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4동성당

[부활 제6주일]사랑 (요한 15,9-17)

인쇄

김종업 [rlawhddjq] 쪽지 캡슐

2018-05-06 ㅣ No.101

 

 

[부활 제6주일]사랑 (요한 15,9-17)

 

베드로와 신자들은 다른 민족들에게도 성령의 선물이 쏟아져 내리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란다. (사도  10,25-26.34-35.44-48)
25 베드로가 들어서자 코르넬리우스는 그에게 마주 나와  그의 발 앞에 엎드려 절하였다. 26 그러자 베드로가 그를 일으키며, “일어나십시오. 나도 사람입니다.” 하고 말하였다.
34 베드로가 입을 열어 말하였다. “ 나는 이제 참으로 깨달았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시고,
35 어떤 민족에서건 당신을 경외하며 의로운 일을 하는 사람은 다 받아 주십니다.”
44 베드로가 이야기하고 있을 때, 말씀을 듣는 모든 이에게 성령께서 내리셨다.
45 베드로와 함께 왔던 할례 받은 신자들은  다른 민족들에게도 성령의 선물이 쏟아져 내리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46 이 다른 민족 사람들이 신령한 언어로 말하면서  하느님을 찬송하는 것을 들었기 때문이다. 그때에 베드로가 말하였다.
47 “우리처럼 성령을 받은 이 사람들에게 물로 세례를 주는 일을  누가 막을 수 있겠습니까?”
48 그러고 나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라고 그들에게 지시하였다. 그들은 베드로에게 며칠 더 머물러 달라고 청하였다.


 요한 사도는, 서로 사랑하자며, 사랑은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1요한 4,7-10)
7 사랑하는 여러분, 서로 사랑합시다. 사랑은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이는 모두 하느님에게서 태어났으며 하느님을 압니다.
8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을 알지 못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9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났습니다. 곧 하느님께서 당신의 외아드님을 세상에 보내시어  우리가 그분을 통하여 살게 해 주셨습니다.

10 그 사랑은 이렇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 우리를 사랑하시어  당신의 아드님을 우리 죄를 위한 속죄 제물로 보내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당신께서 그들을 사랑하신 것처럼 서로 사랑하라고 이르신다. (요한 15,9-17)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9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
10 내가 내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무르는 것처럼,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무를 것이다.
11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이유는,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고 또 너희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는 것이다.
12 이것이 나의 계명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13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14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을 실천하면 너희는 나의 친구가 된다.
15 나는 너희를 더 이상 종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종은 주인이 하는 일을 모르기 때문이다. 나는 너희를 친구라고 불렀다. 내가 내 아버지에게서 들은 것을 너희에게 모두 알려 주었기 때문이다.
16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
너희가 가서 열매를 맺어 너희의 그 열매가 언제나 남아 있게 하려는 것이다. 그리하여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청하는 것을  그분께서 너희에게 주시게 하려는 것이다. 17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은 이것이다. 서로 사랑하여라.”

 

 

 부활 제6주일 제1독서(사도10,25~26.34~35.44~48)

 

"베드로가 이러한 일들에 관하여 이야기하고 있을 때, 말씀을 듣는 모든 이에게  성령께서 내리셨다. 베드로와 함께 왔던 할례 받은 신자들은 다른 민족들에게도  성령의 선물이 쏟아져 내리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다른 민족 사람들이 신령한 언어로 말하면서 하느님을 찬송하는 것을 들었기 때문이다.  그때에 베드로가 말하였다. "우리처럼 성령을 받은 이 사람들에게 물로 세례를 주는 일을  누가 막을 수 있겠습니까?"  (44~47)

 

사도행전 10장 44절부터 48절까지는 이방인임에도 불구하고 일어난 성령 강림 사건과 이방인으로서 최초로 세례를 받은 사건의 보도로서 코르넬리우스 가정의 선교 과정에 있어서 절정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베드로가 이야기하고 있을 때'에서 원문 맨 앞에 '아직도'를 뜻하는 '에티'(eti) 라는 부사가 있는데, 이것은 행동의 '계속됨'을 나타낸다. 

'이야기하고 있을 때' 번역된 '랄룬토스'(laluntos)도 역시 '말하다', '선언하다'의미하는 '랄레오'(laleo)의 현재 분사로서 '에티'(eti)와 함께 베드로의 설교가 계속되고 있음을 나타낸다. 

즉 성령 강림은 베드로가 말씀 전하는 것을 마치기도 전에, 코리넬리우스와 그의 가족들에게 이루어진 것이다.


과거에 사마리아에서 먼저 믿고 세례만 받은 사마리아 사람들을 위해 베드로와 요한이 성령 받기를 위해 기도하여 성령을 받은 것(사도8,14~17)과는 대조적으로, 코리넬리우스 집에서는 베드로의 설교가 채 끝나지도 않아서 성령이 임했던 것이다. 

 

이렇게 두 경우는 성령의 역사(役事)가 정해진 방식대로 일어나는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베드로의 설교가 진행되고 있을 때에 성령이 내리신 것은 어떤 의미가 있는가? 

베드로는 이미 오순전날 성령 강림을 체험한 적이 있으며(사도2,1~13), 세례받고 믿은 다음에 성령받은 사마리아의 일도 기억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세례나 할례를 받지 않은 이방인들에게 성령을 주심은 앞의 두 경우과 비교해 볼 때, 믿음만으로도 이방인이 교회에 받아들여질 수 있음을 강력하게 보여 주시는 하느님의 증거이다.  

이 일은 예루살렘 공의회에서 이방인들도 예수님의 은총과 믿음으로 구원받을 뿐, 할례는 불필요하다는 교회의 공식적인 결정(사도15장)을 낳는 배경이 되었다.

 

한편, 본절이 '이야기하고 있을 때'에서 '이야기하다'(말하다)는 단지 말하는 동작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타 레마타 파우타'(ta remata tauta; these words),'이 복음의 메세지들'을 전하고 있을 때를 말한다. 

베드로가 코르넬리우스 집안에서 설교하는 것은 사적인 말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맡기신 사명으로 '복음'을 힘있게 증거하고 있음을 나타낸다. 그리고 '내리셨다'로 번역된 '에피핍또'(epipipto)는 부정(不定) 과거 3인칭 단수이다. 

여기에서 부정 과거가 사용된 사실은 성령 강림이 지속적이었다는 것이 아니라 '갑자기' 그리고 '예측하지 못한 가운데' 전적으로 하느님의 뜻에 따라 순식간에 이루어졌다는 것을 보여준다.

 

'다른 민족들에게도 성령의 선물이 쏟아져 내리는 것을 보고' (45) 

'헤 도레아 투 하기우 프뉴마토스'(he dorea tu hagyu pneumatos; the gift of the Holy Spirit)'거룩한 영(성령)의 선물'로 번역되었다. 

신약성경 저자들은 종종 성령의 부어주심이 하느님의 은혜로 주어지는 선물(요한4,10; 사도8,20)임을 나타내기 위해 이 '도레아'(dorea)를 사용한다. 

이처럼 하느님께서 성령이라는 은총의 선물을 할례없는 이방인들에게도 부어주심은 그들도 유대인들과 동일하게 하느님의 축복을 받을 수 있는 대상임을 확실하게 증거해 준다.

 

한편 '쏟아져 내리는 것'으로 번역된 '엑케퀴타이'(ekkechytai) '붓다', '흘리다', '쏟다'를 의미하는 '엑케오'(ekcheo)의 수동태 완료 3인칭 단수이다. 

'엑케오'(ekcheo)가 본절에서는 위로부터 선물이 '넘치도록' 주어졌다는 것을 표현한다.  특히 이 동사가 수동태로 쓰여진 것은 이 일을 행하시는 주체가 바로 하느님이심을 보여준다.  

성령이 쏟아져 내림은 하느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아낌없이 거저 주시는 선물인 것이다. 그리고 이 동사의 시제가 완료로 표현된 것은 베드로와 함께 온 할례 받은 신자들이 놀란 것보다 성령 강림이 먼저 이루어졌음을 보여 준다.

 

그렇다면, 그들은 성령께서 강림하실 때는 왜 느끼지 못하다가 왜 성령 강림 후에 인식하고 놀랐는가? 

이것은 성령에서 강림한 순간은 아무런 소리도, 표적도 없었기 떄문이며, 강림한 직후에 성령받은 사람들이 신령한 언어를 말하며<'랄룰톤 글롯사이스'(lalunton glossais); speaking with (in) tongues> 하느님을 찬송하는<"메갈뤼논톤 톤 데온'(megalynonton ton theon); praising(magnifying) God> 등 외적 표시가 나타났기 때문이다. 

이것은 과거 오순절날 성령 강림이 모든 사람들이 알 수 있게 이루어진 것과는 대조되는 일이다(사도2,1~3).

 성령께서 임하는 양식도 여러 가지이며, 많은 경우 이와같이 성령은 받은 당사자가 아닌 제3자의 경우에는, 받은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표적을 보고 들은 이후에야 알 수 있음을 암시한다. 

신령한 언어(방언)는 코르넬리우스 집안 사람들이 성령을 받았음을 보여 주는 하나의 구체적인 표징이었다.

 

 

베드로 역시 이 성령의 부어 주심과 그것에 따른 신령한 언어를 말함을 보고, 그것은 이방인인 코르넬리우스의 사람들이 하느님의 계약(언약)에 포함되었음을 보여 주는 명백한 증거로 인식하고 그들에게 세례를 주었다(47절). 

한편, 신령한 언어를 '말하면서' '찬송하는 것'에 해당하는 원어가  모두 현재 분사형으로 사용되었다.  이것은 성령받은 사람들이 신령한 언어(방언)를 말하고 하느님을 찬송하는 (높이는) 행위가 얼마 동안 지속되었다는 것을 보여 준다. 

한동안 지속되는 이러한 행동을 보고, 베드로와 그 일행은 이방인 코르넬리우스의 집에 하느님의 은총이 확실히 내리고 있음을 분명히 알게 되었다. 

이처럼 구원의 증표인 성령이 이제껏 하느님의 구원의 은총 밖에 있다고 여겨졌던 이방인들에게 확실히 부어지고 있음을 본 베드로 일행은 그들에게 세례주는 것을 주저할 하등의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부활 제6주일 복음(요한15,9~17)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13)

 

요한 복음 15장 13절인간의 사랑 가운데 최고의 사랑이 어떤 것인지를 가르쳐 주시는 말씀이다.

그것은 자신의 친구를 위해서라면, 자신의 목숨까지도 기꺼이 내놓는 희생의 실천이 뒤따르는 사랑이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자신의 친구들은 어떤 사람들을 말하는가?

'친구들을'로 번역된 '톤 필론'(ton philon; his friends)사랑하는 자들을 가리킨다. '필론'(philon) '필로스'(philos)의 복수 소유격인데, '필로스'(philos)형용사로 쓰일 때에는 '사랑받는', '사랑하는'이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친구들'이란 '사랑으로 맺어진 관계'임을 말한다.

 

요한 복음 15장 13절을 통해 이러한 사랑 가운데서도 최고의 사랑은 바로 자신의 목숨까지 내놓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사람의 목숨은 온 우주를 주고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것이지만(마태16,26),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목숨을 친구를 위해 내어준다면, 예수님 말씀처럼 이것은 친구에 대한 사랑이 최고의 사랑임을 분명하게 입증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다음날 당신 자신이 지실 십자가의 사랑이 최고의 사랑임을 가르쳐 주시기 위해서, 동시에 앞으로 제자들도 이러한 당신의 삶을 본받아 희생적인 사랑을 실천하라고 이렇게 말씀하신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당신 목숨까지 내놓으실 정도로 열절히 사랑하시는 이들은 누구일까?


일차적으로는 제자들을 생각할 수 있겠고, 당신 친히 감당하실 대속적인 죽음과 관련이 있기에 '많은 이들'이 포함된다(마르10,45).

여기서 '톤 필론'(ton philon; his friends) 속에는 예수님을 믿어 의롭게 된 모든 믿는 이들앞으로 같은 은총에 참여하게 될 모든 이들이 포함된다.  

사도 바오로는 이들을 '불경한 자들'이라고 증거했다(로마5,6). 이것은 예수님께서 믿는 이들이 아직 죄인이었을 때에, 믿는 이들을 위해 당신 목숨을 내놓으심으로써 이미 믿는 이들을 친구로 생각하셨음을 보여 준다.


그리고 여기서 중요한 것은 믿는 이들이 힘써 실천해야 할 사랑이 친구를 위해 목숨을 내놓을 수 있는 최고의 사랑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의로운 이나 착안 사람을 위해서 간혹 용감하게 죽는 이들이 있을지 모르지만(로마5,7), 예수님께서는 믿는 이들이 아직 죄인이었을 때에 믿는 이들을 위해 돌아가심으로써 사랑의 진수를 보여 주셨고(로마5,8), 이것이 바로 믿는 이들인 우리가 추구해야 할 사랑의 기준인 것이다.

실제 역사 속에서도, 예수님의 12사도 가운데 사도 요한을 제외한 열 명의 사도가 예수님께 대한 사랑과 형제들에 대한 사랑을 실천하여 모두 복음을 위해 순교하였고, 그리스도교 역사 가운데 수많은 순교자들과 복음의 증거자들이 예수님과 인류를 자신의 목숨보다 더 사랑하여 예수님의 이 말씀을 실천했던 것이다.

 

 

2015년 5월 10일 부활 제6주일

 

<친구>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을 실천하면 너희는 나의 친구가 된다. 나는 너희를

더 이상 종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종은 주인이 하는 일을 모르기 때문이다.

나는 너희를 친구라고 불렀다. 내가 내 아버지에게서 들은 것을 너희에게 모두

알려 주었기 때문이다(요한 15,14-15).”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명령’이라는 말은,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5,12).” 라는 계명을 가리킵니다.

‘친구’ 라는 말은, 예수님의 사랑 안에 머무르는 상태(요한 15,10), 또 예수님께서

주시는 기쁨으로 충만하게 되는 상태(요한 15,11)를 나타내는 말입니다.

이 상태는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어 누리는 상태입니다.

따라서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을 실천하면 너희는 나의 친구가 된다.” 라는

말씀은, “너희가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어 누리기를 바란다면,

서로 사랑을 실천하여라.” 라는 뜻이 됩니다.


“나는 너희를 더 이상 종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라는 말씀은,

“그동안 너희를 종이라고 불렀지만 이제부터는 종이라고 부르지 않겠다.” 라는

뜻이 아니라, “너희는 더 이상 종으로 살지 마라.” 라는 뜻입니다.

(‘종으로서’가 아니라 ‘친구로서’ 신앙생활을 하라는 호소입니다.)

신앙생활은 종이(노예가) 주인을 섬기는 생활이 아니라,

친구들이 서로 사랑과 우정을 나누는 것과 같은 생활입니다.

“종은 주인이 하는 일을 모르기 때문이다.” 라는 말씀은,

제자들이 종이 아닌 이유를 설명해 주신 말씀입니다.

종은(노예는) 주인이 시키는 일을 수동적으로 실행할 뿐입니다.

그 일을 왜 시키는지, 누구를 위해서, 무엇을 위해서 시키는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고, 일을 제대로 하지 않았을 때 받을 벌에 대해서만 관심이 있습니다.

그래서 사랑 없이, 또 기쁨도 없이, 그저 벌을 안 받으면 된다는 생각으로,

소극적으로 일하게 됩니다.

이것은 하느님의 뜻과 사랑에 대해서도 관심이 없고,

자기가 얻게 될 구원과 영원한 생명에 대해서도 관심이 없고,

그저 지옥에만 안 가면 된다는 마음으로 소극적인 신앙생활을 하는 모습입니다.

(그런 경우에는 하느님을 사랑하지는 않고 무서워하기만 합니다.)


“나는 너희를 친구라고 불렀다.” 라는 말씀은,

“너희는 처음부터 나의 친구였다.” 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이 선택하신 사람들에게 “나를 따라라.” 라고 말씀하신 일은,

그들을 종으로 삼으려고 부르신 일이 아니라, 당신의 ‘친구’가 되라고,

즉 당신의 사랑과 기쁨을 함께 나누자고 부르신 일입니다.

“내가 내 아버지에게서 들은 것”이라는 말씀은, 구원에 관한 하느님의 뜻과 계획,

또 사람들을 구원하시려는 하느님의 사랑,

하느님의 구원 사업에 관한 진리 등을 가리키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너희를 친구라고 불렀다. ......모두 알려 주었기 때문이다.” 라는 말씀은,

뜻을 생각하면, “너희는 나의 친구이기 때문에, ......모두 알려 주었다.”로

생각하는 것이 옳습니다.

종은 의무감만으로 소극적으로 일하지만, 친구는 사랑하기 때문에 일합니다.

신앙인이 예수님의 계명들을 실천하는 것은, 벌을 받지 않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랑하는 친구이신 예수님께 기쁨을 드리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기쁨은 곧 신앙인 자신의 기쁨입니다.

사랑하니까 실천하고, 기쁜 일이니까 실천한다는 것입니다.

(무서워서 억지로 실천하는 것과는 완전히 다릅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들에 대해서, 요한복음 13장이나 루카복음 17장에 나오는

말씀들을 예로 들면서, 반박할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요한복음 13장을 보면 제자들을 ‘종’으로 표현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너희가 나를 ‘스승님’, 또 ‘주님’ 하고 부르는데, 그렇게 하는 것이 옳다.

나는 사실 그러하다(요한 13,13).”

“종은 주인보다 높지 않고, 파견된 이는 파견한 이보다 높지 않다(요한 13,16).”

또 루카복음 17장에도 제자들을 ‘종’으로 표현하신 말씀이 나옵니다.

“종이 분부를 받은 대로 하였다고 해서 주인이 그에게 고마워하겠느냐?

이와 같이 너희도 분부를 받은 대로 다 하고 나서,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 하고 말하여라(루카 17,9-10).”

제자들을 ‘종’으로 표현한 이 말씀들과

“너희를 친구라고 불렀다.” 라는 말씀은 모순되지 않는가?

겉으로만 보면 모순되는 말씀으로 보이지만,

요한복음 13장의 말씀은, ‘섬김’을 강조하기 위해서 사용하신 표현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그 말씀을 하시기 전에

당신이 먼저 종의 모습이 되어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셨습니다.

루카복음 17장의 말씀은, ‘겸손’을 강조하기 위해서 사용하신 표현일 뿐이고,

제자들이 ‘종’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성모 마리아께서 바로 그런 표현을 사용하셨습니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1,38).”

이 말씀은, 실제로 주님의 ‘종’이라는 뜻으로 하신 말씀이 아니라,

“종이 주인을 섬기는 것처럼 그렇게 주님의 뜻을 따르겠습니다.” 라고

겸손하게 자신을 낮추신 응답입니다.

‘예수님 잉태 예고’는 무조건 복종하라는 명령이 아니라,

‘자유인’이신 마리아를 구원 사업으로 부르신 초대 말씀이었고,

마리아께서는 당신의 자유 의지로 순종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온갖 억압에서 해방시켜 주려고 오신 분입니다(루카 4,18).

구약시대 때에 하느님과 하느님의 계명들을 무서워하면서,

두려움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 계명들을 억지로 실천했던 일들도

인간들을 숨 막히게 했던 ‘억압들’ 가운데 하나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계명들은 주인이 종을 짓누르는 억압이 아니라,

친구에게 선물로 주신 해방이고, 사랑이고, 기쁨이고, 평화이고, 안식입니다.

그렇지만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그 선물을 잘 받으려면

우리 쪽에서도 다른 사람들에게 사랑과 우정을 실천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을 돈이나 권력이나 어떤 힘으로 억압하는 짓을 하지 말아야 하고,

예수님께서 우리를 친구로 대해 주신 것처럼 그렇게

우리도 모든 사람을 ‘사랑하는 친구’로, 또 ‘사랑하는 형제’로 대해야 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주인에게서 도망친 노예 ‘오네시모스’를 데리고 있다가

주인인 ‘필레몬’에게 돌려보내면서 이렇게 호소했습니다.

“이제 그대는 그를 더 이상 종이 아니라 종 이상으로, 곧 사랑하는 형제로

돌려받게 되었습니다. 그가 나에게 특별히 사랑받는 형제라면, 그대에게는

인간적으로 보나 주님 안에서 보나 더욱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그대가 나를

동지로 여긴다면, 나를 맞아들이듯이 그를 맞아들여 주십시오(필레 16-17).”

 

송영진 모세 신부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Fr.조명연 마태오] 2012년 5월 13일 부활 제6주일

 

오늘 예수님께서는 사랑의 실천을 강조하십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사랑의 실천이야말로 신앙인들의 가장 큰 사명이라 하겠습니다. 물론 나와 가까운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문제는 나에게 상처를 준 사람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를 어떻게 용서할 수 있습니까?
용서한다는 것은 너무나도 어려운 일입니다. 용서하려 해도 그가 한 일이 떠올라 다시 분노가 치밀어 오르기도 합니다. 용서하고 싶지 않습니다. 상대방이 먼저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하고 행실을 고치고, 더불어 그가 벌을 받기를 바랍니다. 자신의 한을 풀어 버릴 마음이 없습니다.
또한, 용서하고 싶어도, 기회를 놓치고 그저 상처를 마음에 품고 사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느님의 사랑 안에 머무르려면 나의 상처를 치유해야만 합니다.
상대방을 용서하지 못하는 것은 상대방으로부터 받은 상처가 아직도 나에게 깊게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상대방을 용서하지 못하면 그 상처는 더욱 깊어질 것이 아닙니까?
내가 상대방을 용서하는 것은 나 자신을 위해서입니다. 상처를 치유하고 내 안에 기쁨과 평화가 충만하기 위함이지요. 이런 우리에게 예수님께서 용기를 북돋아 주십니다.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무를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이유는,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고 또 너희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는 것이다.”

 (김준철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12 0

추천 반대(0)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