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창동성당 게시판

5월1일 성 리카르도 팜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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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화정 [wjyou57] 쪽지 캡슐

2012-09-29 ㅣ No.2139





축일 5월1일
성 리카르도 팜푸리
San Riccardo Pampuri Religioso
1 maggio 
Trivolzio, Milano, 1897 - Milano, 1 maggio 1930




성 리카르두스 팜푸리(Richardus Pampuri, 또는 리카르도)는 1897년 8월 12일 이탈리아의 파비아(Pavia) 근처 트리볼지오(Trivolzio)에서 태어났다. 안젤라 팜푸리(Angela Pampuri)와 인노첸테 필리포(Innocente Filippo)의 11남매 중 10번째 태어난 에르미니오(Erminio)는 어린 나이에 고아가 되었다. 세 살 때 어머니를 잃고 인근 마을에 사는 이모 집에 맡겨졌는데 7년 후인 1907년에 아버지 또한 밀라노(Milano)에서 돌아가셨다. 그는 인근에 있는 두 곳의 초등학교를 다녔고 밀라노로 가서 중학교를 마쳤다. 그리고 파비아에서 고등학교 과정을 마치고 1915년 파비아 대학의 의대에 들어갔다. 그는 1915년과 1920년 사이에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해서 하사관과 의무병으로 근무했다. 1921년 7월 6일 파비아 대학의 약학과와 외과를 수석으로 졸업한 그는 의사로 있던 삼촌 밑에서 3년간 의료 실습을 마친 후 밀라노의 한 병원으로 발령을 받았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환자들을 돌보던 그는 그리스도교 사도직에 대한 관심이 깊어졌다. 사실 그는 소년 시절부터 선교사제가 되고 싶었지만 건강 문제 때문에 단념했었다. 젊은 시절 어느 곳을 가던지 그리스도교적 덕행의 모범이었던 그는 세상 속에 살면서도 복음의 메시지를 지속적으로 고백하고 너그러움과 열정을 갖고 자선사업을 실천했었다. 바쁜 일정 중에도 기도하는 것을 잊지 않았고 하느님과 일치를 이루기 위해 노력하였다. 열심히 미사에 참례하고 성체 앞에서 오랜 시간을 보냈다. 그는 성모님께 대한 깊은 신심으로 하루에 한 번 이상 묵주기도를 바쳤고, 파비아 대학 가톨릭 액션 단체의 근면한 회원이었으며, 빈첸시오 아 바오로회와 작은 형제회의 3회원으로도 활동했다.

   소년 시절부터 가톨릭 액션 단체에 참여했던 그는 실습을 위해 모리몬도(Morimondo)에 갔을 때 본당 신부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고, 음악 밴드와 가톨릭 액션 젊은이 단체를 조직하여 그 첫 번째 대표로서 성 비오 10세(Pius X)의 전구 아래 두 단체를 두었다. 그는 또한 본당의 선교 후원회의 간사를 맡기도 했고 자비를 들여 청년 모임과 농민과 지역 노동자들을 위한 정기 피정을 조직하기도 하였다. 의사로서 유능하며 자비로운 그는 환자들에게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의술을 베푸는 데 있어서 시간과 장소를 가리지 않았다. 대부분의 환자들이 가난했기 때문에 그는 오히려 약과 돈 그리고 음식과 이불을 가져다주곤 하였다. 그의 자선사업은 모리몬도 근교의 도시 근로자들과 이웃의 손길이 필요한 노인들에게 퍼져나갔고 다른 마을과 도시로도 확산되었다.

   6년 동안 의사로 일한 그는 수도원에 입회하고자 했고, 이에 ‘거룩한 의사’를 잃을 처지에 놓인 사람들의 슬픔은 말로 다 할 수 없이 컸고 지역 신문에서까지 기사화하였다. 그는 결국 1927년 6월 22일 밀라노의 천주의 성 요한 수도회에 입회하여 이웃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한 자신의 의학기술을 지속하고 동시에 복음적 거룩함에 더 가까이 가는 길을 택하였다. 그는 리카르두스라는 수도명을 받고 브레시아(Brescia)에서 지원기를 마치고 1928년 10월 24일 서원을 하였다. 서원 후 그는 노동자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브레시아의 천주의 성 요한 병원으로 발령을 받았다. 그곳에서 성 리카르두스 팜푸리 수사는 아름다운 자선을 실천하여 모든 이의 존경을 받았다. 수도자로서 그의 삶은 수도회에 입회하기 전에도 그랬듯이 동료, 환자, 의사, 진료 보조원, 간호사, 그와 만나는 모든 이들에게 덕과 자선의 탁월한 모범이었다.

   성 리카르두스 팜푸리는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을 때 얻은 병으로 인해 일종의 폐병을 앓고 급속히 건강이 악화되었다. 밀라노로 치료를 받으러 갔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1030년 5월 1일 33살의 나이로 선종하였다. 그는 ‘자신의 전문지식을 자비의 사명으로 변형시키는 방법을 아는 의사로서, 자신 안에 천주의 성 요한의 진정한 아들로서의 카리스마를 살았던 수도자로서의 기억을 남기고’ 하느님께로 돌아간 것이다. 그의 시신은 고향에 돌아와 묻혔으며 그를 기리는 성당이 세워졌다.

   그는 1981년 10월 4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는데 이날 강론에서 교황은 이렇게 말하였다. “짧지만 열정적인 삶을 산 리카르두스 팜푸리 수사는 모든 하느님 백성에게 자극이 되는데 특히 젊은이와 의사, 수도자들에게 큰 자극이 된다. 그는 오늘날 젊은이들에게 인생을 그리스도교 신앙 안에서 기쁘고 용기 있게 살도록 초대하며, 항상 하느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그리스도의 메시지와 가르침을 따라 다른 이들을 위한 봉사에 스스로를 헌신하도록 초대한다.” 그는 1989년 11월 1일 같은 교황에 의해 성인품에 올랐다.
(가톨릭홈에서)


[금주의 성인] 성 리카르도 팜푸리(St. Riccardo Pampuri, 5월 1일)
 
의술 아닌 인술 베푸는 성자…가난한 이들 무료 진료하며 의사 수사로 충실
 
 
1897-1930. 이탈리아 출생 및 선종. 의사. 수사.
 
성인은 3살 때 어머니를, 10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이모와 의사인 이모부 밑에서 자랐습니다. 독실한 신자인 이모와 이모부는 성인을 지극정성으로 키웠고 부모의 빈자리를 신앙으로 채워줬습니다.
 
성인은 사제가 되고 싶었지만 몸이 허약해 신학교 입학을 거절당했습니다. 그래도 언젠가는 하느님께서 자신을 당신 도구로 써주실 것을 믿으며 실망하지 않았습니다.
 
성인은 지역에서 존경받는 의사인 이모부 영향을 받아 의대에 진학했습니다. 공부만 하기에도 벅찬 의대 생활이었지만 성인은 학업을 핑계로 신앙생활을 게을리하지 않았습니다. 매일 미사에 참례하려 노력했고 가톨릭 액션(Catholic Aciton) 활동을 하며 주변 친구들에게 신앙을 전하는 데도 앞장섰습니다. 또 틈날 때마다 성경을 읽으며 하느님 말씀에 귀기울였습니다.
 
대학 재학 중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성인은 의무병으로 군복무를 합니다. 전쟁터에서 수많은 이들이 죽어가는 모습을 보고 생명의 소중함과 생명을 살리는 자신의 일에 대한 가치를 깨닫습니다. 그리고 의술이 아닌 인술을 베푸는 의사가 될 것을 다짐합니다.
 
성인은 군복무를 마치고 학교로 돌아와 수석으로 졸업합니다. 이후 밀라노의 한 병원에서 근무하면서 본격적으로 인술을 펼칩니다.
 
병원 진료시간이 끝나면 어려운 이웃들을 찾아다니며 치료비와 약값을 받지 않고 진료해줬습니다. 또 자신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있으면 시간과 장소를 가리지 않고 달려갔습니다. 이같은 그의 선행에 성인 주변에는 무료로 진료받으려는 이들과 성인을 후원하려는 이들로 넘쳐났습니다.
 
성인은 하느님의 사람으로 살고 싶어 천주의 성 요한 의료봉사 수도회에 입회합니다. 그리고 리카르도라는 수도명을 받고 수사로서, 의사로서 맡은 바 소임을 충실히 행하며 많은 이들에게 존경을 받았습니다.
 
성인은 늑막염에 걸려 33살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후 성인 전구로 많은 치유기적이 일어났고 1989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성인을 시성했습니다.
 
[평화신문, 2011년 5월 1일, 박수정 기자]


[복자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와 함께 읽는 성인전]
 
성 리카르도 팜푸리 - 의사이자 신심 단체 창설자
 
번역 송영웅 바오로(봉명학원 재단이사)
 
 
성 리카르도 팜푸리(Richardus Pampuri, 1897-1930)는 에르미니오 필리포 팜푸리(Erminio Filippo Pampuri)라는 이름으로 이탈리아 트리볼리지(Trivolizi)에 사는 신앙심 깊고 유복한 가정에서 10번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3살 때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토리노(Torino)로 보내져 외할아버지와 이모 슬하에서 자랐다. 그의 삼촌 카를로(Carlo)는 에르미니오가 의사가 될 수 있도록 교육시키면서 병자들을 향한 깊은 사랑과 봉사정신을 심어 주었다. 1907년 아버지마저 사고로 돌아가셨지만 에르미니오는 그 아픈 상황을 침착하게 이겨냈다.
 
에르미니오는 해외 선교사가 되겠다는 오랜 꿈을 접고 의과대학에 입학하였다. 그의 누나가 수녀회에 들어가자 그는 누나가 수도 생활에 완전히 헌신한 것을 기쁘게 받아들이면서 자신은 프란치스코 수도회 제3회 회원이 되었다. 그 당시 이탈리아 전역에 부는 반성직자주의에도 불구하고 에르미니오는 가톨릭 단체에 가입하여 적극적으로 활동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그는 군대에 징집되어 의무병과에 소속되었는데, 매우 어려운 상황에서도 뛰어난 용기를 발휘하여 훈장을 받았다. 1918년 그는 의과대학에 복학하여 1921년 7월 6일 약학과와 외과 전문의 자격을 획득하였다. 그리고 이듬해에 인턴 과정을 끝내고 1923년 파비아(Pavia) 대학교에서 일반의와 외과에 등록하였다.
 
그는 학생시절부터 성 빈첸시오 아 바오로회(Conference of Vincent de Paul)와 여러 봉사 단체에서 많은 활동을 하였다. 밀라노(Milan)로 옮기고 나서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의술을 베푸는 ‘비오 10세 교황을 따르는 사람들’(the Band of Pius X)이라는 단체를 결성하였다. 그는 가난한 이들에게 의복과 음식을 주기 위한 기금 마련을 위해 분주히 활동하면서 또한 자신에게 성소가 있음을 깨달았다.
 
1927년 6월 22일 그는 자신의 의술을 그리스도와 가난한 이들을 위해 온전히 바치기로 서약하고 ‘천주의 성 요한 의료봉사 수도회’(Hospitaller Order of St. John of God)에 입회, ‘리카르도’라는 수도명을 받았다. 1928년 10월 28일 그는 첫 서원을 하고 브레시아(Bresia)에 있는 병원으로 파견되었다. 그곳에서 그는 가난한 이들을 위한 사도직 활동을 계속하는 한편 환자 치료에 탁월한 솜씨를 보여 명성을 얻었다. 그러나 점차 건강이 나빠져 밀라노에 있는 병원으로 전근된 후 폐에 심한 통증을 느끼기 시작하였는데 이 증상은 곧이어 폐렴으로 악화되었다. 리카르도는 병상에서 자신이 언제 죽을지 예언하였는데 자신의 예언대로 33세의 나이에 숨을 거두었다.
 
1981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리카르도를 복자로 선포하였고 1989년 11월 1일 그를 시성하였다. 교황은 성인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이 성인은 시대적으로도 우리와 아주 가까운 시대를 살았던 분이지만 이분이 살던 시대가 당면하였던 문제와 그 당시 사람들이 느끼고 고민하던 문제들은 바로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문제들이고 우리의 고민들로서 그런 점에서 본다면 이분은 우리와 더욱 가까이 계시는 분이십니다.” 이어서 교황은 리카르도의 생애는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영원한 거룩함이라는 신비로 빛나고 있다”고 하셨다. 성 리카르도 팜푸리는 성 가스파르 베르토니(Gaspar Bertoni, 1777-1835)와 같은 날 시성되었는데 교황은 두 성인을 일컬어 주님께서 산상수훈에서 가르치신 복음을 잘 드러내 보여 준 분이라고 하면서 “리카르도와 가스파르 성인은 서로 다른 시대에 살았고 걸어간 길도 달랐지만 모두 자신의 삶으로써 그리스도의 사랑을 증거하였습니다”라고 강론을 마쳤다.
 
성 리카르도 팜푸리의 축일은 5월 1일이다.
 
[교회와 역사, 2011년 6월호]

 

San Riccardo Pampuri Religioso

1 maggio
 
Trivolzio, Milano, 1897 - Milano, 1 maggio 1930

Erminio Filippo Pampuri, nella vita religiosa, frà Riccardo, nacque (decimo di undici figli) il 2 agosto 1897 a Trivolzio (Pavia) da Innocenzo e Angela Campari, e fu battezzato il giorno seguente. Orfano di madre a tre anni, venne accolto dagli zii materni a Torrino, frazione di Trivolzio. Nel 1907 gli morì a Milano il padre. Compiute le scuole elementari in due paesi vicini, e la prima ginnasiale a Milano, fu alunno interno nel Collegio Sant'Agostino di Pavia. Dopo gli studi liceali, si iscrisse alla facoltà di medicina nell'Università di Pavia, laureandosi con il massimo dei voti, il 6 luglio 1921. Nel 1927 entrò a Brescia nel noviziato dei Fatebenefratelli e vi emise la professione religiosa il 24 ottobre 1928. Gli venne affidato il gabinetto dentistico. Purtroppo nella primavera del 1929 la sua salute peggiorò per la tubercolosi. Il 18 aprile 1930 fu trasferito nell'Ospedale del Fatebenefratelli di Milano dove morì il primo maggio. Proclamato beato da Giovanni Paolo II il 4 ottobre 1981, è stato canonizzato nella festività di Tutti i Santi, 1° novembre 1989. (Avvenire)

Etimologia: Riccardo = potente e ricco, dal provenzale


Martirologio Romano: A Milano, san Riccardo (Erminio Filippo) Pampuri, che dapprima esercitò con generosità nel mondo la professione di medico e, entrato poi nell’Ordine di San Giovanni di Dio, dopo circa due anni riposò in pace nel Signore.

 

 


Caporetto, fine ottobre 1917.
Gli Austriaci travolgono i soldati italiani: un disastro. Tra i militari del servizio sanitario, c’è Erminio Pampuri, 20 anni, studente di Medicina a Pavia. Fin dalla chiamata alle armi, si era prodigato con dedizione tra i soldati e feriti al fronte, rischiando sovente la pelle.
Ora, durante la ritirata, compie un’azione eroica: conducendo un carro tirato da una coppia di buoi, per 24 ore sotto la pioggia battente, pone in salvo il materiale sanitario precipitosamente abbandonato. Sa che se non lo facesse, per pensare solo a se stesso, numerosi feriti non avrebbero più la possibilità di curarsi.
Appena congedato, al termine della guerra, riprende gli studi di medicina e per l’impresa compiuta, viene decorato con medaglia di bronzo.

Rotto a tutte le fatiche
Era nato, decimo di undici figli, il 2 agosto 1897, a Trivolzio (Pavia) in una famiglia che viveva davvero il Vangelo. Era cresciuto in casa degli zii materni, sentendo il benefico influsso dello zio Carlo, medico, uomo di Dio e apostolo. Aveva compiuto gli studi al Liceo Manzoni di Milano, professando la sua fede a viso aperto tra i compagni e professori. Al momento della scelta della professione, si era iscritto a Medicina, seguendo l’esempio dello zio.
All’Università di Pavia, aveva partecipato al Circolo Cattolico Severino Boezio, coinvolgendo nel suo apostolato numerosi giovani studenti. Il suo assistente ecclesiastico, Mons. Ballerini, dirà: «Al Circolo portò più soci lui con il suo esempio e la sua vita intemerata che non tutte le conferenze e i mezzi di propaganda, compreso il suo interessamento personale».
Un giorno, durante una sollevazione studentesca, erano stati uccisi due universitari. Erminio Pampuri fu il solo ad avvicinarsi ai loro cadaveri per pregare, rispettato dai tiratori, profondamente toccati dal suo coraggio e dalla sua fede.
Ora, a 24 anni, è medico e incanta chi lo avvicina per la sua purezza e la sua affabilità. È destinato alla “condotta” di Morimondo (Milano), 1800 abitanti, sparsi in cascinali di campagna, con strade malagevoli, nella pianura milanese. Si stabilisce in un umile alloggio, vicino alla chiesa parrocchiale. Ogni mattina, prestissimo, partecipa alla Messa con la Comunione e, in ogni attimo di libertà, vi cerca respiro davanti al Tabernacolo dove Gesù lo attira e gli dà forza.
Sovente è chiamato di notte presso i malati. Il “dottorino” accorre e indugia a lungo presso di loro, competentissimo, disponibile, un vero fratello. Spesso non accetta nulla come onorario, anzi, porta ancora lui i medicinali e il denaro necessario alle famiglie più povere. Al mattino, dopo la Messa, fa ambulatorio in casa, poi riprende le visite: a piedi, sul calesse, d’estate, d’inverno, sotto il sole cocente o sotto la neve. Porta con sé la corona del Rosario e prega la Madonna di sostenerlo e di illuminarlo.
Scopre che a Morimondo e dintorni, ci sono tanti giovani, spesso poco aiutati, nella loro formazione. Il medico ha pochi anni più di loro e si tiene aggiornato su tutti i problemi della vita, della società, della Chiesa. Si ferma a parlare con i giovani, li raduna attorno a sé, meglio, attorno a Gesù, nella parrocchia: con il suo ascendente, li istruisce nella fede, li guida a vivere il Vangelo, più con il suo esempio che con la parola. Quelli ne restano affascinati e alcuni, aiutati da lui, maturano la vocazione sacerdotale e religiosa: saranno presto apostoli, per aver incontrato lui.
Alcuni, tra la sua gente, gli dicono: «Dottore, quando pensa a sé?». Risponde alzando le spalle e raccomandando di chiamarlo a qualsiasi ora del giorno e della notte, perché lui è lì per servire: per i malati, gli anziani, i bambini, coloro che in qualunque modo hanno bisogno. Lo slancio per resistere all’immane fatica lo trova in Gesù Eucaristico che visita ogni sera: persino il cavallo lo sa, ormai, e quando giunge vicino alla chiesa, si ferma da solo e attende che il dottore abbia finito di pregare.
La vita a Morimondo cambia: il parroco si trova la chiesa piena di giovani alla Messa festiva e all’adorazione eucaristica, molti impegnati nell’Azione Cattolica e per le missioni. Ha fatto tutto il giovanissimo dottor Pampuri. Ma dov’è quando ci sono tutti e lui sembra assente? È a casa che studia e insieme prega, o in un angolo della chiesa, occupato in un colloquio intenso con il divino Amico, o in visita ai suoi malati a qualsiasi ora del giorno.
Alcuni colleghi medici gli consigliano di “prendersela con calma”; «tanto – gli dice qualcuno – si nasce e si muore anche senza di noi». A costoro lui risponde con uno sguardo di fuoco. Ma altri colleghi vengono per consultarlo per i casi più difficili, con una stima grandissima per lui e la sua estrema professionalità.

Il saio per completare
Nel giugno 1927, a 30 anni, il dottor Erminio Pampuri chiede di entrare a farsi religioso tra i Fatebenefratelli, l’Ordine Ospedaliero fondato da San Giovanni di Dio nel 1537 per l’assistenza agli infermi. Lascia tutto e parte, tra le lacrime dei suoi assistiti di Morimondo, per seguire Gesù. Il suo gesto suscita enorme scalpore: anche i giornali ne parlano. Il 21 ottobre 1927, riceve l’umile saio di “fratello” e comincia il noviziato: umile, semplice, sottomesso, come tutti gli altri, nella casa religiosa di Brescia. Prende il nome di fra’ Riccardo.
Medico prestigioso, accetta i servizi più umili all’ospedale dei Fatebenefratelli, ma chiamato dall’obbedienza o dalle necessità, visita i malati e li cura con la sua scienza: stupisce tutti, confratelli, malati, quelli che lo vedono e, presto scoprono la sua vera identità. A volte, sostituisce anche il primario, ma subito dopo prende la scopa in mano, come se fosse l’ultimo della casa, canticchiando sottovoce, con la gioia di appartenere a Dio solo.
Il 28 ottobre 1928, si offre a Dio mediante i santi voti di povertà, castità e obbedienza e scrive: «Voglio servirti mio Dio, per l’avvenire, con perseveranza e amore sommo: nei miei superiori, nei confratelli, nei malati tuoi prediletti; dammi grazia di servirli come servissi Te».
Gli viene affidato il laboratorio dentistico di Via Moretto, annesso all’ospedale. Fra Riccardo è un semplice religioso, ma è anche un grande medico: così, appena si sa, molti, sempre più numerosi, attirati dalla sua bontà e dalla sua scienza, vengono a cercarlo e si rivolgono a lui con una fiducia che si diffonde, in Brescia, come un contagio. Le mamme gli portano i bambini perché li curi e li benedica: risponde promettendo la sua preghiera quotidiana per loro alla Madonna.
Nella sua semplicità, si sente quasi umiliato quando diversi medici vengono ad interpellarlo, perché “il dottorino sotto il saio di religioso è un santo e può molto”. Ha poco più di 30 anni e gode fama di santità.
Ma presto diventa assai fragile di salute: ai superiori che hanno molti riguardi verso di lui, risponde: «Io sto bene». Continua il suo lavoro, fino a quando gli restano le ultime briciole di forze. Qualcuno si domanda: «Perché Fra Riccardo va all’ambulatorio con la febbre addosso?». Risponde: «È il mio posto, là c’è Dio che mi aspetta».
Lo vedono sempre correre, con il sorriso sulle labbra e cantando sottovoce inni alla Madonna, a San Giovanni di Dio e agli Angeli, con le mani sotto lo scapolare, tenendo sempre la corona fra le dita. Spiega: «Questa è la mia arma prediletta, con la corona il demonio fugge». Intanto la pleurite e la febbre lo divorano. Per sollevarlo, i superiori, oltre alle cure, lo invitano ad un viaggio fra le case di Venezia, Gorizia e Postumia. Ma più che alla sua salute, serve a far dilagare tra i confratelli, che lo conoscono per sentito dire, la sua fama di santità.
I parenti lo vogliono avere vicino. Viene assegnato alla casa di Via San Vittore a Milano. Viene la sorella Rita ad assisterlo. Con la gioia in volto, le dice: «Se il Signore mi lascia, sto qui volentieri, se mi toglie, vado volentieri da Lui». Riceve tutti i sacramenti, lucido e ardente. Va incontro a Dio il 1° maggio 1930, all’inizio del mese della Madonna alla Quale aveva affidato fin da bambino gli studi, il lavoro, la vita e la morte. Ha solo 33 anni ma è giunto assai in alto.
Come il suo illustre collega di Napoli, il medico San Giuseppe Moscati (1880-1927), Papa Giovanni Paolo II lo ha iscritto tra i Santi: chi oggi lo prega con fede, lo sente ancora vicino; ancora e più che mai medico e fratello: guarigioni e conversioni inspiegabili umanamente sperimentano coloro che si rivolgono a lui, come un continuo prodigio di carità.


Autore: Paolo Riss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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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giunto il 2007-0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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