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량리성당 장년게시판

그래서 가을을 기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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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중광 [paschal] 쪽지 캡슐

2000-08-08 ㅣ No.1785

몇일 동안 방황했기에 오늘은 큰 마음을 먹고 지난 시간들을 정리하기 위해서 그동안 써왔던 편지들과 글들 그리고 사진을 정리하였습니다. 특히 사진은 찍고 현상만 했지 정리하지 않았기에 너무 많이 쌓여 이번 기회에 정리를 과감하게 했습니다.

버릴 것은 버리고 보관할 것은 남겨두면서 사진들을 계절별로 분류해 보니 의외로 가을 사진이 많아 놀랐습니다. 봄이 아름답고, 꽃이 아름답다고 생각하면서 봄에 사진을 많이 찍었는데 왜 가을 사진이 더 많은지 궁금하여 다시 봄 사진과 가을 사진을 비교해 보았습니다. 그 이유를 알 것 같았습니다.

가을이 봄보다 더 아름답기 때문입니다. 화려하지는 않지만 투명한 가을 분위기가 정을 느끼게 하면서 친근감을 주고 우리를 정성스럽게 위로하고 있었습니다.

몇 년 전에 있었던 일입니다.

어느 신자가 '신부님은 인생을 어떻게 살고 싶습니까?'라는 질문을 했습니다. 예기치 않은 질문에 당황하다가 '저는 봄처럼 젊음과 푸르름을 오래오래 간직하면서 살아가고 싶어요'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나이가 들면서 생각이 바뀌고 현실에 순응하게 되는데 나는 젊음의 순수와 열정을 멈추지 않고 언제까지나 청년으로 살고 싶다면서 설명을 덧붙였습니다.

그때의 대답이 '틀렸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지금 같은 질문을 받는다면 그때의 '봄의 분위기가 계속 살고 싶다'는 대답 대신에 '가을을 분위기로 살고 싶어요'라고 대답할 것 같습니다.

봄이 시작이라면 가을은 성숙입니다. 봄이 화려함이라면 가을은 담담함입니다. 봄이 고개를 들고 뽐내는 계절이라면 가을은 고개를 숙이는 겸손의 계절이고, 봄이 입으로 말하는 계절이라면 가을은 마음으로 생각하는 계절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를 아름답게 하는 절정의 계절은 아무래도 가을인 것 같습니다.가을이 아름다운 것은 가을이라는 계절 속에는 다른 때보다 생각이 더 많이 스며들기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들은 확실히 가을에 많은 것을 생각합니다. 자신의 미래도 좀더 멀리 내다보게 되고, 오늘의 내 모습도 세심히 살펴보게 되며, 다른 이의 삶에도 관심이 더해집니다.

맑은 하늘을 보고 진실을 생각하면서 스스로 더 투명해지고 싶어지는 때가 가을인 것입니다. 가을이 되어 이렇게 생각이 깊어지면 우리는 그 생각의 틈새에서 사랑이 자라는 느낌을 갖게 됩니다. 우리는 맑고 투명한 하늘을 올려볼 때 우리는 진실의 문을 열고 사랑이라는 귀한 손님을 맞이하게 됩니다.

풀벌레 소리를 들으며 외로움을 느낄 때 우리는 사랑을 생각합니다.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를 보고 인간의 연약함을 알게 될 때 우리는 사랑의 무한함에 의지하게 됩니다.

그러고 보면 가을은 우리를 외롭게 합니다. 왠지 쓸쓸하고 수많은 그리움이 고개를 들며, 생명의 유한에 우리는 더욱 작아집니다. 이렇게 연약한 우리의 모습들을 추스려 일으켜 세우는 방법은 단 한가지, 그것은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큰 사랑이든 작은 사랑이든, 연정이든 우정이든, 사람에 대한 사랑이든 일에 대한 사랑이든, 만남의 사랑이든 이별의 사랑이든, 우리의 생각이 '사랑'이라는 단어에 닿기만 하면 어떤 외로움도 쓸쓸함도 불안함도 사라지게 되고 새로운 용기와 기쁨과 안정이 우리의 마음을 채우게 되는 것입니다.

가을은 우리가 더욱 겸손해지고 더 낮아지는 계절입니다. 이 아름다운 계절에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우리는 낮아지면서 높아지고, 외로워지면서 따뜻해지며, 약해지면서 강하게 됩니다. 가을은 사랑을 생각하기에 아름다운 계절입니다. 사랑의 감동과 그 설레임을 다가오는 가을에는 만나십시오. 사랑이 없으면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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