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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인과 아벨의 제물 1035_시기vs질투 [성경해석] [번역오류] [만나는자마다] 782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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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기vs질투 -0 [218.236.113.*]

2007-12-26 ㅣ No.782

 

질문 1:

24일밤 자정미사를 마치고 집에 돌아와서 모 TV를 보았더니 아벨과 카인에 대한 내용이 있었는데,
 좀 헷깔리는 부분이 있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아벨의 제사를 기뻐하시고, 카인의 제사를 기쁘게 받지 않으셨다는 이유에 대하여 "천주교의 공식적인 설명"이 있는지요 ?

 

[내용 추가 일자: 2014년 3월 31일]

질문 2:

카인이 아벨을 죽인 후  하느님꼐 벌을 받으며 떠나게 되면서 다른 사람들에게 죽임을 당하게 될까 두려워하였는데요

찬지 창조후 아담과 하와이후  태어난 첫 자손이 카인과 아벨로 기록 되어  있는데 여기서 다른 사람은 어디서 생겨난 것이며  무엇을 의미하나요?

 

게시자 주: 질문2에 대한 답변은 아래의 제4항에 있습니다.

[이상, 내용 추가 끝]

-------------------------------------------------------------------------

 

답글:

 

+ 찬미 예수

 

주신 질문에 대한 상황을 파악하기 위하여 우선 창세기 제4장을 함께 읽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창세기 제4장 전문:

카인과 아벨 
 1  사람이 자기 아내 하와와 잠자리를 같이하니, 그 여자가 임신하여 카인을 낳고 이렇게 말하였다. “내가 주님의 도우심으로 남자 아이를 얻었다.” 
 2  그 여자는 다시 카인의 동생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치기가 되고 카인은 땅을 부치는 농부가 되었다. 
 
세월이 흐른 뒤에 카인은 땅의 소출을 주님께 제물로 바치고, 
 4  아벨은 양 떼 가운데 맏배들과 그 굳기름을 바쳤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아벨과 그의 제물은 기꺼이 굽어보셨으나, 
 5  카인과 그의 제물은 굽어보지 않으셨다.
그래서 카인은 몹시 화를 내며 얼굴을 떨어뜨렸다. 
 6  주님께서 카인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어찌하여 화를 내고, 어찌하여 얼굴을 떨어뜨리느냐? 
 7  네가 옳게 행동하면 얼굴을 들 수 있지 않느냐? 그러나 네가 옳게 행동하지 않으면, 죄악이 문 앞에 도사리고 앉아 너를 노리게 될 터인데, 너는 그 죄악을 잘 다스려야 하지 않겠느냐?” 
 8  카인이 아우 아벨에게 “들에 나가자.” 하고 말하였다. 그들이 들에 있을 때, 카인이 자기 아우 아벨에게 덤벼들어 그를 죽였다. 
 9  주님께서 카인에게 물으셨다. “네 아우 아벨은 어디 있느냐?” 그가 대답하였다. “모릅니다. 제가 아우를 지키는 사람입니까?” 
 10  그러자 그분께서 말씀하셨다. “네가 무슨 짓을 저질렀느냐? 들어 보아라. 네 아우의 피가 땅바닥에서 나에게 울부짖고 있다. 
 11  이제 너는 저주를 받아, 입을 벌려 네 손에서 네 아우의 피를 받아 낸 그 땅에서 쫓겨날 것이다. 
 12  네가 땅을 부쳐도, 그것이 너에게 더 이상 수확을 내주지 않을 것이다. 너는 세상을 떠돌며 헤매는 신세가 될 것이다.” 
 13  카인이 주님께 아뢰었다. “그 형벌은 제가 짊어지기에 너무나 큽니다. 
 14  당신께서 오늘 저를 이 땅에서 쫓아내시니, 저는 당신 앞에서 몸을 숨겨야 하고, 세상을 떠돌며 헤매는 신세가 되어, 만나는 자마다 저를 죽이려 할 것입니다.” 
 15  주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아니다. 카인을 죽이는 자는 누구나 일곱 갑절로 앙갚음을 받을 것이다.” 그런 다음 주님께서는 카인에게 표를 찍어 주셔서, 어느 누가 그를 만나더라도 그를 죽이지 못하게 하셨다. 
 16  카인은 주님 앞에서 물러 나와 에덴의 동쪽 놋 땅에 살았다. 
 
카인의 자손 
 17  카인이 자기 아내와 잠자리를 같이하니, 그 여자가 임신하여 에녹을 낳았다. 카인은 성읍 하나를 세우고, 자기 아들의 이름을 따라 그 성읍의 이름을 에녹이라 하였다. 
 18  에녹에게서 이랏이 태어났고, 이랏은 므후야엘을 낳고, 므후야엘은 므투사엘을 낳고, 므투사엘은 라멕을 낳았다. 
 19  라멕은 아내를 둘 얻었는데, 한 아내의 이름은 아다이고 다른 아내의 이름은 칠라였다. 
 20  아다는 야발을 낳았는데, 그는 집짐승을 치며 천막에 사는 이들의 조상이 되었다. 
 21  그 아우의 이름은 유발인데, 그는 비파와 피리를 다루는 모든 이의 조상이 되었다. 
 22  칠라도 투발 카인을 낳았는데, 그는 구리와 쇠로 된 온갖 도구를 만드는 이였다. 그리고 투발 카인의 누이는 나아마였다. 
 23  라멕이 자기 아내들에게 말하였다. “아다야, 칠라야, 내 소리를 들어라. 라멕의 아내들아, 내 말에 귀를 기울여라. 나는 내 상처 하나에 사람 하나를, 내 생채기 하나에 아이 하나를 죽였다. 
 24  카인을 해친 자가 일곱 갑절로 앙갚음을 받는다면 라멕을 해친 자는 일흔일곱 갑절로 앙갚음을 받는다.” 
 
셋과 그의 아들 
 25  아담이 다시 자기 아내와 잠자리를 같이하니, 그 여자가 아들을 낳고는, “카인이 아벨을 죽여 버려, 하느님께서 그 대신 다른 자식 하나를 나에게 세워 주셨구나.” 하면서 그 이름을 셋이라 하였다. 
 26  셋에게서도 아들이 태어나자, 그는 아들의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다. 그때부터 사람들이 주님의 이름을 받들어 부르기 시작하였다.  

/이상 창세기 제4장 끝./

 

게시자 주: 사람과 여자가 원죄를 저질러 에덴 동산에서 쫓겨난다는 내용이 창세기 제3장에 있으며, 그 이후 특히 제4장이 끝날 때까지도 하느님께서 아직은 당신의 백성을 선택하지 않으셨기에, 아직은 아담의 후손들과 어떤 계약을 맺지도 않았으며 또 하느님을 섬길 때에 지킬 것을 구체적으로 명하신 율법도 아직은 없었습니다. 따라서 창세기 제1장부터 제4장까지의 성경 내용만으로는 하느님께서 어떠한 종류의 제물을 더 좋아하시는지에 대하여 우리는 제대로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비록 아담과 하와가 원죄를 범하여 그들에게 벌을 내리셨으나, 하느님께서는 그래도 아담과 하와의 자식들과 "대화를 하는 관계"는 유지하고 계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1. 미국 천주교 주교회의 공인 영어 성경인 NAB에는, 주신 질문인, 창세기 제4장 4절에 대한 주석은 없습니다.

출처: http://www.usccb.org/nab/bible/genesis/genesis4.htm

 

2. 다음의 자료(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께서 1995년 3월 25일자로 주신 교서)의 제 8항 전후에 주신 질문과 관련된 내용이 나오고 있는데, 이 내용을 살펴 보아도, 인용하신 구절에 대하여 주신 질문에 대한 “천주교의 공식적 설명”은 없습니다.

 

출처:
http://www.vatican.va/holy_father/john_paul_ii/encyclicals/documents/
hf_jp-ii_enc_25031995_evangelium-vitae_en.html

 

다음은, 위의 출처에서 발췌한 영문 구절을 제가 번역한 것입니다:

 

(발췌 및 번역 시작)
...

8. Cain was "very angry" and his countenance "fell" because "the Lord had regard for Abel and his offering" (Gen 4:4-5). The biblical text does not reveal the reason why God prefers Abel's sacrifice to Cain's. It clearly shows however that God, although preferring Abel's gift, does not interrupt his dialogue with Cain. He admonishes him, reminding him of his freedom in the face of evil: man is in no way predestined to evil. Certainly, like Adam, he is tempted by the malevolent force of sin which, like a wild beast, lies in wait at the door of his heart, ready to leap on its prey. But Cain remains free in the face of sin. He can and must overcome it: "Its desire is for you, but you must master it" (Gen 4:7).

 

8. 카인은 ‘매우 화가 나’ 자신의 얼굴을 ‘떨어뜨렸는데’ “이것은 주님께서는 아벨과 그의 제물은 기꺼이 굽어 보셨기 때문입니다.”(창세기 4,4-5). 이 성경 본문은 왜 하느님께서 카인의 제물보다는 아벨의 제물 더 선호하는지를 드러내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비록 하느님께서 아벨의 선물을 선호하기는 하지만, 성경 본문은 그 다음 구절에서 하느님께서 카인과의 대화를 그만 두지 않음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당신께서는, 악과의 대면에 있어 카인의 자유를 상기시키면서, 그를 타이르십니다. 분명하게, 아담과 마찬가지로, 그는 죄라는 악의에 찬 힘에 의한 유혹을 받는데, 죄악은, 마치 야수와 같이, 사냥감에 달려들 준비가 다 된 상태에서, 그의 심장(heart, 본심)의 문 앞에 도사리고 앉아 카인을 노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카인은 죄에 직면하여서도 자유롭습니다. 그는 그것을 극복할 수 있고 또 극복하여야만 합니다: “죄악이 너를 노리고 있으나, 너는 그 죄악을 잘 다스려야 하지 않겠는가?” (창세기 4,7).

 

Envy and anger have the upper hand over the Lord's warning, and so Cain attacks his own brother and kills him. As we read in the Catechism of the Catholic Church: "In the account of Abel's murder by his brother Cain, Scripture reveals the presence of anger and envy in man, consequences of original sin, from the beginning of human history. Man has become the enemy of his fellow man".10

 

질투(envy)(주: 필자의 번역)분노(anger) (주: 필자의 번역)는 주님의 경고보다 우세하기에, 카인은 자신의 형제인 아벨을 공격하고 그를 죽였습니다. [우리말본] 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 2259항(<----- 꼭 클릭하여 확인십시오)에서 우리가 읽듯이: “성경은 형 카인이 아벨을 살해한 이야기에서, 인류 역사의 시초부터 원죄의 결과인 분노(anger)욕망(envy)(*) (주: 여기서 "envy"를 "욕망"으로 번역한 것은 필자의 번역이 아님)이 인간 안에 내재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하느님께서 형제 살해의 악랄함을 보고 말씀하셨듯이, 인간은 인간의 원수가 되었다.”

...

 

-----
(*) 게시자 주: 영어로 "envy"로 번역되는 신학적 용어를, 우리말본 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2259항에서, 위에서 보듯이,  "질투"로 번역하는 대신에, "욕망"으로 번역한 것은 번역 오류이다.
-----

(이상 발췌 및 번역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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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추가 일자: 2012년 1월 20일]
내용 추가 1: 우리말본 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2259항
에서, 영어로 "envy"로 번역되는, 칠죄종(七罪宗) 중의 하나인 "envy"를, "질투"가 아닌 "욕망"으로 번역한 것은 대단히 심각한 번역 오류이다.

여기를 클릭하면, <----- 필독 권고.

그 어원들부터 완전히 다른, "질투(envy)"와 "시기(jealousy)"가 어떻게 다른 개념들인지에 대한 자세한 글들을 읽을 수 있다.

예를 들어, 다음은, 여기를 클릭하면 읽을 수 있는, 중국어본 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2259항 전문이다. 분명히 "envy"로 번역되는 용어를 "嫉?(질투)"로 번역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괄호 안의 우리말은 필자가 추가한 것입니다]:

CCC 2259. 在亞伯爾被他的哥哥加音殺害的?述裡,聖經揭示了,自人類有史之初,由於原罪的遺毒,忿怒(분노)嫉?(질투)就盤據在人的心中。人成了他同類的仇敵。天主譴責這殺害兄弟的惡行說:「?作了甚??聽!?弟弟的血由地上向我喊?。?現在是地上所?罵的人,地張口由?手中接收了?弟弟的血」(創4:10-11)。

질문: 그런데 도대체 무슨 이유로, 우리말본 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2259항에서는, "envy"에 대응하는 번역 용어를, "질투(嫉?)" 대신에, 때로는 선(good)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 "욕망(desire)"으로 번역하였는지요?

내용 추가 2: 다음은 창세기 4,5의 첫 번째 문장에 대한 "주석 성경"의 주석 전문이다:

(발췌 시작)
성경 저자는 하느님의 절대권은 강조하면서도 그분께서 카인의 제물을 거절하신 동기는 밝히지 않는다. 카인은 행동과 결과 사이에는 늘 확실한 인과 관계가 성립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배워야 한다. 다시 말해서 카인의 제물 거절이 그의 인격 겨부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하느님께서는 마치 아버지와 같은 모습으로 카인에게 곧 말씀을 건네실 것이다(6-7절).
(이상, 발췌 끝).

참고: 그리고 이 주석은, 여기를 클릭하면 확인할 수 있는, 프랑스어본 공동번역 성경(TOB)의 주석을 우리말로 번역한 것으로 파악되었다.

내용 추가 3:

여기를 클릭하면, <----- 필독 권유

가톨릭 보편 교회의 전례력에 있어 홀수해 연중 제6주간 월요일 제1독서(창세기 4,1-15.25)에 대한 나바르 성경 주석서의 해설을 읽을 수 있다. 또한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창세기 4,9-16에 대한 이 나바르 성경 주석서의 해설에서, 여기를 클릭하면 읽을 수 있는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2258항을 발췌 인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내용 추가 4:

여기를 클릭하면, <----- 대단히 좋은 해설이기에 되도록 많은 분들께서 필독할 것을 권고합니다.

창세기 4,3-5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는, 가톨릭 보편 교회의 전례력에 있어 홀수해 연중 제6주간 토요일 제1독서(히브리 11,1-7) 중의 히브리서 11,4에 대한 나바르 성경 주석서의 해설을 읽을 수 있다. 
[이상, 내용 추가 끝]. 
 ----------

 

3. 비록 성요셉 출판사에서 발행한 “주성성서[구약(상)]”의 창세기 4,5에 대한 주석에는 다음의 네가지 견해들이 주어져 있으며,

[2012년 1월 20일자 수정 시작]
이들 견해 중에서 특히 두 번째 설명이, 성경의 본문들에 대단히 많이 의존한, 그리고 어떤 개인의 추측을 배제한, 좀 더 신뢰할 수 있는 설명이라는 생각입니다. 이 두 번째 설명에 대한 대단히 자세한 그리고 정교한 설명인, 그리고 이 글의 결론에 내용 추가한, "내용 추가 4"에 안내되어 있는, 나바르 성경 주석서의 해설을 받드시 필독하도록 하십시오. 바로 이 나바르 성경 주석서의 해설 때문에, 더 이상의 "천주교의 공식적인 설명"은 이제 필요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상, 2012년 1월 20일자 수정 끝].

이런 점 또한 참고하시면 좋을 것 같아, 아래에 발췌하였습니다.

 

(발췌 시작)

<왜 주 하느님께서는 아벨의 제물만 받아들였는가>에 대해서 몇 가지 견해가 있다.

첫째, 제의(祭儀)의 차이로 해명하려는 시도, 즉 농경문화권의 가나안 제의와 유목문화권의 이스라엘 제의간의 충돌에서 이스라엘이 우월한 위치를 차지했기 때문이라고 본다.

둘째, 초대 그리스도교에서는 이 두사람의 품성에서 그 원인을 찾았다. 아벨은 의로웠으나 카인은 악마의 자식(1요한 3,12)으로 믿음이 부족하고(히브 11,4) 사악했기(유다1,11)때문이라는 것이다.

[내용 추가 일자: 2012년 1월 20일]
게시자 주: 아래의 결론 및 위의 내용 추가 4에 안내되어 있는, 히브리서 11,4에 대한 나바르 성경 주석서의 해설을 필독하도록 하라.
[이상, 내용 추가 끝]

 

셋째, 야훼 하느님의 자유로운 선택의지로 볼 수 있다. 하느님은 아무런 조건이나 전제도 없이 자유롭게 선택행위를 하시는 분이시다(탈출 33,19를 보라).

 

넷째, 야훼계 전승에서는 다른 형제들 보다 한 형제, 특히 큰 아들보다 작은 아들을 선호하는 경향을 엿볼 수 있다. 하느님은 카인보다는 아벨, 다른 형제들 보다 아브라함, 이스마엘보다 이사악, 애사오보다는 야곱, 또 다른 아들들보다는 유다를 선택하신다.

(이상 발췌 끝).

 

참고: 성요셉 출판사에서 발행한 “주성성서[구약(상)]” (감수: 김경희 신부)에 실려있는 주석들은

(i) 위의 제 1항에서 말씀드린 NAB 성경의 영문 주석들을 우리말로 번역한 것들, 

(ii) 국내의 교우님들께서 추가한 주석들로 이루어져 있는 듯 싶습니다. 

특히, 교황청 홈페이지를 통하여서도 접할 수 있는 NAB 성경의 영문 주석들은 1970년에 NAB 영문 성경 초판 발행시부터 제공되고 있는 매우 중요한 주석들로서, [비록 전부는 아닐 것이지만] 교황청에서도 그 권위를 인정하는 주석들입니다. 가톨릭 신자이시라면, 이 점을 꼭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결론:

지금까지 살펴 바에 의하면, 말씀하신 구절에 대하여 여러가지 견해는 있으나, 천주교의 공식적인 설명은 아직은 없는 듯 합니다. 그리고 개인적인 견해입니다만, 워낙에 구약 성경 앞 부분의 기록이라, 앞으로도 해당 구절에 대한 "천주교의 공식적인 설명"은 없을 듯 싶습니다.

[내용 추가 일자: 2012년 1월 20일]
위의 내용 추가 4에 안내되어 있는 창세기 4,3-5를 언급하고 있는 히브리서 11, 4에 대한 나바르 성경 주석서의 해설을 순서대로 나열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i) 유다교 측의 많은 주석자들이 창세기 4,6-7을 카인(Cain)의 죄가, 그가 자신의 수확물 중의 가장 좋은 것을 봉헌하지 않았기에, 빈약함(meanness, 인색)의 하나에 있었을 수도 있음을 뜻하는 것으로 보았다.

(ii) 지혜서 10,3에서 아벨(Abel)을 향한 질투(envy)의 죄가 있었을 것이라고 말하면서, 질투하는(envious), 이기적인, 난폭한 그리고 형제를 살해하는 자의 전형(prototype)인 카인과는 대조적으로, 유다교의 문헌은 아벨을 관대, 올바름(uprightness) 그리고 공경(peity)의 모범으로서 칭찬하였다.

(iii) 그런 다음에, 이러한 유다교의 종교적 사고를 배경으로하여, 아벨을 "의로운(righteous)" 자, 즉 거룩하고 헌신적인 자로서 언급하고 있는 예수님(마태오 복음서 23,25)과 성 요한(St. John)(1요한 3,12)의 말씀들이 형성된다(come).

(iv) 히브리서 11,4가 아벨의 봉헌물이 더 나은 것으로 만들었던 바가, 그의 믿음, 하느님에 대한 열심 그리고 관용이었음을 강조하고 있다.

(v)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하느님께서는 그가 제공하였던 제물들을 받아들임으로써 그리고 아마도, 오래된 구전의 유다교 전통에 따라, 그들을 불태우기 위하여 불을 내려 보내심으로써, 그의 의로움을 입증하셨다.

(vi) 이는 하느님께서, "성사(a sacrament)를 제외한 경우들에 있어, 어떤 봉헌물의 용인(容認) 가능성(acceptability)이 봉헌자의 의로움에 의하여 정해지기 때문에, 봉헌자가 봉헌한 것(what)보다 봉헌자를 더 바라보셨기 때문이다" (성 토마스 아퀴나스(St. Thomas Aquinas)의 히브리서 주석(Commentary on Hebrews)[게시자 주: 여기를 클릭한 후에 제569항을 읽도록 하라].

(vii) 이 본문[즉, 창세기 4,6-7]은 글자 그대로, "마치 당신께서 그들을 소모하기 위하여 "내려오시거나" 혹은 "불을 내려보내시는" 것을 암시하듯이(1열왕기 18,38에 있는 엘리야의 유명한 봉헌, 레위기 9,24에 있는 모세와 아론의 유명한 봉헌, 그리고 판관기 6,21에 있는 기드온의 유명한 봉헌을 참조하라), 하느님 스스로 그의 봉헌물들을 입증하셨음을 말하고 있다.
 
[여기에 이어지는, 창세기 4,3-5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는, 히브리서 11,4에 대한 나바르 성경 주석서의 해설의 나머지 부분은, 위의 추가 내용 4에 있는 안내로 가서 읽으시기 바랍니다]

따라서, 바로 위의 (i) - (vii)로 전달해드린, 카인의 죄에 대한 유다교의 전통과 문헌, 성경 본문들 자체, 그리고 성 토마스 아퀴나스의 주석 등에 근거한 나바르 성경 주석서의 해설에 의하면, 질문자께서 말씀하신 "천주교의 공식적인 설명"은, 이 말씀 자체가 무엇을 뜻하던지간에, 더 이상 필요없을 정도로, 주신 질문에 대한 답변으로서 이 나바르 성경 주석서의 해설이 충분하다는 생각입니다.
[이상, 내용 추가 끝].

[내용 추가 일자: 2014년 3월 31일]
4. (질문 2에 대한 답변 시작)

4-1. 질문자께서 말씀하신 "다른 사람들"창세기 4,14"만나는 자마다"를 말한다는 생각이며, 따라서 들여다 보아야 하는 최소한도의 전후 문맥을 우선적으로 파악할 필요성이 있다는 생각입니다.

 

4-2. 가톨릭 교회의 전례력에 있어, 홀수해 연중 제6주간 월요일 제1독서창세기 4,1-15.25 이며, 이에 대한 나바르 성경 주석서의 해설은 다음에 있습니다:

http://ch.catholic.or.kr/pundang/4/navarre/ot_6_mon.htm

 

4-3. 따라서, 들여다 보아야 하는 최소한도의 문맥은 창세기 4,1-15.25 이며, 바로 이 최소한도의 전후의 문맥 안에서 "다른 사람들"이 누군가에 대한 질문의 답변은 창세기 4,3의 첫 부분인 "세월이 흐른 뒤에" 라는 표현 안에 포함되어 있다는 생각입니다.

 

그래서 "이 표현" 안에서 답변을 드리면 다음과 같을 것입니다: 말씀하신 "다른 사람들"도 또한 당연히 아담과 하와의 자손들일 것이나, 그러나 대단히 포괄적인 "그들"이 누구인지에 대하여서는 창세기, 더 나아가, 성경 본문 어디에도 구체적으로 언급되어 있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오랜 기간 동안 구전(口傳)되어 오던 바가, 기원전 6세기 이전의 어느 시점에 와서 비로소 고대 히브리어 글자로 기록된 창세기는, 특히 창세기 처음부터 제11장까지는, 창조부터 아브람에 대한 언급까지의 대단히 오랜 기간 동안의 인류의 역사의 첫 번째 단계들에 대한 요약(a summary)이므로, 예를 들어, "고고학적으로 확인될 수 있는," 어떤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고 알고 있습니다. 지금 말씀드린 바에 대한 더 자세한 언급은

 

(i) "주석 성경"의 창세기 입문, 그리고

(ii) 다음의 글의 첫 부분을 참고하십시오:

http://archive.catholic.com/thisrock/1994/9404otg.asp
[주: 나바르 성경 주석서의 수석 편집자인 Antonio Feuntes에 의하여 제공된 창세기 입문] 

 

4-4. 이어지는 답변으로서, 다음의 주소에 있는 글[제목: 오로지 역사적 사실만이 항상 믿음의 근거이어야 한다??? - 창세기 1장-11장]을 또한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471.htm <----- 되도록 많은 분들의 필독 권고

(이상, 질문2에 대한 답변 끝)

[이상, 내용 추가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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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교수 소순태 마태오 (Ph.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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