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북한관련

[발췌1] 거짓 대안들.

인쇄

승근배 [worker] 쪽지 캡슐

2000-03-06 ㅣ No.570

 

[교회가 심각한 위기에 처해있는 것은 명백하다. "새로운 교회," "공의회 후의 교회"라는 이름 하에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와는 다른 교회가 생겨나려고 몸부림치고 있다. 그것은 하나의 인간 중심의 사회이며 범신론에 근거를 둔 배교에로 향해 가게될 위험에 처해 있다. 쇄신, 에큐메니즘, 적응의 핑계 하에서 전통적인 진리를 포기하려는 운동에 휩쓸려가고 있다.(Temoinage Chretien, Paris, September 1, 1967)]

 

 

제 1 장 거짓 대안들

 

교황 바오로 6세의 빛나는 회칙 "교회에 대하여" (Ecclesiam Suam) 및 공의회 교부들의 "교회 헌장" (Lumen Gentium)을 읽어보면,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위대함을 깨닫지 않을 수 없다.

 

 

제2차 공의회의 거짓 해석들

 

많은 현대의 글들은 우리를 매우 슬프게 해주며 심지어는 중대한 염려로 가득차게 해준다. 그 글들 중에는 매우 유명한 신학자들의 글도 있고, 덜 알려진 신학자들의 글도 있으며, 아마츄어 논평인들이 꾸며낸 이야기 같은 평신도들의 글도 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공식 문서들과 전염병처럼 곳곳에서 솟아난 여러 신학자들 및 평신도들의 피상적이고 지루한 발표문들 사이의 차이보다도 더 큰 차이를 상상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한 편에는, 우리는 진정한 그리스도의 정신과 확실한 교회의 목소리를 발견하며, 외양과 내용이 다 영광스런 초자연적인 분위기를 숨쉬는 문서들을 발견한다. 또 다른 한 편으로는, 우리를 슬프게 하는 세속화, 초자연적 감성의 완전한 상실, 혼란의 늪을 발견한다.  

아마츄어 논평문같은 신학들에 의해 발생된 공의회의 진정한 성격에 대한 왜곡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거짓 대안들 중에서의 선택을 강요하고 있다. 즉 그리스도교의 세속화를 받아들이든가, 아니면 공의회의 정통성을 부인하라고.  

 

 

 

"보수적" 및 "진보적"의 진정한 의미

 

많은 자연적인 영역들에서 쉽게 적용될 수 있는 이 용어들이 교회에 적용이 된다면 매우 심각한 혼동을 일으킬 수 있다.  하느님께로부터의 불변의 계시에 밀착하며, 교회 안에는 문화의 흥망과 역사의 리듬을 초월하는 그 무엇이 있다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가톨릭 신앙의 본질 자체이다. 하느님의 계시와 그리스도의 신비체는 자연의 그 모든 실재(實在)들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이 경우에 있어서 보수적이며 전통적인 것은 교회라는 유일무이한 현상에 대한 마땅한 응답에 있어서 필수적인 요소가 된다.       

어떤 사람이 전혀 보수적인 기질을 가지고 있지도 않고 많은 면에 있어서 진보적이라고 하드라도 만약 그가 정통적인 가톨릭 신자로 남아있기 위해서는 교회의 오류 없는 교도권에 관하여 보수적이어야만 한다.  진보적인 사람이 동시에 가톨릭 신자일 수는 있으나, 자신의 가톨릭 신앙에 있어서 진보적일 수는 없다.  이러한 뜻에서 "진보적인 가톨릭"이라는 개념은 하나의 모순어법(矛盾語法)이며, 형용사 사용에 있어서의 잘못이 발생한 것이다. 불행하게도 오늘날 많은 이들이 이러한 모순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으며, 자신들이 "진보적인 가톨릭"임을 자랑스럽게 선언하고 있다.

 

 

 

"보수적" 및 "진보적"은 거짓 대안들이다

 

"보수적" 및 "진보적"이라는 라벨 하에서 신자들은 선택을 강요당하고 있다. 즉 어떤 쇄신이든지 반대하며, 인간의 나약함 때문에 교회에 침투한 것들(예를 들면, 율법주의, 추상주의, 양심에 대한 외적인 강압, 수도원에서의 권한의 심각한 낭비 등)의 제거에 대해서 반대하든지 또는 신앙의 포기라고 밖에 볼 수 없는 가톨릭 신앙의 변화 또는 "발전"을 택하라는 것이다.

이러한 것들은 거짓 대안들이다. 왜냐 하면, 제3의 대안이 있기 때문이다. 즉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공적인 결정들을 받아들이면서 동시에 많은 소위 진보적인 신학자들과 평신도들에 의한 세속화적인 해석을 단호히 거부하는 것이다.  

 

 

 

진정한 쇄신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변화될 것을 요구한다

 

이러한 제3의 선택은 그리스도와 그분의 성 교회의 오류없는 교도권에 대한 부동(不動)의 신앙 위에 기초를 둔 것이다.  또 하느님께서 계시하신 교회 안의 교리들은 변경의 여지가 없다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며, 뉴만 추기경이 말했던 발전의 의미 이외에는 변화의 가능성을 인정하지 않는다. 즉 사도들의 신앙에 암시되었던 내용 및 그로부터 필연적으로 유출되는 내용을 확실히 명시화한다는 뜻으로의 발전이다.

 

이러한 태도는 크리스챤적 성성(聖性)의 윤리관, 즉 그리스도의 거룩하신 인성(人性)과 그분께서 주신 계명들에 나타났으며 모든 성인들이 모범으로 보여준 도덕률이 영구적으로 불변임을 받아들인다.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변화되며, 그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로 되는 것이 우리들 존재의 목적임을 받아들인다. 성 바오로의 말씀대로, "이것이 하느님의 뜻이니, 곧 너희들의 성화(聖化)이니라" (테살로니카 전 4:3).

 

이 제3의 선택은 그리스도의 왕국과 세상 사이에 큰 차이가 엄연히 존재하고 있음을 우리에게 상기시켜 주며, 과거와 마찬가지로 앞으로 올, 세상 끝 날까지의 모든 세기들에도 그리스도의 정신과 사탄의 정신 사이에 투쟁이 지속될 것임을 명시해준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하신 다음과 같은 말씀이 오늘날에도 꼭같이 적용된다고 믿는다. "만약 너희들이 세상에 속해 있다면 세상은 자기 사람이라고 좋아할 것이다.  그러나 너희가 세상에 속하지 않고 오히려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택했으니 바로 그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는 것이다" (요한 15:19).

 

아무런 조건도 달지 않은 이상(以上)의 내용이 바로 가톨릭의 입장이다. 이러한 가톨릭의 입장은 모든 것을 그리스도 안에서 건설하며 우리 삶의 더 많은 영역들에 그리스도의 빛을 비추어주는 그 어떤 쇄신도 기쁘게 받아들인다. 사실 가톨릭 신자들은 모든 것을 그리스도의 영과 진리로써 과감히 대응해나가도록 명확히 권장되고 있다 - 시절이 맞든지 안 맞든지간에 그리고 현 시대나 그 어느 과거 시대의 정신에도 구애됨이 없이. 또 이러한 쇄신은 성 바오로의 다음과 같은 충고를 따르는 것이 될 것이다. "모든 것을 시험해보고 좋은 것을 지키시오" (데살로니카 전 5:21). 그러한 입장은 교회의 거룩한 분위기를 반영하는 교회 역사의 귀중한 유산들을 존중한다. 예를 들면, 그레고리안 성가라든가 아름다운 라틴어 예절의 성가들이다.  

 

이 가톨릭의 입장은 이러한 유산들이 늘 우리의 예절 속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으며 과거에서와 마찬가지로 지금도 선교를 위한 중요한 역할을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또 성 아오스딩의 고백록,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꼬의 저서들, 그리고 아빌라의 성녀 테레사의 영성 생활에 관한 글 등이 역사의 모든 시기들에 적용되는 극히 중요한 메시지가 된다고 믿는다. 또 그 입장은 교황 성하에 대한 깊은 자녀로서의 충성의 태도를 유지하며 교회를 그 모든 면에 있어서 존중하고 사랑한다.

 

이러한 제3의 선택은 현재 교회가 처한 위기에 대하여 소심적이고 타협적인 반응이 아니라 한결같고 솔직담백한 대응이다. 그것은 복고주의(復古主義)가 아니며, 단순히 지상에서의 미래만을 지향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현재를 충만히 살 수 있게 해준다. 왜냐 하면, 진정한 현실이란 우리가 자신을 과거와 미래에 얽매임으로부터 해방시킬 때에만 충만히 경험될 수 있기 때문이다. 삶의 모든 순간들은, 그것이 개인의 것이든 공동체의 것이든 간에, 영원의 견지에서 볼 때에만 비로소 그 충만한 의미를 지닐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직 인간의 영원한 목표 즉 그리스도의 견지에서 볼 때에만 현 시대를 바로 보고 바로 살수가 있는 것이다.   

 

위에 설명된 가톨릭의 입장은 교회 내의 생활 속에 침투한 세속주의에 대한 심각한 우려를 포함하고 있다.  현재의 이 위기를 교회사(敎會史) 전체에 걸쳐서 가장 심각한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동시에 교회가 반드시 승리할 것이라는 희망에 가득 차 있다.  왜냐 하면, 우리 주님께서 친히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지옥문이 교회를 쳐이기지 못할 것이다" (마테오 16:18).    

 

 

 

제 2 장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의의(意義)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주제와 목표는 "교회 헌장" (Lumen Gentium)에 다음과 같이 설명되어 있다.  "공의회는 이제 교회의 신자들과 전 세계에 교회의 내적 본성과 만민을 위한 사명을 더욱 완전하게 밝히기를 희망한다.  그리고 공의회는 이러한 목적을 이전(以前) 공의회들의 가르침을 충실히 따르면서 실현하고저 한다."

 

 

 

교회는 주기적인 쇄신을 필요로 한다

 

계시 진리를 교리로 명시함에 있어서의 성장 뿐만이 아니라, 주기적인 쇄신, 즉 항상 하나이며 동일한 교회의 진정한 생명력을 때때로 일신(一新)해야 하는 것이 교회의 본성이다.  지난 2,000년 간의 교회사 전반에 걸쳐서 소집되었던 교회의 공의회들은 이러한 초자연적인 리듬의 존재를 확인하여 준다.  그러한 리듬이 한 편으로는 교회를 끊임없이 침범하려고 하는 이단들의 단죄를 포함했으며 또 이와 관련하여 계시된 진리를 확실한 교리로 선포함을 포함하였다.  뉴만 추기경은 이러한 과정을 그의 "크리스챤 교리의 발전에 대한 논문"에서 설명하였다.

또 다른 한 편으로는, 그 초자연적인 리듬은 여러 수도회들의 개혁에 비유할 수 있는 쇄신을 포함한다.  즉 분도회 내에서의 클루니 개혁이라든가 방지거 회에서의 성 베르나르딘에 의한 개혁 등이다.  

역사의 흐름 속에서 성취되는 이러한 성장이나 개혁은 교회의 본질 자체의 변경이나 진화를 뜻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이러한 성장과 개혁을 포함하는 초자연적인 리듬은 헤겔이 말하는 역사 안에서의 세속 정신의 움직임과는 반대의 개념이다. 한 시대의 정신에 교회가 적응한다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개념이다.  이는 교회의 생명 속에서만 발견될 수 있는 현상이며, 교회의 초자연적인 생명력으로부터 솟아나는 현상이다.                  

 

 

 

쇄신은 교회의 초자연적인 활력을 회복시킨다

 

쇄신의 과정이란 인간의 나약성 때문에 그리고 그 시대의 풍조와 경향 때문에 교회 안의 관습 및 신자들의 신앙 생활 속으로 침투한 세속화적인 영향들을 떨쳐버리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그것은 진화나 진보와는 정반대의 개념이다.  오히려 그것은 필수적이고 진정한 교회의 정신에로 되돌아옴을 뜻하며, 따라서 그것은 하나의 정화(淨化)와 회복의 과정이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영(靈)과 세속의 영(靈)사이에 진행되는 전쟁의 한 과정이다.  성 아오스딩은 이 전쟁을 두 성(城) 간의 전투로 묘사하였다.  이 전쟁의 과정에서 그리스도께 부합되지 않는 모슨 사상들과 관습들은 계속적으로 제거된다.  바로 성 그레고리오 7세의 개혁이 그러하였다.  수많은 공의회들에 의한 개혁들이 그러했으며, 특히 트렌트 공의회에 의한 개혁이 그러하였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추구한 것은 율법주의의 극복이었다

 

이전의 공의회들에서는 전반적인 해이(解弛)의 형태로 유포되었던 세속화의 영향들을 퇴치한다는 의미로서의 쇄신에 초점을 두었던 데 반해,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는 편협성(偏狹性)의 형태를 취한 세속화로부터의 탈피를 추구했다.  즉, 그것은 교회의 진정한 모습을 흐리게 했던 경직화(硬直化)와 율법주의(律法主義) (또는 형식주의)를 극복하기 위하여 새로운 활력을 (교회 안에) 불어넣는다는 것을 뜻했다.

 

그것은 하나의 새로운 차원의 쇄신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러한 쇄신이 교회와 세속과의 사이, 즉 그리스도의 정신과 세상의 정신과의 사이에 존재하는 근본적인 적대 관계를 감소시킨다든가 이를 조금이라도 얼버무린다는 것을 결코 의미하지 않는다는 점을 강조해야만 할 것이다.  이에 대한 교황 바오로 6세의 말씀을 들어보자.

 

누구든지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신앙, 전통, 수덕(修德), 애덕의 실천, 희생 정신, 그리고 그리스도의 말씀과 십자가에의 충성에 대하여 교회가 가르쳐온 바를 완화한다라고 해석하든지, 원리 원칙도 없고 초월적인 목적도 없이 나약하고도 변덕스러우며 상대적인 세속적 사고방식에 대하여 관대하게 양보하는 것이라고 해석하든지, 이전보다 더 용이하고 덜 철저한 크리스챤 신앙 형태를 포용하는 것이라고 해석한다면 완전히 오해를 하는 것이다. (His Holiness Pope Paul VI, Sainte Colere, Paris: Editions de la Table Ronde, 1965)

 

편협성을 극복한다는 것은 시대의 정신과 타협한다는 것을 뜻하지 않으며, 오히려 그것은 오직 그리스도의 정신만이 줄 수 있는 도량과 자유를 성취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를 들면, 교회는 모든 오류들에 대하여 철저하게 이를 배격하는 동시에 오류를 범하는 이들에 대해서는 그들 인격의 존엄성을 존중하여 그들을 모성애로써 대하며 그들의 설(說)에 포함되어있는 부분적인 진리에 대하여서도 이를 존중하려는 열성을 보여왔다.  즉 교회는 신성한 것과 신성하지 못한 것을 확실히 구별하는 동시에 모든 것에 그리스도의 정신이 침투하도록 추구하여 왔다.

 

 

 

                                           -하느님의 성에 들어온 트로이의 목마중에서

 

 

 

본 글은 나주의 성모님 메시지를 전하고 있는 사이트에서 발췌해 온 것입니다. 이 글을 읽으시면 현대주의적인 사상이 무엇인지를 어느 정도는 아실 수가 있을 실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이 이해를 돕고자 앞으로 2-3개의 글을 더 발췌하려고 합니다. 저의 투박한 반론보다는 이 분의 글이 현대주의적 사상을 쉽게 이해시켜 줄 것입니다. 내용도 어떤 대백과 사전이나 신학자의 글을 발췌한 것보다 현학적이지 않기 때문에 읽어나가는데 짜증나지도 않는 답니다.

 

 

 

 



159

추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