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레지오

2005년 10월호 [흔적을 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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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지오마리애 [legio] 쪽지 캡슐

2005-09-26 ㅣ No.29

당고개 성지의 이성례 순교자


<당고개 성지>는 그 크기가 작다. 그러나 그 슬픔의 무게는 어느 성지보다도 크다. 당고개 성지는 이곳이 가지는 치열함을 상징하듯 좁고 꼬불거리는 골목길을 지나 가파른 계단을 걸어 올라가야 한다.

당고개 순교지는 서소문 네거리, 새남터에 이어 우리나라에서 3번째로 많은 아홉 분의 성인이 돌아가신 곳이다. 더구나 이곳은 21세의 권진이(아가타), 22세의 최영이(바르바라), 이인덕 (마리아), 27세의 이경이(아가타), 39세의 손소벽(막달레나) 성녀와, 이성례(마리아)까지 여섯 분의 여교우가 순교한 자리이며 그 가운데 다섯 분이 성녀이다. 당고개 성지를 ꡐ성녀의 성지ꡑ로 부르는 까닭이다.

서울역에서 원효대교 방향으로 가자면 용산전자상가 입구에서 짧은 고가차도를 만난다. 이 고가도로 위에서 바라보자면 북쪽으로 집들이 갯바위처럼 닥지닥지 들어붙은 동산이 있다. 그 동산 맨 위로 보이는 숲, 이곳이 당고개 성지다. 서울 용산구 신계동 1-318호. 당고개(堂峴) 성지는 그러므로 용산전자상가가 시작되는 나진상가 17동과 고가차도가 만나는 지점에서 북쪽으로 난 골목길을 따라 150m쯤 올라가면 된다.

용산의 가장 아름다운 풍광을 일컫던 ꡐ용산8경ꡑ이 있었다. 청계산의 아침 구름, 동작나루의 돛단배, 관악산의 저녁 안개 같은 것들이었다. 바로 이 ꡐ용산8경ꡑ을 가장 아름답게 볼 수 있는 곳이 당고개였다고 한다. 이 아름답던 당고개가 왜 갑자기 한겨울의 사형장이 되었을까. 기해박해가 휘몰아치던 1839년 말, 당시 사형장이 있던 서소문 밖의 상인들은 설 대목장을 앞두고 피를 뿌리지 말아달라고 요구했고, 그렇게 해서 음력 12월 27일과 28일 이틀 동안 당고개에서 10명의 순교자가 목이 잘린다. 이틀로 나뉜 것은 가족을 한날 함께 죽이지 않는다는 원칙에서였다.

당고개 성지를 찾아갔던 날은 흐리고 늦은 오후였다. 용산 전자상사 안 유료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골목길을 걸었다. 성지에는 주차장이 없다. 성지에 올라서자, 잔디밭 한가운데에 순교자 현양탑이 하얗게 서서 하늘을 찌르고 있다. 늘 그랬듯이, 어딘가 참 청초하다는 그런 느낌부터 든다.

성지 왼편(서쪽)에는 이곳의 순교자들을 부조(浮彫)한 청동작품이 제대를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다. 제대는 조금 긴 형태를 하고 있는데, 시성된 여성 순교자가 많이 처형된 곳임을 기념하여 서울대교구 가톨릭 여성연합회에서 봉헌한 것이다.

그 앞이 잔디밭인데, 한가운데 현양탑을 세운게 특이하다. 이러한 파격이 오히려 성스러움을 더한다. 입구 맞은편에는 파티마의 성모상이 하얗게 빛나고 그 앞에 기도석이 마련되어 있다. 나도 모르게 무릎을 꿇고 싶어지는 그런 기도석이다. 성모상 옆에 촛불 봉헌함에서는 스무 개쯤의 초가 붉고 노란 촛농을 흘리며 타오르고 있었다. 이 모든 것을 감싸며 성지 전체에 울타리를 치듯 십자가의 길이 휘돌아간다.

당고개는 여성교우들이 가장 많이 찾는 곳으로 알려진 성지이기도 하다. 웃고 떠드는 사람을 볼 수 없는 성지. 혼잣말로 나직나직 묵주기도를 드리고, 눈을 감고 묵상하고, 조용조용 기도하며 14처를 도는… 여교우들로 가득하다. 여기서 순교한 분들의 고결함은 그렇게 빛난다. 어제 흘리신 순교자들의 눈물이 오늘 우리들의 가슴에 와 알알이 빛나는 구슬이 되고 있는 것이다.

이곳에서 스러져간 순교자 이성례(李聖禮) 마리아(1801-1840). 성 최경환(프란치스코)의 아내이며 조선의 두 번째 신부 최양업(토마스)의 어머니이다.

1801년 충청도 홍주에서 내포의 사도 이존창(루도비코 곤자가) 집안의 딸로 태어났다. 18세에 최경환과 혼인하여 지금의 충남 청양군 화성면 농암리에 살면서 1821년에 장남 최양업을 낳았다. 그 후 가족과 함께 한양으로, 다시 강원도를 거쳐 박해의 위험을 피해 경기도 부평으로, 그리고 지금의 안양시 안양3동 수리산 뒤뜸이로 옮겨가며 살았다.

이 궁핍한 생활 속에서도 늘 지혜로웠던 이성례는 어린 자식들이 칭얼거리면, 요셉과 성모 마리아가 이집트로 피난 가시던 이야기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고 갈바리아 산을 오르던 이야기를 들려주곤 했다고 최양업 신부는 어머니를 추억하고 있다.(1851년 10월 르그레즈와 신부께 쓴 편지)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고, 포졸들이 수리산 교우촌에도 들이닥쳤다. 이때 이성례 부부는 음식을 마련해 포졸들에게 대접한 다음, 40여 명의 교우들과 함께 한양으로 끌려가는 장엄한 모습을 보여준다. 자식 다섯을 끌고 옥에 갇히게 된 이성례는 고문보다도 모성애 때문에 더 큰 고통을 겪어야만 했다. 젖이 나오지 않는데다, 옥중에서 먹일 것이 없어서 젖먹이 막내가 굶어 죽어가고 있었다. 한편 갖은 형벌을 받으면서도 반석 같은 믿음을 지켜가던 남편 최경환이 40여 일 만에 옥중에서 치명하자, 이성례는 아이들을 모두 죽일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속에 마음이 흔들렸다. 이 부분을 최양업 신부는 이렇게 적었다.

<곤장에도 칼에도 용맹하였으나 자식에 대한 애정에는 약해졌습니다. 그리하여 살덩이와 핏덩어리들이 더럽게 흩어져 있는 감옥에서 마리아는 마음과 달리 거짓말로 배교한다고 한마디 함으로써 현세적, 영신적 구원을 함께 도모하려는 그릇된 생각이 들었습니다.>

결국 배교의 말을 하고 풀려났던 이성례는 장남 최양업이 신학생으로 마카오에 유학중에 있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이번에는 더 높은 형조로 압송되었다. 그리고 옥중에서 이성례는 결국 어린 막내가 굶어 죽는 것을 본다.

그러나 이제 이성례는 믿음을 회복하고 있었다. 이 모습을  ꡐ두 아들을 하느님께 바친 것을 기뻐했다ꡑ고 최양업 신부는 적었다.(하나는 유학 보낸 최양업, 하나는 하늘나라로 보낸 막내였을까.) 그리고 관례대로 3차례의 혹독한 고문을 받은 후 사형이 선고되었다. 처형의 날이 가까워오자 이성례는 자식들에게 마지막 말을 남겼다. ꡐ절대로 천주와 성모 마리아를 잊지 말아라.ꡑ ꡐ서로 화목하게 살며, 어떤 어려움을 당하더라도 서로 떨어지지 말고 맏형 토마스(양업)가 돌아오기를 기다려라.ꡑ ꡐ형장에는 따라오지 말아라.ꡑ

1839년 12월 27일(음력), 이성례가 동료 신자 6명과 함께 당고개로 끌려나갈 때, 나이는 39세였다.

흐린 하늘이 어두워지며, 당고개에 어둠이 찾아들기 시작했다. 눈 아래 전자상가에 하나씩 불이 들어오고, 거리에는 차들의 불빛이 줄기를 이루며 흘러갔다.

나에게는 늘 의문이자 혼돈이었다. 그 중 제일 큰 아들이 14살. 어린 것들 넷을 밥 빌러 다니는 거지 고아로 남겨두고 순교한 것이 옳은 것일까. 모성(母性)을 포기하고 신성(神性)을 따랐다고 하지만, 하느님께서 과연 그것을 원하셨을까. 그때마다 나는 모성에 손을 들어주며, ꡐ어머니ꡑ로 살았어야 한다, 신부가 되어 돌아올 아들을 기다렸어야 한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이번 순례에서였다.

아! 이성례는 아이들을 하느님께 부탁했구나. 불현듯 가슴을 치며 그런 말이 떠올랐다. 나 자신의 삶은 물론 내가 책임져야 할 아이들의 훗날 모두를 하느님께 맡겼구나! 그리고 안온한 마음으로 형장으로 향했구나. 모성과 신성, 사람의 질서와 하느님의 질서. 이성례에게 이것들은 서로 부딪히는 것이 아니었다. 실로 위대하게 서로가 서로를 보완하며 서로에게 의지함으로써 비로소 완벽한 하나를 이루어낸 것이 아닌가.


당고개를 내려와 세상의 불빛 속으로 걸어가며 나는 소리 없이 물었다.

주여, 저는 도대체 얼마만큼이나 저를 당신께 맡기고 살아가고 있나요?

_한수산․요한 크리소스토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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