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창동성당 게시판

1월22일 성 빈첸시오 팔로티 사제

인쇄

유화정 [wjyou57] 쪽지 캡슐

2012-04-30 ㅣ No.2094



축일 1월22일
성 빈첸시오 팔로티 사제, OFS
San Vincenzo Pallotti Sacerdote
Roma, 21 aprile 1795 - Roma, 22 gennaio 1850
Sacerdote romano, fondatore dell'Unione dell'Apostolato Cattolico.
Etimologia: Vincenzo = vittorioso, dal latino
Saint Vincent Pallotti
Born 21 April 1795 in Rome, Italy
Died 22 January 1850 in Rome, Italy from a severe cold
probably caught the fatal illness on a cold rainy night when he gave his cloak to a beggar who had none
Venerated 24 January 1932 by Pope Pius XI (decree on heroic virtues)
Beatified 22 January 1950 by Pope Pius XII
Canonized 20 January 1963 by Pope John XXIII 

 


성 빈첸시오 빨로띠 증거자, 사제
(St. Vincent Pallotti)

   어디에나 계시는 하느님께 경의를 표하려고 항상 모자를 쓰지 않았던 이 겸손한 사람은, 어지러운 시대에 교회의 기둥이 된 사람들 중의 하나로서 가톨릭 성직자들의 자랑할만한 사제들 중의 한분이다.
   그는 1795년 로마에서 태어났다. 어린 소년 시절부터 성모님에 대해 각별한 사랑을 지녔고, 덕행에 있어서의 탁월함은 다음과 같은 사실을 말해준다. : "그는 가난과 회개를 몹시 사랑하였고 그래서 아씨시의 성프란치스꼬에게 특별히 충실하였다. 1회에 입회하는 데는 많은 방해가 있었기 때문에 3회에 입회하기를 열망하였고 성 프란치스코를 따르고 공경하는 노력을 그치지 않았다." 

   빈첸시오는 1816년 11월 29일, 아라꼬엘리 프란치스꼬 성당에서 3회원이 되었다. 그는 경건함과 뛰어난 지혜로 유명하였는데 철학과 신학박사 학위를 획득하였다. 1818년 5월 16일 성직자로 임명되었을 때는 기뻐서 어쩔줄 몰라했다. 사제 생활이 시작되자 기도하고 보속하며, 설교하고 고백성사를 주고 아픈사람과 위험에 빠진 사람을 위하여 힘썼다. 특별히 로마신학교의 젊은 성직자들을 위하여 생활해 온 그는 헤아릴 수 없는 선행을 하였다.

   그의 사도적 열성은 '경건한 전도회' 설립의 기초가 되었다. 그것을 '빨로띠 신부회'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 회의 목적은 크리스챤들에게 신앙심과 자비심을 증대시키는 것과 이교도와 무신론자에게도 이러한 마음을 전파하려는 것이다. 빈첸시오는 이 조직을 원죄없으신 성모님의 보호아래 두었고 교황 성하께 완전히 순종하였다.
   하느님은 미천한 종의 생애에 그리고 1850년 사후에 기적의 선물을 주심으로써 영광을 더 해 주셨다. 그가 영원한 생명에로 불리워졌을 때 비교적 젊은 나이였지만 짧은 생애 중에 많은 공로를 쌓았다. 그는 1950년에 시복, 1963년에 시성되었다.
(한국 재속프란치스꼬회 50주년 기념집, 평화의 사도 305-306쪽에서)

*하느님의 자비 주일 : 부활 제2주일(게시판1123번)
*원죄없이 잉태되신 동정마리아 대축일 :12월8일(게시판1511번)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 축일 :10월4일(게시판1403번)
*성 프란치스코의 거룩한 상흔 축일:9월17일(게시판1369번)
*성녀 파우스티나 동정녀 축일 :10월5일(1405번)
http://home.catholic.or.kr/gnbbs/ncbbs.dll/chinchang



   성 빈첸시오 팔로티(Vincentius Pallotti)는 1795년 4월 21일 로마(Roma)에서 식료품 장사를 하던 부유한 부모에게서 태어났다. 그의 스승이었던 돈 페리(Don Ferri)는 그를 “작은 성인이지만 머리는 조금 둔했다”고 평가하였다. 그러나 성장하면서 학업 성취 능력은 향상되었고 1818년 5월 16일에 사제품을 받았다. 그리고 같은 해 7월 25일 신학박사 학위를 받은 후에 그는 10년 동안 로마의 사피엔차(Sapienza) 대학에서 신학을 가르친 뒤 영성 지도와 강론에만 전념하였다. 

   보혈회를 설립한 성 가스파르 델 부팔로(Gaspar del Bufalo, 1월 2일)와의 우정에서 고무된 성 빈첸시오는 자신의 직위를 포기하고 여러 본당에서 사목활동에 전념하였다. 모든 그리스도교 신자들의 사도적 역할에 관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가르침을 예견하듯이, 1835년 성 빈첸시오는 변화와 정의에 헌신하고자 하는 성직자, 수도자와 평신도들을 모아 가난한 소년들을 위한 야간학교와 직업학교를 세우고 선진 농업기술의 전수를 위한 학원을 세웠다. 학교에서는 젊은이들에게 제화, 제단 기술과 농업 같은 시장성이 있는 기술을 가르쳤고 그들의 작업에 자부심을 주입시켰다. 그는 수도생활의 기도와 침묵에서만 성스러움을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삶에 있어서 필요한 부분을 찾아 채워주는 데에서도 찾을 수 있다는 전제 하에서 일했다. 이러한 그의 정책은 북부 이탈리아에서 활동했던 성 요한 보스코(Joannes Bosco, 1월 31일)와 비슷했다..

   
  
   1835년 그는 팔라티노회(천주교 사도회)를 설립했는데, 성 빈첸시오의 일생 동안 12명의 회원만 있었지만 그 후로 크게 성장하였다. 그리고 그는 가톨릭 사도직 수녀회도 설립하였는데, 이 수녀회는 후에 팔로틴 선교 수녀회로 발전하였다. 그들은 이탈리아, 브라질, 오스트레일리아, 미국 등지에 퍼져 창립자와 같은 이민자들을 돌보았으며, 동방 정교회 그리스도교인들과의 종교 간 대화를 촉진시키는 데 전문적으로 활동하였다.

   그는 젊은 교수에게 다음과 같이 썼다. “당신은 트라피스트 회원과 은수자들의 엄격함과 침묵에서 잘라져 나온 부분이 아닙니다. 세상에서 거룩해 지십시오. 사회관계에서, 당신의 일터에서, 여가 생활 중에, 당신의 가르치는 직무에서, 출판사와의 만남과 죄인들과의 만남에서 거룩해 지십시오. 성스러움이란 단지 하느님의 일을 하는 것, 언제 어디에나 있는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성 빈첸시오의 사도적 활동은 자신의 엄격함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는 1837년 콜레라가 창궐했을 때에도 위험을 무릅쓰고 환자들을 돌보았다. 그는 사람들의 영적 목마름을 채워주기 위해 극도의 노력을 했으며 자신에게 다가오는 사제는 누구나 쏴버리겠다고 위협하는 환자에게 다가가기 위해 노파로 변장하기도 했다. 1844년 성 빈첸시오는 자신이 가장 신뢰하는 신부를 런던(London)에 사는 이탈리아인들을 사목하도록 파견하였다. 그 후로 그의 수도회는 세계 각지로 뻗어나갔다. 로마의 시민들은 성 빈첸시오 신부를 19세기에 나타난 성 필리푸스 네리우스(Philippus Nerius, 5월 26일)로 이해했다. 왜냐하면 성 빈첸시오는 자신의 옷을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고는 반라의 모습으로 돌아오곤 했기 때문이다.

   성 빈첸시오 팔로티는 죄인들의 회개를 위해 많은 노력을 하다가 1850년 1월 22일 55세의 나이로 로마에서 선종하였다. 그는 1950년 1월 20일 교황 비오 12세(Pius XII)에 의해 시복되었고,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진행 중이던 1963년 1월 20일 교황 요한 23세(Joannes XXIII)에 의해 시성되었다. 교황 비오 11세는 그를 '가톨릭 액션(Catholic Action)의 선구자'라고 불렀다.
(가톨릭홈에서)







천주교 사도회-팔로틴회홈에서


팔로티회  역사
SAC
SOCIETY OF THE CATHOLIC APOSTOLATE
STOWARZYSZENIE APOSTOLSTWA KATOLICKIEGO

1835. 1.  9 : 성 빈센트 팔로티는 추수감사절 미사 후에 수도 단체 설립에 대한 결정적인 계시를 받음.

1835. 4.  4 : 성 빈센트 팔로티(St. Vincent Pallotti)는 사제와 수사, 수녀 그리고 일반인들로 구성된 '가톨릭 사도 연합'이라는 기구를 설립했다. 이 연합은 복음전파라는 공동목적을 위한 신앙공동체이다. 이 연합의 중심부에 그는 사제와 수사만으로 이루어진 천주교 사도회를 설립했다.

1835. 7. 11 : 교황 그레고리오 16세의 사도회 인준, "빈센트 팔로티의 거룩함으로 탄생한 이 사도회의 경건함과 열정에 찬 사업에 무한한 강복을 내림."

  성 빈센트 팔로티는 '가톨릭 사도 연합'이 사제, 수사, 수녀 그리고 일반신자들이 하나의 연합을 이루어 모든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다는 의식을 일깨워주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기를 간절히 원했으며, 더 나아가 이러한 의식을 온 세상에 전해야 할 사명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로마 신학교와 '포교 신학교(Propaganda Fide)'의 영적 지도자로서 변함없는 영향력과 막대한 중요성을 지닌 일을 수행했다.

  빈센트 팔로티 성인은 신앙으로 맺어진 자신의 동료들에게 선교사들이 파견되는 비 가톨릭 국가뿐만 아니라 가톨릭 국가에서도 모든 사람들이 믿음과 사랑이라는 신앙의 메시지를 받아들일 때까지 또한 참된 신앙심을 부활시키고 그 신앙을 유지하고 발전시킬 때까지 이를 위해 일할 수 있는 기구를 만들 것을 제안했다. 그것을 위해서는 새로운 도전이 필요하다고 그는 역설했다. 그것은 성직자로서 필요한 양성과정, 선교를 위한 강론교육, 외국에 복음을 전파하는 일, 가톨릭 본연의 활동 안에서 성직자를 돕기 위한 평신도의 특수 임무 등에 철두철미하게 도움을 주기 위한 도전이었다.

  많은 공적활동을 하는 가운데에도 팔로티 성인은 어려운 사람들을 돕는 일을 결코 게을리 하지 않았다. 부유한 사람들의 저택에서 후원을 간청하고 있는 그의 모습을 볼 수 있었고, 가난한 이들의 누추한 거주지에서 원조물품을 나누어주고 있는 그의 모습도 자주 볼 수 있었다. 병든 사람들과 죽음을 앞둔 사람들을 위로하고 편안함을 주었으며, 군인들을 위한 피정지도와 신앙교육, 감옥에 갇힌 이들을 방문하여 사형수의 친구가 되었고 사형장에도 함께 했다. 버려진 아이들을 위한 기숙사를 마련하고 야간 직업학교도 설립하는 등 그를 필요로 하는 모든 이들, 특히 소외되고 가난하고 병든 이들의 모든 것이 되기 위해 그의 온 삶을 헌신했던 성 빈센트 팔로티는 1850년 1월 22일 그가 새롭게 설립한 공동체의 중심지인 로마에 있는 온다(Onda)의 산살바토레 성당에서 영면했다.

 

설립자 성 빈센트 팔로티 약력

1795년 4월 21일 로마출생
1818년 5월 16일 사제서품
1818~1828 사피엔자 대학에서 신학교수로 재직
1834~1846 성령의 교회 주임
1835년 4월 4일 천주교 사도회(S.A.C) 창립
1850년 1월 22일 선종
1850년 1월 22일 교황 비오 12세에 의해 복자품에 오름
1963년 1월 20일 성인품에 오름. 교황 요한 23세에 의해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주보 성인으로 선포됨.




성빈센트 팔로티 유해 앞에서 기도하시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성 빈센트 팔로티에 대한 교황님들의 언급 

ㅇ. 복자 교황 요한 23세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나아가야 할 '평신도 사도직 영성'을 한 세기나 앞서 실천한 복자 빈센트 팔로티야말로 이 시대에 필요한
성인"이라고 말씀하시며, 63년 1월 20에 있는 시성식에서 성 빈센트 팔로티를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주보성인으로 선포했다.

ㅇ. 교황 바오로 6세는 천주교 사도회의 창립자인 성 빈센트 팔로티를 "선을 위한 평신도의 능력을 발견한 개척자"로 인정했다. 바오로 6세 교황께서는 "빈센트 팔로티 성인이 교회로 하여금 천주교 평신도의 시대가 올 것을 예상하고 준비하게 해주었다"고 말했다.

ㅇ.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팔로티회원들에게 '복음화와 신성화에 신앙을 집결시키려는 사도직에 삶을 바침으로써 사제와 평신도 사이의 가교역할을 하는.... 여러분의 일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정한 평신도에 관한 문헌에 완전히 일치하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천주교 사도회-팔로틴회홈에서)




[영성의 향기를 따라서] 천주교 사도회(팔로틴회)
 
“평신도 사도직 한세기 앞서 실천”
본당·병원·군종 사목 활동에 헌신 
 
'천주교 사도회'는 팔로틴 수도회라고도 불리는데 창립자 성 빈센트 팔로티(St. Vincent Pallotti)의 이름에서 명칭을 따온 것이다.

1795년 로마에서 출생한 빈센트 팔로티는 사제품을 받고 사피엔자 대학 신학 교수로 재직하던 중 1835년 수도 단체 설립에 대한 결정적인 영감을 받고 그해 4월 사제와 수사, 수녀 그리고 일반인들로 구성된 '가톨릭 사도 연합'이라는 기구를 설립했다.

이 연합은 '복음전파'라는 공동 목적을 위한 신앙 공동체였는데 팔로티는 그 공동체 중심에 사제와 수사만으로 이루어진 천주교 사도회를 결성했다. 이렇게 탄생한 천주교 사도회는 1835년 7월 11일 교황 그레고리오 16세의 사도회 인준을 얻고 공식적 활동을 시작했다.

무엇보다 창립자 빈센트 팔로티는 '가톨릭 사도 연합'이 사제와 수사, 수녀 그리고 평신도가 하나의 연합을 이루는 가운데 모든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로 부르심 받았다는 의식을 가질 수 있도록 노력해주기를 원했으며 더 나아가 이러한 의식을 온 세상에 전해야 할 사명이 있다고 생각했다.

성직자와 수도자 평신도가 일치해 복음화 활동에 함께 투신해야 한다는 입장은 현재의 교회가 '참여하는 교회'를 강조하고 있는 면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할 수 있다.

그런 만큼 역대 교황들은 그를 평신도 사도직 영성을 시대에 앞서 실천한 인물로 평가했고 천주교사도회 역시 평신도와 사제를 잇는 가교로서 제2차 바티칸 공의회 평신도에 관한 문헌에 완전히 일치한다고 밝혔다.

교황 요한 23세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나아가야 할 '평신도 사도직 영성'을 한 세기나 앞서 실천한 복자 빈센트 팔로티야말로 이 시대에 필요한 성인"이라는 평과 함께 1963년 1월 20일 시성식에서 성 빈센트 팔로티를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주보 성인으로 선포한 바 있다.

팔로티는 수도회 선교사들이 비 가톨릭 국가뿐만 아니라 가톨릭 국가에서도 모든 사람들이 믿음과 사랑이라는 신앙의 메시지를 받아들일 때까지, 또 참된 신앙심을 부활시키고 그 신앙을 유지하고 발전시킬 때까지 이를 위해 일할 수 있는 기구 구성을 제안하기도 했다. 팔로티 성인의 여러 공적 활동 중에서도 어려운 사람들을 돕기 위해 힘썼던 일은 보다 큰 업적으로 꼽힌다. 그는 부유한 이들에게 어려운 이들을 위한 후원을 요청했고, 가난한 이들의 집에서는 원조물품을 나누어 주느라 분주했으며, 교도소와 병원, 고아원 등지에서 수형자들과 환자 고아들을 돌보는데 힘을 쏟았다.

로마 신학교와 '포교 신학교(Propaganda Fide)'의 영적 지도자로서도 활동한 팔로티 성인은 1850년 1월 22일 로마 온다(Onda)의 산살바토레 성당에서 선종했다.

한국 진출은 전 수원교구장 고 김남수 주교 초청으로 1990년 5월 1일 폴란드 '그리스도왕 관구'에서 선교사제 2명의 파견으로 시작됐으며, 수원교구 내 본당사목을 비롯한 병원.군종사목 활동을 해왔다. 1998년 분당에 본원을 마련한 후 현재 폴란드 '성모영보관구' 소속 선교사 4명(사제 3명, 수사 1명)과 한국인 수사 1명이 수원교구를 중심으로 활발한 사목활동을 벌이고 있다.

한편 천주교 사도회(팔로틴회)는 '팔로틴 선교 수녀회' 등과 함께 팔로틴 가족을 이루고 있으며 현재 41개국에서 2400여명이 활동 중이다.[가톨릭신문, 2004년 11월 21일, 이주연 기자] 



 
 
 천주교 사도회 영성과 역사
평신도 사도직에 새 숨결...시대 앞서간 혁명적 활동에 나서 
 
▲ 천주교 사도회 창립자 성 빈센트 팔로티 신부.
천주교 사도회(Society of Catholic Apostolate)를 설립한 이탈리아 출신 성 빈센트 팔로티(1795~1850년) 신부의 카리스마(은사) 핵심은 '평신도 사도직'이다.
 
1835년 1월 9일 "세례 받은 모든 이를 나의 사도로 만들라"는 그리스도의 계시를 받은 팔로티 신부는 3개월 뒤 성직지와 수도자, 평신도들로 이뤄진 '천주교 사도직 연합'을 설립, 평신도 사도직 운동을 본격화한다. 당시만 해도 평신도들이 사도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은 혁명적 사고였다. 그래서 팔로티 신부가 선종한 뒤 1854년 천주교 사도회는 '경건한 선교회'로 명칭을 바꿔야 했고, 1947년까지 93년간 '사도회'라는 명칭을 쓰지 못하는 제재를 받아야 했다.
 
그러나 시대를 앞서간 그리스도의 계시와 팔로티 신부의 인식은 정확했다. 20세기 들어 평신도 사도직에 대한 인식이 확산되면서 1950년 시복됐고, 1963년에는 시성되기에 이른다. 교황 요한 23세는 특히 팔로티 성인을 제2차 바티칸공의회 수호성인으로 선포하고, 그를 평신도 사도직의 선구자로 꼽았다.
 
또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도 성 팔로티를 따르는 천주교 사도회 활동을 두고 "제2차 바티칸공의회가 정한 평신도 관련 문헌에 완전히 일치한다"고 말하며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폴란드에만 700여 명에 이르는 회원들이 활동하는 천주교 사도회는 전 세계 46개국에 2400여 명이 활동하고 있다. 국내엔 1990년 5월 1일 파견돼 올해로 한국 파견 20주년을 맞고 있으며, 현재 천주교 사도회 한국지부는 폴란드 주님 탄생 예고 관구에 속해 있다. 폴란드 출신 사제 4명과 수사 1명, 한국인 사제 1명과 유기서원자 1명, 청원자 2명 등 모두 9명이 각자 사도직을 살고 있다.
 
※성소모임
매달 둘째 주일 오후 2시 분당 본원(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분당동104의6)
문의 : 031-707-4450, 안동억 신부
[평화신문, 2010년 4월 18일, 오세택 기자, 사진=전대식 기자
        

  

영성의 향기] 수도회 창설자를 찾아서 - 성 빈센트 팔로티
팔로틴 수도회 설립
 
지금은 익숙하게 들리는 ‘평신도 사도직’이라는 말이 교회 안에서 강조되기 시작한 것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라고 할 수 있다. 그 이전에 교회는 평신도를 복음화의 대상으로만 보았을 뿐 복음화를 주도하는 주체자로서는 인식하지 못했다. 세례를 받은 사람이면 누구나 세상을 복음화할 책임이 있다는 의식은 1962년부터 3년간 열린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계기로 비로소 정착되기 시작했다.
 
공의회보다 약 1백 30년 앞서 이 같은 생각은 지녔던 사람이 바로 ‘팔로틴 수도회’를 설립한 성 빈센트 팔로티(1795-1850)다. 팔로티는 바티칸 공의회가 열리고 있던 1963년 1월에 시성됐고 교황 요한 23세는 그를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주보성인으로 선포했다.
 
팔로티는 1795년 이탈리아 로마에서 태어나 1818년 로마 교구에서 사제 서품을 받았다. 그는 1835년 4월 4일 팔로틴 수도회의 모태가 된 평신도사도직 공동체 ‘천주교 사도 연합’을 창설했고 이어 사제 · 수사회, 수녀회를 차례로 세웠다. 그러나 우리나라에는 현재 남자 수도회만 진출해 있다.
 
수도회를 창설한 뒤에도 팔로티는 1850년 이탈리아 온다산 살바토레 성당에서 서거할 때까지 줄곧 로마 교구에서 활동했다. 그가 사목한 영역은 상당히 폭넓다. 따라서 어떤 특정한 활동 분야에 매이지 않는 것이 팔로틴 수도회의 독특한 카리스마이기도 하다.
 
팔로티는 대학생들과 수녀들의 영적 지도를 담당하면서 동시에 군인과 죄수, 병자들을 돌보았고 직접 저술활동을 하며 출판 사도직의 중요성도 강조했다. 또한 선교에 큰 관심을 자고 여러 선교 단체를 설립하는 데 많은 영향력을 미쳤으며, 그가 세운 수도회의 회원들 역시 여러 나라로 파견돼 선교 활동을 하고 있다.
 
그가 이렇게 다양한 사도직에 관심을 두었던 것은 모든 사람 안에 숨어있는 사도의 소명과 능력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그는 누구든지 선을 위해, 하느님을 위해사랑하고 봉사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다고 보았다. 교황 바오로 6세는 그를 ‘선(善)을 위한 평신도의 능력을 발견한 개척자’라며 ‘교회에 평신도의 시대가 올 것을 예견하고 준비한 사람’이라고 팔로티를 높이 평가했다.
 
“모든 신자들은, 사제, 수도자, 평신도를 막론하고 기뻐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세상에 복음을 전하고 주님의 사랑을 밝히며 예수님의 신앙을 부활시키는 어떤 일에도 참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재능, 지식, 학문, 권력, 직업, 선행 또는 적어도 기도로 참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팔로티가 이런 영성을 가진 것은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에 대한 깊은 체험이 수반된 것이었다. 사랑 자체인 하느님은 인간이 죄로 멀어질 때에도 인간을 저버리지 않으며 주님은 인간의 나약함을 너무도 잘 알고 있다는 것, 따라서 인간의 어떤 작은 행동도 주님을 위해서 할 때는 그대로 그분의 기쁨이 된다는 것을 팔로티는 깨달았다.
 
우리의 삶이 기쁠 때 주님도 기뻐하신다. 어떤 처지에서도 기쁘게 살고 기쁜 마음으로 자신을 봉헌하는 사람을 주님은 기쁘게 받아들이시며 이 기쁨은 다시 우리의 내적 평화로 되돌아온다. 이럴 때 사람들은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하느님을 위해 무슨 일이든지 하고 싶은 갈증을 느낀다.
 
‘능력이 없어서 주님을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핑계는 성립되지 않았다. 외적으로 드러나는 봉사 활동뿐 아니라 지극히 사소한 일상생활들까지도 얼마든지 기도로 봉헌할 수 있기 때문이다. 육신의 아픔이나 내적 고통까지도 하느님을 위해 겪고 참아낸다면 그 역시 훌륭한 기도가 된다고 팔로티는 생각했다. 직업의 귀천이나 건강도, 학식이나 외모도 주님께 나아가는 데 걸림돌이 될 것은 없었다. 오히려 그 모든 것은 하느님께 나아가는 길이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재촉한다”(2고린 5,14)는 성서 말씀은 사도적 활동의 중심축이었다. 그는 하느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 외에 더 중요한 규칙은 없으며, 그 사랑이 사람들의 신앙을 쇄신시키고 그들로 하여금 사도적 열정에 불타게 한다고 확신했다.
 
팔로티의 영성은 팔로틴 수도회의 6가지 서약 안에 구체적으로 나타난다. 그들은 정결, 가난, 순명 서원 외에 인내와 나눔, 봉사를 약속한다. 땅끝까지 가서 복음을 전하라는 소명은 혼자 하는 것보다 여럿이 함께할 때 더욱 힘을 얻지만 그만큼 인내가 필요하다는 것을 팔로티는 깨닫고 있었다.
 
팔로티는 그 자신이 사제이면서 평신도의 위상과 역할을 누구보다 중요하게 인식했다는데서 오늘날 영적을 해이해져 있는 많은 평신도들을 깨워 일으킨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복음화와 성화를 위해 사도직에 헌신한 그의 삶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평신도 사도직 사상과 완전히 일치하는 삶이다”라고 그를 칭송했다. 한 사람의 거룩한 사제로 살았을 뿐 아니라 사제와 평신도 사이의 가교 역할을 충실히 이행한 사람이 바로 성 빈센트 팔로티였다.
[평화신문, 1997년, 3월 9일, 남기은 기자]



 



 
 


San Vincenzo Pallotti Sacerdote
22 gennaio 
Roma, 21 aprile 1795 - Roma, 22 gennaio 1850
Sacerdote romano, fondatore dell'Unione dell'Apostolato Cattolico.
Etimologia: Vincenzo = vittorioso, dal latino


Martirologio Romano: A Roma, san Vincenzo Pallotti, sacerdote: fondatore della Società dell’Apostolato Cattolico, con gli scritti e con le opere sollecitò la vocazione di tutti i battezzati in Cristo a lavorare con generosità per la Chiesa.

Va bene, è un buon prete. Ottima preparazione, confessore al Seminario Romano e al Collegio Urbano di Propaganda Fide, attivo in molte opere di carità. Ma perché fondare una “società per l’apostolato cattolico”, come se per questo non ci fossero già le strutture della Chiesa? E, per di più con laici, uomini e donne? Vincenzo Pallotti, romano, nato nel 1795 e prete dal 1818, va incontro a diffidenze e ostacoli nel mondo ecclesiastico perché come pochi altri (don Nicola Mazza a Verona, per esempio) capisce ciò che il tempo esige dai cattolici.
Dopo il tornado della Rivoluzione francese e di Napoleone, vescovi, preti, religiosi, studiosi, si spendono generosamente in difesa della fede. E lui vede e apprezza. Ma dice che non basta, non basta più: il problema vero non è proteggere il recinto dei credenti. No, ora bisogna conquistare altri credenti ancora, dappertutto, abbattendo i recinti. E aggiunge: questo è compito di tutti, perché ogni singolo cristiano ha il dovere di custodire la fede e di diffonderla dove non c’è ancora o non c’è più. Questo è un programma di attacco. Vincenzo rispetta il mandato apostolico peculiare del Papa, dei vescovi, del clero; ma parla poi di “apostolato cattolico” come dovere e competenza di ogni credente, perché "a ciascuno ha comandato Iddio di procurare la salute eterna del suo prossimo". Su questa base sorge nel 1835 l’Opera dell’Apostolato Cattolico, associazione di laici che avrà come “parte interna e motrice” una comunità di sacerdoti, seguita dalla congregazione delle suore dell’Apostolato Cattolico (chiamati comunemente Pallottini e Pallottine). Scopo: far conoscere Cristo con la parola, l’insegnamento, le opere di carità spirituale e materiale.
Gregorio XVI approva l’Opera e a Roma tutti hanno grande stima per don Vincenzo. Ma la sua società d’apostolato, dopo un buon inizio, passa da un ostacolo all’altro, e vede sempre rinviata l’approvazione delle sue regole (fino al 1904). Vincenzo muore con la fama di sant’uomo che ha fatto uno sbaglio. Quello sbaglio che però andrà avanti, trovando i Pallottini sempre vivi e operosi alla fine del XX secolo. Quello sbaglio che ha portato aria nuova nella Chiesa, ma che rallenterà la causa della sua canonizzazione, sempre con malintesi e miopie intorno all’iniziativa. Ci vorrà papa Pio XI a spazzare riserve e diffidenza, proclamando Vincenzo "operaio vero delle missioni", "provvido e prezioso antesignano e collaboratore dell’Azione Cattolica". Giovanni XXIII lo proclamerà santo nel 1963. Due anni dopo, il decreto Apostolicam actuositatem del Vaticano II dirà solennemente: "I laici derivano il dovere e il diritto all’apostolato dalla loro stessa unione con Cristo Capo". Le parole di Vincenzo Pallotti risuoneranno così, dopo 130 anni, nella Chiesa universale con la voce di Paolo VI e dei vescovi di tutto il mondo.

Autore: Domenico Agasso

Fonte:  

Spunti bibliografici su San Vincenzo Pallotti a cura di LibreriadelSanto.it

Vincenzo Pallotti (san), Un apostolo dell'infinita misericordia di Dio, San Paolo Edizioni, 2006 - 112 pagine
Altri suggerimenti...


Saint Vincent Pallotti
Memorial

22 January
Profile

Born to the Italian nobility. Priest. Taught theology. He lived in constant danger working with the sick during a cholera epidemic. Highly successful fund-raiser for charities for the poor. Founded guilds for workers, agricultural schools, loan associations, orphanages and homes for girls. Felt a strong calling to bring Christ to Muslims, and founded a program to incorporate lay people in the apostolate of priests. Founded the Pious Society of Missions (Pallottines) for urban mission work. Started the special observance of the Octave of Epiphany for the reunion of the Eastern and Roman Churches, and the return of the Church in England.

Born
21 April 1795 in Rome, Italy

Died
22 January 1850 in Rome, Italy from a severe cold
probably caught the fatal illness on a cold rainy night when he gave his cloak to a beggar who had none

Venerated
24 January 1932 by Pope Pius XI (decree on heroic virtues)

Beatified
22 January 1950 by Pope Pius XII

Canonized
20 January 1963 by Pope John XXIII

Prayer
Prayer to Saint Vincent Pallotti
Prayer of Saint Vincent Pallotti to Mary, Queen of Apostles
Apostolic Prayer of Saint Vincent Pallotti


Additional Information
Book of Saints, by the Monks of Ramsgate
Catholic Encyclopedia
New Catholic Dictionary: Saint Vincent Pallotti
New Catholic Dictionary: Pallottines
Wikipedia
Our Sunday Visitor’s Encyclopedia of Saints, by Matthew Bunson, Margaret Bunson, and Stephen Bunson


Readings
Since God is perfect in loving man, man must be perfect in loving his neighbor. - Saint Vincent Pallotti

Not the goods of the world, but God.
Not riches, but God.
Not honors, but God.
Not distinction, but God.
Not dignities, but God.
Not advancement, but God.
God always and in everything.
- Saint Vincent Pallotti

Remember that the Christian life is one of action; not of speech and daydreams. Let there be few words and many deeds, and let them be done will. - Saint Vincent Pallotti

You must be holy in the way that God asks you to be holy. God does not ask you to be a Trappist monk or a hermit. He wills that you sanctify the world and your everyday life. - Saint Vincent Pallotti


MLA Citation
“Saint Vincent Pallotti”. Saints.SQPN.com. 21 April 2012. Web. {today’s date}.
 
  



764 0

추천 반대(0)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