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아동(구 미아3동)성당 게시판

눈보라 치는 산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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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승원 [ordinary] 쪽지 캡슐

2000-02-16 ㅣ No.1011

 

+  그리스도 우리의 해방

 

 

눈 내리는 산길을 걸어 보신적이 있으신지요?

눈보라 치는 산길을 올라 보신적이 있으신지요?

 

 

  첨엔 좋았습니다. 눈내리는 산길을 걷는다는게... 앞이 보이지 않기 시작하더군요. 그러다가 눈이 뺨을 스치고, 콧물이 얼어붙고, 입김이 눈썹에 달라 붙어 고드름이 되고...

선두에 서서 인도하는 입장이여서 그랬는지 점점 불안해 지더군요. 제가 혹시라고 길을 잘못 드는 날에는...

희미하게나마 들어오는 산장의 모습이 어찌나 반갑던지... 그렇게 첫째날은 지나고 ...

 

  우린 아침 일찍 일어나 천왕봉에서 일출을 맞기로 했습니다. 바람이 잠잠해 지길 바라는 마음으로

저녁기도를 함께 바치고 나서 잠을 청했죠.

새벽녘엔 참다참다 못해 일어나서 화장실을 갔습니다. 제가 꼼지락 대는 소리에 옆에서 자던 동기 신학생이 깼더군요.

  동기 - "어디가?"

  나   - "화장실"

  동기 - "욕봐라!"

  나   - "금방 온다!"

  솔직히 무섭더군요. 헤드렌턴 하나 밝히고 화장실을 간다는게... 산장 문을 나서는 순간   "휘이잉~~!" 산바람이 잡아 먹을듯이 아우성을 치고 있더군요. "꼴까악!" - 침 넘어가는 소립니다. 다시 정신을 차리고 화장실로 한걸음 한걸음 조심스럽게 내딛었습니다. 볼 일을 무사히(?) 마치고 화장실을 돌아 나오는 순간 누군가 뒤에서 제 등을 밀더군요. 엉겁결에 앞으로 내동댕이 쳐지듯이 달려 나갔습니다. 누구였겠습니까? 아까 그 놈입니다. 잡아 먹을 듯한 바람~! 왜 있지 않습니까, 바람에 사람이 날려 간다고... 전 그시간 이후로 그 말을 전적으로 믿기로 했죠. 그리고 아까 동기 신학생의 말이 떠오르더군요. "욕봐라!" - 아마 저보다 먼저 화장실을 다녀온 듯... 같이 가지...

 

  일출시간이 7시 10분이라 우리는 5시 20분쯤에 일어나서 짐 챙기고 천왕봉으로 오르기로 했죠. 정확한 시간에 알람이 울어주더군요.

  나   - "야들아! 일나자!"

  동기 - "바람부나 보고와!"

  나   - "네~엡"

  이번엔 눈보랍디다. 귀곡산장이 떠오르더군요...

  나   - "바람 죽인다!"

  동기 - "자자!"

  나   - "그래도 슬슬 가보자!"

  동기 - "자자!"

  나   - "네~엡"

 

  누군가 절 깨우더군요. 신경질 섞인 목소리로... 왜 안깨웠냐고... 이런! 아까 한말은 잠꼬대  였습니다.

  그렇게 일어나서 짐싸고 간단하게 요기하고 천왕봉을 향했습니다. 아이젠(쉽게 '쇠발톱'이라고 하죠)에 스패취 (정강이 싸개)에 오바 재킷, 오바 트라우져, 바라클라바(눈만 뚤려있는 얼굴 감싸개)... 있는 장비는 모두 착용하고... 다행이 해가 떠서 밝긴 했지만.

 

  어제 무리했던 관계로 '퍼진' 동기 최모 마르코 신학생은 중산리로 내려가자고 완강하게 버텼지만 거기에 질 사람은 아무도 없었죠. 그런데... 문제가 생기더군요. 10m도 채 가지 못하고 아이젠이 풀리는 거였습니다. 마음씨 착한 동기 이모 시몬 신학생이 친절히도 다시 착용해 주더군요. 그러나... 이게 왠일입니까? 한 15m 갔나? 또 풀리는 겁니다. 또 시몬 신학생이 묶어 주더군요. 그러길 세네번... 선두에 선 저를 보고 먼저 가라고 하더군요. 눈보라 치는 길은 1분이 다르게 길이 달라지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 정말 어쩔 수 없었을까 하는 생각이 드네요. *^^* - 올라 갔습니다. 그렇게 쫓아 오더군요. 잠시 바람을 피할 장소를 찾아 쉬면서 서로의 얼굴을 바라 보았습니다. 정말 웃기더군요. 사람의 형상이 아니였습니다. 얼어붙은 콧물과 입김 때문에 앞머리는 하얗게 눈꽃이 피고 싸매고 싸맸음에도 불구하고... (싸맨 모습을 상상해보셔요. 얼마나 웃겼을까?)

  그렇게 그렇게 천왕봉이 우리에게 다가왔습니다. 그래도 기분이라고 사진 한장씩 박고 내려왔죠. 눈보라가 너무 심해 서있지 조차, 숨쉬는 것조차 힘이 들었지만... '천왕봉' 이라고 써있는 바위를 껴안고서 - 감격의 눈물 찔끔...

 

저의 생애 최고의 산행이였습니다.(참고로 전 스물 다섯입니다)

 

 

  그렇게 우리들의 지리산 산행은 끝이나고, 이번 겨울의 마지막 여행은 막을 내렸습니다.

 

  함께 길을 가는 친구가 있다는 것... 믿을 수 있고, 나의 모든 것을 나눌 수 있는 친구가 있다는게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 함께 있는 것만으로, 서로의 눈이 마주치는 것만으로 웃음 짓는 친구... 전 이세상 누구보다 부자 입니다.

 

  내 몸 하나도 끌고 올라가기 힘든데, 자꾸만 속썩이는 친구의 아이젠을 몇번이고 묶어주던 동기 신학생의 마음을 한번 생각해 봅니다. 어떤 기분이 들었을까요? 정말 기쁜 마음으로 몇번이고 묶어 주었을까요? 그 마음이 기뻤던, 속으로 열을 삭히며 묶어 주었든... 정말 멋진 놈입니다.

 

  보이는 아름다운 길과 보이지 않는 불안한 길... 여러분은 지금 어느 길을 걷고 계십니까? 어떤 길을 걷고 있을지라도 목표만 확실하고, 가고 있는 길에 충실하다면 반드시, 반드시 그 목표는 여러분에게로 다가올 것입니다. 전 그렇게 믿고 있습니다.

 

 

P.S 1000번 돌파! 여러분 모두와 함께 기뻐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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