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장동성당 게시판

로마서 13장

인쇄

노희성 [lhopeter] 쪽지 캡슐

2010-12-21 ㅣ No.2134

 

* 로마서 13장


그리스도인과 권위

1 사람은 누구나 위에서 다스리는 권위에 복종해야 합니다. 하느님에게서 나오지 않는 권위란 있을 수 없고, 현재의 권위들도 하느님께서 세우신 것입니다

2 그러므로 권위에 맞서는 자는 하느님의 질서를 거스르는 것이고, 그렇게 거스르는 자들은 스스로 심판을 불러오게 됩니다. 

3 사실 지배자들이란 악행을 할 때에나 두렵지 선행을 할 때에는 두렵지 않습니다. 그대는 권위를 두려워하지 않기를 바랍니까? 선을 행하십시오. 그러면 권위로부터 인정을 받을 것입니다. 

4 지배자는 그대의 이익을 위하여 일하는 하느님의 일꾼입니다. 그러나 그대가 악을 행할 경우에는 두려워하십시오. 그들은 공연히 칼을 차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악을 저지르는 자에게 하느님의 진노를 집행하는 그분의 일꾼입니다. 

5 그러므로 하느님의 진노 때문만이 아니라 양심 때문에도 복종해야 합니다. 

6 여러분이 조세를 바치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그들은 바로 이러한 일에 정성을 다하는 하느님의 심부름꾼입니다. 

7 여러분은 모든 이에게 자기가 해야 할 의무를 다하십시오. 조세를 내야 할 사람에게는 조세를 내고 관세를 내야 할 사람에게는 관세를 내며, 두려워해야 할 사람은 두려워하고 존경해야 할 사람은 존경하십시오.


사랑은 율법의 완성

8 아무에게도 빚을 지지 마십시오. 그러나 서로 사랑하는 것은 예외입니다. 남을 사랑하는 사람은 율법을 완성한 것입니다

9 “간음해서는 안 된다. 살인해서는 안 된다. 도둑질해서는 안 된다. 탐내서는 안 된다.”는 계명과 그 밖의 다른 계명이 있을지라도, 그것들은 모두 이 한마디 곧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말로 요약됩니다. 

10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저지르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입니다.


그리스도인의 경각심

11 또한 여러분은 지금이 어떤 때인지 알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잠에서 깨어날 시간이 이미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가 처음 믿을 때보다 우리의 구원이 더 가까워졌기 때문입니다. 

12 밤이 물러가고 낮이 가까이 왔습니다. 그러니 어둠의 행실을 벗어 버리고 빛의 갑옷을 입읍시다

13 대낮에 행동하듯이, 품위 있게 살아갑시다. 흥청대는 술잔치와 만취, 음탕과 방탕, 다툼과 시기 속에 살지 맙시다

14 그 대신에 주 예수 그리스도를 입으십시오. 그리고 욕망을 채우려고 육신을 돌보는 일을 하지 마십시오.



로마서 13장 1-7절은 ‘권위’ 또는 ‘지배자’에 관한 말씀을 담고 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위에서 다스리는 권위에 복종해야 합니다”(로마 13,1). “권위에 맞서는 자는 하느님의 질서를 거스르는 것이고, 그렇게 거스르는 자들은 스스로 심판을 불러오게 됩니다”(로마 13,2). 또한 지배자는 “하느님의 일꾼”, “악을 저지르는 자에게 하느님의 진노를 집행하는 그분의 일꾼”(로마 13,4)이어야 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지배자에 대한 무조건적 복종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지배자는 하느님의 일꾼이고 그의 권위도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이므로, 주님은 오직 한 분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분명히 하였습니다. “우리에게는 하느님 아버지 한 분이 계실 뿐입니다. ...... 또 주님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이 계실 뿐입니다. 모든 것이 그분으로 말미암아 있고 우리도 그분으로 말미암아 존재합니다”(1코린 8,6). 당시 로마 신자들은 하느님의 주권과 로마 황제의 지배권을 슬기롭게 조화시켜야 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그들의 상황을 잘 이해하고 나름대로 해법을 제시한 것으로 보입니다. 사회 질서를 유지하는 지배자의 역할을 인정하고 그 권위에 복종할 것을 당부하면서도, 지배자의 권위가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임을 밝힌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황제에게 세금을 내야 하느냐는 바리사이들과 헤로데 당원들의 질문에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 드려라.”(마르 12,17) 하고 대답하심으로써, 세속 질서를 어느 정도 인정하시면서 동시에 온 세상의 주님이신 하느님의 절대적 주권을 확인하십니다.


어쩌면, 예수님과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인들이 무모하게 황제의 지배에 도전하거나 반란을 일으키다가 희생되는 것을 바라지 않으셨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은 열혈당원(혁명당원) 시몬을 열두 제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받아들이셨지만 열혈당원들처럼 과격하고 폭력적인 방법을 쓰지 않으셨습니다. 폭력은 폭력을 낳고, 복수는 복수를 낳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그렇게 오지 않습니다. 하느님께서 선택하신 방법은 악을 선으로 갚는 것이었습니다. 인간이 하느님을 배반하였지만, 하느님은 당신 생명을 바쳐 인간을 구원하십니다. 열혈당원이건 세리건 누구나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있지만, 예수님의 제자가 된 다음에는 열혈당원의 이념이나 세리의 생활방식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이제 ‘사랑의 새 계명’(요한 13,34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이 제자들의 이념이요 생활 기준이어야 합니다.


로마서 13장 8-11절은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라고 가르칩니다. 아무에게도 빚을 지지 말고(로마 13,8 참조) 각자 의무를 이행해야 하지만, 해도 해도 채울 수 없는 것이 ‘사랑의 의무’입니다. “아무에게도 빚을 지지 마십시오. 그러나 서로 사랑하는 것은 예외입니다”(로마 13,8). 우리는 ‘사랑에 빚진 자’입니다. 로마서에는 ‘빚을 지다’라는 표현이 몇 차례 나옵니다. “나는 그리스인들에게도 비그리스인들에게도, 지혜로운 이들에게도 어리석은 이들에게도 다 빚을 지고 있습니다”(로마 1,14). 이 경우는 ‘복음에 빚진 자’가 되겠습니다. 반대로 우리는 ‘육에 빚진 자’가 아닙니다. “우리는 육에 따라 살도록 육에 빚을 진 사람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육에 따라 살면 죽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의 힘으로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 것입니다. 하느님의 영의 인도를 받는 이들은 모두 하느님의 자녀입니다”(로마 8,12-14). 이 거룩한 말씀들이 우리 마음에 육화되어 생명과 구원을 주기를 바랍니다. 귀를 통하여 마음으로 들어가고 또 손과 발의 실천으로 이어지기를 빕니다.


우리가 하느님께 받은 사랑의 빚은 우리 힘으로는 결코 채울 수 없을 만큼 큰 것입니다. 마태 18,23-35의 ‘매정한 종의 비유’에 나오는 것처럼, 우리는 만 탈렌트를 빚진 종들입니다.


* 마태 18,23-35: 매정한 종의 비유

23 “그러므로 하늘 나라는 자기 종들과 셈을 하려는 어떤 임금에게 비길 수 있다.

24 임금이 셈을 하기 시작하자 만 탈렌트를 빚진 사람 하나가 끌려왔다.

25 그런데 그가 빚을 갚을 길이 없으므로, 주인은 그 종에게 자신과 아내와 자식과 그 밖에 가진 것을 다 팔아서 갚으라고 명령하였다.

26 그러자 그 종이 엎드려 절하며, ‘제발 참아 주십시오. 제가 다 갚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27 그 종의 주인은 가엾은 마음이 들어, 그를 놓아주고 부채도 탕감해 주었다.

28 그런데 그 종이 나가서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을 빚진 동료 하나를 만났다. 그러자 그를 붙들어 멱살을 잡고 ‘빚진 것을 갚아라.’ 하고 말하였다.

29 그의 동료는 엎드려서, ‘제발 참아 주게. 내가 갚겠네.’ 하고 청하였다.

30 그러나 그는 들어주려고 하지 않았다. 그리고 가서 그 동료가 빚진 것을 다 갚을 때까지 감옥에 가두었다.

31 동료들이 그렇게 벌어진 일을 보고 너무 안타까운 나머지, 주인에게 가서 그 일을 죄다 일렀다.

32 그러자 주인이 그 종을 불러들여 말하였다. ‘이 악한 종아, 네가 청하기에 나는 너에게 빚을 다 탕감해 주었다.

33 내가 너에게 자비를 베푼 것처럼 너도 네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었어야 하지 않느냐?’

34 그러고 나서 화가 난 주인은 그를 고문 형리에게 넘겨 빚진 것을 다 갚게 하였다.

35 너희가 저마다 자기 형제를 마음으로부터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의 내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그와 같이 하실 것이다.”


그리스 화폐 단위인 탈렌트는 금 33kg 값에 해당하는 큰 액수라고 합니다. 2009년 금값이 1돈(3.75g)당 대략 16만 원이었으므로, 1탈렌트는 14억 원 정도가 됩니다. 그러므로 만 탈렌트는 14조원이 됩니다. 또 1탈렌트는 6000데나리온이며, 1데나리온은 일꾼의 하루 품삯이라고 합니다. 굳이 계산을 해 보자면 못된 종은 동료 종보다 6십만 배를 더 빚졌던 것입니다. 물론 만 탈렌트라는 것은 도저히 깊을 수 없는 엄청난 금액을 의미합니다. ‘만’은 고대 근동에서 계산할 때에 가장 높은 수이고 ‘탈렌트’는 가장 큰 화폐 단위입니다 그러니 주인의 자비가 없이는 도저히 갚을 수 없는 빚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만한 빚을 진 사람이 단지 석 달 열흘 치 품삯에 해당하는 빚을 진 동료에게 무자비하게 굴고 감옥에 가두었으니, 고문 형리에게 넘겨질 만합니다. 이 비유는 우리 모두에게 해당됩니다. 우리는 하느님께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하루에도 몇 번씩 잘못을 저지르며 살아가고, 하느님의 용서를 청합니다. 그런데 며칠, 몇 주, 몇 달 만에 한 번씩 자신에게 잘못한 동료를 용서해 주지 못해서 속상해 하고 마음고생을 합니다. “저마다 자기 형제를 마음으로부터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의 내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그와 같이 하실 것이다”(마태 18,35). 반대로, 우리가 형제를 마음으로부터 용서하면 하느님께서도 우리를 용서해 주실 것입니다.


이웃에게 사랑을 실천함으로써 하느님께 받은 사랑의 빚을 조금이나마 갚을 수 있습니다. 사실, 우리는 하느님에게뿐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의 빚을 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지켜야 하는 ‘사랑의 새 계명’ 또한 하느님의 은총으로만 완수할 수 있는 드높은 이상이며 과제입니다. 로마서 12장에서 제시한 ‘그리스도인의 새로운 생활’, ‘그리스도인의 생활 규범’은 결국 ‘이웃 사랑’으로 마무리됩니다. 사실, ‘이웃 사랑’의 계명은 새로운 것이 아닙니다. 유다인들의 율법인 모세 오경에도 ‘이웃 사랑’이 명시되어 있습니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레위 19,18). 예수님도 이 계명을 잘 알고 계셨습니다.


* 마르 12,28-34: 가장 큰 계명(마태 22,34-40; 루카 10,25-28)

28 율법 학자 한 사람이 이렇게 그들이 토론하는 것을 듣고 있다가 예수님께서 대답을 잘하시는 것을 보고 그분께 다가와, “모든 계명 가운데에서 첫째가는 계명은 무엇입니까?” 하고 물었다. 

29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첫째는 이것이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30 그러므로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31 둘째는 이것이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이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 

32 그러자 율법 학자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훌륭하십니다, 스승님. ‘그분은 한 분뿐이시고 그 밖에 다른 이가 없다.’ 하시니, 과연 옳은 말씀이십니다. 

33 또 ‘마음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그분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이 모든 번제물과 희생 제물보다 낫습니다.” 

34 예수님께서는 그가 슬기롭게 대답하는 것을 보시고 그에게, “너는 하느님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다.” 하고 이르셨다. 그 뒤에는 어느 누구도 감히 그분께 묻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슨 일을 하건,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해야 합니다. 사랑이 없으면 봉사의 열매도 아주 작을 것입니다. 사랑 없는 봉사는 노예가 하는 일이며, 봉사 없는 사랑은 말장난이요 착각입니다. 사랑이 없는 곳에는 하느님도 계시지 않습니다. 무슨 일을 하건, 그 안에 사랑을 담고 그 사랑을 더욱 키우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남을 비판할 때에도 사랑이 담겨 있어야 합니다. 사랑 없는 비판은 하지 않는 편이 낫겠습니다. 험담이나 비난은 더 말할 것도 없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로마서 13장 11-14절에서 신자들에게 경각심과 긴박감을 불러일으킵니다. “여러분이 잠에서 깨어날 시간이 이미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가 처음 믿을 때보다 우리의 구원이 더 가까워졌기 때문입니다”(로마 13,11). 이 말씀에 가슴이 덜컹 내려앉습니다. 과연, 내가 처음 믿을 때보다 구원이 더 가까워졌는가? 잠에서 깨어날 시간이 이미 되었는데, 나는 깨어 있는가? 로마서 13장을 가르칠 자격이 없는 사람이어서 마음이 아픕니다. 이미 세례를 받은 사람들, 세례 받은 지 10년, 20년 된 사람들은 더욱 이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전에는 하느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에 관하여 잘 몰라서 세속의 논리대로 내 생각대로 살아도 봐 주셨지만, 이제는 참된 그리스도인으로서 성숙한 생각과 행동을 갖추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로 시작된 우리 구원의 완성이 점점 더 가까워지고 있음에 틀림없습니다. 밤이 물러가고 낮이 가까워 오는데, 아직도 어둠의 행실을 벗어 버리지 못하고 있지는 않습니까?(로마 13,12) 하느님께서 정하신 구원의 때는 가까워지고 있는데, 정작 나는 구원의 대열 어디쯤에 있는 것일까요?


로마서 13장 13-14절은 위대한 성인 아우구스티노를 낳은 성경 구절입니다. 젊은 시절 방탕한 생활을 하던 아우구스티노를 회개의 길로 이끈 말씀이 바로 이 구절이라고 합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이 40세에 쓴 자서전인 「고백록」(Confessiones) 제8권 제12장에 보면, 성인이 32세에 겪은 은혜로운 체험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당시 성인은 과거의 좋지 못한 행실을 완전히 끊어 버리지 못하여 심한 갈등을 겪고 있었습니다.


“나는 어느 무화과나무 밑에 주저앉아 버렸습니다. 어떻게 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그저 울음보를 터뜨려 놓기가 무섭게 눈에선 강물이 콸콸 쏟아지는 것이었습니다. 당신이 즐겨 받으시는 그 제사가. 그때 말은 같지 않으나 대강 이런 뜻으로 당신께 연거푸 아뢰었습니다. ‘주여, 언제까지나? 언제까지나, 주여, 끝내 진노하시려 나이까? 행여 우리 옛 죄악을 기억치 마압소서.’ 나는 그 죄들에 얽혀 있는 것만 같아 애처로운 목소리로 부르짖는 것이었습니다. ‘언제까지, 언제까지? 내일, 또 내일이오니까? 지금은 왜 아니랍니까? 어찌하여 내 더러움이 지금 당장 끝나지 않나이까?’ 이런 말을 하며 내 마음은 부서져 슬피 슬피 울고 있었습니다. 때마침 이웃 집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있었습니다. 소년인지 소녀인지 분간이 가지 않으나 연달아 노래로 되풀이 되는 소리는 ‘집어라, 읽어라, 집어라, 읽어라.’는 것이었습니다. 금시 내 안색이 변하면서 나는 곰곰이 생각해 보는 것이었습니다. - 어린이들이 무슨 놀이에 저런 노래를 부르는 일이 있느냐고 -. 그러나 아무데서고 들어본 기억이라곤 전혀 없었습니다. 나는 울음을 뚝 그치고 일어섰습니다. 이는 곧 하늘이 시키시는 일, 성서를 펴들자 마자 첫눈에 띄는 대목을 읽으라 하시는 것으로 단정해버린 것입니다. ...... 그런 만큼 나는 부리나케 알리삐우스가 앉아있는 자리로 돌아갔습니다. 아까 내가 일어나 왔을 때 거기다가 사도(바오로)의 서간경을 두고 온 까닭이었습니다. 집어들자, 펴자, 읽자, 첫눈에 들어오는 장귀는 이러하였습니다. ‘폭식과 폭음과 음탕과 방종과 쟁론과 질투에 (나아가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를 입을지어다. 또한 정욕을 위하여 육체를 섬기지 말지어다’(로마 13,13-14). 더 읽을 마음도 그럴 필요도 없었습니다. 이 말씀을 읽고난 찰나, 내 마음엔 법열이 넘치고, 무명의 온갖 어두움이 스러져 버렸나이다”(아우구스티노 저, 최민순 역, 「고백록」, 성바오로출판사, 1984, 181-182면).


아우구스티노가 읽은 로마서 말씀의 새 「성경」 번역은 “흥청대는 술잔치와 만취, 음탕과 방탕, 다툼과 시기 속에 살지 맙시다. 그 대신에 주 예수 그리스도를 입으십시오. 그리고 욕망을 채우려고 육신을 돌보는 일을 하지 마십시오.”(로마 13,13-14)입니다. 젊은 아우구스티노처럼 잠에서 깨어날 시간, 어둠의 행실을 벗어 버릴 시간이 되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밤이 물러가고 낮이 가까이 왔습니다. 그러니 어둠의 행실을 벗어 버리고 빛의 갑옷을 입읍시다”(로마 13,12). 어둠의 행실은 떳떳하지 못한 행실, 남부끄러운 행실, 자기 자신에게도 부끄러운 행실입니다. 빛의 행실은 투명한 행실, 세상을 밝게 비추는 행실, 세상을 이롭게 하는 행실입니다. 빛의 자녀는 빛의 행실을 보여야 합니다. 바오로 사도 시대와 아우구스티노 시대와 오늘 우리 시대가 크게 다르지 않나 봅니다. 바오로 사도와 아우구스티노 성인이 느끼셨던 그 절박함을 오늘 우리도 함께 느끼기를 빕니다. 회개하고 구원받기를 빕니다.


‘빛의 갑옷’은 단지 어둠을 막는 방어 도구만이 아닙니다. 빛은 어둠과 죽음의 세력을 공격하는 무기이기도 합니다. 빛의 무기는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믿음과 희망과 사랑입니다. “우리는 낮에 속한 사람이니, 맑은 정신으로 믿음과 사랑의 갑옷을 입고 구원의 희망을 투구로 씁시다”(1테살 5,8). 우리는 믿음과 사랑의 갑옷을 입고 희망의 투구를 쓰고, 선행을 실천하여야 합니다. 선행은 그 자체로 우리의 구원을 보장하지 못하지만, 구원을 향하여 바른 길을 가고 있다는 증거라고 할 수는 있겠습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자기 자신, 자기 가족의 구원만을 지향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이웃과 세상의 구원을 위하여 자신이 해야 할 몫을 적극적이고 성실하게 수행할 것을 요구합니다. 날마다 바치는 ‘주님의 기도’에서처럼, ‘아버지의 나라가 오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도록’ 자기 몫을 다하여야 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신자들에게 “주 예수 그리스도를 입으십시오.”(로마 13,14)라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미 그리스도를 입고 있습니다. 언제일까요? 세례 때입니다. “그리스도와 하나 되는 세례를 받은 여러분은 다 그리스도를 입었습니다”(갈라 3,27). 이미 시작은 했는데, 아직 완성을 못하였습니다. 그리스도를 입는다는 말은 그리스도와 일치한다는 뜻입니다. “지난날의 생활 방식에 젖어 사람을 속이는 욕망으로 멸망해 가는 옛 인간을 벗어 버리고, 여러분의 영과 마음이 새로워져, 진리의 의로움과 거룩함 속에서 하느님의 모습에 따라 창조된 새 인간을 입어야 한다는 것입니다”(에페 4,22-24). 우리가 그리스도와 일치할수록, 우리가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과 희망과 사랑을 간직할수록, “대낮에 행동하듯이, 품위 있게 ”(로마 13,13) 살아갈수록, “욕망을 채우려고 육신을 돌보는 일을 하지”(로마 13,14) 않을수록, 우리의 세례는 완성되고 우리의 구원은 가까워집니다.


우리는 구원의 길에서 참으로 많은 사람을 만납니다. 그 한 사람 한 사람이 구원의 길이요 문이기도 합니다. 가족, 친구만이 아니라, 무질서하게 지내는 이와 소심한 이와 약한 이, 심지어 악행을 저지르는 이도 모두 사랑의 대상이요, 어쩌면 더 많은 사랑이 필요한 사람들일 것입니다. 그 모든 사람, 모든 일 안에서 선을 추구하고, 언제나 기뻐하고, 끊임없이 기도하며, 한결같이 감사하는 삶이야말로 깨어 있는 삶이요, 종말을 준비하는 삶이며,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삶입니다. 하느님은 아흔아홉 마리 양을 남겨 둔 채 한 마리 길 잃은 양을 찾아 나서시는 분입니다. 세상의 경제 논리로는 이해할 수 없는 처사입니다. 그러나 한 마리 양이 광야를 헤매며 추위와 굶주림, 맹수의 공격으로 고통을 겪을 것을 아시기에, 그 길 잃은 양을 찾아 나서실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하느님의 마음이며, 우리가 본받아야 하는 마음입니다.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잃어버리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다”(마태 18,14).


* 마태 18,12-14: 되찾은 양의 비유(루카 15,3-7)

12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어떤 사람에게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가운데 한 마리가 길을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산에 남겨 둔 채 길 잃은 양을 찾아 나서지 않느냐?

13 그가 양을 찾게 되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는데, 길을 잃지 않은 아흔아홉 마리보다 그 한 마리를 두고 더 기뻐한다.

14 이와 같이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잃어버리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다.”


우리에게 바라시는 하느님 아버지의 뜻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기뻐하는 삶, 기도하는 삶, 감사하는 삶입니다. “언제나 기뻐하십시오. 끊임없이 기도하십시오. 모든 일에 감사하십시오.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살아가는 여러분에게 바라시는 하느님의 뜻입니다”(1테살 5,16-18).


형제 여러분, 여러분에게 권고합니다. 무질서하게 지내는 이들을 타이르고 소심한 이들을 격려하고 약한 이들을 도와주며, 참을성을 가지고 모든 사람을 대하십시오. 아무도 다른 이에게 악을 악으로 갚지 않도록 주의하십시오. 서로에게 좋고 또 모든 사람에게 좋은 것을 늘 추구하십시오”(1테살 5,14-15).




83 0

추천 반대(0)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