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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시지 없는 권위는 독단 "설득력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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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명환 [wax77] 쪽지 캡슐

2003-03-11 ㅣ No.3724

 

 

 

탈 권위주의 시대, 교회는?

 

메시지 없는 권위는 독단 “설득력 없어”

 

성직자 중심의 사고방식 큰 걸림돌

 

수평적 쌍방향적 문화 코드 읽어야

 

대통령 취임식이 열린 지난달 25일 국회에는 인터넷으로 참여 신청을 한 일반 시민 1만 여명이 앉아 있었다. 노무현 대통령은 먼저 일반 국민들과 악수를 나눴고 과거 민주화 운동 시절 불후의 명곡이었던 상록수 등 저항가요들이 불려졌다.

 

대세, 탈(脫) 권위주의

우리 사회는 이미 억압적 권위주의에서 탈피하려는, 때로는 발랄하고 신선하며 때로는 위태하고 과격한 시도와 논쟁들이 자주 눈에 띄고 있다.

물론 여전히 우리 사회에는 구시대적인 유물인 권위주의의 잔재들이 곳곳에 남아있다.

하지만 전체주의적인 통치 체제가 막을 내리고 정치, 사회의 민주화가 진전되기 시작하면서 우리 사회에서는 탈권위주의에 대한 요구가 분명히 대세를 이뤄왔고 사회 각 부문에서 구체화되기 시작했다.

 

거침없는 토론 열린 언로

권위주의에 대한 도전에서 가장 밑바닥의 흐름은 거침없는 토론과 다양한 언로였다. 여론과 토론이 지금처럼 활발한 적은 없었다. 권위주의 시대에서 「침묵은 금」이었다. 정부 일에 대해서 가타부타 토를 다는 일은 명을 재촉하는 만용이었다. 회사에서도 상사 앞에서 자기 주장을 곧게 펴는 일은 인사고과에 결코 유리한 일이 아니었다.

지난 선거는 「인터넷 선거」였다. 기존의 「언론 권력」과는 달리 인터넷을 매개로 해서 누구든 자유롭게 의사를 개진할 수 있었고 같은 의견을 가진 사람들이 조직적인 행동에 나설 수 있었다. 월드컵도 그랬고 촛불시위도 그랬다.

우리 사회에 새로운 여론의 장으로 등장한 것은 「인터넷 언론」이었다. 「오마이뉴스」에 이어 「프레시안」, 「뉴스앤조이」 등은 「제4부」라고 일컬어지는 기성 언론을 능가하는 영향력을 발휘했다. 그것은 권력과 권위주의에 대한 도전이었다.

기성 방송에서도 사회적 이슈들을 놓고 토론을 벌이는 프로그램들이 눈에 띄게 늘어났다. 프로그램 수만 아니라 시청률 자체도 급상승했다. 탈권위주의의 징후는 사회 전 부문에 걸쳐 소소하지만 꾸준하게 이어졌다.

 

비판, 종교도 예외 없다

90년대 초까지 주된 권력 비판은 독재, 권위주의 정권의 거대 권력을 어떻게 해체하고 민주화를 이룰 것인가에 집중됐다. 하지만 90년대 후반에 접어들면서 「권력」에 대한 비판은 문화에서 언론까지 전 영역으로 확산됐다. 급기야 「성역과 금기에 도전하는」 권력 비판은 종교계에까지 확산됐다. 최고의 권위로 자칫 최악의 권위주의로 빠질 위험성을 항상 보유하고 있는 종교에 대한 노골적인 폭로와 비판이 시작됐다.

지난 2월 15일 「종교와 사회권력」 학술대회에서 강인철 교수(한신대)는 논문 「종교 권력과 한국 천주교회」를 통해 최근 한국 천주교의 이미지에 부정적 영향을 준 사건들을 나열하면서 그 원인으로 「독특하게 한국적인 권위주의, 성직 중심주의」를 지목했다.

그 자신이 가톨릭 신자인 강교수의 주장들은 전혀 생소한 것은 아니다. 수년 전부터 교회내 인터넷 사이트들 안에서는 이보다 엄정한 이론을 갖추지는 못했지만 툭툭 불평을 내뱉듯 유사한 주장을 하는 신자 네티즌들의 수가 늘어나기 시작했다.

문제는 이러한 비판들이 교회 지도층의 검토와 수렴으로 이어지지 못한 채 「인터넷의 역기능」으로 간주됐고 이제는 일반 언론을 포함한 교회 밖에서부터 이러한 지적들이 공공연하게 나오고 있다는 점이다.

 

성직자 중심주의의 성찰

교회 안에서도 이에 대한 성찰이 있었다.

서울대교구 시노드 성직자 의안은 제7항에서 『무조건적으로 외적 권위를 내세우며 신자들을 함부로 다루는 태도는 사목직을 가장 저해하는 요소』라고, 평신도 의안은 『한국 사회에 내재되어온 권위주의적 전통에 근원을 둔 성직자 중심주의적 사고방식』을 지적했다. 200주년 사목회의 성직자 의안은 『성직주의의 함정에 빠지지 말고, 그리스도의 종이라는 자신의 신분을 명심해 현대인에 대한 봉사의 자세로 절대자의 증인 역할을 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심상태 신부는 저서에서 『한국교회가 성원들 모두를 존중하는 민주적 질서와 거리가 먼 권위주의적 분위기에 휩싸여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고 말했고, 정의채 신부는 교회의 모든 계획과 결정에 전 교회 구성원이 책임과 의무 뿐만 아니라 권리를 행사할 수 있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수원교구장 최덕기 주교는 지난 97년 『권위주의적 삶의 양식은 한국교회를 한국화로부터 더 멀어지게 만든다』고 말했으며, 성염 교수는 「성직자 우위의 질서」를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으로 규정하면서 권위주의적 처신을 정당시하려는 풍토가 여전히 건재한다고 지적했다.

한편 교회내의 권위주의는 차별 의식을 야기한다. 특히 교회 안의 여성에 대한 차별 의식은 최근 들어 매우 자주 지적되고 있다.

 

시대적 요청, 교회에도

제2차 바티칸공의회 이전까지 성직자는 「그리스도의 대리자」로서 공동체 밖에, 또는 위에 존재하는 특별한 존재였다. 하지만 공의회는 친교의 교회론을 통해, 그리고 하느님 백성에게 봉사하는 존재로서의 사제상을 가르쳤다.

하지만 시대를 앞서간 공의회는 그 후 수십 년 동안 지역교회 안에서 체화되지 못했다. 특히 한국교회 안에서 권위주의적인 모습들은 공의회 이전과 이후 큰 차이 없이 지금까지 신학적, 교회 구조적으로 전례와 언어생활에 있어서 강력한 지원을 받으면서 유지되고 있다.

그러나 이제 시대적인 표징들은 교회 안에서도 탈권위주의의 과제가 긴급한 문제임을 알려주고 있다.

문화사목을 시종 주장하고 있는 주교회의 매스컴위원회 총무 김민수 신부는 지난해 11월 한 신문에 기고한 글에서 『교회 안에서 수직적이고 획일적으로 행사되어온 성직자의 권위주의가 수평적이고 쌍방향적인 문화코드를 실천하는 신자들에 의해 흔들리고 있음을 주시해야 한다』고 경고했다.

사이버상에서의 만남처럼 일대일, 인격적으로 동등한 대면을 중시하는 현대인들은 「권위」를 부정적인 의미로 받아들인다. 여기에는 다양한 원인이 있겠으나 무엇보다도 자본주의의 등장과 함께 과거 국가 권력이나 성직자, 양반, 귀족, 유지 등 전통 사회의 권위 주체가 독점했던 권위를 자본가, 문화 예술인, 전문 기술인 등이 분점함으로써 권위의 다원화 사회가 도래했기 때문이다. 이제 권위는 그 주체의 신분을 바탕으로 일방적으로 주어지는 순종의 관계와 명령이 아니라 주어지는 가르침과 메시지 자체가 얼마나 신뢰할 수 있는가에 따라 수용되는 시대이다.

권위주의적인 성격을 지닌 언어는 현대인에게 설득력을 지니지 못하고 독단으로 간주된다. 이는 그리스도교 신자들을 포함한 현대인들이 교회의 권위를 바라볼 때에도 마찬가지이다. 보다 참되고 깊이 있는 대화와 헌신성으로 뒷받침될 때 교회는 신뢰를 얻게 되고 진정한 권위로 인정받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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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의 말이냐가 아닌 무슨 내용이냐가 중요

 

인터넷과 권위주의

탈(脫) 권위주의의 목소리가 높아지게 된 데에는 인터넷으로 상징되는 커뮤니케이션 수단의 확대가 큰 몫을 했다. 인터넷 확산으로 개인들이 원할한 의사 소통을 하고 과거 일부가 독점하거나 다른 사람들이 획득할 수 없도록 배제할 수 있었던 정보를 이제는 모두가 손쉽게 공유할 수 있게 됐다.

뿐만 아니라 이제 개인은 누구나 네트워크에 연결되면 자기 의사 표시를 얼마든지 할 수 있게 됨에 따라서 일방적으로 주어지는 명령과 순종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고 권위의 주체에 대한 부정과 반박까지도 자유롭게 할 수 있다.

이러한 커뮤니케이션 수단의 확대는 교회 안에서도 새로운 현상을 선보였다.

90년대 초 PC통신이 등장하고 중반을 넘어서면서 인터넷이 급속도로 확산되기 시작했다. 사이버세계가 확대되면서 온라인에는 다양한 모임들이 생겨나기 시작했고 이들은 온라인을 신앙생활의 심화와 확대를 위한 방편으로 삼았다. 그런데 인터넷이 보편화되고 게시판이 다양한 의견을 확대재생산하는 공간으로 자리잡으면서 이전과는 사뭇 다른 양상을 띤 현상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자기 신앙생활과 경험을 나누면서 사이버공간을 신앙성숙을 위한 방편으로 활용했던 초창기와는 달리 교회 기관 종사자들의 처우 개선 요구, 한국교회의 일제 시대 친일 행적에 대한 비판, 성당의 혼인이나 장례 절차에서의 부정, 본당 신부의 무례한 태도 등 이전에는 공공연히 입에 올리지 않았던 문제들에 대한 체험과 의견들이 봇물 터지듯 쏟아지기 시작했다.

일단 교회에 대한 비판 의견들이 쏟아지기 시작하자 교회 쇄신, 여성 사제 문제, 교회의 정치 참여 등 굵직한 사안들을 둘러싸고 격렬한 토론이 벌어지곤 했고 심지어는 교리적인 문제에까지 의문을 제기하기에 이르렀다.

여기서 주목되는 부분은 『누가 이야기를 하는가』가 아니라 『무슨 이야기를 하는가』가 의미를 가진다는 것이다. 사이버 상에서 모든 사람은 하나의 네티즌일 뿐 성직자나 수도자, 평신도의 구별은 있을 수 없다. 얼굴을 맞대고 토론을 할 경우 토론 내용은 상대의 지위나 신분에 좌우된다. 하지만 ID로 통용되는 온라인에서 신분의 구별은 무의미하고 다만 어떤 주장과 의견을 갖고 있느냐에 따라 구분될 뿐이다.

본질적으로 인터넷에서는 발신자와 수신자가 따로 없다. 모두가 발신자이면서 수신자인 쌍방향성이 인터넷의 특징이다. 네트워크에 익숙한 현대인들에게 있어서 일방적인 명령이나 순종의 강요는 설득력이 없다. 사이버상에서는 권위 있는 사람이 따로 없다. 메시지 자체가 권위를 지닐 뿐이다.

결국 교회는 누가 메시지를 전하느냐가 아니라 어떤 메시지를 현대인들에게 전해야 하는가에 더 많은 고민을 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러한 고민은 권위주의적인 사고방식을 탈피할 때에만 그 해결책을 찾을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박영호 기자>가톨릭신문 young@catholictimes.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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