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북한관련

자식을 버린 자보다 더 나쁜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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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광식 [guten1273] 쪽지 캡슐

2008-12-14 ㅣ No.8948

조선 후기의 실학자 정약용은 딸을 버린 사람이다. 

유배지에서 자신을 돌봐 준 주막집 여자가 낳은 딸이다.   그 여자의 신분이 비천하지 않았다면 그러지 않았을 것이다.    정약용은 떠나보낸 홍임이 모녀에게 연민의 정조차 베풀지 않았다.    유배지 강진 시절의 제자가 마현으로 찾아왔을 때, 정약용은 "이엉은 새로 했는가? 우물 축대의 돌들은 무너지지 않았는가? 못 속의 잉어 두 마리는 더 자랐는가?" 하고 시시콜콜 물으면서도 그 곳을 지키고 있는 홍임이 모녀에 대해선 한 마디도 묻지 않았다.  

 

프랑스의 계몽주의 사상가인 루소는 자신의 다섯 아이를 고아원에 갖다 버리라고 산파에게 지시한 사람이다. 

  그는 산모에게는  ' 당신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라며 그녀를 설득한다.  이후 그는  평생 꼭 한 번 맏이의 행방을 수소문해 보았을 뿐이다.   이러한 사실은 자신을 무신론자라며 공격하는 루소에게 분노한 볼테르가 익명으로 출판한  <시민의 감정> 에 의해 드러났다.   이 책에서 그는 루소가 매독환자인데다 살인자라며 맹렬히 되받아친다.

 

이 두 가지의 사실에 대한 변명을 해 보자.

우선 정약용이 살던 당시의 법이나 습속이 그러했다고 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이는 변명이 될 수가 없다.  그보다 앞선 시대였지만 이순신은  자신의 서녀를 첩으로 주겠다는 병조판서 김귀영의 제의를 거절한다.   이는 권력에 빌붙지 않겠다는 이순신의 결벽증 때문이다.   그런 그도 두 명의 첩을 거느렸고 자신과  형의 자식들까지 임지에 데리고 다니며 남솔(濫率)을 부끄럽게 여겼으나 아무도 버리지 않았고, 자기 자식보다 형의 자식을 먼저 생각해 주었다.

루소의 경우에는 그의 난잡한 성관념이나 가난 탓으로 돌릴 수도 있겠으나 이 또한 그 자신이 쓴 글로 인해서 용서받을 수 없다.

'부친의 의무를 다하지 못하는 자는 부친이 될 자격이 없다.   부친이란 가난이라든지 직업이라든지 하는 여러가지 인간적 요인을 이유로 아이를 양육하고 교육하는 의무에서 면제될 수 없다......'

과연 용서가 될까?

 

그러면 남의 자식을 교육하는 사람의 입장은 어떨까.  

'교육하다 '라는  educate의 어원은 라틴어 educare에서 유래한 말이다.   '밖으로'라는 뜻의 e와 '끌어낸다는 뜻의 ducare의 합성어이다.  즉, 교육자란 자신이 가르치는 아이들을 이끌어 줄 의무가 있는 사람인 것이다.   그런데 대학교수가 아닌 초중고의 교원들이 상대하는 학생들은 미성년자들이 대부분이므로 절대선(絶對善)에 대한 교량이 되어야 하고, 따라서 적어도 표면상으로는 모범을 보여야 할 입장인 것이다.   자신이 가르치는 학생에게는 일제고사를 치르지 못하게 유도하면서 자기 자식에게는 시험을 치르게 했다면 어떠한 말로도 변명할 수도 없는 파렴치한 행위인 것이다.   이러한 행위를 자행한 전교조소속 교사 본인은 개인적으로 파렴치한이라고 치더라도 그가 소속되어 있는 단체는 정체가 뭔가.  그들에게도 낯짝이 있는가. 새로 선출된 위원장은  '정부의 교육정책은 이미 모든 국민이 잘못됐다고 생각한다. 어떤 식으로든 국민이 공감하는 방향으로 바꿔나가겠다. '라고 일갈하고 있지만 사과가 우선이다.   게다가 교사 파면에 대한 법적 대응이라는 말을 듣는 순간 어안이 벙벙해질 뿐이다.  이들 뿐만 아니라 그들을 두둔하고 해당 교육청과 정부를 비판하는  앞 뒤 분간을 할 줄 모르는 일부의 저열한 글쟁이들이 마치 길거리에 보이는 두더지 망치처럼 고개를 치켜들고 목소리를 내는 데에는 환멸감이 들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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