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4동성당

[연중 제7주일]자비로운 사람 (루카 6,27-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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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업 [rlawhddjq] 쪽지 캡슐

2019-02-24 ㅣ No.149

 

 

[연중 제7주일]자비로운 사람 (루카 6,27-38)


다윗은 사울에게, 주님께서 사울을 자기 손에 넘겨 주셨지만, 주님의 기름부음받은이에게 손을 대지 않았다고 한다. (1사무 26,2.7-9.12-13.22-23)
그 무렵 2 사울은 이스라엘에서 뽑은 부하 삼천 명을 거느리고  지프 광야에 있는 다윗을 찾아 그곳으로 내려갔다.
7 다윗은 아비사이를 데리고 밤을 타서 군대가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그때 사울은 진지 안에서 머리맡 땅바닥에 창을 꽂아 놓고 잠들어 있었다. 아브네르와 그의 군사들도 사울을 둘러싸고 잠들어 있었다.
8 아비사이가 다윗에게 말하였다. “하느님께서 오늘 원수를 장군님 손에 넘기셨으니, 이 창으로 그를 단번에 땅에 박아 놓겠습니다. 두 번 찌를 것도 없습니다.”
9 그러나 다윗이 아비사이를 타일렀다. “그분을 해쳐서는 안 된다. 누가 감히 주님의 기름부음받은이에게 손을 대고도 벌받지 않을 수 있겠느냐?”
12 다윗은 사울의 머리맡에서 창과 물병을 가지고 나왔다. 주님께서 그들 위에 깊은 잠을 쏟으시어 그들이 모두 잠들었기 때문에, 다윗을 본 사람도 알아채거나 잠을 깬 사람도 없었다.
13 다윗은 맞은쪽으로 건너가 상대와 거리를 멀리 두고  산꼭대기에 서서,

22 응답하였다. “여기 임금님의 창이 있습니다. 젊은이 하나가 건너와 가져가게 하십시오.
23 주님은 누구에게나 그 의로움과 진실을 되갚아 주시는 분이십니다. 오늘 주님께서 임금님을 제 손에 넘겨주셨지만, 저는 주님의 기름부음받은이에게 손을 대려 하지 않았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우리가 흙으로 된 첫 인간의 모습을 지녔듯이, 하늘에 속한 그분의 모습도 지니게 될 것이라고 한다. (1코린 15,45-49)
형제 여러분, 45 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첫 인간 아담이 생명체가 되었다.” 마지막 아담은 생명을 주는 영이 되셨습니다.
46 그러나 먼저 있었던 것은 영적인 것이 아니라 물질적인 것이었습니다. 영적인 것은 그다음입니다.
47 첫 인간은 땅에서 나와 흙으로 된 사람입니다. 둘째 인간은 하늘에서 왔습니다.
48 흙으로 된 그 사람이 그러하면 흙으로 된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늘에 속한 그분께서 그러하시면 하늘에 속한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49 우리가 흙으로 된 그 사람의 모습을 지녔듯이, 하늘에 속한 그분의 모습도 지니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우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라고 하신다. (루카 6,27-38)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27 “내 말을 듣고 있는 너희에게 내가 말한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너희를 미워하는 자들에게 잘해 주고,

28 너희를 저주하는 자들에게 축복하며, 너희를 학대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29 네 뺨을 때리는 자에게 다른 뺨을 내밀고, 네 겉옷을 가져가는 자는 속옷도 가져가게 내버려 두어라.
30 달라고 하면 누구에게나 주고, 네 것을 가져가는 이에게서 되찾으려고 하지 마라.
31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32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인정을 받겠느냐? 죄인들도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은 사랑한다.
33 너희가 자기에게 잘해 주는 이들에게만 잘해 준다면 무슨 인정을 받겠느냐? 죄인들도 그것은 한다.
34 너희가 도로 받을 가망이 있는 이들에게만 꾸어 준다면 무슨 인정을 받겠느냐? 죄인들도 고스란히 되받을 요량으로 서로 꾸어 준다.
35 그러나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에게 잘해 주고 아무것도 바라지 말고 꾸어 주어라. 그러면 너희가 받을 상이 클 것이다. 그리고 너희는 지극히 높으신 분의 자녀가 될 것이다. 그분께서는 은혜를 모르는 자들과 악한 자들에게도 인자하시기 때문이다.
36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37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심판받지 않을 것이다. 남을 단죄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단죄받지 않을 것이다. 용서하여라. 그러면 너희도 용서받을 것이다.
38 주어라. 그러면 너희도 받을 것이다. 누르고 흔들어서 넘치도록 후하게 되어 너희 품에 담아 주실 것이다. 너희가 되질하는 바로 그 되로 너희도 되받을 것이다.”


 

 연중 제7주일 복음(루카6,27~38)

 

"네 뺨을 때리는 자에게 다른 뺨을 내밀고,  네 겉옷을 가져가는 자는 속옷도 가져가게 내버려 두어라." (29)

 

루카복음 6장 27절과 28절에는 2인칭 복수 인칭 대명사 '휘민'(hymin)을 사용하여 예수님의 명령의 대상'너희'라고 하는 데 반해, 루카복음 6장 29절부터 31절까지는 2인칭 단수 인칭 대명사 '세'(se) '네'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이렇게 2인칭 복수에서 단수로 전환한 것은 이 말을 듣는 사람들로 하여금 자기 개인을 보다 깊게 성찰하도록 하기 위한 의도이다.

 

그리고 '뺨'에 해당하는 '시아고나'(siagona; cheek)는 정확히 사람 얼굴의 볼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턱' 또는 '턱뼈'를 가리키는 것으로서, 병행 구절인 마태오 복음 5장 39절에서는 '오른뺨'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고대 근동에서 손으로 뺨을 때리는 것은 매우 모욕적인 일이었다.

 

특히 히브리인들은 오른손을 주로 사용하기 때문에 오른뺨을 때렸다는 것은 정면에서 손등으로 쳤을 경우뒤에서 손바닥으로 쳤을 경우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유다 풍습으로 볼 때 손등으로 때리는 것은 손바닥으로 때리는 것보다 두 배나 모욕을 주는 것이다.또한 등 뒤에서 때렸다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불의의 공격을 받은 것이 된다.

 

그러나 본문은 이때에 오히려 '다른 뺨'도 돌려대라고 말한다. 

이것은 실제로 왼편 뺨까지 때리도록 하라는 의미가 아니라 그 어떤 경우에라도 직접적으로 복수하지 말고 고통과 모욕을 견디라는 교훈이다.

 

원수들의 경멸적인 폭행을 당하더라도, 같이 대적하여 맞서기보다는 사랑의 원리로 무저항, 무보복의 행동을 보이라는 명령이다.

이것은 어떤 문제에 직접 대응하여 복수가 악순환되는 것을 막고, 오히려 상대방에게 관용과 무저항으로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라는 말이다.

 

'네 겉옷을 가져가는 자는 속옷도 가져가게 내버려두라'

 

병행 구절인 마태오 복음 5장 40절루카 복음 6장 29절의 후반절과는 달리 '너를 재판에 걸어 네 속옷을 가지려는 자에게는 겉옷까지 내주어라'로 되어 있다.

 

이렇게 마태오 복음사가속옷을 먼저 언급하고 있는데, 이것은 이웃의 겉옷을 담보로 잡을 수 없다는 율법의 규정을 잘 알고 있는 유다인을 대상으로 복음을 기록했기 때문이다(탈출22,25~26).

 

속옷은 겉옷보다 가격이 싸고, 보잘것 없는 가치를 지닌 것이다. 

반면에 겉옷은 가격도 비싸고, 일교차가 심한 팔레스티나에서 밤에 덮고 자야 하는 필수품이므로, 전당잡힐 수조차 없는 품목이었다(탈출22,26; 신명24,13).

 

그럼에도 불구하고, 속옷을 달라고 하는 이에게 더 비싸고, 없으면 당장 추위에 떨어야 하는 겉옷까지 아무 저항도 하지 않고 양도하라는 것은 무조건적인 자기 희생을 요구하는 것이다.

 

재산상의 분쟁이나 강도를 당한 상황에서 속옷조차 취하려는 상대에 대하여 저항하지 말고, 오히려 사랑을 베풀라는 뜻이다. 

반면에 루카복음중요한 것을 달라는 이에게 사소한 것까지도 모두 주라는 뜻으로 겉옷을 먼저 언급했지만, 내용은 동일하다.



<연중 제7주일>(2019. 2. 24.)(루카 6,27-38)

<원수를 사랑하여라.>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권고합니다.

“거짓을 벗어 버리고 ‘저마다 이웃에게 진실을 말하십시오.’ 우리는 서로 지체입니다. ‘화가 나더라도 죄는 짓지 마십시오.’ 해가 질 때까지 노여움을 품고 있지 마십시오. 악마에게 틈을 주지 마십시오(에페 4,25-27).”

“여러분의 입에서는 어떠한 나쁜 말도 나와서는 안 됩니다. 필요할 때에 다른 이의 성장에 좋은 말을 하여, 그 말이 듣는 이들에게 은총을 가져다줄 수 있도록 하십시오.

하느님의 성령을 슬프게 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속량의 날을 위하여 성령의 인장을 받았습니다. 모든 원한과 격분과 분노와 폭언과 중상을 온갖 악의와 함께 내버리십시오.

서로 너그럽고 자비롭게 대하고, 하느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을 용서하신 것처럼

여러분도 서로 용서하십시오(에페 4,29-32).”

 

바오로 사도의 이 말을,

“원수를 사랑하여라.” 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에 대한 해설로 삼을 수 있습니다.

살다보면 화가 나는 일이 생길 수 있습니다. 화가 나더라도 죄가 되는 일을 하면 안 됩니다. 악마는 바로 그런 기회를 노립니다.

(천사는 “화를 풀어라. 참아라. 용서해라.” 라고 충고하는데, 악마는 “네가 잘못한 것이 없으니 화를 내는 것은 정당한 일이다. 참지 말고 받은 대로 되갚아 주어라.” 라고 유혹합니다.) 

 

“내 말을 듣고 있는 너희에게 내가 말한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너희를 미워하는 자들에게 잘해 주고, 너희를 저주하는 자들에게 축복하며, 너희를 학대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네 뺨을 때리는 자에게 다른 뺨을 내밀고, 네 겉옷을 가져가는 자는 속옷도 가져가게 내버려 두어라. 달라고 하면 누구에게나 주고, 네 것을 가져가는 이에게서 되찾으려고 하지 마라.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루카 6,27-31).” 

이 말씀은, 정의의 실현을 외면하라는 가르침도 아니고, 불의가 판치도록 내버려 두라는 가르침도 아닙니다.

우리는 정의의 실현을 위해서 노력해야 하고, 또 악과 불의를 막기 위해서도 노력해야 합니다.(불의와 폭력을 방관하거나 방치하는 것도 죄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평화의 실현을 위해서도 노력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악에 악으로 맞서면 안 되고, 선으로 악을 물리쳐야 합니다.

(정의의 실현을 위한다는 명목을 내세우더라도, 악한 방법으로 악에 맞서는 것은 죄를 짓는 일입니다. 죄를 통해서는 평화를 얻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 말씀의 뜻은, “선과 사랑으로 악을 이겨라.”입니다. 똑같은 방식으로 앙갚음하면 전쟁이 일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악에 악으로 맞서는 것은 악마가 바라는 대로 하는 것이고, 따라서 그것은 악에 굴복하는 것입니다.

악에 선으로 맞서야만 악을 이길 수 있습니다. 시간이 많이 걸리기도 하고, 그래서 인내심이 많이 필요하기도 합니다. 어떻든 궁극적인 승리는 ‘선 자체이신’ 하느님 쪽에 있음을 믿어야 하고, ‘선’을 행하기를 포기하면 안 됩니다.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인정을 받겠느냐? 죄인들도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은 사랑한다. 너희가 자기에게 잘해 주는 이들에게만 잘해 준다면 무슨 인정을 받겠느냐?

죄인들도 그것은 한다. 너희가 도로 받을 가망이 있는 이들에게만 꾸어 준다면 무슨 인정을 받겠느냐? 죄인들도 고스란히 되받을 요량으로 서로 꾸어 준다. 그러나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에게 잘해 주고 아무것도 바라지 말고 꾸어 주어라. 그러면 너희가 받을 상이 클 것이다. 그리고 너희는 지극히 높으신 분의 자녀가 될 것이다. 그분께서는 은혜를 모르는 자들과 악한 자들에게도 인자하시기 때문이다.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루카 6,32-36).”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하는 것은 ‘죄인들이나 하는 짓’, 즉 죄입니다. 사랑에는 울타리가 없어야 합니다. 개인 사이에서도 그렇고, 국가 사이에서도 그렇습니다.

(죽어가는 난민들의 입국을 거부하고 그냥 죽게 내버려 두는 것은 하느님 앞에서 큰 죄를 짓는 일입니다.)

자비는 대가를 바라지 않고 그냥 베풀어 주는 일입니다. 인간의 눈으로 보면 손해를 보는 일로 보이지만, 결코 손해가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모두 갚아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베푸는 입장’에서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받는 입장’에서도 생각해야 합니다. 내가 굶주리고 있을 때 원수 사이였던 사람이 나에게 먹을 것을 준다면? 또는 내가 강도당해서 죽어가고 있을 때, 원수로만 여기고 있었던 사마리아인이 다가와서 도와준다면?)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심판받지 않을 것이다. 남을 단죄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단죄 받지 않을 것이다. 용서하여라. 그러면 너희도 용서받을 것이다. 주어라. 그러면 너희도 받을 것이다. 누르고 흔들어서 넘치도록 후하게 되어 너희 품에 담아 주실 것이다. 너희가 되질하는 바로 그 되로 너희도 되받을 것이다(루카 6,37-38).”

정말로 억울하고 분한 일을 겪었다고 해도 천벌이 내리라고 빌면 안 됩니다.

그런 일을 당한 경우에 하느님께 도와달라고 하소연하는 것은 당연히 할 수 있는 일이지만, “그 악인에게 천벌을 내려 주십시오.” 라고 기도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그렇게 기도한다면 예수님께서 엄하게 꾸짖으실 것입니다(루카 9,55).

(그 악인의 회개를 위해서 기도하는 것이 옳은 일인데, 그 전에, “그가 정말로 악인인가? 내 마음대로 그를 악인이라고 판단하는 것은 아닌가?”를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사실 ‘용서’는 굉장히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니까 기도해야 합니다. 용서할 수 있는 힘을 달라고...

(죄를 지은 입장에서 생각해도, 용서받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얼마나 회개하고, 얼마나 보속해야 용서를 받을 수 있는지...우리는, 나는 얼마나 회개하고 보속하고 있는가?)

송영진 모세 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사랑을 어떻게, 그리고 얼마나 실천해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십니다.

예수님께서 여러 가지 말씀을 하시지만 두 가지로 요약한다면, “네 이웃을 네 몸 같이 사랑하여라.”와 “네 원수를 사랑하여라.”입니다.
이웃을 제 몸처럼 사랑하라는 것도 정말 이해하기 어렵지만, 원수까지 사랑하고 원수가 원하는 것을 다 들어주어야 한다는 말씀은 참으로 이상하고, 충격적이고, 역설적입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보통 이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말씀보다는 오히려 악에 맞서서 악과 싸우고, 악을 응징함으로써 정의를 세워야 한다는 논리가 훨씬 마음에 와 닿고 실천하기도 더 쉬울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웃 사랑과 함께 원수 사랑에 대한 예수님의 이 가르침은 역사 안에서 언제나 옳다는 것이 증명되었습니다.

이 가르침이 있었기에 사회 안에서도 인권이 존중되고, 인간의 존엄성이 지켜져 왔음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정의를 내세운 폭력과 권력은 오히려 인권과 인간 존엄성을 파괴하는 부작용을 낳을 뿐입니다.

예수님께서 실현하신 하느님 나라는 결국 악에 대한 선의 승리를 뜻합니다.


물론 원수를 사랑한다는 것, 곧 원수를 용서하고, 원수가 원하는 대로 해 주고, 원수를 위하여 기도하는 그 모든 것이 어찌 쉬울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하시며, 또 “주어라. 그러면 너희도 받을 것이다. 누르고 흔들어서 넘치도록 후하게 되어 너희 품에 담아 주실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남에게 베푼 대로 우리에게 갚아 주실 것이며, 우리가 준 것보다 더 후하게 베풀어 주실 것입니다.

사랑을 받기보다는 주려고 애쓰는 신앙인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이성근 사바 신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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