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장동성당 게시판

로마서 11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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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희성 [lhopeter] 쪽지 캡슐

2010-11-25 ㅣ No.2128

 


로마서 11장은 9장, 10장과 한 묶음입니다. 로마서 9-11장에 하느님의 심오한 구원 경륜이 담겨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에게 자기 동포 이스라엘의 구원은 참으로 중요한 문제였습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이스라엘의 구원을 믿고 싶었고 그 근거를 찾아보려고 하였습니다. 다만, 우리가 바오로 사도와 함께 이스라엘의 구원 문제를 다루고 있지만, 우리와 무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오늘날 교회, 우리 자신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놓치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11장 첫 부분에서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을 버리지 않으셨다는 두 가지 근거를 제시합니다.


우선, 바오로 사도 자신이 이스라엘 사람이며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는 것입니다. “나 자신도 이스라엘 사람입니다. 아브라함의 후손으로서 벤야민 지파 사람입니다”(로마 11,1). 이스라엘 백성이 모두 구원받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은총으로 선택된 남은 자들”(로마 11,5)이 있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그 증거의 하나라는 것이고, 또 다른 근거로서 엘리야(기원전 9세기 활약)와 하느님의 대화를 소개합니다(2-4절). “주님, 저들은 당신의 예언자들을 죽이고 당신의 제단들을 헐어 버렸습니다. 이제 저 혼자 남았는데 저들은 제 목숨마저 없애려고 저를 찾고 있습니다”(로마 11,3). “나는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않는 사람 칠천 명을 나를 위하여 남겨 두었다”(로마 11,4).이 대화는 구약성경 열왕기 상권 19장에 나옵니다.


* 1열왕 19,9-18 엘리야가 하느님을 만나다

9 그가 거기(하느님의 산 호렙)에 있는 동굴에 이르러 그곳에서 밤을 지내는데, 주님의 말씀이 그에게 내렸다. 주님께서 그에게 “엘리야야, 여기에서 무엇을 하고 있느냐?” 하고 물으셨다

10 엘리야가 대답하였다. “저는 주 만군의 하느님을 위하여 열정을 다해 일해 왔습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은 당신의 계약을 저버리고 당신의 제단들을 헐었을 뿐 아니라, 당신의 예언자들을 칼로 쳐 죽였습니다. 이제 저 혼자 남았는데, 저들은 제 목숨마저 없애려고 저를 찾고 있습니다.” 

11 그분께서 말씀하셨다. “나와서 산 위, 주님 앞에 서라.” 바로 그때에 주님께서 지나가시는데, 크고 강한 바람이 산을 할퀴고 주님 앞에 있는 바위를 부수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바람 가운데에 계시지 않았다. 바람이 지나간 뒤에 지진이 일어났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지진 가운데에도 계시지 않았다

12 지진이 지나간 뒤에 불이 일어났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불 속에도 계시지 않았다. 불이 지나간 뒤에 조용하고 부드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13 엘리야는 그 소리를 듣고 겉옷 자락으로 얼굴을 가린 채, 동굴 어귀로 나와 섰다. 그러자 그에게 한 소리가 들려왔다. “엘리야야, 여기에서 무엇을 하고 있느냐?” 

14 엘리야가 대답하였다. “저는 주 만군의 하느님을 위하여 열정을 다해 일해 왔습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은 당신의 계약을 저버리고 당신의 제단들을 헐었을 뿐 아니라, 당신의 예언자들을 칼로 쳐 죽였습니다. 이제 저 혼자 남았는데, 저들은 제 목숨마저 없애려고 저를 찾고 있습니다.” 

15 주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길을 돌려 다마스쿠스 광야로 가거라. 거기에 들어가거든 하자엘에게 기름을 부어 아람의 임금으로 세우고, 

16 님시의 손자 예후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의 임금으로 세워라. 그리고 아벨 므홀라 출신 사팟의 아들 엘리사에게 기름을 부어 네 뒤를 이을 예언자로 세워라. 

17 하자엘의 칼에서 빠져나간 자는 예후가 죽일 것이고, 예후의 칼에서 빠져나간 자는 엘리사가 죽일 것이다. 

18 그러나 나는 이스라엘에서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도 않고 입을 맞추지도 않은 칠천 명을 모두 남겨 두겠다.”


농부가 흉년에도 다음해 심을 종자를 남겨 두는 것처럼, 하느님께서는 우상 숭배자들 가운데서도 당신 약속을 이어갈 칠천 명을 남겨 두셨습니다. ‘남은 자 칠천 명’에 속하는 것은 매우 영예스러운 일입니다. 그러나 막강한 세속 권력에 대항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렇게 대항하다가 많은 사람이 살해를 당하였을 것입니다. 물론, 더 많은 사람이 권력 앞에 굴복하였을 것입니다. 다름 아닌 하느님 백성 안에서 벌어지는 이 황당한 사태가 하느님의 분노를 자아냈지만, 하느님께서는 성조들에게 하신 약속을 잊지 않으십니다. 당신 백성에게 약속하신 복을 거두지 않으시고, 구원을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당신 약속의 실현을 위하여 늘 남겨 둔 자들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대부분은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를 인정하지 않고 배척하였지만, 바오로 사도는 “은총으로 선택된 남은 자들”(로마 11,5)에 주목하였습니다. ‘남은 자들’은 자신의 의로움으로 선택된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은총으로 선택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남은 자들’도 교만해서는 안 됩니다. 하느님께 감사드리고 하느님께만 믿음과 희망을 두어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자기들이 찾던 것을 얻지 못하고, 선택된 이들만 그것을 얻었습니다”(로마 11,7). 그 나머지 사람들에 대해서는 마음이 완고해졌다고 합니다. “나머지 사람들은 마음이 완고해졌습니다”(로마 11,7). “이렇게 하느님께서는 당신이 원하시는 대로 어떤 사람에게는 자비를 베푸시고, 당신이 원하시는 대로 어떤 사람은 완고하게 만드십니다”(로마 9,18). 이 말씀은 하느님께서 어떤 사람에게 완고해지라고 시키셨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아드님을 배척하라고 하느님께서 시키셨겠습니까? 하느님께서 아담에게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따 먹으라고 시키셨습니까? 하느님께서는 그렇게 하지 말도록 명령하셨습니다.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에서는 따 먹으면 안 된다”(창세 2,17). 그러나 자유의지를 선물로 받은 인간은 그 귀중한 선물을 남용하였습니다. 주님의 뜻을 거역하였습니다. 그렇다면 로마서 9장 18절 말씀은 무슨 뜻일까요? 이 말씀은 하느님께서 인간의 자유의지를 맘대로 조종한다는 뜻이 아니라, 인간의 거역에도 불구하고 구원에 대한 전적인 주도권을 하느님께서 쥐고 계심을 드러내는 것으로 이해하면 좋겠습니다. 하느님의 구원 계획은 인간의 불순명에도 취소되지 않고 반드시 실현됩니다. 하느님께 등을 돌렸던 사람들도 다시 하느님을 찾아 돌아오면 다시 받아주십니다. “그들도 불신을 고집하지 않으면 다시 접붙여질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들을 다시 접붙이실 능력이 있으십니다”(로마 11,23).


바오로 사도는 마음이 완고한 사람들에 대한 따끔한 지적을 빼놓지 않습니다. 그들의 영은 마비되어 있고, 눈은 보지 못하며, 귀는 듣지 못한다고 질책합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들에게 사람을 마비시키는 영을, 보지 못하는 눈을, 듣지 못하는 귀를 주시어 오늘날까지 이르게 하셨다”(로마 11,8). 시편 말씀도 인용합니다. “그들 식탁이 그들에게 올가미와 덫이 되고 걸림돌과 응보가 되게 하소서. 그들의 눈은 어두워져 보지 못하고 그들의 등은 늘 굽어 있게 하소서”(로마 11,9-10). ‘식탁’은 본래 생명의 양식을 섭취하는 자리, 친교의 자리, 은총의 자리이지만, 마음이 완고한 사람에게는 저주의 자리가 됩니다. 식탁에 둘러앉아 음모를 꾸미고 죄 지을 궁리나 합니다. 길게 늘어진 식탁보는 걸려 넘어지기 좋습니다. 완전한 제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빼놓은 유다교의 제단은 눈 먼 자들이 차린 형편없는 식탁입니다. 아브라함을 비롯한 성조들이 가슴을 치고 있습니다. 마음이 완고한 자들은 자신의 잘못을 깨우칠 때까지 등을 굽혀 종노릇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마음이 완고한 자들의 특징이 바로 자신의 잘못을 잘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남은 자’ 이야기는 우리를 긴장하게 합니다. 아브라함의 여러 아들 가운데 이사악만이 “약속의 자녀”(로마 9,8)였듯이, 엘리야 시대에 칠천 명만이 ‘남은 자’에 속하였듯이, 오늘날 교회에도 ‘약속의 자녀’, ‘남은 자’에 속하지 못하고, ‘마음이 완고한 사람’ 곧 영은 마비되어 있고, 눈은 보지 못하며, 귀는 듣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남은 자’는 ‘은총으로 선택된 자’입니다. 우리는 믿음 덕분에 은총 속으로 들어올 수 있었고, 믿음을 통하여 은총 안에 머물 수 있습니다. ‘남은 자’에 속하려면 시련과 정화의 과정을 겪어야 합니다. 순금이 되려면 불의 단련을 거쳐야 하는 것과 같습니다. ‘남은 자’에 속하여 하느님의 은총 속에서 하느님의 영광에 참여하리라는 희망을 지닌다면 그것은 참으로 자랑할 만한 일입니다. “믿음 덕분에,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가 서 있는 이 은총 속으로 들어올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영광에 참여하리라는 희망을 자랑으로 여깁니다”(로마 5,2).


‘남은 자’에 속하고 하느님의 영광에 참여할 수 있다는 희망은 아브라함의 혈육이라는 테두리를 초월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통하여 하느님의 구원 계획이 전달되었지만, 구원 대상은 이스라엘 백성을 넘어 만백성, 모든 민족으로 확장됩니다. 히브리어로 쓰인 구약성경이 그리스어, 라틴어, 그 다음에는 온갖 언어로 번역된 것과 비슷합니다. 하느님 말씀을 듣는 데 히브리어를 꼭 배워야 하는 것은 아니듯이, 하느님을 믿는 데 반드시 이스라엘 백성이 되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믿음으로써 새로운 이스라엘 백성에 소속됩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스라엘 백성의 잘못으로 다른 민족들이 구원을 받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들의 잘못으로 다른 민족들이 구원을 받게 되었고, 그래서 그들이 다른 민족들을 시기하게 되었습니다”(로마 11,11). 사도 바오로와 바르나바는 안티오키아에서 주님의 말씀을 전하다가 유다인들의 배척을 받고 주님의 명령에 따라 다른 민족들에게 간다고 선언합니다.


* 사도 13,44-50

44 그다음 안식일에는 주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도시 사람들이 거의 다 모여들었다. 

45 그 군중을 보고 유다인들은 시기심으로 가득 차 모독하는 말을 하며 바오로의 말을 반박하였다

46 그러나 바오로와 바르나바는 담대히 말하였다. “우리는 하느님의 말씀을 먼저 여러분에게 전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그것을 배척하고 영원한 생명을 받기에 스스로 합당하지 못하다고 판단하니, 이제 우리는 다른 민족들에게 돌아섭니다. 

47 사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이렇게 명령하셨습니다.

땅 끝까지 구원을 가져다주도록

내가 너를 다른 민족들의 빛으로 세웠다.’”

48 다른 민족 사람들은 이 말을 듣고 기뻐하며 주님의 말씀을 찬양하였다. 그리고 영원한 생명을 얻도록 정해진 사람들은 모두 믿게 되었다. 

49 그리하여 주님의 말씀이 그 지방에 두루 퍼졌다

50 그러나 유다인들은 하느님을 섬기는 귀부인들과 그 도시의 유지들을 선동하여, 바오로와 바르나바를 박해하게 만들고 그 지방에서 그들을 내쫓았다. 


사도행전에 따르면, 유다인들 중에는 바오로 사도를 죽이겠다는 음모에 가담한 자가 마흔 명이 넘었다고 합니다. “날이 밝자 유다인들은 모의를 하고, 바오로를 죽이기 전에는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겠다고 하느님을 두고 맹세하였다. 그 음모에 가담한 자는 마흔 명이 넘었다”(사도 23,12-13). 바오로 사도는 먼저 유다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려고 하였으나, 그들이 받아들이지 않자 이방인들에게로 그 몫이 풍성하게 돌아간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민족들의 사도”(로마 11,13)라는 자신의 직분을 영광스럽게 생각하였지만, 자신의 이민족 선교가 자기 동족의 구원에 도움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나는 이민족들의 사도이기도 한 만큼 내 직분을 영광스럽게 생각합니다. 그것은 내가 내 살붙이들을 시기하게 만들어 그들 가운데에서 몇 사람만이라도 구원할 수 있을까 해서입니다”(로마 11,13-14).


이방인들이 주님의 기쁜 소식을 듣게 된 것은 그들에게 공로가 있어서가 아닙니다. 유다인들의 불신이 있었기에 이방인들은 사도들에게 복음을 전해들을 수 있었고 그 복음을 믿음으로써 새로운 이스라엘 백성이 되었습니다. 유다인들이 올리브 나무에서 잘려 나갔기에 그 자리에 이방인들이 접붙여지게 되었습니다. “올리브 나무에서 몇몇 가지가 잘려 나가고, 야생 올리브 나무 가지인 그대가 그 가지들 자리에 접붙여져 그 올리브 나무 뿌리의 기름진 수액을 같이 받게 되었습니다”(로마 11,17). (실제 원예에서 접붙이는 방식은 정반대라고 합니다. 우량 품종의 눈을 열등 품종의 나무줄기에 접붙이는 것이 보통입니다. 마치 복음을 전하는 사도직을 연상시킵니다.) 올리브 나무 뿌리는 16절의 ‘맏물’처럼 거룩함의 은총을 전달하는 통로입니다. “맏물로 바치는 빵 반죽 덩이가 거룩하면 나머지 반죽도 거룩합니다. 뿌리가 거룩하면 가지들도 거룩합니다”(로마 11,16). 비록 야생 올리브 나무 가지였지만 올리브 나무에 접붙여져 그 뿌리에서 ‘기름진 수액’을 공급받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잘려 나간 가지들은 더 이상 ‘기름진 수액’을 공급받을 수 없습니다. 그들이 나무에서 잘려 나간 것은 믿지 않아서입니다. 믿지 않으면 잘려 나가고, 믿으면 접붙여집니다. 그러므로 믿음을 잃지 않도록, 값싼 믿음, 부스러기 믿음을 갖지 않도록, 깨어 있어야 하고 두려워해야 하고 겸손해야 합니다. 구원은 하느님의 인자하심에서 오는 것이므로 사람이 오만해서는 안 됩니다. “그들은 믿지 않아서 잘려 나가고 그대는 믿어서 그렇게 서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오만한 생각을 하지 말고 오히려 두려워하십시오”(로마 11,20). “너희가 믿지 않으면 정녕 서 있지 못하리라”(이사 7,9). “하느님의 인자하심과 함께 준엄하심도 생각하십시오”(로마 11,22). 사실, 인자하심도 준엄하심도 모두 하느님의 사랑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아마도 이스라엘 백성이 아니라 어떠한 민족이라도 이스라엘이 걸었던 배반과 배척의 길을 면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만큼 인간은 나약하고 죄의 종살이를 하고 있습니다. 어찌 보면, 이스라엘이 모든 민족을 대신하여 짐을 진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의 말씀처럼 우리 교회가 “선택된 겨레고 임금의 사제단이며 거룩한 민족이고 그분의 소유가 된 백성”(1베드 2,9)이듯이,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은 선택된 겨레로서 사제적 백성이었습니다. 아직 그들 대부분은 그리스도 예수님을 믿지 않고 있지만, “그들도 불신을 고집하지 않으면 다시 접붙여질 것입니다”(로마 11,23).


그대가 본래의 야생 올리브 나무에서 잘려 나와, 본래와 달리 참 올리브 나무에 접붙여졌다면, 본래의 그 가지들이 제 올리브 나무에 접붙여지는 것이야 얼마나 더 쉬운 일이겠습니까?”(로마 11,24) 바오로 사도는 그날을 내다보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일부가 마음이 완고해진 상태는 다른 민족들의 수가 다 찰 때까지 이어지고 그다음에는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게 되리라는 것입니다”(로마 11,25-26).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이스라엘의 구원’이 있어야 하느님의 구원이 완성된다고 하여, ‘이방인 선교’보다 ‘이스라엘 선교’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다른 지역 선교는 비교적 잘 되는데 이스라엘은 잘 안 되는 것에 대하여 안타까워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저는 오히려 더 많은 이방인의 구원을 위해서는 이스라엘에 대한 직접 선교는 다소 자제해도 되지 않겠나 하는 역설적 생각도 해 봅니다. 무리한 선교로 오히려 이스라엘 사람들의 반감을 일으키기 쉽다는 점도 고려해야 할 것입니다. 특히 복음 선교에서 언제나 명심해야 할 것은 상호 이해와 존중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말씀대로, 우리는 이스라엘 민족에게서 영적 은혜를 나누어 받아 큰 빚을 지고 있으므로 그들에 대한 배려와 감사를 아끼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지금은 예루살렘으로 성도들에게 봉사하러 떠납니다. 마케도니아와 아카이아 신자들이 예루살렘에 있는 성도들 가운데 가난한 이들에게 자기들의 것을 나누어 주기로 결정하였기 때문입니다. 사실 그들은 예루살렘 성도들에게 빚을 지고 있어서 그렇게 결정하였습니다. 다른 민족들이 예루살렘 성도들의 영적 은혜를 나누어 받았으면, 그들도 물질적인 것으로 성도들을 돌볼 의무가 있습니다”(로마 15,25-27).


성조들에게 약속하신 “하느님의 은사와 소명은 철회될 수 없는 것”(로마 11,29)입니다. 인간의 죄는 하느님의 사랑을 능가할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에 대한 하느님의 처사는 오늘날 우리에게도 희망을 줍니다. 이스라엘의 배반의 역사를 하느님께서는 자비와 구원의 역사로 바꾸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과 마찬가지로 우리도 자주 하느님을 배반하고 죄악에 빠지지만, 세례를 받음으로써 이미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되고 하느님의 자녀가 되고 성령의 궁전이 되었으므로 회개하고 믿음을 회복한다면 넘치는 자비를 받을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로마서 9-11장의 결론으로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의 자비와 지혜를 말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모든 사람에게 자비를 베푸시는 하느님의 모습을 그리며, 하느님의 지혜를 찬미합니다. “사실 하느님께서 모든 사람을 불순종 안에 가두신 것은, 모든 사람에게 자비를 베푸시려는 것입니다”(로마 11,32). “오! 하느님의 풍요와 지혜와 지식은 정녕 깊습니다. 그분의 판단은 얼마나 헤아리기 어렵고 그분의 길은 얼마나 알아내기 어렵습니까?”(로마 11,33) “과연 만물이 그분에게서 나와, 그분을 통하여 그분을 향하여 나아갑니다. 그분께 영원토록 영광이 있기를 빕니다. 아멘”(로마 11,36).


로마서 11장은 구원 역사의 완성에 관한 하느님 계획의 계시이지만, 개인의 구원과도 연관 지어 생각해 볼 수 있겠습니다. 요컨대, 배은망덕한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하느님께 은총으로 선택된 자들을 뜻하는 ‘남은 자들’을 개인의 신앙 생활, 영성 생활과 연관 지어 볼 수 있겠습니다. 곧, 우리가 하느님 뜻을 거역하고 온갖 죄를 저지를지라도, 하느님께서는 반드시 구원의 여지를 남겨 두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남은 자들’을 통하여 끊임없이 당신에 대한 믿음과 충성을 잃지 않도록 이끄신다는 것입니다. 이 ‘남은 자의 은총’ 덕분에 우리는 희망을 버리지 않아도 됩니다. 우리는 행복합니다. 결코 포기하지 않으시고 언제나 구원의 길을 열어 주시는 하느님께 사랑과 감사를 드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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