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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매일미사 소식 12호] 평화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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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성준 [praxis] 쪽지 캡슐

2009-04-17 ㅣ No.9272

용산참사의 올바른 해결을 위한 매일미사 소식
제12호 | 2009년 4월 17일
용산참사의 올바른 해결을 위한 매일미사
■ 제41차 촛불평화미사가 용산참사 현장에서 봉헌됩니다.
- 일시 : 2009년 4월 18일(토) 저녁 7시
- 장소 : 참사 현장 (지하철 4호선 신용산역 2번출구-직진)
- 집전 : 문정현 신부님, 이상윤 신부님

■ 이명박 정부가 용산참사에 대해 회개하고 참사의 진실이 밝혀질 때까지 매일미사는 계속됩니다. 많은 참석 부탁드립니다.
- 일시 : 매일 저녁 7시(일요일 제외)
- 장소 : 참사 현장 (지하철 4호선 신용산역 2번출구-직진)


미사소식

1. 4/16(부활 팔일 축제 내 목요일) 미사

4/16(목) 저녁 7시, 용산참사 현장에서 매일미사가 봉헌되었습니다. 이강서 신부님(서울교구 빈민사목위원회 위원장, 장위1동선교본당 주임)과 문정현 신부님께서 함께 집전하셨습니다.

강론 (이강서 신부님) - 일부

찬미예수님.

저는 서울교구 빈민사목 이강서 신부입니다.
부활때도 함께 미사를 봉헌했지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온 세상을 기쁘게 하고 있는데
누구보다 기뻐야 할 사람들이 용산의 희생자들이고
이 현장을 지키고 있는 철거민들이라는 사실을 기억하고자
이 자리에 다시 왔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 가운데에 서시어, “평화가 너희와 함께!” 하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복음. 루카 24,36)

성경은 늘 우리에게 많은 영감을 불러 일으킵니다.
여기 앉아계신 분들 중에 많은 분들이 천주교 신자이실텐데
신자가 되려는 예비자들에게 왜 천주교 신자가 되려고 하느냐
제가 예전에 설문지를 통해 물어본적이 있습니다.
그때 10명 중에 9명이 이런 답변에 체크했습니다. 마음의 평화를 위해서.
마음의 평화를 위해서 천주교를 믿겠다고 쓰신 거죠.

그분들의 지향은 아마 여기 앉아계신 다른 분들에게도 공감대가 생길지 모르겠습니다.
불교도 그렇고 심지어는 무당을 찾아가는 것도 마음의 평화를 위해서 간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하고 말씀해주시는 그 평화는
우리가 바라는 그 평화를 말씀해 주시는거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저는 두 가지 점에서 우리가 착각할 수도 있겠다는 점을 상기시켜 드리고자 합니다.

우선, 예수님께서 오늘 제자들에게 하신 평화의 인사에서,
평화는 물론 모든 사람에게 열려있는 평화이기도 하지만
불특정 다수에게 아무나 들으라고 하는 평화의 인사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평화를 인사하는 이분이 어떤 분입니까?
참혹하고 억울하고 비참하게 십자가에서 치욕스런 죽음을 겪었던
그 수난과 고통을 겪었던 그분의 입에서 나온 평화라는 점이 첫 번째입니다.
누구라도 평화를 얘기할 수 있지만,
그 치욕스런 상황을 겪어 본 사람이 얘기하는 평화는
평화의 무게가 다른 것입니다.

평화의 인사를 들은 사람은 누구입니까?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했던 대사제들, 백성의 지도자들,
그리고 이것도 저것도 모른채 부화뇌동해서
예수님을 십자가에서 죽여도 싸다고 외쳤던 사람들에게 건네진 평화의 인사가 아니라,
예수님을 믿었던 죄 때문에 집 밖으로 나가지 못하고
무서워서 집안에 모여 있던 제자들에게 하신 인사였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어떤 영웅들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이 붙잡혔을 때 모두 도망갔던 나약하고 겁 많고
사실 우리와 다를 바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따라서 오늘 예수님이 평화의 인사를 한 것은
모진 괴로움과 고통, 치욕 속에 사는 사람에게 건네는 인사말인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 있는 우리에게 하는 인사말이라는 것을
우리는 먼저 기억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두 번째.
우리 세상에는 평화를 바라지 않는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모두가 원합니다.
세상이 평화롭기를 바라고, 우리나라가 전쟁 없는 평화로운 나라이길 바랍니다.
우리 사회가 있는 사람 없는 사람 갈라서 싸우지 않고
화목하게 평화롭게 살기를 바라지 않는 사람이 있나요?

없지요. 없습니다.
성당에서도 매 주일 미사 때 세계평화를 위해 보편지향기도를 하지 않습니까?

이렇게 모든 사람들이 평화를 기도하지만
여전히 우리 사회가 평화롭지 못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여전히 평화를 위해 기도하는 사람이 소수이기 때문에 그렇습니까?
그럴 수도 있겠지요.

문제는 평화가 입에만 있기 때문에 그렇지 않을까요?
입으로만 평화를 원하고, 입으로만 평화를 기원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평화를 이룩하기 위한 수단, 평화를 성취하기 위한 방법,
그것을 이루기 위한 계단들은 우리가 아는 바 없고 관심없고,
오로지 듣기 좋은 말로만 평화를 얘기하고 있기 때문에
여전히 우리 나라가 우리사회가 평화와 먼 폭력과 전쟁,
그리고 힘없는 사람을 짓밟는 참담한 현실이
조금도 줄어들지 않는 것은 아닌가 되돌아 보게 됩니다.

그렇다면 오늘 예수님이 건네주는 평화의 인사의 알맹이가 무엇입니까?
불특정 다수에게 듣기 좋으라고 말로 인사한 것도 아니고,
그냥 입으로만 단어로만 존재하는 평화를 얘기하신 것이 아닌,
실제 참평화를 말하신 거라면,
그 평화는 무엇이고 우리는 어떻게 그 평화를 경험할 수 있습니까?

1963년, 당시 교황님인 요한 23세가 지상의 평화라는 짧은 회칙을 써냈습니다.
그때는 쿠바 미사일 위기, 미국과 소련이 핵전쟁을 할 일촉즉발의 위기,
세계 평화가 풍전등화의 위기에 있을 때였습니다.
그때 교황님이 쓴 회칙에는 우리 모두가 염원하는 평화를 이루기 위해 해야할 몇가지가 있습니다.

인간이 인간으로서 존중받을 때 평화가 시작됩니다.
인간의 권리와 인간의 의무가 있는데,
인간이 짐승과 구별되고 인간이 인간의 존엄성을 존중받을 권리는 남에게 양도할 수 없고,
남에게 맡겨질 수 있는 권리가 아니고, 각자가 지켜야 합니다.
그리고 내가 주장하는 권리는 동시에 타인에 대한 의무입니다.
아무도 권리를 존중하거나 지키려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구호에 불과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모든 인간은 존엄하다", "인권은 절대로 침해받을 수 없다"고 우리는 선언하고 외치지만,
다른 사람이 그 권리를 우습게 여길 때, 인정하지 않을 때,
지켜야 할 의무라고 대하지 않을 때 그것은 구호에 불과한 것입니다.

국민이 세금을 내면서 인간이 한 국가에서 살 때,
국가는 국민의 기본권을 지켜야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우리가 국가에 권력을 준 이유가 그것입니다.
그런데 국가가 기본권을 지켜주지 않고 오히려 짓밟는다면
우리가 이야기하는 인권은 허공에 떠도는 외침에 불과하게 됩니다.

세계평화, 우리가 염원하는 우리 나라, 우리 사회, 우리 마음의 평화는,
우리에게 양도할 수 없는 권리가 있다는 생각,
그리고 나의 권리가 중요한만큼 타인의 권리도 소중하다는 마음이 없다면
평화는 그 어디에도 발붙일 수 없는 것입니다.

평화는 힘있는 사람이 힘없는 사람에게 사탕 주듯이 주는 것이 아닙니다.
각자가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고유한 선물이 바로 평화입니다.

이 평화를 위협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첫째는 우리 욕심입니다.
둘째는 칼자루를 쥔 힘있는 사람들이 이 평화를 위협하는 것입니다.

세계평화는 한 인간의 존엄성을 지켜줄때
바로 그 때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근 3개월 전에 세계의 평화, 한 나라의 평화가
무참하게 허망하게 불로 사라지는 현장을 목격했고
바로 그 현장에 와 있습니다.

예수님이 그 평화를 얘기하셨습니다.
있지도 않은 평화를 얘기하는게 아니라
우리가 평화를 되살리는 그 사람이라고 얘기하고 계신 것이지요.

어제 독서말씀이었지만, 사도행전에서 베드로와 요한이 사람을 멀쩡하게 고치는 기적을 행했습니다.
자초지종을 듣고 보니 죽은줄 알았던 예수라는 사람이,
이 사람들에게 힘을 줘서 놀라운 일을 하게 했구나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것입니다.

우리 머릿속에는 죽으면 끝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죽으면 끝이야..."
우리 생각이 옳지 않다는 것을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이 증명해 보였습니다.
죽으면 아무 힘도 쓰지 못할 줄 알았는데,
우리 머릿속에서 잊혀질줄 알았는데,
죽으면 다 끝날 줄 알았는데, 안죽더라는 것입니다.

심지어는 살아있는 사람도 그렇게 할 힘이 없는데,
죽은 줄 알았던 예수라는 사람이 산 사람도 하지 못하는 일을 하고 있구나,
이것이 바로 부활의 증언입니다.

지금 이명박 정부, 경찰, 검찰,
그리고 용산 문제를 바라보면서 불편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의 공통점은
이 사람들이 죽어서 아무런 힘도 쓰지 못하고
우리 뇌리 속에서 없어져줬으면 하고 바라는 것일 겁니다.

하지만 보십시오.

돌아가신 희생자들이 살아 있는 사람들보다 몇십배 몇백배 상상할 수 없는 힘으로 되살아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성경속이나 성당에서 기념하고 그치는 사건이 아닙니다.
우리가 살면서 매일매일,
죽은 이가 산 이보다 더 큰 힘으로 우리 사회를 바로 만들고
우리의 삐뚤어진 마음을 새롭게 하고 있다는 것을 기억하는 것,
그것이 우리가 이곳에서의 미사를 통해 경험하고 있는 것입니다.






2. 용산참사 유가족 돕기 콘서트 라이브에이드 LIVE AID 희망

용산참사로 아픔을 겪고 있는 유가족들을 위로하기 위해 이상은, 윈디시티, 킹스톤 루디스카, 블랙홀, 브로콜리 너마저, 오! 부라더스, 흐른, 갤럭시 익스프레스 등 뮤지션들이 나섰습니다.
뜻깊은 이 자리에 여러분 모두를 초대합니다!

□ 일시 : 2009년 4월 23일[목]- 24일[금] 7시 30분
□ 장소 : 추계예술대학교 추계콘서트 홀(2호선 아현역 2번출구)
□ 문의 : 749-0883 (콘서트 준비위)
□ 후원계좌 : 하나은행159-910003-67004 예금주 문화연대
□ 주최 : 용산참사 유가족 돕기 콘서트 준비위원회 주관_문화연대
□ 티켓 판매가 : 1일 공연 20,000원
□ 본 행사의 수익금은 용산 참사 유가족에게 전달합니다.



3. 구술집 '여기 사람이 있다' 판매중입니다

[책소개] '여기 사람이 있다'
- 평범하게 살고싶은 사람들의 어쩔 수 없는 희망모음


- 문재훈(서울남부노동법률상담센터 소장)

용산에서 경찰에 의해 학살이 일어난 날 나는 하루 종일 입 속으로 욕만 했다.
“이 개새끼들아!”
거기에 도대체 더 뭘 말해야 할까? 프랑스의 아베 피에르 신부는 ‘이웃의 가난은 나의 수치’라고 했다. 본문에서 조세희 선생님은 ‘이웃 아이가 배고파 밤새우는데 그것을 그치지 않게 놔두는 것도 폭력’이라 한다. 수치를 느끼고 침묵조차 폭력이라 느끼는 이 숭고한 영혼이 되지는 못할망정 사람 죽여놓고도 외려 가해자가 피해자를 탓하는 야만의 나라에서 욕이라도 맘껏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3달이 가까워 오는데도 어느 누구 하나 책임지는 이가 없다. 그 답답한 가운데 송경동 시인으로부터 ‘대한민국 개발잔혹사’ 『여기 사람이 있다』가 물경 수십 권이 배달됐다. 사서 읽는 것만으로 끝나서는 안 되는 책이라고 한다. 책을 한권이라도 팔아 용산 투쟁에 연대하라는 것이다.

책을 펼치는 마음이 무겁다. 박래군 선배의 발문이 아프다. 그런데 너무 익숙하다. 비참 슬픔이 또 한 가득 하겠구나는 생각. 기륭전자 여성비정규직 천막을 지키면서 한번에 읽어 버렸다. 나도 어쩔 수 없이 눈시울이 자꾸 젖는다. 슬퍼서가 아니고 분해서가 아니다. 그것을 넘는 무엇이 있다. 그 무엇을 찾기 위해 하루가 더 흘렀다. 그리고 내 식대로 결정했다. 이 책은 ‘평범하게 살고 싶은 사람들의 어쩔 수 없는 희망 모음’이지 비참이나 슬픔을 모아 놓은 것이 아니라는 거다.

힘으로 이성을 만드는 이들이나, 이성으로 힘을 만드는 이들이나 먼저 들어야 할 것이 있다. 이 외침이다. “여기 사람이 있다.” 머리도 돈도 권력도 아닌 가슴이, 몸이 그리고 그 땀 냄새 가득한 피멍들의 외침을 먼저 들어야 한다. 반 호흡 먼저 가고, 반 호흡 더 거칠게 가고, 반 호흡 더 아픈 길을 가는 이들, 현장에서 투쟁하는 이들의 근육 마디마디가 토해 내는 말들을 먼저 들어야 한다.

책 속에서 철거민들이 외치는 말들은 언뜻 슬픔과 한과 분노와 절망같다. 하지만 그들의 말에 담긴 진체(眞體)를 보면 ‘여기 희망이 있다’라는 질긴 소망이 요동치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슬픔과 분노 속에 잉태한 연대와 참세상을 향한 희망이 오롯하게 담겨 있다.

그렇다. 구술하는 평범한 투사들의 말이 나에게는 지독하지도 불편하지도 않았다. 서러움 밑바닥에 단단히 다져 있는 것은, 바다 표면의 출렁이는 물결 밑에서 바다를 결정하는 거대한 해류처럼 흐르는 것은 여전히 ‘사람이라는 희망. 투쟁이라는 낙관’이었다. 깡다귀로 통박으로, 그리고 투쟁으로 만든 낙관주의가 소용돌이 치고 있기 때문이다.
보자. 그들의 투쟁은 이렇게 시작한다.

“남들에게 누추해도 우리에겐 궁전인 것이 내 집이다. 그게 무허가라 해도 그게 셋방이라 해도. 우리 가족만의 궁전이 재판 판결도 나기 전에 외출한 뒤에 사라졌고 그래서 막막하고 기가 막히고 참담해도… 법을 모르면 안주고, 법을 알아도 싸우지 않으면 주지 않는 탐욕에 맞서 우리 대에 철거민으로 더 이상 쫓겨나지 않는 것을 목적으로...”(유순복)

그들은 ‘임대’라는 이름의 슬픈 궁전일망정 우리 후세대에게 철거의 아픔, 송두리째 삶의 둥지를 말살하는 아픔을 남겨주지 않기 위해 투쟁을 하는 것이다. 그 투쟁은 언제나 연대투쟁이다. “우리가 힘이 약하니 힘을 빌리기 위해 시작한 연대”가 “궂은 일이 있을 때 도와줘야 우리도 도움을 받는 것”이라는 품앗이 정신으로 나가다 “모두가 한 식구(食口)가 되는 그 연대”를 한다. 누가 사주한 것이 아니다. 언제나 그렇듯 투쟁의 첫 걸음은 떨림이다. 그 떨림이 무서움에서 새로운 희망의 설렘으로 변하기까지는 많은 고난이 필요하지만 말이다.

“처음엔 너무 너무 무서워 뒤로 물러서지만 우리가 무섭게 싸우지 않으면 이기지 못한다는 것을 알게 되고 이제는 어는 순간에도 물러서지 않는 강한 사람이 됐지... 평범하게 사는 꿈을 이루기 위해 미안하게 교회도 투쟁이 끝난 뒤에 가기도 했지만... 거짓이라는 것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조명희)

용역깡패, 백골단, 구사대라는 말은 시대의 수치를 상징했다. 몸과 마음이 다 양아치인, 인간적인 것 공동체적인 것의 적이다. 하지만 그들이 입고 있는 갑옷은 개발 자본이고 그들이 든 몽둥이는 경찰이고 그들이 든 방패는 법이었다. 아무도 누구도 돈독에 중독돼 이 시대 가장 슬픈 단어인 철거민들을 짓밟고 죽일 때 철거민이 가진 것은 오직 하나 사람다운 공동체를 지키려는 “정의감과 그마저 짓밟는 것에 대한 ‘깡’이었다.”

욕된 용역깡패와 둥지를 지키려는 철거민의 대립은 각박하다. 다들 목숨을 걸고 있다. 하지만 다르다. 용역은 돈벌이지만 철거민은 생명이고 생존이기 때문이다. 죽음을 불사한 ‘깡다귀’가 있어 희망과 절망은 나뉜다. 그렇게 목숨을 건다는 것이 바로 연대를 찾고 조직을 묶는 것이다. 전철연이 만들어지는 역사다. 철거민들의 자주적 자발적 조직 전철연의 조직 비결을 그들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저들은 외부세력이라 하지만 한 식구, 그렇다 우리는 함께 밥을 먹는 식구(食口)인 것이다.”(정찬래)

20여년 동안 화장품 가게를 하며, 편의점을 하며, 식당을 하며, 책대여점을 하며 평생 경찰서 구경 한번 안해 본 사람들이 투쟁을 한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다.

“위험하니깐 가족들이 굉장히 반대했어요... 그래도 우리 생존권을 우리가 못 지키면 바보라고 생각해요. 우리 같은 밑바닥들이 꿈틀꿈틀해야 바뀌잖아요. 없는 사람끼리 힘을 합치면 거기에 나도 조금 힘을 보태자는 마음이 밑바닥에 있어요.”(박선영)

오랜 투쟁으로 사회적 냉대와 차별을 함께 받는 아이들에게 미안하다. 하지만 어쩌랴! “아빠가 잘못하고 있지 않다.”(김창수)

철거 중장비, 용역깡패의 패악에 맞서 ‘악으로 깡으로’ 하는 철거 저지 투쟁은 천막농성투쟁으로, 그리고 골리앗 망루 투쟁으로 이어진다. 삶에, 생활고에, 주변의 압력에, 투쟁의 피로함에 저절로 떨어져 나갈 것을 믿고 뭉개는 자본의 폭압에 맞서 긴 투쟁의 시간은 힘들지만 그들은 또 다른 희망의 속살을 채운다.

“천막 투쟁을 하면서 많이 바뀌었어요. 소유하는 것이 달라졌어요. 저도 이전에는 남편을 소유하려고만 했어요. 이 사람은 내 것이다. 하지만 아니잖아요. 개인(주체)과 개인(주체)이 만나는 거잖아요. 기업이 노동자를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일한 것을 돌려주는 거잖아요... 살 땐 물론 지겹고 그랬지만 지금 생각하면 그런 생각이 나요. 인간적인 냄새가 나는...”(이영희)

외로워서 힘이 들기도 하다.

“상황이 정말 터무니없었어요. 잘못된 법에 가난한 사람만 죽는 거예요. 그런데 한사람의 소리만으로 부족해요. 여럿이 모여 사람들의 귀를 잡고 철거민들에 대한 법이나 서민들에게 잘못된 것들을 고쳐야 한다고 생각했죠.… 세입자에 대한 편파가 너무 심해요… 그런데 잘못된 것을 잘못됐다 지적하면 이상하게 말을 한 사람을 나쁘게 봐요. 그 사람의 말을 보지 않아요. 나쁜 게 있을 때 그걸 나쁘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으면 호응이 되는데... 없는 사람은 계속 없어야 하고 있는 사람은 계속 있어야 한다는 법안에 있으니 가난한 사람이 더 많아지는 것 아니에요”(박명순)

하지만 실망보다 다짐이 강해야 한다. 단 한 가구가 남아도 포기한 99%가 희망이 아니라 남은 1%가 희망이기에.

“정말 너무 너무 힘들어도 철거민 투쟁 그만 두어야하겠다는 생각 한 적은 없다. 내 생존권, 내 인권,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권리를 찾아야 해요. 우리를 말살하려고 하는데 힘들다고 그만두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승리를 한다고 확신해요. 승리한다.”(최순경)

그리고 최후의 거점이 바로 망루다.
기실 망루에 오르는 것은 귀가 꽉 막힌 세상과 소통하고자 하는 호소의 몸부림일 뿐이었다. “난 이런 것을 요구한다. 얘기하러 올라간 사람들이에요.”(정영신) 얘기 좀 하자고 했더니 불벼락을 준 것이 삼성이고 이명박 정부라는 것이다.
망루는, 그 하늘로 오르는 마지막 계단은 “조금만 여유가 있다면 아마 싸우지도 않을 이들이 세운 마지막 방주(方舟)”인데 “나가서 때릴 힘은 없어도 들어오는 놈 막을 수 있는 든든한 기지”이기도 했다. 철거민들도 망루로 오르기 싫다. 하지만 그 길밖에 없기에 오를 수밖에 없는 아픔의 길이었다. 이렇게 의지와 무관하게 되는 것이기에 망루는 그것에 대한 대처가 범사회적이고 공공체적이어야 한다는 사실을 호소하는 우리 사회의 비상벨이었다.(성낙경)

이런 절박한 철거민들의 연대와 투쟁은 가끔 승리를 가져오기도 했다. 하지만 그 승리의 대가는 정부가 언론을 통해 공작했듯 수천만 원의 부정한 돈이 아니라 이웃과 동지들의 마음이 담긴 한잔 술이었다.

“거저 얻는 것도 없고 기다리다 쪽박차는 것이 서민의 처지다. 잔머리 잘 굴려 자기만 살짝 투쟁을 피해 실속을 차린 듯 하지만 바로 그게 자본과 토호들의 노림수일 뿐이다. 집을 마련할 수 없는 사람은 차라리 투쟁을 해야 한다. 투쟁을 하면 임대 아파트는 얻는다. 자기 집도 아닌데 겨우 임대 아파트에 복권 당첨한 것보다 더 기뻐한다. 승리하면 연대해서 고생했다고 술 한 잔 준다. 너무너무 감사하다.”(인태순)

이런 이들이 정부가 브로커라고 얘기했던 전철연의 철거민들이었다. 그들의 수괴라고 했던 남경남 의장의 한달 상근비가 50만원이라고 한다. 사무실 유지 경비를 위해 1년에 두 차례 대학식당을 빌려 후원주점을 연 것이 전부였다고 한다. 목숨을 걸고, 구속을 각오하고 이웃 철거민들을 돕는 이들의 눈물겨운 삶이다. 우리가 오히려 그들에게 미안해 해야 하지 않을까. 고마워해야 하지 않을까. 승리한 철거민들과 연대해준 동지들 모두가 서로에게 감사하는 이 눈물겨운 삶들. 이마저 얻지 못해 평생 떠돌아다닐 투쟁을 중도에 포기한 이웃 철거민들이 안쓰러워 또 가슴 한쪽 미어지는 사람들.

그렇다면 이들은 왜 떠나지 않고 싸울까? 포기하고 새로운 삶터를 찾아가지 않을까. 왜 이들은 바닷물의 97%가 아니고 그 바닷물을 썩지 않게 만드는 3%가 되어 외롭게 지독하게 아프게 싸우는 것일까? 그 궁극은, 즉 이 책이 내릴 철거민들의 결론은 이것이 아닐까?

“철거민이 곧 노동자다. 노동운동에도 눈을 떠야 한다. 철거민은 자본주의 모순. 그 모순에 의한 폭력이다. 철거민만의 운동으로 자본주의 모순을 절대 해결할 수 없다. 노동자 철거민 농민 다 함께 해야 한다.”(남경남)

마지막으로 죽음 앞에서 살아남은 사람들, 살아남아 앞서서 간 이들을 오직 가슴 아픔만으로 기억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슬프다. 하지만 이 슬픔이 희망의 거름이 될 것을 또한 보여준다. 참사 당시 건물에 매달렸다 툭하고 국민들의 가슴과 함께 떨어져 내려 지금도 병원에 있는 이는 말한다.

“후회는 안 해요. 평생 두발로 못 걷는다 해도… 우리나라 정부는 누가 죽어야 귀를 기울여요. 이렇게 해서라도 법을 뜯어 고쳐야죠. 없는 사람만 착취하고 없는 사람 거 뺏어다 있는 사람들 도와주는 것이 무슨 나라예요... 며칠 전에 우리 철대위 초대 위원장이셨던 일흔이 넘으신 분이 병문안을 왔어요. 한정식을 오래 하신 분인데 ‘투쟁 끝나면 함께 식당을 하자’고 그러시데요. 고맙죠.”(지석준)

세상의 비참, 세상의 고통, 보이지 않는 통로, 전혀 뚫릴 것 같지 않은 불통의 조건 속에서 목숨을 걸고 투쟁하는 철거민들은 치열하다. 하지만 그들의 요구는 소박하다 못해 초라하다. 그 소박하고 평범한 소망을 위해 목숨을 바쳐야 하는 사회가 좋은 사회일 수 없다.

하지만 철거민들은 투쟁 속에서 가난한 자의 처지, 부자들만 옹호하는 법 제도 권력, 그것을 고치기 위해 필요한 투쟁, 투쟁을 승리하기 위해 반드시 잡아야 하는 연대의 손, 그 손길에서 느끼는 인간의 냄새가 향기로 피어나는 자유롭고 평화롭고 평등한 공동체를 희구한다. 가난해서 함께 아파서 나눌 줄 아는 그들이 희망이고, 이들의 하루하루가 바로 우리 사회 밑바닥, 아니 토대로부터 단단하게 다져지는 희망 아닐까?

님을 위한 행진곡이 아직 절절한 세상은 어둠의 세상이니 이 어둠을 건너는 투쟁의 불길만이 희망이다. 이 책은 그런 희망들의 모음이다. 한 식구가 되는 진정한 연대의 손길을 내밀어 소통을 호소하는 간절한 희망이다.

사람들이여 일독하라.


■ 주문 방법
- 개인 구입은 서점을 이용해 주시면 됩니다.
- 단체 주문은 범국민대책위로 해주시면 됩니다.
* 책을 받고 판매 후 입금해주셔도 됩니다.
* 판매를 통해 조성된 기금은 전액 추도기금으로 쓰입니다.
* 입금 계좌 및 담당자/302-0005-1159-01(농협중앙회/김덕진)

이명박정권 용산철거민 살인진압 범국민대책위원회
02-795-1444/mbout.jinbo.net/mbout@jinb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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