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북한관련

성직자로의 불림만이 성소인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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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ter Sheen [PEDROSHEEN] 쪽지 캡슐

1999-04-28 ㅣ No.114

 

 

  부활 후 제 4 주일은 성소 주일로서 온 세계가 다채로운 행사를 통하여 성소의 중요성을 홍보하고  계발하며 하루를 지내고 있다.    교황님도 올 해의 성소 주일을 맞아 담화문을 발표하시면서 "성소는 하느님의 은혜이기 때문에 선택하는 것이 아닌 선택받는 것이며, 동시에 함께 하는 사랑에 응답하는 것" 이라며 "주님의 뜻을 따르는 봉헌의 삶은 하느님의 '선물'임을 깨달아야 한다" 고 말씀하셨다.    성직자로서의 불리움을 받고 그에 응하여 사는 삶이 어찌 고귀하고 값지지 않을 수 있겠는가 ?    말씀대로 악을 대항하여 앞장 서 싸워야하는 분들이 바로 그 분들이므로 세상 구원에 아주 필요한 직책이 아닐 수 없다.    또한 이 분들은 그 직책 상 거룩함의 원천이신 하느님에 대한 모든 업무를 맡아 하며 그 삶 또한 온전히 하느님께 바쳐진 것이므로 이 분들과 관계되는 모든 단어 앞에 성(聖)이라는 접두어가 항상 따라 다니는 것도 당연한 이치일 것이다.

 문제는, 왜 사제나 수도자로서의 불림만이 고귀하고 값진 것이어야만하는가에 있다.   그리고 그 분들만이 그 생애를 온전히 하느님께 바친다는 말인가 ?    평신도들은 삶의 대부분은 뒤에 놓아두고 한쪽 귀퉁이만 짤라 미사 봉헌 시간에 맞추어 하느님께 바치는가 ?    성스럽고 고귀하고 값지다는 것은 그 직책이나 모양새에 있는 것이 아니고 삶의 내용에 있는 것이다.    아무리 그 신분이 성스러운 것일지라도 그 신분에 맞는 삶이 따라주지 못한다면 성스럽기는커녕 오히려 더욱 추악스러울 따름이다.    굳이 성직자의 훈화 말씀에서보다 많은 경우 우리는 자신의 소명에 진지하게  임하는 모습에서 진한 감동을 받는다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삶은 그 자체가 하느님께 온전히 봉헌되어지는 삶이라고 볼 수 있다.    그것은 세상의 어떤 신분이나 직업에 제한을 두지 않는다.   그것이 타인에게 해를 끼치지만  않는다면  이 세상에 필요하지 않은 직업이나  신분이 어디 있겠는가 ?      왜냐하면 세상을 창조하신 조물주께서는 그 완성의 임무를 우리 인간 각자에게 맡기셨기 때문이다.     세상 완성의 임무는 어느 한 부류의 신분에 의한 것이 아니고  여러 분야,  여러 사람의 힘에의하여 오메가 그 정점을 향해나아가고 있는 것이다.     이는 다른 말로 구원의 완성이라해도 좋을 것이다.    이의 실현을 위해 자신이 처한 현실에서 최선을 다한다면 그것이 바로 성스러움이요 값진 삶이되는 것이다.     혼신의 힘을 다해 악기를 연주하는 그 모습이 성스럽지 않은가 ?   땀을 뚝뚝 흘리며 열심히 망치질하는 목수의 모습은 또 어떠한가 ?    가슴에 청진기를 대고 골똘히 병의 증상을 정확히 파악하려는 의사의 모습에서,   다정히 어깨에 손을 얻고 행복에 젖어 걸어가는 젊은 연인들의 모습에서,  조용히 무릎을 꿇고 감실 앞에서 열심히 기도하는 수녀의 모습에서,   아주 열심히 열심히 가르치는 선생님의 모습에서....  이러한 모든 모습들이야말로 진정 구원으로가는 모습이 아니련가 !  소위 평신도들의 역할이  세상 구원의 보조 역할이라는 논리는 완전히 앞뒤가 뒤 바뀐 역설적 논리인 것이다.    이는 교회에 의하여 저주 받아왔던 육신과함께 세속이란 표현으로  구원의 원수로 여겨졌던 세상에 대한 잘못된 개념이 만들어 낸 사생아일 따름이다.   세상을 떠난 구원이 어디 있겠는가 ?  그나마 평신도들의 구원의 역할을 공식적으로 좀 인정해 줬다는 것이 2차 바티칸 공의회인데,  실제로 조금 인정한 것 조차도 실행하기에는 제대로 내키지도 않고 이제껏 독점해온 것을 내주려니 아까운 생각도 들고 했기 때문이다.   평신도 사도직 교령에서 이론적으로 표현된 평신도의 사제직, 왕직, 예언직의 행사는 항상 성직자들에 의해서 제한되왔고 무시되어왔던 것이 사실이다.      왜냐하면 평신도들의 삶의 가치는 성직자들의 것보다 비교도 안되게  교회 내에서  공공연히 평가 절하되왔기 때문이다.   바로 이러한 시각 때문에 성직자로의 불림만이 성소(聖召)라고 불리웠다.   광역적 의미로 모든 직업을 성소로 보아서는 안된다.    진정 세상 구원을 위하여 현장에서 뛰는 성직자 아닌 일반 평신도들이 가진 직업의 고귀성과 성스러움을 신학교 교실의 직업 윤리 시간에서뿐 아니라 이 세상에서도 인정하라 !    좀 더 현실에 눈을 뜨라 !  무엇이 먼저이고  나중인지를 !  세상의 가치가 좁은 성직자의 세계보다 덜한지를 !

 새로운 세기가 열리려한다.    대희년이 준비되고 있다.   유아 독존적이고 항상 권위적인 지도자의 자리에서 내려와 이제껏 상처받아온 평신도의 마음을 어루만져주고  성직만큼이나 다른 소임도 하느님께로부터 받은 귀중한 선물임을 인정하면 냉담자도 돌아오고 세상을 알아주는 세상 사람들도 이제 교회의 품으로 다시 올 것임을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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