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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신부님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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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복이 [chsara] 쪽지 캡슐

2001-04-27 ㅣ No.2883

게시자: 최복이(chsara) 신자들의 기본자세(펀글)

게시일: 2001-04-27 10:0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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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어:  

 

나는 주일이면 공소 예절에 한번도 빠진 일이 없었다. 공소 예절에 빠진다는 것은 어

렸을 적 나에게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공소 예절은 주로 회장님께서 주례하시

는데, 성서를 낭독하고 간단한 강론도 빠뜨리지 않는다.

 

사순절 때면 거의 매번 하신 말씀인데 나는 그 강론의 내용을 기억하고 있다. "사순절

동안에는 부부의 잠자리를 같이하지 않는다" 나는 그게 무슨 말씀인지를 커서야 알았다.

교우들 중 몇몇은 사순절이 돌아오면 40일 동안 술, 담배, 놀음을 끊는다.

 

단식제와 금육제는 당연하고 마땅한 일이다. 60세만 넘으면 단식제에서 면제받지만 할아

버지들도 연령에 연연하지 않는다. 대제를 지키는 날에는 아침부터 12시까지는 냉수 외에

어떠한 간식도 입에 대지 않는다. 공소 신자들 전부가 철저한 율법주의자들이 된다.

봄, 가을 판공 때 신부님이 오시는 날은 공소 전체가 축제의 날이다. 일할 때 입었던

옷이지만 깨끗이 빨아 입고 한던 일도 일체 중단한다. 신부님의 식사는 우리 어머니가

도맡아서 하셨다. 어머니의 음식 솜씨는 공소에서 다 알아주었다.

 

신부님이 잡수시고 남은 음식은 내가 독차지한다. 대부분 교우들은 신부님이 남긴 음식을

먹으면 명오가 열려 교리를 잘 배운다고 믿고 밥상을 물리면 한 숟가락이라도 자기 자녀

에게 얻어 먹이려고 아예 부엌에서 기다리고 있는 엄마들도 있다.

밥을 남기실 것을 예상하고 큰 사발에 고봉으로 드리고, 식사하시는 신부님의 밥상 머리에

둘러앉아 어느 반찬에 젓가락이 제일 많이 가나하고 지켜보고 있다.

 

내가 신부가 되겠자는 꿈을 가져 본 일이 있었다면, 신부님 식사 후에 드리는 주물(간식)

상에 오른 과일 때문이었으리라. 그 시절에는 밀감을 일본말로 미깡이라 했는데 지금은

제주도에서도 다량 재배하지만 그때는 일본에서 들어오는 수입품 뿐이었다. 그 맛은

꿀맛이었고, 미깡을 벗길 때 풍기는 향기가 아직도 내 코에 그윽하다.

 

요즈음은 사과라 하지만 그때는 능금이라 했다. 신부님께서 능금을 깎아서 십자로 쪼개어

한 조각 주시면 그렇게 맛이 있을 수가! 그것을 얻어먹는 재미로 주물상이 신부님 방에

들어갈 때면 신부님 앞에 바싹 다가앉는다. 이런 얘기를 들으면 웃음이 나겠지만,

그때는 그랬다.

 

공소 판공날이 다가오면 이웃간에 마음 상했던 교우들은 찾아가서 화해를 청한다. 노름꾼

도 손을 턴다. 주정뱅이들도 조용해진다. 욕쟁이들도 온순하여 진다. 고해성사가 시작이

되면 저마다 깨끗이 세탁한 옷을 입고 팔짱을 끼고 고해성사 보는 줄에 끼어 차례를 기다

린다. 판공상사 보기를 머뭇거리고 꽁무니를 빼는 교우도 간혹 있다.

 

그러다가도 회장님이나 대부님들이 권하면 마지못해서 성사를 본다. 그렇게 해서라도

성사를 본 교우와 막무가내 거절한 사람과는 마음가짐이 완연히 차이가 난다. 교우들은

고해성사가 죄만을 용서받는 성사로 알고 있지만 고해성사를 통하여 많은 은총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대부분 잘 모르고 있다.

 

고해성사로 충만된 기쁨을 체험할 때 하느님 사랑으로 깊숙히 스며들고 있음을 느낀다.

 

성사를 모두 마치고 나면 공소 분위기가 숙연해진다. 다음날 새벽미사에 성체를 영하고

나면 모두가 천사로 변한다. 공소 분위기는 성령으로 가득찬 느낌이다.

 

나는 같은 날 두번 고해성사 본 것을 지금도 잊지 않고 있다. 고해성사를 보고 난 후에

성당마당에서 아이들과 놀고 있는데 옆에 모여있던 어른들이 내가 욕을 했다하여 고해

성사를 다시 보라는 것이다. 그래서 고해소에 들어갔더니 "왜 또 들어 왔느냐" 신부님

께서 야단을 쳐 쫓겨난 일을 생각하면 지금도 웃음이 난다.

 

나는 대축일이면 어머니의 손을 잡고 본당에 가면서 논두렁 받두렁 사잇길을 걸었던

옛일이 왜 잊혀지지 않는지 모르겠다. 부모님과 함께 기도하고 성당에 갈때 같이 가고

 

고해성사보고 견진성사 받고 성모의 밤 성지순례를 다녔던 어린시절이 한평생 신앙

생활에 얼마만큼 보탬이 되는지 모른다.

 

 <예수께서 열두살이 되던 해에 어머니와 요셉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올라갔다. 그런데

 

 명절의 기간이 다 끝나 집으로 돌아올 때에 어린 예수는 예루살렘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의 부모는 되돌아가 그를 성전에서 찾았을 때 예수는 학자들과 한자리에 앉아 그들의

말을 듣기도 하고 그들에게 묻기도 하였다.

 

그의 부모는 그를 보고 깜짝 놀랐다. 예수는 부모를 따라 나자렛으로 돌아와 부모에게

순종하며 살았다. 예수는 몸과 지혜가 날로 자라면서 하느님과 사람의 총애를 더욱

많이 받게 되었다.>  (루가2,42-52)

 

이제는 사정이 바뀌었다. 공소에서 신부님을 기다렸던 내가 아니고, 내가 신부가 되어

공소를 찾아가는 길이었다. 보좌신부 7개월만에 산간 벽지 시골 본당 주임신부로

발령을 받았을 때의 일이다.

 

가을 판공 때가 되어 공소 길을 나서는데 나보다 훨씬 연상이신 회장님과 수녀님 두분,

그리고 사무장과 함께 버스에서 내려 걷는데 시작부터 오르막이었다. 초행길이기에

얼마나 올라가야 하는지 지루하다는 생각이 들 무렵 정상에 이르러 보니 몇몇 꼬마들이

반갑게 꾸벅꾸벅 인사를 한다. 공소에서 이곳까지 마중을 나온 것이다.

이제부터는 내리막 길이라서 내가 앞장섰다. 도중에 만나는 사람들은 나를 맞이하러

나온 교우들이었다. 내려가면서 연령이 차차 높아진다. 수염이 하얀 어른들이 인사를

깊숙히 하신다. 거의 마을에 다다를 즈음에는 아낙네들도 다 나온 것 같다.

논두렁 밭두렁을 휘돌면서 맨 앞장서서 가는데 동네 개들도 다 나와서 꼬리를 흔들어

댄다. 뒤돌아보니 한줄로 꼬불꼬불 100m 정도는 되는 듯 싶다. "덩 덩" 북소리는 들리지

않지만 마치 춘향전에서 변사또가 행차하는 장면을 연상케 한다.

 

그 당시 내 나이 겨우 이십 칠세 후반밖에 되지 않은 때였다. 공소 방 아랫목에 놓여 있는

방석에 앉자마자 나이 많은 어른들로부터 시작하여 두 무릎 꿇고 큰절을 한다. 인사가

끝나자마자 주물상이 들어온다.

 

옛날 어렸을 때 공소에서 신부님을 맞이했던 생각이 왈칵 떠오른다. 그 때 주물상 앞에

바싹 다가앉아 신부님으로부터 받아먹었던 미깡,능금이 주물상에 올라 있다. 세월이

무상함을 찐하게 느꼈다.

어렸을 적 공소에서 신부님을 맞이했던 때부터 신부가 되어 공소 에서 주물상을 받은

햇수를 헤아려 보니 23년 간격이었다. 수염이 하얀 노인이 긴 담배대에 불을 붙인다.

감히 신부 앞에 담배대를 물고 이야기한다는 것이 죄송스러워 뒤고 돌아 앉으며

하시는 말씀, "신부님, 이 죄인이..." 하고 말을 잇는다.

저녁 밥상이 들어왔다. 하얀 사기 밥그릇에 사발 높이보다 밥의 높이가 훨씬 더 높다.

그렇게 많이 퍼준 밥의 의미를 다 알고 있었지만 모른 체하고 물어 보았다. "아니 이

밥을 어떻게 다 먹으라고 이렇게 고봉으로 펐습니까?"

"신부님, 봉지만 뜨세요. 남은 것은 저희가 다 치울께요." 국은 닭고기로 끓여 놓았다.

목도 다리도 모조리 잘라 없애고 껍질도 말끔히 벗겨내었다. 하얀 속살만 맑은 국물에

찢어 놓았고 그 위에 하얀 참깨를 설설 뿌려 놓았다.

젓가락은 들었지만 막상 어디로 먼저 가야할지 망설이고 있는데 아주머니들이 밥상머리에

앉아 "신부님 이것 좀 잡수어 보세요. 특별히 준비했어요." "예 맛있네요." 간도 안 맞고,

맛도 없는 걸 맛있다고 거짓말을 하다보니 웃음이 터져 나올 뻔했다. 나는 일찍이 경험한

일이라서 속이 훤히 들여다 보였다.

나는 이 공소에서 잊을 수 없는 추억거리가 또 하나 있다. 가난한 공소이기에 공소 집을

새로 짓고 지붕을 함석으로 개량하여 놓았더니 산동네 사람들이 현대식 건물 구경하려

모여왔다. 지금 그때 그일을 소상히 적으려니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 같아서 재미있다.

"우리는 자동차나 자전거는 한번도 보지 못했지만 비행기는 보았어요." 공소 교우가

한마디 한 말이 명언이었다. 그 본당을 떠난 이후 한번도 가 보지는 못했지만 궁금해서

간간히 물어보면 지금은 그 산 정상 너머까지 버스가 다닌다더라.

내가 맨 처음 찾아간 그 공소는 순교자들의 피난처다. 첩첩 산중으로 포졸들의 눈을 피하여

오로지 신앙만을 위해 고향도, 전답도, 가족까지 버리고 이곳 깊고 깊은 산중에서 살아온

교우들이다.

 

돌이켜 지난날을 생각해 보면 내가 가난한 집에서 자랐다는 것과 공소에서 태어났다는 것이

그렇게 감사로울 수가 없다. 교우들과 공동체를 이루는데는 신학교에서 배운 신학 철학만

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어릴 적부터 체험한 생활신앙이 아주 필요하다.

도시 본당에서 있을 때 일이다. 구역 회장님과 가정 방문을 하는 중에 어느 교우 집에

들어가 보니 내가 어릴 적 자라던 우리 집 같아서 포근한 느낌이 들어 잠시 누어 눈을

감았다. 짧은 잠이었지만 피곤이 확 풀렸다.

 

방문을 다 마치고 구역 회장님과 헤어질 때 "신부님과 방문을 하고 나니 참 편안하네요.

우리 구역에 가난한 교우들이 많아서 걱정을 많이 했어요."

 

 <오! 십자가의 어리석음이여-  멸망할 사람들에게는 십자가의 이치가 어리석게 보이지만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느님의 힘입니다. 지혜로운 자가 어디 있고, 학자가 어디 있습

니까?  하느님께서는 세상의 어리석음을 통하여 사람들을 구원하기로 작정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이 사람의 눈에는 어리석어 보이지만 사람들이 하는 일보다 지혜롭고,

하느님의 힘이 사람의 눈에는 약하게 보이지만 사람의 힘보다 강합니다. 그러니 사람으로

서는 아무도 하느님 앞에서 자랑할 수 없습니다.>  (고린토1,1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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