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장동성당 게시판

로마서 12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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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희성 [lhopeter] 쪽지 캡슐

2010-12-02 ㅣ No.2129


 

1절 “그러므로 형제 여러분, 내가 하느님의 자비에 힘입어 여러분에게 권고합니다. 여러분의 몸을 하느님 마음에 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바치십시오. 이것이 바로 여러분이 드려야 하는 합당한 예배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우리의 몸을 하느님께 제물로 바치라고 권고합니다. 십자가에 제헌되신 예수님을 생각한다면 제물로 바쳐진다는 것이 그리 낯설지는 않지만 제사상에 올려진 음식물이나 불에 태워지는 번제물을 떠올리면 긴장이 되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바오로 사도의 권고대로 자신을 “하느님 마음에 드는 거룩한 산 제물”(로마 12,1), “하느님께 바치는 향기로운 예물과 제물”(에페 5,2)이 되어야 합니다. [구약의 번제는 오늘날 바비큐 요리와 비슷했다고 합니다. 죽은 동물의 고기 기름을 태우면 좋은 냄새가 나고 고기는 먹기 좋게 되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제사 음식은 꼭 유교 예법을 따르기보다는 식구들이 함께 맛있게 먹을 수 있는 것으로 차리면 좋겠습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 좋아하시는 것이 몸일까요, 마음일까요? 보통은 눈에 보이는 몸보다는 눈에 보이지 않는 마음이 더 중요한 것으로 여겨집니다. “하느님께 맞갖은 제물은 부서진 영. 부서지고 꺾인 마음을 하느님, 당신께서는 업신여기지 않으십니다”(시편 51,19). 몸으로 아무리 좋은 일을 하고 좋은 것을 드려도 진실하고 정성스러운 마음이 없으면 값어치가 떨어집니다. 영과 마음이 중요한 것이기에 주님께서는 “너희에게 새 마음을 주고 너희 안에 새 영을 넣어 주겠다. 너희 몸에서 돌로 된 마음을 치우고, 살로 된 마음을 넣어 주겠다.”(에제 36,26)고 말씀하십니다.


다른 한편, 주님께 “새 영”과 “살로 된 마음”을 받은 사람은 자신의 몸을 “하느님 마음에 드는 거룩한 산 제물”(로마 12,1)로 바쳐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12장 1절 첫 단어 ‘그러므로’의 뜻입니다. 예수님을 마음으로 믿는다고 하면서 자신의 몸을 거룩한 제물로 바치지 않는다면, 그 믿음은 값어치 있는 것이라고 말하기 어렵습니다. 사실, 우리의 몸은 그리스도의 지체요 성령의 성전이므로, 머리이신 그리스도를 영광스럽게 하고 성전을 깨끗이 하여 성령을 모시는 것은 마땅하고 옳은 일입니다. “여러분의 몸이 그리스도의 지체라는 것을 모릅니까? 그런데 그리스도의 지체를 떼어다가 탕녀의 지체로 만들 수 있겠습니까? 결코 그럴 수 없습니다”(1코린 6,15). “여러분의 몸이 여러분 안에 계시는 성령의 성전임을 모릅니까? 그 성령을 여러분이 하느님에게서 받았고, 또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의 것이 아님을 모릅니까? 하느님께서 값을 치르고 여러분을 속량해 주셨습니다. 그러니 여러분의 몸으로 하느님을 영광스럽게 하십시오”(1코린 6,19-20).


그렇습니다. 하느님께서 값을 치르고 속량하신 것은 우리의 영혼만이 아닙니다. 우리의 몸도 구원하셨습니다. 다만, 우리의 몸은 연약하고 나약합니다. 예수님께서도 그 점을 잘 아시고 겟세마니에서 제자들에게 “마음은 간절하나 몸이 따르지 못한다.”(마태 26,41)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오시어 우리의 영을 충만케 하시면 우리는 몸의 연약함과 한계를 초월할 수 있습니다. 성령이 충만한 스테파노는 하느님의 영광을 볼 수 있었고 예수님을 위하여 육신의 생명까지 제물로 바칠 수 있었습니다.


* 사도 7,55-60

55 그러나 스테파노는 성령이 충만하였다. 그가 하늘을 유심히 바라보니, 하느님의 영광과 하느님 오른쪽에 서 계신 예수님이 보였다. 

56 그래서 그는 “보십시오, 하늘이 열려 있고 사람의 아들이 하느님 오른쪽에 서 계신 것이 보입니다.” 하고 말하였다. 

57 그들은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았다. 그리고 일제히 스테파노에게 달려들어, 

58 그를 성 밖으로 몰아내고서는 그에게 돌을 던졌다. 그 증인들은 겉옷을 벗어 사울이라는 젊은이의 발 앞에 두었다. 

59 사람들이 돌을 던질 때에 스테파노는, “주 예수님, 제 영을 받아 주십시오.” 하고 기도하였다. 

60 그리고 무릎을 꿇고 큰 소리로, “주님, 이 죄를 저 사람들에게 돌리지 마십시오.” 하고 외쳤다. 스테파노는 이 말을 하고 잠들었다.


그러므로 ‘몸’을 ‘거룩한 산 제물’로 바친다는 것은 ‘몸’뿐 아니라 ‘영’도 함께 봉헌하는 것입니다. 사실, 이 세상에 살아 있는 동안에는 영혼과 분리된 육신은 있을 수 없습니다. 영혼과 육신은 죽음으로 분리됩니다. 바오로 사도는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 ‘믿음의 마음을 몸의 순종으로 표현’하도록 촉구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한마디로 “믿음의 순종”(로마 1,5; 16,26)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예수님의 가르침에 순종하지 않는다면, 그것을 과연 믿는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살아 있는 동안 우리는 언제든지 몸을 산 제물로 봉헌할 수 있겠습니다만, 되도록 자신의 능력(탈렌트)이 최고일 때 자신을 봉헌하는 것이 더욱 좋겠습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기운도 넘치고 머리 회전도 빠르고 돈도 잘 벌고 사회적으로 명성을 날릴 때에는 자기 자신과 자기 가족의 만족을 위하여 살다가, 건강도 나빠지고 기억력도 떨어지고 남은 돈도 별로 없고 사회적으로도 별 볼일 없어졌을 때에야, 하느님께 돌아와 무릎을 꿇고 엎드려 자신을 받아달라고 하지 말자는 것입니다. 물론 하느님은 자비하신 아버지이시므로 돌아온 자녀를 기꺼이 받아들이실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느님께서 하실 일이고, 우리는 우리 몫을 다하자는 것입니다. 그러면 언제가 우리 자신을 하느님께 바치는 가장 좋은 때일까요? 바로 지금입니다. “지금이 바로 매우 은혜로운 때입니다. 지금이 바로 구원의 날입니다”(2코린 6,2). 하느님께 나 자신을, 내가 가진 모든 것을 내맡기는 날, 그날이 믿음의 순종을 하는 날, 죄를 용서받는 날, 구원의 날입니다. 이 결심을 하는 오늘이기를 바랍니다. 하느님께 바칠 것이 무엇인지 생각하는 시간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행복하기를 바라면서 행복과는 반대 방향으로 가지 않기를 바랍니다.


자신을 산 제물로 바치는 것이 하느님께 드리는 “합당한 예배”(로마 12,1)라고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여기에서 “예배”는 그리스어 원문으로 ‘라트레이아’( latreiva)입니다. ‘라트레이아’는 ‘봉사’라고도 해석할 수 있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합당한 봉사’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마음에 사랑을 가득 담아 이웃을 섬기는 삶이요 하느님을 섬기는 삶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이라면 ‘마땅히 해야 하는 봉사’입니다. ‘하느님께 드리는 예배’와 ‘이웃에 대한 봉사’를 따로따로 생각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예배와 봉사는 동전의 앞뒤 면과 같습니다. 앞면과 뒷면은 동일하지는 않지만 서로 값어치를 확인해 줍니다. 한 쪽이 없으면 그 동전은 가치를 잃고 맙니다. 적극적으로 봉사하기가 어렵다면, 현재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는 일을 하고 있지 않은지 생각해 보고 바로잡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을 이루는 지체들입니다. 지체들은 각기 자기 몫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몸 전체를 유지하고 자라게 하는 데 필요한 은총을 각 지체에게 베푸십니다. “우리는 저마다 하느님께서 베푸신 은총에 따라 서로 다른 은사를 가지고 있습니다”(로마 12,6). 그러므로 자신이 받은 은사를 식별하는 일은 매우 중요합니다. 분수에 넘치는 몫을 책임지려 해서는 안 됩니다. “자신에 관하여 마땅히 생각해야 하는 것 이상으로 분수에 넘치는 생각을 하지 마십시오”(로마 12,3). “믿음의 정도에 따라”(로마 12,3) 자기 분수에 맞는 역할을 찾아야 합니다. 자신이 받은 은사나 자기 믿음의 정도를 과대평가해서도, 과소평가해서도 안 됩니다.


이른바 열심한 사람들이 공동체를 망치는 일이 생기는 것은 바로 자기 분수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해야 자신의 은사를 식별할 수 있을까요? 먼저 세속적 가치관을 버려야 하고, 정신을 새롭게 해야 합니다. 우리가 어려서부터 보고 들은 세속적 행태와 가치관, 예컨대 약자에 대한 배려가 부족한 경쟁의식, 자신의 축재와 출세를 위하여 알게 모르게 남의 것을 취하는 것, 부당한 권력 앞에서 침묵하는 행태, 높은 자리에 오르려 하고 오른 뒤에는 낮은 곳을 외면하는 자기 과시와 권력 지향적 사고방식 따위입니다. 세속적 가치관을 버리고 정신을 새롭게 하려면, 날마다 아니 아침 점심 저녁으로 자신을 성찰하고 회개해야 합니다. 하느님 앞에서 기도해야 합니다. 하루에 몇 번씩 물과 음식을 먹어야 하듯이, 끊임없이 숨을 쉬어야 하듯이, 날마다 얼굴을 씻고 손발을 닦아야 하듯이, 꾸준히 자주 자기 마음을 하느님 앞에서 열어 놓고 추한 생각, 이기적인 마음, 탐욕과 교만을 털어내고 씻어내야 합니다. “그리하여 무엇이 하느님의 뜻인지, 무엇이 선하고 무엇이 하느님 마음에 들며 무엇이 완전한 것인지 분별할 수 있게 하십시오”(로마 12,2).


한 사람이 자신의 은사를 잘못 식별하여 공동체 안에서 자신의 몫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면, 그 피해는 공동체 전체에게 돌아갑니다. 어떤 사람이 이기심과 탐욕과 교만을 깨끗이 씻어내지 못하면, 그 주변 사람이 고통을 겪습니다. 또 어떤 사람이 물을 낭비하면, 자연이 훼손되고 물 부족으로 어려움을 겪는 사람이 생깁니다. ‘이웃에게 피해를 주는 것’은 ‘이웃에 대한 봉사’와는 정반대되는 일입니다. 이것은 하느님께 드리는 예배가 아니라 하느님을 업신여김이요 배은망덕입니다. 하느님께서 베풀어 주신 풍성한 은총에 대한 배은행위입니다. 이러한 행위를 하는 몸은 “하느님 마음에 드는 거룩한 산 제물”(로마 12,1)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굽어보시지 않는 카인의 제물(창세 4,3-5 참조)입니다. 우리의 행동 하나하나가 하느님께 바치는 제물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믿음을 거듭 강조하였지만, 동시에 믿음에 따르는 순종의 삶, 곧 몸으로 바치는 제사의 중요성도 빼놓지 않고 권고하는 것입니다. 미사 때 봉헌되는 그리스도의 살과 피에 동참하여 바치는 믿음의 순종이야말로 우리가 하느님 아버지께 드리는 거룩한 제물일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생각이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생각 하나, 말 하나, 행동 하나를 모두 거룩하고 아름다운 예물로 봉헌하는 마음을 함께 지니면 좋겠습니다.


우리 하루하루의 삶은 반복의 연속입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씻고 식사하고 출근길에 나서거나 집안일을 합니다. 만나는 사람들도 거의 비슷합니다. 가끔씩 만나는 사람들도 크게 바뀌지 않습니다. 간혹 새로운 만남이 있고 새로운 관계를 맺기도 합니다. 우리 삶에서 반복되는 부분이 절반은 넘을 것입니다. 이 절반은 결코 적은 부분이 아닙니다. 이 시간의 삶을 하느님께 거룩한 제물로 바치지 못한다면, 우리 삶의 절반 이상은 실패입니다. 새로운 상황, 새로운 도전은 우리가 미처 준비하지 못한 때에 닥치지만, 매일 반복되는 부분은 우리가 충분히 대비하고 성화할 수 있습니다. 아침에 눈을 뜰 때에는 새로운 하루를 주신 하느님께 찬미와 감사를 드립시다. 세수를 할 때에는 우리의 몸을 깨끗이 해 줄 뿐 아니라 정신까지도 번쩍 들게 해 주는 물을 선사해 주신 하느님께 영광을 돌리고 정결한 몸과 마음으로 살아갈 것을 다짐합시다. 밥이나 빵을 먹을 때에도, 과일, 커피, 우유를 먹거나 마실 때에도 주님의 은혜에 감사하고, 아울러 마태오 복음 25장 40절, 45절에 나오는 “가장 작은 이들”, 예수님께서 당신의 형제들이라고 하신 ‘굶주리고 목마르고 떠돌이생활을 하고 헐벗고 병들고 감옥에 갇힌 사람들’에게 사랑을 실천할 것을 다짐합시다. 가장 작은 이들에 대한 봉사는 교회의 우선적 선택이어야 합니다.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지체입니다. “우리도 수가 많지만 그리스도 안에 한 몸을 이루면서 서로서로 지체가 됩니다”(로마 12,5). 바오로 사도는 로마서 12장 6-8절에서 각 지체에게 주어진 몇 가지 서로 다른 은사를 제시합니다. 예언의 은사, 봉사의 은사, 가르치는 은사, 권면하는 은사, 나누어 주는 은사, 지도하는 은사, 자비를 베푸는 은사가 그것입니다. 이러한 은사들은 그리스도의 몸에 필요한 것들입니다. 이 가운데 한두 가지는 누구나 받은 은사일 것입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각기 받은 은사를 활용하지 못하여, 저 게으른 종처럼 야단맞는 일이 없어야 하겠습니다. 주인에게 한 탈렌트를 받았으나 그것을 땅에 숨겨 두었다가 그대로 돌려 준 종은 주인한테 “악하고 게으른 종”(마태 25,26), “쓸모없는 종”(마태 25,30)이라는 말을 들어야 했습니다. 그리스도의 몸의 각 지체들은 서로 자기 몫을 다하고자, 부지런하고 쓸모 있는 종이 되고자 상호 격려하며 선의의 경쟁을 하는 것도 좋겠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 지체로서의 역할을 강조한 데 이어, 성도들 사이의 거짓 없는 사랑, 형제애와 친교를 생활 규범으로 제시합니다. “형제애로 서로 깊이 아끼고, 서로 존경하는 일에 먼저 나서십시오”(로마 12,10). “궁핍한 성도들과 함께 나누고 손님 접대에 힘쓰십시오”(로마 12,13). 그리스도인은 사랑 없이는 아무것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사랑이 없으면 하느님 앞에 남을 것이 하나도 없기 때문입니다. 코린토 1서 13장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나에게 사랑이 없으면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1코린 13,2). 신령한 언어의 은사, 예언의 은사, 가르치는 은사, 나누어 주는 은사도 사랑이 없으면 모두 쓰레기입니다. 사랑 없는 사람은 “하느님 마음에 드는 거룩한 산 제물”(로마 12,1)이 될 수 없습니다. 하느님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이 하느님 나라 잔치에 참여할 수 있겠습니까? 구원과 생명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언제까지나 죽음에 머물러 있습니다. “우리는 형제들을 사랑하기 때문에 우리가 이미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갔다는 것을 압니다. 사랑하지 않는 자는 죽음 안에 그대로 머물러 있습니다”(1요한 3,14). 사랑은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것이 아닙니다. 생명을 원한다면 사랑해야 합니다. 사랑이 있는 곳에 생명이 넘칩니다. “이 강이 흘러가는 곳마다 온갖 생물이 우글거리며 살아난다”(에제 47,9). 하느님은 사랑이시며 생명을 주십니다.


믿음에는 실천이 따라야 하고, 실천에는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사랑 없는 실천, 실천 없는 믿음은 별 가치가 없습니다. “나의 형제 여러분, 누가 믿음이 있다고 말하면서 실천이 없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러한 믿음이 그 사람을 구원할 수 있겠습니까?”(야고 2,14) “영이 없는 몸이 죽은 것이듯 실천이 없는 믿음도 죽은 것입니다”(야고 2,26). 이 시간에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물으십니다. ‘너의 믿음에 실천이 있느냐?’ ‘너의 실천에 사랑이 있느냐?’ ‘너의 사랑이 있는 곳에 모든 것이 살아나느냐?’ 이 질문들은 우리를 아프게 합니다. 우리에게는 믿음의 순종, 사랑의 실천이 너무도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나는 책망도 하고 징계도 한다. 그러므로 열성을 다하고 회개하여라. 보라, 내가 문 앞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 누구든지 내 목소리를 듣고 문을 열면, 나는 그의 집에 들어가 그와 함께 먹고 그 사람도 나와 함께 먹을 것이다. 승리하는 사람은, 내가 승리한 뒤에 내 아버지의 어좌에 그분과 함께 앉은 것처럼, 내 어좌에 나와 함께 앉게 해 주겠다”(묵시 3,19-21). 성모님께서 하늘로 들어 올림을 받으시어 천상 모후의 관을 받으셨듯이, 우리도 하느님 나라에서 멋진 어좌에 앉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주님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정신을 새롭게 하여 자신을 변화시킵시다. 비록 가끔씩 자신에게 실망도 하겠지만 좌절하지 맙시다. “열성이 줄지 않게 하고 마음이 성령으로 타오르게 하며 주님을 섬기십시오. 희망 속에 기뻐하고 환난 중에 인내하며 기도에 전념하십시오”(로마 12,11-12).


* 예화: 밴 다이크의 소설 ‘대저택’에 등장하는 이야기 하나.

웅장한 집에서 살던 한 부자가 죽어서 하늘나라에 올라갔다.그런데 자신의 집은 비가 새는 허름한 오두막이었다.마침 그 옆에 으리으리한 대저택이 건축되고 있었다.부자가 천사에게 물었다.“도대체 저 웅장한 집은 누구의 것입니까?” 천사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당신의 옆집에 살던 가난한 의사가 살 집입니다.” 부자는 깜짝 놀랐다.그 의사는 동네에서 조그마한 병원을 운영하는 사람이었다.의사는 마을 사람들의 질병을 무료로 치료하느라 평생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했다.천사는 놀란 표정을 짓는 부자를 향해 말했다.“땅에서 쌓은 선행들은 모두 하늘나라로 배달됩니다.당신의 선행은 오두막의 지붕을 씌우기에도 부족할 정도예요.당신은 자신을 위해서만 살았어요.그러나 저 의사는 평생동안 남에게 사랑을 베풀었어요.그가 베푼 사랑은 대저택을 짓고도 남을 분량입니다.”


14절 “여러분을 박해하는 자들을 축복하십시오. 저주하지 말고 축복해 주십시오.”

참으로 어려운 말씀을 바오로 사도께서 하십니다. 박해받는 사람 입장에서는 박해하는 자를 축복하라는 말씀을 들으면, ‘자기가 박해를 안 당해 봤으니까 그런 말을 하는 거지.’라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바오로 사도는 자신이 박해를 받은 경험이 있는 사람으로서 이러한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매도 맞고 돌팔매질도 당한 경험이 있는 분입니다. 박해자를 축복하는 일이 쉽다면 바오로 사도가 그런 말씀을 하실 필요도 없었겠지요. 쉽지 않은 길입니다. 그러나 그 길이 그리스도인의 길이고, 그 어려운 길도 예수님께서 함께하시면 쉽게 갈 수 있습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마태 11,28-30).


한 가지 재미있는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내가 어떤 사람을 축복하면 그 사람이 복을 받나요? 또 내가 어떤 사람을 저주하면 그 사람이 저주를 받나요?’ 어떻습니까? 루카 복음에 보면, 주님께서는 “어떤 집에 들어가거든 먼저 ‘이 집에 평화를 빕니다.’ 하고 말하여라. 그 집에 평화를 받을 사람이 있으면 너희의 평화가 그 사람 위에 머무르고,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되돌아올 것이다.”(루카 10,5-6)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저주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어떤 사람을 저주하였을 때, 그 사람이 저주를 받을 만한 사람이면 저주를 받겠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이라면 그 저주가 자신에게 되돌아올 것입니다. 그러니, 축복은 하면 할수록 좋고, 저주는 하면 할수록 손해입니다.


15절 “기뻐하는 이들과 함께 기뻐하고 우는 이들과 함께 우십시오.”

요한 크리소스토모 성인(347/349-407년)은 이런 말씀을 하셨다고 합니다. “우는 자와 함께 우는 것은 웃는 자와 함께 웃는 것보다는 쉽다. 우리가 웃는 자와 함께 웃기 위해서는 훨씬 더 고상한 인격을 필요로 한다.” 이웃의 기쁨에 진심으로 함께할 수 있으려면 참으로 고상한 인격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우리 속담에도 사촌이 논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말이 있습니다. 가까운 사람이 잘 되는 것을 싫어하는 경향이 누구에게나 어느 정도는 있다는 것입니다. 인류 최초의 살인을 저질렀던 카인(농부)의 경우도, 동생 아벨(양치기)이 잘 되는 걸 보고 참지 못해서 죄를 범한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아벨과 그의 제물은 기꺼이 굽어보셨으나, 카인과 그의 제물은 굽어보지 않으셨다. 그래서 카인은 몹시 화를 내며 얼굴을 떨어뜨렸다”(창세 4,4-5). 주님께서는 카인에게 “네가 옳게 행동하면 얼굴을 들 수 있지 않느냐?”(창세 4,7)고 하시며, 죄악에 빠지지 않도록 경고하십니다. 그러나 카인은 결국 동생 아벨을 들로 데려가 죽입니다(창세 4,8). 인류의 첫 살인이 시기와 질투에서 비롯되었음을 명심하고, 카인의 전철을 밟지 않도록 해야겠습니다(칠죄종: 교만, 인색, 음란, 분노, 질투, 탐욕, 태만). 죄악에 빠진 카인에게는 고단한 삶이 남아 있을 뿐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각자에게 그 행실대로 갚으십니다(로마 2,6 참조). “네가 땅을 부쳐도, 그것이 너에게 더 이상 수확을 내주지 않을 것이다. 너는 세상을 떠돌며 헤매는 신세가 될 것이다”(창세 4,12).


* 로마 12,19-20

19절: 사랑하는 여러분, 스스로 복수할 생각을 하지 말고 하느님의 진노에 맡기십시오. 성경에서도 “복수는 내가 할 일, 내가 보복하리라.” 하고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20절: 오히려 “그대의 원수가 주리거든 먹을 것을 주고, 목말라하거든 마실 것을 주십시오. 그렇게 하는 것은 그대가 숯불을 그의 머리에 놓는 셈입니다.” 


복수는 하느님의 몫입니다. 우리의 몫은 원수라도 사랑하는 것입니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너희를 미워하는 자들에게 잘해 주고, 너희를 저주하는 자들에게 축복하며, 너희를 학대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루카 6,27-28). 어렵지만 노력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미워하는 자, 저주하는 자, 학대하는 자, 박해하는 자, 고문하는 자를 사랑하기는 참으로 어렵습니다. 손톱이 뽑히고, 혀가 잘리는 고문과 폭력을 당하면서 어떻게 그 가해자에게 복을 빌어 줄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우리의 스승께서는 그렇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들을 용서하여 달라고 하느님 아버지께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루카 23,34). 그런 분을 그들은 어떻게 대했습니까? “그들은 제비를 뽑아 그분의 겉옷을 나누어 가졌다”(루카 23,34). 사도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마음에 새겼고, 신자들에게 예수님을 본받도록 가르쳤습니다. “바로 이렇게 하라고 여러분은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리스도께서도 여러분을 위하여 고난을 겪으시면서, 당신의 발자취를 따르라고 여러분에게 본보기를 남겨 주셨습니다”(1베드 2,21). “그분께서는 모욕을 당하시면서도 모욕으로 갚지 않으시고 고통을 당하시면서도 위협하지 않으시고, 의롭게 심판하시는 분께 당신 자신을 맡기셨습니다”(1베드 2,23).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복수를 하지 말라고 하신 것은 우리는 하느님처럼 공정하지 못하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로 그쳐야 하는데, 한 대 맞으면 세 대 이상은 때려야 분이 풀리고, 자존심이 상하는 말을 들으면 상대방에게 더 큰 망신을 주려고 합니다. 창세기 34장에 보면, 야곱의 딸 디나가 스켐이라는 고장에서 어떤 젊은이에게 겁탈을 당하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때 야곱의 두 아들, 곧 시메온과 레위가 성읍에 들어가 남자들을 모두 칼로 쳐 죽이고 재산을 약탈하고 어린아이들과 아낙네들을 잡아갑니다. 이렇게 포악하고 잔악한 복수에 대하여 야곱은 시메온과 레위에게 말합니다. “너희는 이 땅에 사는 가나안족과 프리즈족에게 나를 흉측한 인간으로 만들어, 나를 불행에 빠뜨리는구나. 나에게는 사람들이 얼마 없는데, 그들이 합세하여 나를 치면, 나도 내 집안도 몰살당할 수밖에 없다”(창세 34,30). 복수는 또다시 복수를 낳고, 불안과 불행을 가져옵니다. 이 일을 결코 잊을 수 없었던 야곱은 수십 년 뒤 임종하는 자리에서 열두 아들을 불러놓고 유언을 하는 중에, 시메온과 레위에 대하여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그들의 모의에 끼지 않고 그들의 모임에 들지 않으리라. 그들은 격분하여 사람들을 죽이고 멋대로 소들을 못 쓰게 만들었다. 포악한 그들의 격분, 잔악한 그들의 분노는 저주를 받으라. 나 그들을 야곱에 갈라놓으리라. 그들을 이스라엘에 흩어 버리리라”(창세 49,6-7). 반면에, 시메온과 레위의 동생인 요셉은 자신을 팔아넘긴 형들이 보복을 두려워하는 것을 알고, “내가 하느님의 자리에라도 있다는 말입니까?”(창세 50,19) 하며, 위로의 말을 건냅니다. 이것이 제자의 길입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숯불을 머리에 놓는 것’입니다.


20절의 ‘숯불을 머리에 놓는다’는 표현은 두 단계로 해석할 수 있겠습니다.


첫째, 악을 선으로 갚는 것이 원수에게 양심의 가책(뜨거움)을 주어 회개로 이끄는 최선책이라는 것입니다. 숯불의 따뜻함이 악인의 차가운 마음을 녹이고(포용과 포옹의 불), 숯불의 뜨거움이 마음의 더러움을 정화합니다(정화의 불). 심판과 복수는 인간의 몫이 아닙니다. 악을 악으로 갚는 것은 악에 굴복하는 것이며,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둘째, 악을 선으로 갚았는데도 원수가 회개하지 않는다면 하느님의 심판과 복수를 피할 수 없습니다. 이제 그의 머리 위에 놓인 숯불은 그를 살라버리는 하느님의 진노입니다(심판의 불). “보라, 그들은 지푸라기처럼 되어 불이 그들을 살라 버리리라. 그들은 그 불길의 위력 앞에서 저 자신도 구해 내지 못한다. 그 불은 몸을 덥힐 숯불도 아니고 그 앞에 앉아 쬘 불도 아니다”(이사 47,14).


‘숯불을 머리에 놓는다’는 표현은 잠언 25,22에도 나옵니다.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을 것을 주고 목말라하거든 물을 주어라. 그것은 숯불을 그의 머리에 놓는 셈이다. 주님께서 너에게 그 일을 보상해 주시리라”(잠언 25,21-22).


이처럼 악을 악으로 갚지 않고 원수에게 복수하지 않으며, 오히려 용서하고 사랑을 베푸는 사람들에게는 커다란 상급이 보장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심판받지도 단죄받지도 않을 것입니다.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심판받지 않을 것이다. 남을 단죄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단죄받지 않을 것이다. 용서하여라. 그러면 너희도 용서받을 것이다”(루카 6,37). 또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영광을 받게 됩니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그래야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마태 5,44-45). 우리가 세례를 받음으로써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고 배웠습니다. 그런데 이 마태오 복음 말씀은 원수를 사랑하고 박해자를 위하여 기도함으로써 하느님의 자녀가 될 수 있다고 합니다. 이는 세례의 의미를 밝혀 줍니다. 세례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더불어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삶이야말로 세례의 삶입니다. 이마에 물을 붓는 것으로 시작된 세례의 삶은 평생 계속되어야 하는 회개의 삶이요, 용서의 삶이요, 기도의 삶입니다.


악을 선으로 갚고 원수를 사랑하라는 명령은 이행하기가 거의 불가능해 보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왜 이렇게 불가능해 보이는 일을 우리에게 명령하시는 것일까요? 하느님은 욕심쟁이시기 때문입니다. 자식이 잘 되기를 바라는 부모의 마음입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완전해지기를 바라십니다. 짐승보다 약간 나은 정도로는 만족하지 못하십니다.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태 5,48). 그리고 이러한 완전함은 성령에 힘입어 실현됩니다. 우리는 이미 스테파노의 모범을 알고 있습니다. 그는 성령이 충만하였기에 죽기까지 그리스도 예수님을 고백하였고 원수를 용서할 수 있었습니다(사도 7,55-60 참조).


비록 힘들지만, 우리가 가야 할 길은 명백합니다. “악에 굴복당하지 말고 선으로 악을 굴복시키십시오”(로마 12,21). 우리가 가야 할 길, 그 길을 모두 지나서 마침내 하느님의 나라에 도착할 수 있도록 성령께 기도하고 성령 충만한 우리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이다음에 우리도 바오로 사도처럼 말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나는 이미 하느님께 올리는 포도주로 바쳐지고 있습니다. 내가 이 세상을 떠날 때가 다가온 것입니다. 나는 훌륭히 싸웠고 달릴 길을 다 달렸으며 믿음을 지켰습니다. 이제는 의로움의 화관이 나를 위하여 마련되어 있습니다. 의로운 심판관이신 주님께서 그날에 그것을 나에게 주실 것입니다. 나만이 아니라, 그분께서 나타나시기를 애타게 기다린 모든 사람에게도 주실 것입니다”(2티모 4,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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