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계동성당 게시판

/다미아노의 49제 연도를 다녀와서../

인쇄

이경미 [sophia67] 쪽지 캡슐

2000-10-19 ㅣ No.1883

 

 

안녕하세요. 쏘피 입니다. 어제는 매주 수요일, 청년전례단이 미사 봉사가 있는날인터라 그 주 봉사가 아니라 하더라도, 이젠 몇년이나 버릇이 되어 있어서 인지, 왠지모르게그날만(?) 되면발걸음이 성당으로 향해 지곤 하는 좋은 버릇이 생겼습니다.

 

 

어제도 예외가 아니라 성당으로 미사 봉헌하러 갔습니다. 솔직히 어젠 조금 농땡이를 부리고 싶기도 하고, 피 씨 방에서 일 볼것이 있어 있다보니 시간 가는 줄도 모르겠구 해서 "오늘은 가지 말까"하는 생각이 더 컸음이 사실이었습니다.

 

 

그러나 단원들간의 알게 모르게 생긴 평일 미사 약속이, 이젠 누구하나 보이지 않으면 찜찜한 마음과 궁금한 마음과, 걱정이 더 앞섬을 알기에 미사 시작 직전까지 피씨방에서 일을 본후, 성당에 갔읍니다.

 

 

놀랐어요. 신자가 주일 미사 뺨치도록 많았었거든요. 생각해 보니 어제 수요일부터 시작인 견진교릴 듣는 신자들도 함께 미사 참석해서 였지요.

 

아무튼 평일 미사에 그렇게 많은 신자가 함께 봉헌하니 왠지모르게 기분이 굉장히좋았습니다.

 

 

그리고, 며칠전 부터 알고 있던 다미아노 형제의 49제 날도 오늘이기에  단원을 비롯해 뜻이 맞는 사람들도 같이 가기로 한 날이기도 했습니다.

 

미사후 견진받는 전례단원들이 몇몇있기에 우린 기다리기로 하고 모처에 모여 있었는데 왜그리 시간이 더디 가는지...  11시 가까이 되어서야 다 함께모여 다미아노 형제님댁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너무늦어서..., 와도 괜찮다는 허락은 받았지만, 그래도 혹 방해드리는 건 아닐까 싶었는데 문을 열고 우릴 맞이해 주시는 두 누님과 조카들의 반가운 얼굴이 정말 오길 잘했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정말 기뻐 하셨습니다.

 

 

49제날 인지라, 두 누님은 슬프고 속상한 마음에 술한잔씩 하셨다며, 붉어진 얼굴을 창피해 하셨지만, 그런 누님들의 마음 아픔을 충분히 이해하고도 남았습니다.

 

 

다미가 기거하던 방안엔, 영정 사진이었던 그  환한 미소의 사진이, 성모상과 촛불과 함께

놓여져 있었습니다. 순간 눈물많은 나는 울컥하는 눈물을 참으려 애썼습니다. 울면 누님들이 더 슬퍼하실꺼 같았었거든요.

 

 

전례단원들 모두 그 방안에 모여 연도를 바치며, 아직도 우리곁에 있는것만 같은 다미의 기운을 느끼며 드리는 연도가, 그렇게나 우리의  마음을 평안히 만들줄 몰랐습니다.

 

 

순간이었지만, 늦은 시간때문에 짜증을 냈던 저 자신의 마음이 너무 부끄러웠고, 다미가 우리에게 보여준 많은 웃음과 사랑을, 과연 잘 실천하고 있는중인가 라는 자문도 해보았습니다. 정말 살아있을적의 다미는 누구에게나 짜증 한번 크게 내는 걸 못 봤습니다.

 

 

남자가 없는 우리집에, 필요한거 없냐고 물어보곤 가끔와서 이것 저것 전기도 손봐주던 친구였는데...

새벽 일찍 출근할때나, 저녁 늦게 돌아올땐 어두워 불편했던 현관앞을 환하게 고쳐주기도 했던 자상하고 상냥한 친구였는데...

 

멀리있다는게 아직도 믿어지지않습니다.

 

내가 힘들고 어려워 할땐 많이 위로해주고, 도와주고 달려와 주던 그런 친구였더랬습니다.

지금도 그 현관앞에 서면 다미가 많이 생각나고, 또 많이 그립습니다.

 

 

어제 연도를 마치며 끝으로 자유기도를 돌아가며 했습니다.

 

참았던 울음을 많이 흘렸습니다. 단원들 각자 각자 그를 위한 기도와 그 기도 끝엔, 자신을 돌아보게하는 기도로 마칠수 있게 해준, 우리 모두 안에 다미에게 감사했습니다.

 

 

아낌없이 주는 나무를 생각케 했던 , 참 좋은 연도 였습니다.

 

 

 

 

"같이 갈래?" 라는 제의에 두말없이 예, 갈래요. 라고 함께해준 오로라 공주 한아, 연이, 그리고 연실이에게도 감사합니다.

 

감히 내가 그들에게 감사를 하느냐 마냐는 사실 우습지만, 그래도 언니인 내가 감사하는건 그들의 따뜻한 마음과, 남의 아픔을 함께하고 위로하고자 하는 형제애 입니다.

 

그리고 내가 그 나이때엔(?) 연도가 뭔지도 모르고, 또 그런곳에 함께하자면 핑계대기가 바빴을 거였기 때문입니다.

 

 

 

다미형제를 위한 연도 였지만, 오히려 우리자신들이 조금 더 커져서 돌아왔습니다.

 

이곳에 살아 있는 우리가, 다미게 해줄수 있는 가장 가까운 사랑의 실천은 많이 참고 사랑하기라는 교훈입니다.

 

 

저는 매 미사때마다 다미를 위해 늘 지향을 둡니다. 평안하라고, 기쁘라고, 그리고 우리가 있다고.

 

 

 

제가 그를 위해 해줄 수 있는 일이 그것밖에 없읍니다.

 

 

 

 

.......다미야, 사랑해. 내 좋은 친구.

 

 

 

 

 

 

 



130 0

추천 반대(0)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