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생각하며

성가정 축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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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유1동성당 [suyu1] 쪽지 캡슐

2008-01-01 ㅣ No.553

가정의 중요성에 대해서는 많은 설명이 필요하지 않을 것입니다. 가화만사성(家和萬事成)이라는 옛말이 말해주듯이 가정이 원만할 때 다른 모든 일이 제대로 됩니다. 남자들은 집안에서 부부간에 서로 티격태격하거나 고부간의 갈등을 안고 산다면 직장 일을 제대로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아이들도 가정불화가 지속되거나 부모가 이혼을 하게 되면 학교 공부는 물론 성격 형성에 적지 않은 지장을 받게 됩니다. 어렸을 적에 부모의 사랑과 보살핌을 받지 못하고 자라난 아이는 십중팔구는 잘못된 길로 빠지게 됩니다. 범죄자들의 대부분은 부모의 사랑 없이 자라난 사람들이라고 합니다. 집안이 평안할 때 바깥일은 물론 아이들의 교육도 원만하게 이루어지고, 화목한 가정이 많아질 때 사회도 안정되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가정은 살아가는 데에 필요한 힘을 얻는 보금자리요, 사람을 키워내는 못자리이며 건전한 사회의 초석이라고 하겠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가톨릭 교회는 전통적으로 가정에 많은 관심을 갖고 그 중요성에 대해서 누누히 강조해 왔습니다. 그래서 성가정(聖家庭) 축일이란 것을 정해서 지내 왔던 것입니다. 성가정이란 예수, 마리아, 요셉께서 이루신 가정을 말하는 것이고, 우리도 그 가정을 본받아서 성가정을 이루고자 다짐하는 데에 이 축일의 의미가 있다고 하겠습니다. 요즘에는 식구들이 모두 세례를 받으면 “성가정이 되었다”고 말을 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이 말에 다소 거부감을 느낍니다. 그런 경우는 “가족 모두 신자가 되었다”, “이제 신자 가정이 되었다”고 표현하는 것이 옳다고 봅니다. 성가정은 우리가 목표로 추구해야 할 대상이지 우리가 이미 이루었다고 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만큼 우리가 부족하기 때문이겠지요.

 

   성가정이라고 해서 모든 것이 순풍에 돛단배처럼 잘 되어 갔다고 생각한다면 큰 오해입니다. 예수, 마리아, 요셉의 가정은 보통 가정보다 더 많은 우여곡절을 겪어야 했습니다. 이 가정의 성립부터 순탄하지가 않았습니다. 요셉이 자기 약혼녀 마리아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결혼 전에 임신한 사실을 알고는 파혼하기로 결심을 했습니다. 그러나 꿈속에서 천사는 마리아의 아이가 성령으로 잉태된 것임을 알려주었고 요셉은 이 말을 믿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입니다(마태 1,18-25).

이렇게 힘들게 결혼이 성사된 후에도 또 다른 어려움이 닥칩니다. 마리아는 예수 아기를 여행 중에, 그것도 여관방이 없어서 초라한 마구간에서 낳아야 했습니다(루카 2,1-7). 또 요셉은 예수 아기를 죽이려는 헤로데 왕의 손길을 피해서 멀리 이집트로 가서 그곳에서 얼마간 타향살이를 해야 했습니다(마태 2,13-15). 마리아와 요셉이 예수님을 키우는 데에도 그야말로 속 썩는 일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이 열두 살 나던 해에 가족 전체가 예루살렘으로 순례를 갔었습니다. 그런데 돌아오는 길에 마리아와 요셉은 예수님이 없어진 것을 알게 되었고 사흘 동안 애태우며 찾아다니다가 성전에서 학자들과 토론하고 있는 아들 예수를 겨우 찾게 됩니다(루카 2,42-52). 이처럼 성가정이라고 해서 어려움과 고난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적어도 이런 면에서는 보통 가정과 크게 다를 바가 없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서 예수, 마리아, 요셉은 성가정을 이룰 수 있었을까요?

 

   마리아, 요셉의 가정이 성가정인 이유는 그들이 이렇게 무엇보다도 하느님의 뜻을 따르고자 하는 신앙인이었다는 데에 있습니다. 마리아와 요셉은 어떤 상황에서든 우선 하느님 아버지의 뜻에 귀를 기울였고 그 뜻을 기꺼이 따랐습니다.

 

   마리아는 하느님의 아들을 잉태하게 된다는 가브리엘 천사의 전갈을 받고서 비록 그 전갈의 의미를 다 알아듣지는 못했지만 하느님께 대한 굳은 신뢰 안에서 다음과 같이 응답합니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1,38) 또 성모님은 열두 살의 예수님을 예루살렘 순례의 귀환 길에서 잃어버렸다가 성전에서 다시 찾았을 때 아들의 이해할 수 없는 대답을 들었지만, 그 말을 무시하지 않고 마음속에 간직하십니다(루카 2,51). 성모님은 비록 하느님의 뜻을, 아들의 말을 다 파악할 수 없어도 무시하거나 내치지 않고 마음속에 간직하십니다. ‘내가 지금 이해하지는 못해도 뭔가 드러나지 않은 깊은 뜻이 있을 것이다’는 생각으로 그러셨을 것입니다. 이는 인내와 겸손의 태도입니다. 성모님은 인내와 겸손의 태도로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이시고, 그런 태도로 아들을 기르신 것입니다.

 

   요셉 역시 하느님의 뜻을 충실히 따랐습니다. 결혼 전에 약혼녀인 마리아가 임신한 사실을 알고서 분명 당황하였고 고민도 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꿈에 나타난 천사의 말을 듣고는 하느님의 뜻을 깨닫고 마리아를 흔쾌히 아내로 맞아들입니다(마태 1,24). 또한 천사의 지시대로 위험에 처한 가족을 위해서 주저하지 않고 밤길을 나서서 멀리 피신하고, 다시 천사의 지시에 따라 가족들과 함께 나자렛으로 돌아갑니다(마태 2,13-15. 19-23). 요셉은 하느님의 뜻을 따르기 위해서 자신의 권리를 기꺼이 포기하고 마리아를 아내로 받아들이고, 가족을 위하여 어려움도 기꺼이 감수합니다. 이는 자비와 헌신의 태도입니다. 요셉 성인은 자비와 헌신의 태도로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신 것입니다.

 

   예수님 역시 하느님의 뜻에 충실하셨습니다. 하늘 아버지의 뜻에 따라서 육친의 부모를 잠시 떠나 성전에 머무르셨지만, 다시 마리아와 요셉을 따라 나자렛으로 돌아가 “그들에게 순종하며”(루카 2,51) 지내셨습니다. 십계명의 넷째 계명인 ‘부모에게 효도하라’는 말씀에 충실하신 것이지요. 예수님은 하늘 아버지에 대한 충실, 육친의 부모님께 대한 효도로써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예수, 마리아와 요셉, 그분들에게도 우리와 똑같이 어려움과 고민이 있었고 속이 상하는 일도 있었으며 미처 다 알아듣지 못하는 일도 있었습니다. 이들이 성가정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도 하느님의 뜻을 우선으로 하면서, 그 뜻을 구체적으로는 인내와 자비, 헌신, 충실의 모습으로 실천하면서 가족 서로를 감싸주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우리 가정은 하느님의 뜻보다는 다른 것에 더 무게 중심을 둡니다. 예를 들어서 아이들이 학업을 위해서라면 신앙생활도 뒷전으로 미뤄둡니다. 고3 아이에게 주일 미사 빠지지 말고 가라, 아침 저녁 기도 바치라고 권고하는 부모, 어려움에 처한 아이와 함께 기도하는 부모는 과연 얼마나 될까요? 고 3 시기가 어려울 때입니다. 바로 이때 하느님의 뜻을 생각하고 그분께 모든 것을 의탁하는 것을 배울 수 있지요. 그런데 적지 않은 부모들은 '고3 때는 성당을 잠시 쉬고 공부 열심히 해서 대학에 붙은 다음에 교리 교사도 하고 다른 활동을 하라'고 합니다. 어렵고 힘들 때일수록 하느님의 뜻을 생각하고 그분께 의탁해야 하는 것을 배울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이런 식으로 날려버립니다.

   또 부모들은 자신 출세와 돈벌이를 위해서라면 신앙생활도 포기하는 경우 종종 있더군요. 제가 오래 전에 군복무할 때 진급을 위해서는 자신의 종교를 버리고 상관의 종교를 따라가는 경우를 보았습니다. 안타까운 일이지요. 가족 구성원들끼리는 어떤가요? 인내보다는 조급함이 앞서지요. 다른 식구의 말을 잘 듣고 거기에 대답하기 보다는 하는 말을 뚝 자르고 자기 말하기 바쁩니다. 누가 마음에 안드는 행동을 했다면, '왜 그랬을까? 무슨 사정이 있었던 것은 아닐까?'하고 좀 생각해보고, 당사자에게 물어봐 확인해도 늦지 않을테네, 야단과 비난의 말이 먼저 나갑니다. 서로 감싸주기 보다는 미움과 다툼으로 서로를 대하고, 헌신보다는 자기 것을 움켜쥐고 손해 보기를 꺼려하는 경우도 많지요. 가족끼리는 사랑 때문에 기꺼이 서로 손해볼 생각을 해야 하는데, 어느 새 장사의 논리가 끼어들어 결코 손해보지 않으려고 합니다. 젊은 부부들은 좀 져주고 손해보면 자존심이 무너지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런 관계의 근저에는 '기꺼이 주고도 덜 준 것 같아서 미안해 하는' 사랑이 아니라 '밑져서는 안 된다'는 장사의 마인드가 깔려있을 뿐입니다.  

   아이들에게 부모에 대한 효도와 어른들에 대한 예의를 가르치기 보다는 기죽이지 않겠다고 버릇없는 말과 행동까지도 허락합니다. 가족까리 외식하러 나가서 식당에서 아이들이 헤집고 돌아다니면서 소란을 피워 다른 손님들의 눈을 찌프리게 해도 '애 기죽여서는 안 된다'고 그냥 놔둡니다. 요즘에는 성당에서 주일학교 미사에서 아이들이 떠들어서 신부님이 좀 야단치면 부모들이 반발한다는 말도 있습니다. '우리 애는 집에서도 야단 안 치는데, 왜 성당에서 야단치느냐'고요. 예전에는 반찬 한 가지를 하더라도 할아버지 또는 아버지의 입맛에 맛는 것을 했지만, 요즘에는 애들 입맛이 기준이 됩니다. 그래가지고서야 아이들이 어찌 부모에 대한 효도를 배우겠습니까? 이렇게 하면서 세례받고 성당 다닌다고 해서 성가정이 되는 것은 아니지요. 예수, 마리아, 요셉 성 가정이 하신 바를 실천할 때 성가정을 닮아 가는 것입니다. 오늘의 세태는 성가정이 사신 바와는 정반대로 가는 기류가 아주 강합니다. 그러기에 성가정은 더욱 더 중요하게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우리도 우리가 당하는 모든 어려움, 역경 속에서도 그분 뜻대로 살려고 노력하며 가족끼리 인내로 참아주고, 관대하고 대하며, 자신을 쪼개주려고 하고, 가족 간의 도리를 지키려고 노력한다면, 바로 성가정을 닮아 갈 수 있을 것입니다. / 글. 손희송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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