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일강론

사순 제5주일(나해) 요한 12,20-33; ’24/0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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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흥보 [peters1] 쪽지 캡슐

2024-03-09 ㅣ No.5696

사순 제5주일(나해) 요한 12,20-33; ’24/03/17

 

언젠가 한 번,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교황님의 집무실을 방문하는 분들에게 보시라고, 이런 글을 적어 놓았다고 합니다. “불평 금지!” 그리고 언젠가 또 한 번은 우리가 다른 사람에 대한 뒷담화만 안 해도 성인이 될 수 있다.”라고도 하셨습니다. 그럼 어떻게 살라는 것인가? 좋은 것만 보고, 좋은 말만 하고 살라는 말인데. 안 좋은 것을 보고서 좋다고는 할 수 없을지 몰라도, 안 좋은 것을 보고 안 좋다고 판단하여 단죄하면서 죄짓지는 말아야겠다고 하시는가 봅니다. 사회적인 범죄이거나 나나 공동체에 심각한 손해와 폐해를 끼치는 것이 아니라면, 천상 속으로 삭이거나 참아주거나, 못 본 체하거나, 그저 저것도 각자의 개성이겠거니라고 존중해 주면서 넘어가는 수밖에 없겠구나 싶습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이스라엘 축제기간에 예루살렘 성전에 예배를 드리러 온 사람들 중에는 그리스 사람도 몇 명 있었다고 합니다. 그들 중 몇몇이 갈릴래아의 벳사이다 출신으로 예수님의 제자가 된 필립보에게 다가가 선생님, 예수님을 뵙고 싶습니다.”(21) 라고 청합니다. 그러자 필립보가 안드레아에게 말하고, 안드레아가 필립보를 데리고 예수님께 가서 말씀드립니다. 그러고 보면, 예수님께 가기까지에는 여러 명의 제자들에게 단계적으로 청해야 했나봅니다. 우리도 가끔 사람들이 우리에게 무언가를 청하거나 어려운 사람들을 보면 지체없이 주 예수님께 고해야겠습니다. 물론 성모님과 성인들의 전구도 아울러 구해야겠습니다.

 

안드레아와 필립보의 이야기를 들으신 예수님께서는 이제 유다인들뿐만 아니라 그리스 사람들에게까지 소식이 전해진 것을 알아차리시고는 사람의 아들이 영광스럽게 될 때가 왔다.”(23) 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엉뚱한 소리를 하십니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24) 다른 나라에 나가지 않고 이스라엘에만 머물면, 우물 안의 개구리가 된다는 것인가, 아니면 난데없이 죽음 이야기가 왜 나오는가? 씨가 심어지지 않으면 꽃도 열매도 열리지 않는다는 이야기는 알겠는데, 왜 그것을 죽음에 연관시키시는가?

 

그것은 우리가 죽고 싶어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아니 죽으면 끝이라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죽으면 더 이상 만날 수도 없고, 더 이상 자신의 뜻을 펼칠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죽기 전에 자기 뜻을 필치기를 바라고, 죽기 전에 하나라도 더 이루고 떠나기를 바랍니다. 그러기에 언제 올지 또는 안 올지도 모르는 위험을 대비하여, 오늘 자신의 것을 꽉 움켜잡고 기회가 있을 때, 가급적이면 더 많은 것을 취하고 이루려고 합니다. 그런가 하면 더 취하고 더 이루기는커녕, 요즘 일반적으로 자기 가족 하나 먹여 살리기도 빠듯한데, 어떻게 남을 돌볼 수 있는가? 게다가 앞으로 오래 오래 잘 살기 위해서는, 지금보다 더 많이 벌고 더 높아져야 그나마 살 수 있는데, 그 걸 잘 아시면서도 우리더러 마다하라고 하시는가? “자기 목숨을 사랑하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목숨을 간직할 것이다.”(25) 하물며 남을 위해 희생까지 하라는 말씀이신가?

 

누구든지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라야 한다. 내가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사람도 함께 있을 것이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면 아버지께서 그를 존중해 주실 것이다.”(26) 예수님의 이 말씀은 믿는 우리가 자기 혼자 열심히 미사 참례하고 충실히 기도하며, 규정을 잘 지키면서 단순히 죄짓지 않고 착하게 사는 것만으로는 부족하고, 다른 이들의 구원을 위하여, 자신을 희생하여야 한다고 명하십니다.

 

마치 나 하나 잘 살겠다고 아등바등 하며 이것 저것 청하는 것은 들어주시지 않겠지만, 우리가 만일 다른 사람을 구하기 위해 애쓰는 것은, 귀 여겨 들어주겠다고 말씀하시는 듯합니다.

 

사도 성 바오로는 오늘 독서에서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 계실 때, 당신을 죽음에서 구하실 수 있는 분께 큰 소리로 부르짖고 눈물을 흘리며 기도와 탄원을 올리셨고, 하느님께서는 그 경외심 때문에 들어 주셨습니다.”(히브 5,7) 라고 전합니다. 로마 군인들이 채찍질을 할 때, 예수님이라고 안 아프셨겠습니까? 십자가에서 돌아가시면서 예수님께서 봉헌하신 생명은 여러 개 생명들 중의 하나였거나, 없어져도 그만이거나, 없어지거나 손상되면 자동으로 다시 재생되는 생명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생명도, 다른 뭇사람과 똑같이 내어주면 죽고 마는, 이 생애를 걸쳐 하나뿐인 귀한 생명이었습니다. 그러기에 생명을 내놓기까지, 참으로 힘겨운 결정을 내리셨으리라고 봅니다.

 

예수님이라고 해서, 구원의 방법론 선택에 대한 번민과 고민이 왜 없으셨겠습니까? 예수님이라고 해서, 생명에 대한 고귀함과 이승에 대한 아쉬움이 왜 없으셨겠습니까? 하지만 주 예수님께서는 그 모든 것을, 하느님 아버지의 뜻에 따라 내놓으셨습니다. 아버지 하느님께서 아들 예수님의 생명을, 다른 사람들의 구원을 위한 희생제사의 죗값으로 내놓기를 바라신 그대로, 예수님께서는 하나뿐인 생명을 바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드님이시지만 고난을 겪으심으로써 순종을 배우셨습니다.”(8)

 

주 하느님께서는 예수님께서 아버지의 뜻대로, 자기 생명을 희생제물로 바치시는 것을 보시고는, 아들 예수님께 다시 생명을 내주셨습니다. 그렇게 예수님께서는 우리 생명의 주인, 바로 주님이 되셨습니다. “완전하게 되신 뒤에는 당신께 순종하는 모든 이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셨습니다.”(9)

 

예레미야 예언자는 이 구원의 현실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그들의 가슴에 내 법을 넣어 주고, 그들의 마음에 그 법을 새겨 주겠다. 그리하여 나는 그들의 하느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될 것이다.”(예레 31,32)

 

내 소망이, 주 예수님께서 세상의 구원을 위해 몸소 걸으셨고, 또 오늘 이 자리에서 주님을 믿는 우리가 수행하기를 바라시는 소망과 같다면?

 

내 소망이, 나와 내 그룹의 사회적인 입신양명과 신분상승에 그치지 않고, 주 하느님께서 나와 함께 동시대를 살아가라고 보내 주신, 형제자매들의 보다 낳은 삶을 위한 봉사로 귀결된다면?

 

내 소망이, 나와 내 가족, 내 그룹 삶의 물질적인 풍요와 안녕을 위한 재정축재와 미래를 위한 비축에 그치지 않고, 내가 간직하고 있는 내 몫의 재물이, 하느님께서 형제자매들과 나눠 쓰라고 내게 맡겨주신 재물이라고 여긴다면?

 

우리 시공의 존재와 삶은 자유롭고 행복할 것이고, 주 하느님과 형제자매들로부터 존중받을 것입니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요한 12,24)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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