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 신앙생활 Q&A 코너
카인과 아벨의 제물 1035_시기vs질투 [성경해석] [번역오류] [만나는자마다] 782_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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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기vs질투 -0 [218.236.113.*] 2007-12-26 ㅣ No.782
질문 1: 24일밤 자정미사를 마치고 집에 돌아와서 모 TV를 보았더니 아벨과 카인에 대한 내용이 있었는데,
좀 헷깔리는 부분이 있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아벨의 제사를 기뻐하시고, 카인의 제사를 기쁘게 받지 않으셨다는 이유에 대하여 "천주교의 공식적인 설명"이 있는지요 ?
[내용 추가 일자: 2014년 3월 31일] 질문 2: 카인이 아벨을 죽인 후 하느님꼐 벌을 받으며 떠나게 되면서 다른 사람들에게 죽임을 당하게 될까 두려워하였는데요 찬지 창조후 아담과 하와이후 태어난 첫 자손이 카인과 아벨로 기록 되어 있는데 여기서 다른 사람은 어디서 생겨난 것이며 무엇을 의미하나요?
게시자 주: 질문2에 대한 답변은 아래의 제4항에 있습니다. [이상, 내용 추가 끝] -------------------------------------------------------------------------
답글:
+ 찬미 예수
주신 질문에 대한 상황을 파악하기 위하여 우선 창세기 제4장을 함께 읽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창세기 제4장 전문: 카인과 아벨 /이상 창세기 제4장 끝./
게시자 주: 사람과 여자가 원죄를 저질러 에덴 동산에서 쫓겨난다는 내용이 창세기 제3장에 있으며, 그 이후 특히 제4장이 끝날 때까지도 하느님께서 아직은 당신의 백성을 선택하지 않으셨기에, 아직은 아담의 후손들과 어떤 계약을 맺지도 않았으며 또 하느님을 섬길 때에 지킬 것을 구체적으로 명하신 율법도 아직은 없었습니다. 따라서 창세기 제1장부터 제4장까지의 성경 내용만으로는 하느님께서 어떠한 종류의 제물을 더 좋아하시는지에 대하여 우리는 제대로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비록 아담과 하와가 원죄를 범하여 그들에게 벌을 내리셨으나, 하느님께서는 그래도 아담과 하와의 자식들과 "대화를 하는 관계"는 유지하고 계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1. 미국 천주교 주교회의 공인 영어 성경인 NAB에는, 주신 질문인, 창세기 제4장 4절에 대한 주석은 없습니다. 출처: http://www.usccb.org/nab/bible/genesis/genesis4.htm
2. 다음의 자료(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께서 1995년 3월 25일자로 주신 교서)의 제 8항 전후에 주신 질문과 관련된 내용이 나오고 있는데, 이 내용을 살펴 보아도, 인용하신 구절에 대하여 주신 질문에 대한 “천주교의 공식적 설명”은 없습니다.
다음은, 위의 출처에서 발췌한 영문 구절을 제가 번역한 것입니다:
(발췌 및 번역 시작) 8. Cain was "very angry" and his countenance "fell" because "the Lord had regard for Abel and his offering" (Gen 4:4-5). The biblical text does not reveal the reason why God prefers Abel's sacrifice to Cain's. It clearly shows however that God, although preferring Abel's gift, does not interrupt his dialogue with Cain. He admonishes him, reminding him of his freedom in the face of evil: man is in no way predestined to evil. Certainly, like Adam, he is tempted by the malevolent force of sin which, like a wild beast, lies in wait at the door of his heart, ready to leap on its prey. But Cain remains free in the face of sin. He can and must overcome it: "Its desire is for you, but you must master it" (Gen 4:7).
8. 카인은 ‘매우 화가 나’ 자신의 얼굴을 ‘떨어뜨렸는데’ “이것은 주님께서는 아벨과 그의 제물은 기꺼이 굽어 보셨기 때문입니다.”(창세기 4,4-5). 이 성경 본문은 왜 하느님께서 카인의 제물보다는 아벨의 제물 더 선호하는지를 드러내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비록 하느님께서 아벨의 선물을 선호하기는 하지만, 성경 본문은 그 다음 구절에서 하느님께서 카인과의 대화를 그만 두지 않음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당신께서는, 악과의 대면에 있어 카인의 자유를 상기시키면서, 그를 타이르십니다. 분명하게, 아담과 마찬가지로, 그는 죄라는 악의에 찬 힘에 의한 유혹을 받는데, 죄악은, 마치 야수와 같이, 사냥감에 달려들 준비가 다 된 상태에서, 그의 심장(heart, 본심)의 문 앞에 도사리고 앉아 카인을 노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카인은 죄에 직면하여서도 자유롭습니다. 그는 그것을 극복할 수 있고 또 극복하여야만 합니다: “죄악이 너를 노리고 있으나, 너는 그 죄악을 잘 다스려야 하지 않겠는가?” (창세기 4,7).
Envy and anger have the upper hand over the Lord's warning, and so Cain attacks his own brother and kills him. As we read in the Catechism of the Catholic Church: "In the account of Abel's murder by his brother Cain, Scripture reveals the presence of anger and envy in man, consequences of original sin, from the beginning of human history. Man has become the enemy of his fellow man".10
질투(envy)(주: 필자의 번역)와 분노(anger) (주: 필자의 번역)는 주님의 경고보다 우세하기에, 카인은 자신의 형제인 아벨을 공격하고 그를 죽였습니다. [우리말본] 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 2259항(<----- 꼭 클릭하여 확인십시오)에서 우리가 읽듯이: “성경은 형 카인이 아벨을 살해한 이야기에서, 인류 역사의 시초부터 원죄의 결과인 분노(anger)와 욕망(envy)(*) (주: 여기서 "envy"를 "욕망"으로 번역한 것은 필자의 번역이 아님)이 인간 안에 내재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하느님께서 형제 살해의 악랄함을 보고 말씀하셨듯이, 인간은 인간의 원수가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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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비록 성요셉 출판사에서 발행한 “주성성서[구약(상)]”의 창세기 4,5에 대한 주석에는 다음의 네가지 견해들이 주어져 있으며,
(발췌 시작) <왜 주 하느님께서는 아벨의 제물만 받아들였는가>에 대해서 몇 가지 견해가 있다. 첫째, 제의(祭儀)의 차이로 해명하려는 시도, 즉 농경문화권의 가나안 제의와 유목문화권의 이스라엘 제의간의 충돌에서 이스라엘이 우월한 위치를 차지했기 때문이라고 본다. 둘째, 초대 그리스도교에서는 이 두사람의 품성에서 그 원인을 찾았다. 아벨은 의로웠으나 카인은 악마의 자식(1요한 3,12)으로 믿음이 부족하고(히브 11,4) 사악했기(유다1,11)때문이라는 것이다.
셋째, 야훼 하느님의 자유로운 선택의지로 볼 수 있다. 하느님은 아무런 조건이나 전제도 없이 자유롭게 선택행위를 하시는 분이시다(탈출 33,19를 보라).
넷째, 야훼계 전승에서는 다른 형제들 보다 한 형제, 특히 큰 아들보다 작은 아들을 선호하는 경향을 엿볼 수 있다. 하느님은 카인보다는 아벨, 다른 형제들 보다 아브라함, 이스마엘보다 이사악, 애사오보다는 야곱, 또 다른 아들들보다는 유다를 선택하신다. (이상 발췌 끝).
참고: 성요셉 출판사에서 발행한 “주성성서[구약(상)]” (감수: 김경희 신부)에 실려있는 주석들은 (i) 위의 제 1항에서 말씀드린 NAB 성경의 영문 주석들을 우리말로 번역한 것들, (ii) 국내의 교우님들께서 추가한 주석들로 이루어져 있는 듯 싶습니다. 특히, 교황청 홈페이지를 통하여서도 접할 수 있는 NAB 성경의 영문 주석들은 1970년에 NAB 영문 성경 초판 발행시부터 제공되고 있는 매우 중요한 주석들로서, [비록 전부는 아닐 것이지만] 교황청에서도 그 권위를 인정하는 주석들입니다. 가톨릭 신자이시라면, 이 점을 꼭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결론: 지금까지 살펴 바에 의하면, 말씀하신 구절에 대하여 여러가지 견해는 있으나, 천주교의 공식적인 설명은 아직은 없는 듯 합니다. 그리고 개인적인 견해입니다만, 워낙에 구약 성경 앞 부분의 기록이라, 앞으로도 해당 구절에 대한 "천주교의 공식적인 설명"은 없을 듯 싶습니다. [내용 추가 일자: 2014년 3월 31일] 4-1. 질문자께서 말씀하신 "다른 사람들"은 창세기 4,14의 "만나는 자마다"를 말한다는 생각이며, 따라서 들여다 보아야 하는 최소한도의 전후 문맥을 우선적으로 파악할 필요성이 있다는 생각입니다.
4-2. 가톨릭 교회의 전례력에 있어, 홀수해 연중 제6주간 월요일 제1독서는 창세기 4,1-15.25 이며, 이에 대한 나바르 성경 주석서의 해설은 다음에 있습니다:
4-3. 따라서, 들여다 보아야 하는 최소한도의 문맥은 창세기 4,1-15.25 이며, 바로 이 최소한도의 전후의 문맥 안에서 "다른 사람들"이 누군가에 대한 질문의 답변은 창세기 4,3의 첫 부분인 "세월이 흐른 뒤에" 라는 표현 안에 포함되어 있다는 생각입니다.
그래서 "이 표현" 안에서 답변을 드리면 다음과 같을 것입니다: 말씀하신 "다른 사람들"도 또한 당연히 아담과 하와의 자손들일 것이나, 그러나 대단히 포괄적인 "그들"이 누구인지에 대하여서는 창세기, 더 나아가, 성경 본문 어디에도 구체적으로 언급되어 있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오랜 기간 동안 구전(口傳)되어 오던 바가, 기원전 6세기 이전의 어느 시점에 와서 비로소 고대 히브리어 글자로 기록된 창세기는, 특히 창세기 처음부터 제11장까지는, 창조부터 아브람에 대한 언급까지의 대단히 오랜 기간 동안의 인류의 역사의 첫 번째 단계들에 대한 요약(a summary)이므로, 예를 들어, "고고학적으로 확인될 수 있는," 어떤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고 알고 있습니다. 지금 말씀드린 바에 대한 더 자세한 언급은
(i) "주석 성경"의 창세기 입문, 그리고 (ii) 다음의 글의 첫 부분을 참고하십시오: http://archive.catholic.com/thisrock/1994/9404otg.asp
4-4. 이어지는 답변으로서, 다음의 주소에 있는 글[제목: 오로지 역사적 사실만이 항상 믿음의 근거이어야 한다??? - 창세기 1장-11장]을 또한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471.htm <----- 되도록 많은 분들의 필독 권고 (이상, 질문2에 대한 답변 끝) [이상, 내용 추가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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