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색성당 게시판

대림 제3주일(가해) 강론-보좌신부표

인쇄

박성욱 [EliaPark] 쪽지 캡슐

1998-12-12 ㅣ No.34

대림 제3주일(가해 : 자선주일)

1998. 12. 13.(수색)

. 제1독서 : 이사야35,1-6a. 10./ . 제2독서 : 야고보5,7-10./ . 복음 : 마태오11,2-11.

겨울이 점점 깊어가고 있습니다. 몸을 움추리고 종종걸음을 치며 뛰어 다니는 사람들

의 모습에서, 또 손을 옷소매에 집어넣고 꼭 손이 없는 사람처럼 흔들면서 학교를 향하

는 아침 학생들의 모습에서 우리는 겨울의 모습을 보게 되는 것 같습니다. 겨울은 이처

럼 모든 것을 움추리게 하고 주눅이 들게 하는 암울한 계절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렇

게 춥고 암울한 겨울이 지나면, 봄이 온다는 사실을 알고 희망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겨

울이 새 봄을 준비하는 희망으로 가득 찬 계절로 보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한 겨울의 추

위가 매서우면 매서울수록, 새봄에 대한 희망과 기쁨으로, 그 새 봄을 열심히 준비하면서

겨울을 지냅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지금 당장의 추위에 움추리고 주눅이 들어, 겨

울이 지나면 봄이 온다는 사실을 잊은 채, 절망하고 자포자기하며 겨울을 지냅니다. 당장

의 추위만을 모면하려고 하면서 말입니다.

 밤이 길면 길수록 아침의 태양 빛이 더욱더 찬란하듯, 겨울의 추위가 매서우면 매서

울수록 새봄의 따뜻함은 더욱더 감미롭습니다. 어려움이 심하면 심할수록, 그 뒤에 찾아

오는 행복은 더욱더 기쁜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그 어려움의 무게에 눌려 헤어나지 못

하고 절망하고 자포자기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밤의 어두움에, 겨울의 추위에, 어려

움의 무게에 눌려서 당장의 편안함만을 찾는다면, 그 뒤에 찾아오는 찬란한 태양 빛도,

새봄의 따사로움도, 진정한 평화로움의 행복도, 그것이 얼마나 찬란하고 아름다운 것인지

도 모르고 지나가게 되고 말 것입니다.

밤이 한 가지 키워주는 것은 불빛이다./ 우리도 아직은 잠이 들면 안 된다./ 거대한

어둠으로부터 비롯되는/ 싸움, 떨어진 살점과 창에 찔린 옆구리를/ 아직은 똑똑히 보

고 있어야 한다/ 쓰러져 죽음을 토해내는 사람들의 아픈 얼굴,/ 승리에 굶주린 그 고

운 얼굴을/ 아직은 남아서 똑똑히 보아야 한다.//

밤이 마지막으로 키워주는 것은 사랑이다./ 끝 없는 형벌 가운데서도/ 우리는 아직

든든하게 결합되어 있다./ 쉽사리 죽음으로 가면 안 된다. 아직은 저렇게/ 사랑을 보

듬고 울고 있는 사람들, 한 하늘과/ 한 세상의 목마름을 나누어 지니면서/ 저렇게 저

렇게 용감한 사람들, 가는 사람들,/ 아직은 똑똑히 우리도 보고 있어야 한다.//

이 詩는 이성부라는 詩人의『밤』이라는 시입니다. 이 詩는 인간세상의 모든 부조리

와 불평등, 진정한 사랑을 나누지 못해서 평화롭지 못한 현실을 어두운 밤이라는 상징으

로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를 주눅들게 하고, 움추리게 하며, 제대로 행동하지

못하게 하는, 그 모든 암울함에서도 우리가 가져야 할 것은, 세상을 밝게 하는 불빛에 대

한 희망이며, 세상에 진정한 평화를 가져다주는 사랑에 대한 희망이라는 것을 잘 나타내

주고 있습니다. 또한 이러한 모든 암울함과 부조리와 어두움 속에 휩쓸려 잠들지 말고,

눈이 똑똑히 뜨고 그 모든 것들을 봄으로써, 아침이 왔을 때, 그 모든 것을 제자리에 놓

을 수 있도록 준비하여야 한다는 것도 잘 나타내 주고 있습니다. 이렇게 본다면 이 詩는,

찬란한 태양 빛으로 우리에게 오셔서 우리에게 올바른 사랑과 정의를 보여주시며, 이 세

상에 진정한 평화를 이루게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기다리는 우리의 대림시기

에, 너무도 잘 어울리는 시가 아닌가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기다림은 넋 놓고 앉아서

기다리는 수동적인 기다림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준비하면서 기다리는 능동적인 기다림

이기 때문이며, 우리가 기다리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와, 하느님의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약육강식이라는 동물의 법칙으로 암울하고 어둡기만한 이 세상이,/ 사랑이 아니라 이기적

인 욕심으로 얼룩져 서로를 죽이고 죽는 이 세상이, 하느님의 사랑을 나눔으로써 진정한

평화를 누리는 광명천지, 하느님의 나라가 되기를 희망하며 준비하는 것이 우리의 대림

시기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정말 이것을 희망하면서 이 대림시기를 기다리고 있습니까?

"오시기로 되어 있는 분이 바로 선생님이십니까?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하겠습니까?"

오늘 복음에서 세례자 요한은, 자신의 제자들을 예수님께 보내어 이같은 질문을 하게

합니다. 세례자 요한은 이 세상을 하느님 나라가 되게 하실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며, 사람들에게 회개의 세례를 베풀고 사람들을 준비시켰던 사람이었습니다. 세례

자 요한은 자신이 하느님께로부터 받은 소명인, 사람들을 준비하며 기다리게 하는 그 임

무에 충실하여, 마침내 감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자기 뒤에 자신이 닦

은 길로 오실 그분이 예수님이란 것까지 알고, 자신의 임무는 이제 끝났다고 생각했는

데..., 한가지 이상한 점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심판의 징벌을 내리지 않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많은 죄인들에게 사랑을 베풂으로써 스스로 회개하도록 만들고 있었

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세례자 요한과 그의 제자들은 의문을 가졌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

로 구약시대의 한계였던 것입니다.

구약시대에는 하느님께서 당신의 뜻을 예언자라는 '사람들'을 통해서 전달했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하느님의 뜻을 백퍼센트, 온전히 다 깨달을 수도 없었고, 다 전하기에도 한

계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구약시대에는 주로 하느님의 심판과 징벌을 강조하면서,

사람들이 겁을 먹고서라도 하느님의 뜻을 따르도록 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

스도께서는 온전한 인간이면서, 동시에 완전한 하느님이십니다. 따라서 성부 하느님의 뜻

이 무엇인지, 백퍼센트, 온전히 다 보여주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당신 자신이 하느님이

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이시기도 한 하느님의 뜻이 어떠한 것

인지를 말과 행동을 통하여 온전히 보여주십니다. 더 이상 겁에 질려 하느님을 따르지

않게, 이제는 구원의 기쁨을 누리며 하느님의 뜻을 따를 수 있도록, 사랑의 모습으로 하

느님의 구원을 우리에게 베푸시는 것입니다.

"너희가 듣고 본대로 요한에게 가서 알려라. 소경이 보고 절름발이가 제대로 걸으

며 나병환자가 깨끗해지고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사람이 살아나고 가난한 사람들

에게 복음이 전하여 진다."

예수님의 이같은 행동은 바로 인간을 하나로 모으고 일치되게 하려는 하느님의 뜻인

것입니다. 인간의 모든 한계로부터 해방될 수 있도록, 하느님의 사랑을 서로 나누지 못하

게 하는 모든 방해물을 제거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은,/ 인간 세상의 모든 구분과 차별이

사라져서, 서로 갈라지고 흩어져있던 모든 사람들이 그 모든 장애를 뛰어넘어, 하느님 앞

에서 하느님의 사랑을 나누며, 하나로 일치되는 진정한 평화를 누리게 하려는, 하느님께

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구원의 뜻인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느님 나라의 모습인 것입니

다. 이러한 하느님 나라의 모습을 예수님을 통해 직접보고, 기쁨에 넘쳐 하느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신약시대의 사람들은, 참으로 구약시대의 예언자들보다 더 큰 사람들인 것입니

다. 겁에 질려서가 아니라, 하느님의 사랑에 감사하고 기뻐하면서 그 하느님의 사랑을 실

천하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시고 난 이후를 우리는 신약시대라고 합니다. 하느님께서 옛날

의 약속인 구약을 완성시킬 새로운 계약을 하시고 그것을 이루어 가는 시대라는 뜻입니

다. 그러나, 우리의 모습은 여전히 구약시대의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지는 않은지 반성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인간적인 한계에 묶여 하느님의 사랑과 구원의 말씀을 오직 심판과

징벌의 말씀으로만 알아듣고, 위축되어 살아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물론, 예수 그리스도

는 심판자이십니다만, 최후의 심판이 있기 전까지, 한 사람이라도 더 구원되기를 바라시

며, 우리에게 하느님의 사랑과 정의, 그 해방의 기쁨을 우리에게 직접적으로 전해 주시는

중재자이십니다. 그러하기에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기쁜소식, 즉 복음이 되시는 것입니

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하느님의 징벌을 무서워하는데만 그쳐서, 그 기쁜소식을, '슬

픈소식', 혹은 '겁나는 소식'으로 알아듣고 있지는 않습니까? 또한 이러한 하느님의 심판

과 징벌을 강조하면서, 나의 생각과 사상, 주관적인 계산으로 하느님을 조정하고 있지는

않았습니까? 나와 반대되는, 내가 미워하고 싫어하는 사람들을, 하느님의 이름으로 단죄

하고 저주하여,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사랑으로 일치되는 하느님의 나라를, 이 세상의 모

습처럼 사람들을 서로 갈라지고 흩어지게 하는 것으로 만들지는 않았습니까? 이러한 모

습은 바로 '하느님 나라'를 폭행하는 모습, 바로 하느님 나라를 빼앗으려 하는 모습인 것

입니다.

 오늘은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기다리는, 그분의 오심으로 하느님의 뜻, 그 사랑과

정의와 평화가 온전히 이루어지는 하느님의 나라가 오기를 기다리는 대림 제3주일입니

다. 교회에서는 이 대림 제3주일을 '장미주일'이라고도 합니다. 그 이유는 우리의 기다림

이 지치고 힘든 것만은 아니며, 이제 곧 그 기다리는 바가 오고 이루어지게 되리라는 희

망으로 기쁨을 느낀다는 것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이 대림 제3주일은 교회에

서 지정한 '자선주일'이기도 합니다. 교회가 대림 제3주일을 '자선주일'로 정한 것은, 우

리가 기다리는 것이 얼마나 희망차고 기쁜 것인지를,/ 우리가 기다리는 것이 바로 이 세

상 모든 이가 하느님의 사랑으로 일치되는 것이라는 사실을,/ 우리의 자선이라는 사랑의

행동을 통해 드러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우리의 기다림이 희망의 기쁨으로 가득한 것은, 바로 우리가 기다리는 것이, 모든 이

가 진정한 사랑을 나눔으로써 하나로 일치되는 하느님의 나라이며, 그렇게 될 수 있도록

모든 장애로부터 해방시켜주시는 예수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나라와 예

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

과 같이, 증명서나 겉치레의 행동, 또는 모든 사람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바대로 행동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하느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우

리의 삶과 행동에서 드러나는 것입니다. 진정한 일치를 향하여, 세상의 모든 차별을 뛰어

넘어 모든 인간이 하느님의 사랑 받는 존재라는 사실을 자신의 사랑 행함으로 증거하며

기다림의 시기인 이 대림시기를 보낼 때, 우리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일 수 있으며, 밤이

지나 아침이 왔을 때, 진정한 기쁨을 누리는 사람들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늘어진 두 팔에 힘을 주어라. 휘청거리는 두 무릎을 꼿꼿이 세워라. 겁에 질린 자

들을 격려하여라. 용기를 내어라. 무서워하지 말아라. 너희의 하느님께서 너희를 구원

하러 오신다."



104 0

추천 반대(0)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