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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정은 [iuno78] 쪽지 캡슐

2000-12-01 ㅣ No.150

                               

한 청년이 겨울 밤거리를 힘없이 걷고 있었다.

 

앞에서 찬바람이 한 줄기 불어오자 청년은 기다렸다는 듯

 

바로 옆의 공중전화 부스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공중전화 수화기는 몸체 밑으로 길게 늘어져 있었는데,

 

거스름돈은 나오지 않지만 한 통화를 할 수 있는 상태였다.

 

청년의 충혈된 시선에 다음과 같이 씌어 있는 광고 문구가 들어 왔다.

 

’전화국 24시간 희망의 상담 서비스. 999번! 무료!’

 

청년이 곱은 손을 오랫동안 비비고 999번을 누르자

 

싸늘한 자동 응답용 음성이 흘러나왔다.

 

"안녕하십니까? 전화국에서 무료로 지원하는

 

희망의 상담 서비스 프로그램입니다. 종교 문제 상담은 1번,

 

경제 문제 상담은 2번, 교육 문제 상담은.... 그리고

 

종합 상담은 9번입니다. 지금 누르세요. 대단히 감사합니다."

 

청년이 9번을 누르자 실제 음성인 듯한

 

여자 상담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안녕하십니까? 연결되었습니다. 여보세요?"

 

"..... "

 

"여보세요? 연결되었습니다. 여보세요?"

 

"저……."

 

"네,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저는 모든 것을 잃었습니다. 직장도 잃고, 가족도 잃고,

 

친구도... 머지않아 목숨도 잃게 되겠지요.

 

저에게는 내일이 없습니다. 암담한 오늘만 있을 뿐이에요."

 

"....."

 

"끊어야겠네요. 다른 분들을 위해……."

 

"여보세요? 끊지 마세요. 지금 듣고 계시죠?

 

내일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아세요?

 

제가 책을 한 권 권하겠습니다."

 

"저는 지금 책 한 권을 살 돈도 없는 상황입니다."

 

"그렇다면 제가 대신 읽어드리겠습니다. 잠깐만 기다리세요.

 

가방에 있거든요."

 

청년은 수화기를 공중전화 몸체 위에 살며시 내려놓고

 

밖으로 나갔다. 몇 걸음 걷던 청년은

 

울퉁불퉁한 보도블록에 걸려 넘어질 뻔했다.

 

자세를 바로잡고 다시 몇걸음 걷던 청년은

 

공중전화 부스에 무엇인가를 놓고 나온 것처럼

 

공중전화 부스 안으로 다시 뛰어 들어갔다.

 

다급한 듯한 여인의 음성이 계속 흘러나오고 있었다.

 

"여보세요? 듣고 계시죠? 아직 끊지 않았잖아요.

 

여보세요? 뭐라고 말좀 하세요.

 

여보세요? 지금 듣고 계시잖아요. 절대로 끊지 마세요.

 

가만히 듣고만 계셔도..."

 

청년은 수화기를 아예 제자리에 걸쳐놓았다.

 

더 이상 여인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밖으로 나간 청년은 옷깃을 세우며 도로변을 따라

 

다시 발걸음을 옮겨놓았다.

 

가로수들은 옷을 다 벗어버린 허수아비처럼

 

앙상한 모습으로 서 있었다. 나뭇잎들은 모두 떨어졌고,

 

나뭇가지들은 볼품없이 잘려나간 상태였다. 그런 가로수들이

 

꼭 자신처럼 여겨졌는지 청년은 어느새 눈물을 떨구고 있었다.

 

하늘에서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청년은 계속 손을 비비면서 도로변을 따라 걸었다.

 

시내버스는 이미 끊어졌고 지나 다니는 사람들도

 

눈에 띄지 않았다. 청년은 부들부들 떨며 손을 비비기만 했다.

 

눈발이 굵어지자 청년은 어느 공중전화 부스로 다시 들어갔다.

 

바닥에 동전이 하나 떨어져 있었다.

 

청년은 무의식적으로 동전을 주위 공중전화에 넣었다.

 

손이 너무 곱았는지 계속 손을 비비던 청년은

 

999번과 9번을 조심스럽게 눌렀다.

 

귀에 익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안녕하세요? 연결되었습니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

 

"연결되었습니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저...."

 

"네, 말씀하세요. 혹시, 혹시 그분 아니세요?

 

맞군요. 전화 주셔서 감사합니다.

 

책을 읽어드리겠어요.

 

그냥 듣고만 계셔도 됩니다. 지금 책을 펴고 있어요.

 

잠깐만..."

  

"...."

 

"<내일이 아름다운 이유>라는 우화소설입니다.

 

모두 아홉 장으로 되어 있어요. 인간이 되고 싶은

 

뇌성마비 원숭이 시몽과 하늘을 날고 싶은 눈먼 타조 비비가 펼

 

치는 이야기예요."

 

"...."

 

"그럼 먼저 첫 번째 장부터 읽어드릴께요.

 

햇살이 따뜻한 어느 오후였다. 원숭이 시몽은

 

숲속 빈터에 화구들을 펼쳐놓고..."

 

청년은 펑펑 내리는 함박눈을 바라보았다.

 

거리에는 눈이 조금씩 쌓이고 있었다.

 

주의를 기울이지 못한 청년은 녹음테이프를

 

들려주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순간적으로

 

확인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결코 짓궂은 장난은 아니었다.

 

"다른 생각을 하느라고 듣지 못했어요.

 

처음부터 다시 읽어주면 좋겠습니다."

 

"아, 네. 알겠습니다. 첫 번째 장이에요.

 

햇살이 따뜻한 어느 오후였다. 원숭이시몽은 숲속 빈터에...."

 

그때부터 청년은 귀를 통해 <내일이 아름다운 이유>라는

 

우화소설을 읽었다. 여인의 음성은 따뜻한 메시지로 다가와

 

청년의 온몸을 녹여주고 있었다. 자정이 넘어서고 있었지만

 

책을 읽어주는 목소리는 끊어지지 않았다.

 

첫 번째 장이 끝나자 청년은 여인을 위해 잠시 쉬자고 했다.

 

청년이 여인을 위해 베풀 수 있는 최대한의 배려였다.

 

그후로도 여인은 희망을 잃은 한 청년을 위해 따뜻한

 

난로의 온기를 계속 전화선으로 보내주었다.

 

시간이 하염없이 흐르고 또 흐르며 함박눈은

 

거리를 하얗게 덮고 있었다.

 

마침내 여덞 번째 장이 끝나자 청년이 말했다.

 

"마지막 장은 조금 있다가 듣고 싶어요. 괜찮을까요?"

 

"아, 그러세요. 그렇다면 반드시 전화 하셔야 돼요. 약속하세요."

 

"네. 기다리세요."

 

청년은 수화기를 제자리에 걸쳐놓았다.

 

동전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자 청년은 다 녹은 듯한

 

손으로 동전을 꺼내 밖으로 나갔다.

 

세상은 함박눈을 덮고 있었다.

 

발이 푹푹 빠지는 거리를 따라 청년은 한 걸음씩

 

힘들게 걸어나갔다.

 

한참 후, 청년은 전화국 건물 앞에서 멈추었다.

 

건물 옆쪽으로 가자 수위실이 나타났다.

 

제복을 입은 한 중년 남자가 수위실 안에서 졸고 있었다.

 

청년은 잠시 망설이다가 수위실 창문을 부드럽게 두드렸다.

 

중년 남자가 깜짝 놀란 얼굴로 말했다.

 

"무슨 일입니까?"

 

"희망의 상담 전화 9번 담당자를 찾아왔습니다.

 

조금 전까지 저와 통화를 했거든요. 만나볼 수 있을까요?"

 

"그렇다면 저 문으로 가세요.

 

2층으로 올라가면 자원봉사자들을 금방 찾을 수 있을겁니다."

 

"자원봉사자라니요?"

 

"전화국에서는 전화 설비와 요금을 지원할 뿐이지요.

 

희망의 상담 서비스 999번은 자원봉사자들이 담당하는

 

프로그램입니다."

 

청년은 중년 남자가 가리키는 곳으로 들어갔다.

 

계단을 통해 2층으로 올라가자 한쪽에 나란히 늘어선

 

십여 개의 공중전화 부스가 눈에 들어왔다. 각각의 공중전화

 

부스에는 아라비아 숫자가 적힌 아크릴 판이 걸려 있었다.

 

청년은 9번 상담자가 있는 곳으로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순간, 청년은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을 뻔했다.

 

9번 상담자는 검은 안경을 쓴 채점자로 된 책을 읽고 있었다.

 

앞을 보지 못하는 시각장애인이었다.

 

귀에 이어폰을 착용한 여인은 <내일이 아름다운 이유>라는

 

우화소설을 오른손으로 스치며 입으로는 읽는 속도를

 

조절하고 있었다. 마지막 아홉 번째 장을 읽어주기 위해 연습하고

 

있는게 분명했다.

 

"아홉 번째 장이에요. 시몽은 태풍이 완전히 사라졌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청년은 고맙다는 인사도 못하고 돌아섰다.

 

계단을 훨훨 날며 내려간 청년은 수위

 

실을 바람보다 빠르게 지나 전화국 앞에 있는

 

공중전화 부스로 들어갔다. 주머니에서 꺼낸 동전을 넣고

 

999번과 9번을 누르며 눈물을 주르륵 떨구었다.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안녕하십니까? 연결되었습니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청년이 울먹이며 말했다.

 

"마지막 장을 읽어주세요. 너무 궁금합니다."

 

"아, 네! 그런데 목소리가 왜 그래요?

 

무슨 일 있었나요? 괜찮습니까?"

 

"아무 일도 없습니다. 어서 읽어주세요."

 

"네, 알았습니다. 아홉 번째 장이에요.

 

시몽은 태풍이 완전히 사라졌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 반대로....."

 

청년은 점자책을 손가락으로 읽어주고 있는

 

여인의 모습을 떠올려보았다. 어느새 청년의 오른손은

 

점자책을 읽듯이 공중전화 몸체 위를 스치며 부드럽게 만지고 있

 

었다. 청년의 눈에서는 주체할 수 없는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렸다. 귀에 익은 여인의 목소리가

 

너무 따뜻하기만 했다.

 

".....수많은 동물들 가운데 어느 누구도

 

뇌성마비 원숭이와 눈먼 타조 곁에서

 

떠날 줄을 몰랐다. 이상이에요.

 

끝까지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오히려 제가 감사합니다.

 

처음에는 모든 것을 잃어버린 상태였지만,

 

<내일이 아름다운 이유>를 귀로 읽은 뒤에는

 

다시 꿈을 지니게 되었습니다.

 

저는 당신과의 만남을 겨울의 전설로 간직하겠어요.

 

정말 감사합니다."

 

청년은 다른 사람을 위한 배려인 듯

 

수화기를 공중전화 몸체 위에 살며시 내려놓고

 

눈이 소복히 쌓인 새벽거리를 힘차게 달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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