 데 산 호세 데 베탕쿠르트를 복자로 선포하면서 그의 겸손과 헌신 그리고 지극히 복되신 분을 지성(至誠)으로 섬기는 그의 뛰어난 덕을 기렸다. 특히 프란치스코 성인의 정신을 따르는 수도자들이 하느님 백성을 돌보면서 느끼는 기쁨과 신뢰심 그리고 희열이 그의 삶에 잘 드러나 있다고 말하였다. 2002년 7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사목 방문차 과테말라를 방문하면서 그달 30일에 페드로를 시성하였다. 시성식에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이러한 말을 하였다.

 

“페드로 수사는 그의 고향 땅에서 그리고 수많은 삶의 현장에서 언제나 기도에 충실하였습니다. 특히 이곳 ‘갈보리의 외딴집’에서 열심히 기도하면서 매 순간 자신에 대한 하느님의 뜻을 깨닫고자 열심히 노력하였습니다. 그리하여 페드로 수사는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의 뛰어난 모범으로 우뚝 서 있습니다. 그는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성덕으로 나아가는 데 가장 필요한 것은 특별히 기도에 정진하는 것’(교황 교서 <새 천년기 Novo Millennio Ineunte> 32항)임을 다시금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과테말라와 그 외 여러 나라의 그리스도인 공동체에 다시 한 번 간곡히 청합니다. 여러분이 하는 모든 행동을 기도에 초점을 맞추어 여러분의 공동체가 기도의 참된 도량이 되게 하십시오. 치열한 삶은 언제나 풍성한 결실을 맺습니다. 페드로 수사는 그런 의미에서 참으로 치열하게 살았으며, 특별히 베들레헴의 신비와 십자가의 신비를 깊이 묵상하는 가운데 자신의 심오한 영성을 가꾸었습니다. 페드로 수사는 예수님의 탄생과 소년 시기를 묵상하면서 말씀이 육화된 이 엄청나고 획기적인 사건의 근본적 의미에 깊이 몰입함으로써 사람들 안에서 하느님의 모습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의 신비를 깊이 묵상하면서 그는 이 세상에서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들과 모든 것을 박탈당한 사람들을 위한 자선 활동에 용맹스럽게 뛰어들 수 있는 힘을 발견하였습니다.”
성 페드로 데 산 호세 데 베탕쿠르트의 축일은 4월 25일이다.
[교회와 역사, 2013년 7월호, 번역 송영웅 바오로(봉명학원 재단이사)]

 

 

교황 순방 중 2명 새 성인 선포

과테말라 페드로 신부, 멕시코 후안 디에고

 

-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8월 1일 멕시코 시티의 과달루페 성모 대성당에서

후안 바티스타와 히야친토 데 로스 안젤레스를 복자 반열에 올리는 시복식을 거행했다.
 

[외신종합] 교황의 순방 기간 중 2명의 성인과 2명의 복자들을 선포한 것은 라틴 아메리카 지역 교회에 있어서 각별한 의미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교황은 7월 31일 인디안 출신으로 과달루페 성모 발현을 목격한 후안 디에고를 성인으로 선포했다.

교황은 새 성인의 탄생을 선포하면서 『그리스도교 신앙은 결코 인종이나 문화에 구별을 두지 않는다』며 『토착민으로서의 정체성을 잃어버리는 일이 없이 복음을 받아들임으로써 그는 새로운 인류의 깊은 진리를 발견했다』고 말했다.

최초의 인디안 출신 성인이 된 후안 디에고는 1474년에 태어나 1548년에 타계했다.

한편 교황은 하루 전인 30일에는 과테말라에서 또 다른 성인 페드로 데 산 호세 데 베탄쿠르(1626~1667)의 시성식을 거행했다.

교황은 시성식에서 프란치스코 제3회 소속의 페드로 성인이 『300년 전 스페인에서 건너와 원주민들을 대상으로 복음을 전파하고 특별히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의 벗이 됐다』며 그의 정신을 기리며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의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증진하기 위해 노력해 줄 것』을 호소했다.

또한 교황은 8월 1일 멕시코 과달루페 대성당에서 지난 1700년에 신앙을 지키기 위해 순교한 복자 후안 바티스타와 히야친토 데로스 안젤레스 등 인디안 2명에 대한 시복식을 거행했다.

[가톨릭신문, 2002년 8월 11일]

 

 

 

아메리카 대륙 첫 인디오 성인 탄생

과달루페 성모 발현 목격한 후안 디에고 시성식


- 창 밖에 후안 디에고와 과달루페 성모의 그림을 내건 한 멕시코 신자가 7월31일 시성식장으로 이동하는 교황을 보기 위해 망원경의 초점을 맞추고 있다. [멕시코 시티=CNS]


[멕시코=외신종합] ‘멕시코의 어머니’로 추앙받는 과달루페 성모 마리아의 발현을 목격한 복자 후안 디에고가 성인 반열에 올랐다.

 

캐나다와 과테말라 방문을 마치고 7월30일 멕시코에 도착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이튿날 멕시코 시티 과달루페 성모성당에서 거행된 시성식에서 “500여년 전 테페약 언덕에서 성모 마리아의 발현을 목격한 후안 디에고를 아메리카 대륙의 첫 인디오 성인으로 선포하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긴다”고 말한 후 그를 성인으로 선포했다. 
그 순간 전통복장인 판초를 걸친 인디오가 소라 나팔을 불고, 아즈텍 문명을 상징하는 화려한 깃털을 단 옷을 입은 무희들이 제단 아래에서 격렬한 춤을 추는 등 시성식장은 축제 분위기에 휩싸였다.
 
성 후안 디에고의 초상화가 제단으로 옮겨질 때는 아래에서 연기가 피어 오르고 공중에서 형형색색의 꽃가루가 날렸다. 
국민의 90% 가량이 가톨릭 신자인데다 과달루페 성모신심이 뛰어난 멕시코에는 지난 몇 달 동안 시성식 및 교황 영접 준비 등과 맞물려 축제 분위기가 지속돼 왔다.
 
평범한 농부였던 후안 디에고는 1531년 12월 9일 현재의 과달루페 성당 자리인 테페약 언덕에서 검은 머리에 갈색 피부를 가진 성모의 발현을 목격했다. 그때 성모 마리아는 디에고에게 “하느님의 자비와 구원 계획이 드러나도록 이곳에 성당을 지으라고 주교에게 이르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 지역의 주교는 디에고의 말을 불신하면서 성모의 증표를 제시할 것을 요구했다. 이튿날 디에고는 성모 마리아가 증표로 준 장미꽃 송이를 자신의 틸마(망토처럼 생긴 인디안의 겉옷)에 싸서 주교에게 갖고 가 내밀자 그 주교는 디에고 앞에서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렸다. 디에고 자신도 기절해 쓰러질 뻔했다. 테페약 언덕에서 만난 성모의 모습이 틸마에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기 때문이다.
 
이 기적의 천은 지금도 전해져 내려오는데 과학자들의 분석에 따르면 성모 그림에 사용된 염료는 지구상에 존재하지 않는 성분일뿐만 아니라 붓으로 그린 흔적도 찾아볼 수 없다. 
이 발현사건 이후 8년간 멕시코 원주민 800만명 이상이 가톨릭 신앙을 받아들였다. 이때부터 과달루페 성모와 디에고는 멕시코인의 신앙적,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해왔다.
 
하지만 1990년 디에고가 복자품에 오른 직후 과달루페 성당에서 사목했던 한 사제가 “그는 스페인 식민 통치자들이 원주민들에게 가톨릭을 전파하기 위해 꾸며낸 가상 인물”이라고 주장하는 바람에 그의 존재 여부를 둘러싼 논쟁이 일어났다. 
이 때문에 바티칸의 위촉을 받은 연구조사위원회는 그의 실존 사실과 그와 관련된 기적을 증명하기 위해 멕시코 · 스페인 · 이탈리아 · 오스트리아 등 여러 나라의 고문서실을 샅샅이 뒤졌다.
연구조사위원회는 마침내 1998년 연구보고서를 내고 “18세기 조사자료를 살펴보아도 후안 디에고는 실존 인물이 틀림없기 때문에 그의 시성절차는 계속 진행되어야 한다”는 최종 의견을 제시했다.

 
이에 앞서 교황은 7월 30일 과테말라에서 ‘아메리카의 성 하비에르’라고 불리는 페드로 드 산 호세 베탕커(1619∼1667)의 시성식을 주례했다. 
아프리카 서북부 카나리 군도에서 출생한 베탕커는 지적 능력이 모자란다는 이유로 신학교 입학을 거절당한 후 프란치스코 재속3회에 입회, 과테말라에서 가난하고 병든 이들을 돌보는 일에 일생을 바쳤다. [평화신문, 2002년 8월 11일]

 

update 2015.2.16.

 

 

 

 

 

 

 



San Pedro de S. Josè (Pietro di S. Giuseppe) di Betancur Fondatore in Guatemala
25 aprile 
Tenerife, Canarie, 19 marzo 1626 - Guatemala, 25 aprile 1667

La Chiesa ricorda oggi anche uno degli ultimi santi canonizzati: Pedro de Betancour proclamato santo da Giovanni Paolo II nel luglio 2002 a Città del Guatemala davanti a una folla immensa. Nato a Chasna nell'isola di Tenerife nel 1626; dal 1649 si trasferì nel Nuovo Mondo: in Guatemala diede vita all'Ospedale di Nostra Signora di Bethleem, con annessa scuola per i bimbi poveri. Nel 1658 fondò i Fratelli dell'Ordine di Betlemme, meglio noti come Betlemiti. Morì il 25 aprile 1667. (Avvenire)

Martirologio Romano: Ad Antigua presso Città del Guatemala nell’America Centrale, san Pietro di Betancur, membro del Terz’Ordine di San Francesco, che sotto il patrocinio di Nostra Signora di Betlemme si adoperò con tutte le forze nell’assistenza agli orfani, ai mendicanti, agli infermi, ai giovani incolti e abbandonati, agli stranieri e ai condannati ai lavori forzati. 


E' uno dei pochi santi canonizzati dallo stesso papa che l’aveva beatificati. Infatti s. Pedro de s. Josè de Betancur, fu beatificato da papa Giovanni Paolo II il 22 giugno del 1980 in Piazza S. Pietro ed è stato proclamato santo dallo stesso papa il 30 luglio 2002 con una solenne celebrazione a Città del Guatemala.
In questo Stato del Centro America, perché Fratel Pedro (così è chiamato), è divenuto l’apostolo del Guatemala, un san Francesco dei suoi tempi.
S. Pedro de Betancur nacque a Chasna nell’isola di Tenerife, dell’arcipelago spagnolo delle Isole Canarie, il 19 marzo 1626 da una nobile famiglia di origine normanna. Nel 1649 si trasferì nel Nuovo Mondo, prima all’Avana, nell’Isola di Cuba e poi nel 1651 a Guatemala dove condusse una vita austera, dedicandosi alle opere di carità e formandosi alla scuola dei gesuiti; l’anno successivo, non essendo riuscito ad entrare nello stato ecclesiastico, divenne Terziario Francescano, fondando l’Ospedale di Nostra Signora di Bethleem, con annessa scuola per i bimbi poveri.
Nel 1658 fondava i Fratelli dell’Ordine di Betlemme, con la Regola del Terz’Ordine Francescano, chiamati Fratelli Betlemiti, per dare un futuro alla sua opera di assistenza. Continuò a fondare e costruire ospedali e Istituti di istruzione, ancora a Guatemala e in altre città dello Stato.
La Comunità fu approvata il 2 maggio 1667, pochi giorni dopo la morte del fondatore, avvenuta il 25 aprile 1667. Il suo successore fratello Antonio della Croce, trasformò l’Istituzione laicale in una Famiglia religiosa, con voti solenni e sotto la Regola di S. Agostino, approvata poi il 26 marzo 1687 da papa Innocenzo XI.
Alla solenne cerimonia di canonizzazione, oltre i Fratelli Betlemiti erano presenti circa 200 suore Betlemite, il ramo femminile della Congregazione, scaturito dall’ispirazione riformatrice della prima beata del Guatemala Madre Encarnación Rosal, artefice nella seconda metà dell’800, del recupero dei valori fondamentali dell’opera di Fratel Pedro.

Autore: Antonio Borrelli

_______________________
Aggiunto il 2002-09-15

 


Saint Pedro de San Jose Betancur

Also known as
Pedro Betancur
Peter Betancur
Peter of Saint Joseph Betancur
Saint Francis of the Americas


Memorial
25 April


Profile
Born a poor shepherd, he devoted his time with the flocks to prayer. At age thirty-one, he journeyed to Guatemala City in hopes of a job away from the sheep. Befriended by the Jesuits and Franciscans of the area, he enrolled in the Jesuit College of San Borgia in hopes of becoming a priest. However, with little background education he was unable to master the material, and withdrew. He then took private vows, and became a Franciscan tertiary, taking the name Peter of Saint Joseph.

Three years later he opened Our Lady of Bethlehem, a hospital for the convalescent poor. Soon after there was a shelter for the homeless, schools for the poor, and an oratory. Not to neglect the rich of Guatemala City, Pedro walked through their part of town, ringing a bell, begging support for the poor, and inviting the wealthy to repent. Other men were drawn to Pedro’s work, and they formed the foundation of the Bethlehemite Congregation or Hospitalers Bethlehemite, which earned papal approval after Pedro’s death. He is the first canonized Guatemalan native.

Pedro built chapels and shrines in the poor sections of the city, and promoted the ministry of intercessory prayer among those who had nothing except their time. He is sometimes credited with originating the Christmas Eve posadas procession in which people representing Mary and Joseph seek a night’s lodging from their neighbors. The custom soon spread to Mexico and other Central American countries. Legend says that petitioners need only tap gently on Peter’s stone tomb in order to have their prayers fulfilled. Stone tablets scratched with thank-you notes are often left on the tomb afterwards.


Born
16 May 1619 at Villaflores, Tenerife Island, Canary Islands, Spain


Died
25 April 1667 at Guatamala City, Guatamala of natural causes


Venerated
25 July 1771 by Pope Clement XIV (decree of heroic virtues)


Beatified
22 June 1980 by Pope John Paul II


Canonized
30 July 2002 in Guatemala City, Guatemala by Pope John Paul II


Images
Gallery of images of Saint Peter


Additional Information
Beatifications of Pope John Paul II
Book of Saints, by the Monks of Ramsgate
Hagiography Circle
Kirken i Norge
Our Sunday Visitor’s Encyclopedia of Saints, by Matthew Bunson, Margaret Bunson, and Stephen Bunson


Readings
God lavished his kindness and his mercy on them, enriching them with his grace; he loved them with a fatherly, but demanding, love, which promised only hardships and suffering.
He invited and called them to heroic holiness; he tore them away from their countries of origin and sent them to other lands to proclaim the message of the gospel, in the midst of inexpressible toil and difficulties. - Pope John Paul II at Pedro’s beatification ceremony

MLA Citation
“Saint Pedro de San Jose Betancur”. Saints.SQPN.com. 25 April 2012. Web. {today’s 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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