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농동성당 게시판

원한(怨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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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잇키 [Albatross28] 쪽지 캡슐

2000-03-03 ㅣ No.1114

 "원한이 맺힌다."라는 말을 잘 쓴다. 옛날 군가에도 "원한이여. 피에 맺힌"이라는 가사가 있다. 그런데 그렇게 잘 쓰는 말인데도 원(怨)과 한(恨)이 어떻게 다르냐고 물어보면 대답하기 곤란할 때가 많다.그러나 원과 한을 구별하는 아주 간단한 방법

이 있다. 몇가지 말을 만들어 보면 된다. 원수라는 말은 있어도 한수라는 말은 없지 않은가.그리고원수는 갚는다’고 하고 한은 ’푼다’ 라고 한다.

 일본과 한국의 문화적 차이도 이 원과 한을 놓고 보면 분명해진다. 근대 일본 문학

의 상징 이라고 할 수 있는 나쓰메 소세키는 일본 문학의 전통적 특징은 그 유명한 주신구라(忠信藏)처럼 원수 갚는 이야기라고 한 적이 있다.현실 속이든 이야기 속이

든 세계 어느 나라에도 일본처럼 복수극이 많은 나라는 없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갚는 문화이다.원수도 갚고 은혜도 갚는다. 그래서 일본 사람 들은 미안하다고 할

때 ’스미마셍’ 이라고 한다. ’스미마셍’은 아직 갚아야 할 것이 덜 끝났다는 뜻이다.

 17세기 통신사로 일본에 갔던 남욕익은 이러한 일본인들의 기질을 보고 "실낱 같은

은혜도 골수에 새기고 턱끝만한 원망도 갚고야 마네." 라고 노래하고 있다.

 그러나 한국의 문화는 푸는 문화이다. 한만 푸는 것이 아니라 심지어는 심심한 것까

지 풀어 심심풀이라고 한다.남들이 싸워도 풀어 버리라고 하고 죽은 사람들도 한을

남기지 말라고 푸닥거리를 한다.푸닥거리는 푸는 거리에서 온 말이라고 한다.무언가

중요한 일을 할 때 일본 사람은 정신 바짝 차리라고 한다. ’기오쓰게데’라느 말이

그렇다. 말로만 그러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그들은 싸움을 하려고 하면 머리띠를 매

고 어깨띠를 죈다.

 경제 대국이 되어 여유가 생겼다는 오늘에도 일본에서 가장 많이 쓰고 있는 말은

’시메루(죄다)’라는 낱말이다.고속 도로에 붙여 놓은 구호판에는 "자동차 문을 꼭

닫고 안전띠를 죄고 마음을 죄라."라고 쓰여 있다.우리는 원고를 마감한다고 하는

데 일본에서는 ’시메기리(締切..)라고 한다.죄어서 잘라 버린다는 뜻이다.

 하지만 한국인은 무슨 일에 도전할 때 몸을 푼다고 말한다. 싸울 때도 조이는 게

아니라 오히려 위통을 풀어 제친다. 풀지 않으면 힘이 안 나는 사람들이다. 시험치

르러 가는 아이를 붙잡고 하는 소리도 정반대다. 일본 사람들은 ’간바테(눈을 부릅

뜨고 정신차리라는 뜻)’이지만 한국의 부모들은 놀랍게도 "야,마음 푹 놓고 쳐라."

라고 말한다.마음을 놓으라는 말을 한자로 직역하면 방심 아니가.

 원은 갚으면 그만이지만 한은 풀면 창조하는 것이 된다.춘향이의 경우 변사또에 대

한 감정은 원이고 이별한 이도령에 대한 감정은 한이다.얼마나 다른가. 춘향전이 만

약 원의 문학이었다면 변 사또에게 복수하는 드라마로 변하여 일본의 주신구라 같은

이야기가 되었을 것이다. 변 사또를 백 번 죽여도 원심은 없어질지 모르나 그리운

이 도령을 만나지 못한 한은 그냥 남는다. 그러나 춘향전은 원이 아니라 한으로 향

한 문학이었기에 끝내 님과 다시 만나 이별의 한을 푼다. 그래서 정경 부인이 되어

백년 해로를 하는 것이다. 원수 갚는 이야기는 통쾌하지만 핏방울이 튄다. 그러나

한을 푸는 이야기는 신이 난다. 눈물은 나도 핏방울은 없다. 원수를 갚고 나면 맥

이 풀리지만 한을 풀고 나면 힘이 솟는다. 푸는 데서 나오는 힘. 그것이 바로 한

때 유행어가 된 ’신바람’이다.

 문민 정부가 들어서면서 과거청산 이라는 말을 많이들 한다.일제 식민지 때의 친

일파도 우물쭈물 넘어갔고 이승만 때 부정선거를 한사람들도 흐지부지 끝냈다. 그

러니 이번만은 과거를 단절하고 깨끗이 청소를 하자는 것이다.그러나 보복은 청산

보다 더 두려운 결과를 가져 온다. 그것을 우리는 프랑스 혁명 때의 로베르 피에르

에게서 배웠고 소련의 프롤레타리아 혁명때의 스탈린에게서 배웠다.무수한 숙청이

남긴 것은 피가 피를 부르는 악순환이었다.

 백이.숙제 라고 하면 털끝만한 타협도 마다한 수양산 고사리로 이름 높은 선비지

만 논어에 적힌 대로 그는 추호의 악도 용서하지 않았으나 구악(舊惡)을 논하지 않

았다고 되어 있다. 원은 과거를 향해 있지만 한은 미래를 향해 있다.

 우리 민족의 마음에 쌓여 있는 것은 과거에 대한 원이 아니라 못 다한 한들이다.

그래서 한을 풀 때 한국인은 강해지고 창조적이 된다. 신바람 나게 일하고 신바람

나게 사는 것. 이것이 새로운 한국의 새 엔진이다.독재 때문에 하지 못한 한이 있

으면 이제는 민주화의 실천으로 그 한을 풀어 자유의 소중함을 맛보게 하여야 한

다. 과거를 아무리 단죄해도 민주화가 성공하지 않으면 한은 계속 쌓이고 마음속

에 응어리진다.

 

                                              - 이어령 ’말속의 말’中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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