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흥보 신부님의 성서 자료실

신약 데살로니카인들에게 보낸 편지

인쇄

심흥보 [peters1] 쪽지 캡슐

2003-02-12 ㅣ No.74

 

 

신약 데살로니카인들에게 보낸 편지 해제

 

 

-진 토마스, 한국 천주교회 200주년 기념 신약성서9 데살로니카서, 분도출판사, 1981

 

 

 

1. 배경

1) 데살로니카

오늘의 데살로니카는 그리이스 북부의 가장 중요한 항구도시다. 이 도시는 알렉산더 대왕의 매부인 갓산드로 장군이 기원전 315년경에 건설하여 자기 부인의 이름을 따서 데살로니카라 불렀다. 로마 사람들이 그리이스를 합병한 후 이 도시를 마케도니아주(州)의 수도로 삼았다. 이 도시는 로마와 아시아를 연결하는 도로변에 위치하여 옛부터 매우 번창하였다. 데살로니카에는 로마 관리와 그 밖의 외국인들도 많이 살았다. 그들 중에는 유대인들도 적지 않았는데 그들은 물론 자기네 종교인 유대교를 신봉하였다.

 

데살로니카 교회의 설립

제 2차 전도여행(50-52년경)때 바오로 사도는 실라(본문 번역문에서는 실바노라 부름) 및 디모테오와 함께 아시아에서 그리이스로 건너와 필립비에서 복음을 선포하여 충성스러운 교회를 세웠다(필립비서 참조). 그러나 얼마 후 박해를 받아 추방되었다(사도 16,11-40; 1데살 2,2). 그래서 바오로 일행은 데살로니카로 가서 우선 유대교회당에서 복음을 선포하였다. 그러나 좋은 반응을 얻지 못하여 바오로는 야손이라는 사람의 집에서 전도를 하였다. 그런데 얼마 안 가서 유대인들의 책동으로 바오로는데살로니카에서도 추방되었다. 이 모든 일은 사도행전 17,1-10에 기록되어 있다.

  사도행전에 바오로는데살로니카에서 "세 안식일에 걸쳐" 활동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실제로 그 기간은 훨씬 더 길었을 것이다. 사실 바오로는 거기서 천막 짜는 일을 하며(1데살 2,9; 사도 18,3) 여러번 필립비 사람들의 도움을 받았고(필립 4,16), 많은 이방인들을 회개시켜 굳건한 교회를 세웠던 것이다. 루가는 사도행전에서 바오로가 활동한 기간의 시작과 끝만을 묘사하여 "세 안식일에 걸쳐"라고 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실제로 바오로가 거기서 한동안 활동하다가 추방된 사실로 미루어볼 때 그가 그곳에 머무른 기간은 몇 달되었을 것이다. 그때까지 데살로니카 신자들은 기본적인 교리만 배웠을 뿐, 부족한 점이 많았다(1데살 3,10). 그래서 불의에 추방된 바오로는 박해받는 새 교우들의 신상을 걱정했고 그 박해운동을 일으킨 유대인들에 대해서는 몹시 분개하였다(1데살 2,15-16).

 

2. 집필 동기

1) 첫째 편지(전서)

바오로는데살로니카를 떠난 다음 베레아, 아테네, 고린토에서 전도하였다. 사도행전에 의하면, 데살로니카의 유대인들이 베레아까지 따라와 바오로를 박해하기에 그는 홀로 아테네로 갔다(사도 17,14; 18,5). 데살로니카 전서 3,1-2에 의하면 바오로는 아테네에서 동료들을 만났다. 바오로는 직접 데살로니카로 가려 했으나 그럴 수가 없었다(1데살 2,18: "사탄이 방해했다"). 그래서 디모테오를 그곳으로 보냈다. 디모테오가 그후 고린토로 간 바오로에게 데살로니카 교회에 관한 좋은 소식을 전하자 바오로는 그곳 신자들에게 첫째 편지를 보내게 된다.

  데살로니카 전서는 바오로의 다른 편지와는 판이한 성격을 띠고 있다. 우선 그 집필 동기가 교리에 관한 것이 아니라, 단지 자기가 얼마 전에 떠나온 신설 교회에 대한 사랑과 배려를 표현하고자 했다. 그 교회의 일을 여러모로 걱정하던 바오로는 좋은 소식을 듣자 크게 기뻐하였다. 새로 형성된 신앙의 공동체가 충실한 생활을 하고 있다기에 우선 바오로는 긴 감사의 기도를 드린다(1,2-10. 이 원문은 한 문장으로 되어 있다!). 데살로니카의 신자들은 시련을 잘 극복하고 좋은 길로 나아가고 있었다. 그래서 계속 꾸준히 그 길로 나아가라고 권고한다. 바오로는 신자들을 다시 만나 그 신앙의 부족한 점을 보충해 줄 생각은 하고 있었으나(3,10) 크게 걱정하지는 않았다. 그곳 신자들은 그리스도를 굳게 믿으며 신자로서의 본분을 다하고 있었고 또한 그들은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내림(來臨)에 희망을 두고 살아가고 있었다(1,10; 2,19; 4,16). 데살로니카 전서는 마치 여러 가지 어려움을 극복해야 할 처지에 있는 자녀들에게 보내는 아버지의 자상하고도 정다운 격려의 서한과도 같다(2,11-12). 우리는 이 편지에서 초대교회의 투쟁과 승리, 그 열성과 긍지, 그리고 하느님이 하시는 일에 대한 경탄의 정감을 엿볼 수 있다.

 

2) 둘째 편지(후서)

인사말을 보면 바오로는 실라 몇 디모테오와 함께 머무르고 있었다. 그러므로 데살로니카 전서를 보낸 지 얼마 되지 않아 바오로는 둘째 편지를 보냈을 것이다. 첫째 편지를 보낸 뒤에 데살로니카 신자들 사이에 두 가지 물의가 일어났다.

  첫째, 어떤 사람들은 주님의 재림이 이미 다가왔다고 주장했다. 바오로는 이러한 주장을 물리치며 그리스도의 재림 전에는 두 가지 전조가 있을 것이라고 했는데 그중 하나는 신앙배반이며 다른 하나는 반(反)그리스도의 출현이다. 이 두 가지 전조가 있은 다음에야 주님이 재림하신다는 것이다(2,1-10).

  둘째, 일은 하지 않고 공리공론(空理空論)만 떠벌리며 남에게 부담이 되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에, 바오로는 단호히 그들의 개과(改過)를 촉구하며 말을 듣지 않는 자는 멀리하라고 명한다(3,6-14).

 

3. 집필 연대

바오로는 제 2차 전도 여행중(50-52년경)고린토에서 1년 반 동안 활동했다(사도 18,11). 그는데살로니카 전서를 51년경에, 후서를 같은 해 혹은 52년경에 썼을 것이다. 이 두 편지는 바오로의 편지들 가운데 제일 먼저 씌어진 것이다. 그뿐 아니라 예수께서 돌아가시고 대략 20년밖에 안된 무렵에 씌어졌으니, 신약성서 가운데서 제일 먼저 작성된 문서이다. 그러므로 이 두 편지는 그리스도교의 최초의 공적인 문서로서 매우 귀중한 것이다.

 

4. 내용

1) 사도의 체험

데살로니카 전서에서 바오로는 현재시제(現在時制)를 사용하고 있다. 이것은 특히 1-3장에서 두드러져 보인다. 새로운 문단을 시작할 때마다 바오로는 "기억하고 있다," "아는 바와 같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여 자신의 기억을 되살리며 동시에 그곳 사람들의 기억도 되살리고 있다(1,3ㆍ4ㆍ5; 2,1ㆍ2ㆍ5ㆍ9ㆍ11; 3,3ㆍ4ㆍ6; 4,2; 5,2). 다시 말하면 사도와 수신인(受信人)들의 현재 관계는 몇 달 전에 있었던 공동체험에 그 뿌리를 박고 있는 것이다. 그때 바오로와 데살로니카 신도들은 함께 생활하면서 복음선포를 통해 그리스도교의 공동체가 탄생하는 것을 목격하였다. 다른 어느 편지에서도 바오로가 이만큼 상세히 한 교회의 유래를 회상한 적은 없다.

  복음선포를 듣고 데살로니카 사람들은 자기네 생활의 방향을 바꾸었다. 즉, 그들은 하느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서 부활시키신 당신의 아들 예수의 재림을 기다리게 되었던 것이다. 바오로는 그들의 신앙과 사랑에 대하여 감사하지 않을 수 없었다(1,3). 이 근본적인 생활자세의 변화를 불러일으킨 원동력은 옛 이스라엘을 선민(選民)으로 택하신 하느님의 자유로운 사랑에 의한 그 선택과 똑같은 작용이다(1.4; 2,12).

  데살로니카 사람들은 바오로의 말 때문에 회개한 것이 아니며 또 바오로는 개인적인 성공을 거두거나 사람들의 호의를 얻고자 말재주를 부리지도 않았다(2,3). 그의 말을 통하여 하느님께서 친히 작용하셨다는 점이 중요하다. 그러므로 헬라 사람들이 "우상으로부터 하느님께로 돌아서서, 살아 계시고 참되신 하느님을 섬길"수 있게 한 것은 오로지 하느님의 권능이다(1,9). 하느님께서는 바오로의 입을 빌어 말씀하시고 당신의 성령을 통해 듣는 이의 마음을 움직이신 것이다. 그 결과 신앙이 싹트고 그 신앙은 하느님의 권능을 드러낸다(2,13).

  바오로는 자신이 선포한 것을 일컬어 "복음"(그리이스어로 '에우앙겔리온'), "하느님의 복음"(2,4ㆍ8ㆍ9) 혹은 "그리스도의 복음"(3,2)이라 한다. 바오로는데살로니카 전서 1,9-10에서 전통적인 표현을 빌어 복음의 내용을 요약한다. "여러분은 우상으로부터 하느님께로 돌아서서, 살아 계시고 참되신 하느님을 섬기게 되었으며 또한 그분이 죽은 이들 가운데서 일으키신 당신 아들, 우리를 장차 닥쳐올 진노로부터 건져 주시는 예수께서 하늘로부터 오실 것을 고대하게 되었습니다."

  복음을 선포할 때 사도는 하느님의 협력자가 된다(3,2). 그 이유는 이 선포 속에 하느님께서 성령을 통하여 힘차게 작용하시기 때문이다(1,5). 예수께 대한 믿음이 박해와 환난을 초래함에도 불구하고(2,14) "성령의 기쁨으로"(1,6) 말씀을 받아들인다는 놀라운 사실을 달리 설명할 도리는 없다. 그리고 하느님은 신앙이 싹틀 때에만 활동하시는 것이 아니다. 하느님께서는 신자들이 투쟁과 고통 속에 신앙생활을 계속하는 동안에도 더욱 활동적인 신앙, 더욱 헌신적인 사랑, 그칠 줄 모르는 희망을 갖도록 끊임없이 그들의 마음을 움직이신다.

  예수를 부활시키신 하느님의 그 능력이 지금도 사도들의 선포 속에 작용하고 있다. 사도는 자기가 확신하고 있는 부활사건을 그저 진술하는 것이 아니라 선포하는 행위로써 하느님의 도구가 된다. 죽은 이들 가운데서 예수를 부활시키신 하느님의 이 능력은 옛날 예수 안에서 작용했듯이 지금 신도들 안에서도 작용하고 있다.

  하느님이 신자들 안에서 작용하시는 것을 보고 바오로는 위로를 받고(3,7) "여러분이야말로 우리의 영광이며 기쁨입니다" (2,20)라고 했다. 이와 같이 바오로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신비가 얼마나 깊은 현실성과 효력을 지니고 있는지를 그 전도활동을 통하여 체험하게 되었다. 빠스카(죽음과 부활) 사건은 과거의 일만은 아니다. 사도와 교회는 예수께서 겪은 시련을 지금도 겪는 한편(1,6; 2,14)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생명과 영광에도 이미 참여하고 있다.

 

2) 종말론

데살로니카 전서는 교리를 밝히기 위하여 엮어진 편지는 아니지만, 종말에 관한 가르침이 이 편지 안에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1-3장은 주로 과거의 전도활동과 데살로니카 신도들의 생활을 회상하고 있지만 4,13-5,3은 주로 종말에 관한 일련의 문제들을 풀이해 주는 교훈이다. 그러나 종말에 대한 믿음과 기대는 1-3장에서도 뚜렷이 드러나 있다(1,10; 2,19; 3,13참조). 그리스도 신자란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는 사람이다. 이 재림에 대한 희망과 기대가 신자 생활의 방향을 설정케 한다.

  구약성서에서는 역사의 종말을 일컬어 '주님의 날' 혹은 '야훼의 날'이라고 했다(예컨대, 아모 5,18). 이 날 하느님께서 모든 사람을 심판하시고 의인들에게는 영원한 평화를, 악인들에게는 무서운 벌을 주실 것이라고 생각했다. 바오로는 이 날을 그리스도의 날이라 일컬었다. 그 날에 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 아들의 영광을 떨치며 오셔서 믿는 이들을 구원하시고 악인들을 멸망시키실 것이니, 신자들은 그 날에 주님 앞에서 조금도 흠 잡힐 데가 없도록 준비를 해두어야 한다.

  데살로니카 후서에서는 종말론이 더 큰 비중을 차지한다. 집필 동기부터가 세말에 관한 문제이다. 세상의 종말과 예수의 재림에 관한 가르침은 바오로의 어느 편지에서보다 데살로니카 전후서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바오로는 세말을 묘사할 때 대체로 구약 예언서와 유대교 묵시문학의 사상을 원용(援用)하고 있다. 묵시문학의 사관(史觀)에 의하면 역사의 말기에는 악의 세력이 떨쳐 극심한 혼란과 박해가 일어난다. 이 세상 어느 누구도 그 혼란과 박해를 막을 수 없다. 오직 하느님 혹은 그분의 대리자만이 미구에 하늘로부터 나타나 극적으로 세상을 구원하실 것이다. 그리고 묵시문학계에서는 세말의 광경을 묘사할 때 대천사의 소리, 하느님의 나팔소리(1데살 4,16), 불꽃(2데살 1,8), 구름을 타고 오는 심판자(1데살 4,17) 등의 소재를 즐겨 사용했다. 바오로는 묵시문학적인 상상과 표현을 이용하지만 그 내용은 완전히 달라진다. 그것은 예수께서 부활하심으로써 이미 세말이 시작되었다는 믿음 때문이다. 바오로가 주장하는 종말론의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다.

  (1) 예수는 부활하셔서 주님이 되시고 아버지와 함께 계신다. 그분은 다시 오셔서 악인들을 멸망시키고(1데살 5,3; 2데살 1,9; 2,10-12) 믿는 이들을 구원하여(1데살 5,9) 당신의 영광에 참여케 하실 것이다(2데살 2,14).

  (2) 바오로는 초대교회 신도들과 마찬가지로 곧 주님의 날이 올 것이라고 생각했다. "주님이 내림 하실 때까지 남아 있을 우리 산 사람들"(1데살 4,15)이란 표현은 예수의 재림이 임박했다는 생각을 분명히 증언해 준다. 그렇다고 해서 바오로가 그리스도의 재림이 몇 년 안에 있으리라고 가르친 것은 아니다. 그는 다만 자신이 죽기 전에 재림하실 그리스도를 다시 뵙는 것이 소원이었다. 그러나 그 소원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바오로 자신도 차츰 예수의 재림을 보지 못하고 죽을 각오를 하게되었다(1고린 15,31-32; 2고린 5,1-8; 필립 1,20-24). 데살로니카 신자들은 주님의 재림 전에 죽는 형제들이 구원받지 못할 것을 걱정했다. 그들에게는 아직 부활에 대한 명확한 개념이 없었던 까닭이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데살로니카 전서 4,13-18에서 죽은 이들도 불리한 점은 없다고 설명한다. 신자는 죽어도 그리스도께 대한 희망이 사라지지 않는다. 예수를 부활시키신 하느님의 권능은 그 부활을 믿는 신자를 저버리지 않는다.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자기에게 속한 사람들을 하나도 잊지 않으실 것이니, 그들은 모두 그리스도의 영광에 참여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오시면 먼저 죽은 이들이 부활하고 그 다음에 그들은 살아 있는 신자들과 함께 주님 앞에 나아갈 것이다. 그리하여 모두 함께 영원히 주님을 모실 것이다.

  (3) 세말은 예고 없이 갑자기 닥쳐올 것이다. 그것은 마치 밤중의 도둑과도 같이 들이닥친다(1데살 5,1-3). 사람들은 안일하게 지내다가는 느닷없이 멸망에 직면할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교인들은 항상 깨어 있으면서 주님을 기다려야 한다. 그들의 생활은 고대하는 생활, 깨끗한 생활, 맑은 정신을 가진 생활이어야 한다(1데살 1,10; 3,13; 5,4-10ㆍ23).

  (4) 데살로니카 후서에서는 종말문제를 보는 관점이 매우 다르다. 그리스도 재림의 임박성을 성급히 해석한 나머지 일부 신자들은 주님의 날이 이미 왔다고 잘못 생각하고 있었다. 그들은 이러한 해석을 사도의 가르침으로 뒷받침하려고 했다(2데살 2,1-2). 그리고 그들은 현세의 모든 일에 관심을 잃어버리고 무질서한 생활을 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스스로 일하지 않고 구걸하며 다른 사람들에게 폐를 끼쳤다(2데살 3,6ㆍ10-12). 그래서 바오로는 그들에게 인간 본연의 의무를 환기시킨다. 그리고 그는 상식을 벗어난 열광주의자들의 주장을 반박하고 세말의 전조에 관하여 설명한다. 그의 의도는 그들로 하여금 세말이 이미 도래했다는 착각을 버리고 현실생활을 충실히 해나가게 하려는 것이다.

  바오로는 유대교 묵시문학을 원용하여 세말에 나타날 그 전조의 사건과 과정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가. 사탄은 이미 이 세상에서 활동하고 있다. 그 활동으로 신자들은 박해를 당한다. 이 세상에서 믿는 사람들과 악한 사람들이 서로 대립하게 되고 죄악은 점점 우심해져 거짓과 불의가 널리 만연하게 된다. 특히 위험한 것은 거짓을 참으로, 불의를 정의로 오인(誤認)케 하는 속임수로 말미암은 인간의 착각이다(특히 2데살 2,9-12).

  나. 다음으로 배교(背敎)하는 사태가 발생하고 '불법의 사람' 혹은 '무법자'라는 인물이 등장할 것이다(2데살 2,3-12). 배교의 개념은 묵시문학(다니 11,32; 1마카 1,46-52; 2,15-16; 2마카 6,1 이하)뿐 아니라 복음서에도 나타난다(루가 18,8; 마태 24,10-12). 바오로는 배교를 무법자의 활동과 동일시한 것 같다. 그 무법자의 유혹에 빠져 진리와 선(善)을 멀리하는 사람들은 하느님 보시기에 배교자들이다. 불법의 사람, 무법자는 '반(反)그리스도'(Antichristus)라고 하는 존재다. 반그리스도란 말은 요한의 서한에 나오는 표현이다(1요한 2,18ㆍ22; 4,3; 2요한7). 모든 악의 화신(化身)인 이자는 놀라운 기적을 보이고 "진리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은"(2데살 2,10) 사람들을 속이고 오만으로 가득 차 하느님으로 자처하며 성전에 자리잡을 것이다. 반그리스도란 개인을 가리키는지 혹은 집단을 가리키는지는 판단하기 어렵다.

  다. 반그리스도가 아직 나타나지 못한 이유는 누가 혹은 무엇이 그를 붙들고 있기 때문이다(2,6-7). 이 장애물 혹은 그 반그리스도의 출현을 막고 있는 것이 어떤 사물인지 혹은 누구인지 추론하기는 어렵다. 틀림없이 데살로니카 신자들은 이에 대한 바오로의 가르침을 들었을 것이다. 이 장애물의 성격에 대하여는 다음과 같은 학설을 들 수 있다.

  - 로마제국과 황제(제국은 붙들고 있는 것, 황제는 붙들고 있는 자): 제국은 질서와 평화를 유지하기 위하여 전통적으로 세말의 전조로 생각되어 온 혼란과 전쟁을 막고 있다는 것이다. 많은 교부들은 이런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 사도들의 전도활동과 바오로 사도 자신(몹수에스트의 테오도르, 테오도레토, 칼빈, 쿨만의 견해): 예수께서는 복음이 모든 이방인들에게 선포되기 전에는 세말이 오지 않으리라 하셨다(마르 13,10; 마태 24,14; 루가 21,24; 참조 로마 11,25). 여기서 묵시록 11,3-14의 두 증인의 역할도 생각할 수 있다. 결론으로는 이미 아우구스띠노가 한 말을 들겠다. "그 당시의 신자들은 알고 있던 것을 우리는 모르고 있으므로 사도가 뜻한 것이 무엇인지 수고를 다하여 캐보려 해도 찾지 못하고 있다.… 그가 도대체 무엇을 말했는지 내가 모르고 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신국 20권 19장 2).

  여하튼 주님의 재림 전에는 배교의 어지러운 사태와 무법자의 책동이 있기 마련이나 아직 그런 현상이 없으므로 종말이 온 것은 아니다.

  라. 반그리스도가 나타난 다음에야 주님이 발현하시어 그를 멸하실 것이다(2데살 2,8).

  주님의 날이 이미 왔기 때문에 아무런 걱정 없이 살 수 있다는 그릇된 생각을 한 데살로니카의 신도들은 세말사건의 진행에 관한 사도의 가르침을 외면한 것이다(2,3). 그들의 안일한 생각과는 전혀 달리 세말은 환난과 투쟁의 시대임을 사도는 강조한다. 재림하실 그리스도가 승리하시기 직전에는 싸움이 한층 더 격렬해질 것이다. 이때는 그 어느 때보다 정신을 차리고 올바른 판단을 할 줄 알아야 한다. 복음은 신도들을 그리스도의 영광에 참여하도록 초대하고 있으나(2,14) 먼저 그 영광에 참여하기에 앞서 박해와 고통을 겪어야 한다(1.4-5). 이 환난을 극복하려면 사랑과 믿음과 인내가 있어야 한다.

  데살로니카 후서의 이러한 입장을 전서의 그것과 비교해 보면 종말의 임박성이 다소 상대화되어 있다. 후서에서 주장하는 바는 세말이 가까워졌다는 핑계로 공동체와 사회의 질서를 어지럽히지 말라는 것이다. 이미 세말의 승리를 얻었다 하여 일하기를 그만둔 사람들을 멀리하고 필요하다면 그들과의 모든 관계도 끊어야 한다(3,6ㆍ14). 역사의 종말을 인내로 기다리지 않고 이미 실현되었다고 하는 열광 주의자들이 그후에도 종종 교회에 나타났다. 이를 우려해서 데살로니카 후서는 열광주의자들을 반박하며 현실 속에서 실현되는 하느님의 계획을 설명한다.

 

3) 초대교회의 교리

데살로니카 신자들에게 보낸 두 통의 편지는 초대교회의 생활과 그 희망을 엿볼 수 있는 매우 귀중한 자료이다. 이 편지에서 바오로는 종말론 이외의 다른 교의적(敎義的)인 문제를 본격적으로 다루지는 않았지만, 초대 그리스도교의 주요교리가 대부분 그 속에 포함되어 있다. 집필 연대인 51-52년경에 이미 주요교리가 이처럼 정립된 것은 놀라운 일이다. 이와 같이 교리는 바오로가 처음 만든 것은 아니다. 그가 전통적인 표현과 정식(正式)을 빌어 교리를 밝힌 예가 몇 군데 있다. 주요교리는 다음과 같다.

  하느님은 모든 일의 근원이 되시고 그 사랑으로 인간을 부르시어 신앙과 구원을 얻게 하신다. 그분은 아버지시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아들이시다. 그분은 우리의 죄 때문에 죽었다가 부활하시어 하늘에 살아 계신다. 신자들은 그를 주님으로 모시고 그의 재림을 간절히 바란다. 성령은 말씀의 선포와 공동체의 생활 가운데서 활동하신다.

  이제 신앙인은 자신의 부활을 굳게 확신하고 고대하면서 박해 속에서도 인내하며 각 도시뿐 아니라 제국 판도내의 모든 교우들과 형제적 사랑으로 한데 뭉쳐야 한다.

  교회는 약 2천년 동안 이 서간들을 되풀이하여 읽으며 해석해 왔다. 비록 짧은 글이나 우리는 그 속에서 초창기 교회의 생생한 모습을 엿볼 수 있고 우리가 물려받은 신앙의 소박한 원형을 대하게 된다. 방향감각을 잃어 가는 현대의 신자들에게도 이 편지는 신앙의 참된 모습을 보여 주며 특히 그리스도교적 희망을 불어넣어 주는 것이다.  

 

 



448 0

추천 반대(0)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