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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 나와 김대건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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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홍 [clemenskim] 쪽지 캡슐

2017-07-25 ㅣ No.7997

 

 

+ 찬미예수님

 

어제 밤 성지에서 머무신 분들은 잘 주무셨습니까?

신자들 가운데 일생에서 성지 안에서 자본 사람이 얼마나 될까 생각해봅니다.

늘 말하지만, 성지에 오고 성지에서 하룻밤 자는 것도 특별한 은총이 아니면 불가능합니다.

 

어제 은총의 밤에는 베드로 사도와 바오로 사도 이야기를 드렸습니다.

두 분은 하느님 안에서 높고 낮음이 없이, 한 분은 교회의 주춧돌,

또 한 분은 기둥 역할을 하셨기에 축일을 한 날에 지낸다고 말씀드렸습니다.

한국의 김대건 신부님과 최양업신부님의 관계도 이와 비슷합니다.

 

최양업신부님을 우리는 동양의 바오로사도라 부릅니다.

바오로 사도의 전도여행은 유대 땅에서의 박해로 인한 것이었습니다.

신비한 것이 그 박해를 이용하여 전 세계에 당신을 알게 되는 계기를 마련해주신 겁니다.

서간에는 그 분이 얼마나 이방인들에게 예수님을 알리려고 온 힘을 다했는지 나옵니다.

최양업신부님은 돌아가실 때까지 구만리 길을 양들을 찾아 한 달에 삼일밖에 자지 못하면서

조선의 127개의 교우촌을 다니십니다. 비록 목을 잘린 순교는 아니지만, 백색 순교입니다.

 

김대건 신부님은 몰락한 양반의 가문입니다.

부모님 김제준 이냐시오와 고 우르술라 모두 양반 집안이었지만 천주교박해에 몰락했어요.

최양업, 최방제와 함께 신학생으로 마카오로 간 김대건신부님은 3년 먼저 서품을 받지요.

나이로는 최 신부님이 위였지만, 김 신부님은 자주 고국을 드나들어 조선 지리에 밝았어요.

이런 김 신부님을 빨리 조선에 보내어 주춧돌을 놓아야겠다고 생각하셨던 거지요.

 

최양업신부님은 3년이나 늦게 받은 이유는 무언가 결격사유가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최양업신부님은 부제 때 중국에 돌아다니면서 선교를 했어요.

중국 주교님이 서품 주려고 부르시면 어느 시골에서 선교중이고,

최 신부님이 서품 받으러 오면 주교님이 견진 주러 멀리 나가 계시고...

교통, 통신이 발달된 때도 아니고, 또 약속을 하고 서품식을 하는 시기도 아니어서

3년이나 늦게 서품을 받은 것입니다.

최양업신부님이 서품을 받을 때는 그 절친인 김대건 사제는 이미 순교한 후였지요.

 

호탕한 성격의 김대건 신부님, 그리고 내성적이면서 학자풍인 최양업 신부님,

14살의 어린 소년들이 머나먼 이국에서 얼마나 서로 의지했겠습니까?

 

최양업신부님은 김대건 신부님이 가자마자 얼마 후 목이 잘렸다는 소문을 듣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 아들 신학교 보냈다는 죄로 아버지 최경환 프란치스코는 매 맞아 죽고,

엄마 이성례 마리아도 목이 잘려 죽고, 본적도 없는 막내 동생은 굶어죽고,

동생 넷은 거지가 되어 떠돌고 있다는 소문을 듣습니다.

그 이야기를 듣고 최양업신부님이 그러셨대요.

내 친구 대건이가 살아있었다면 내 동생들 거두어 주었을 텐데.”

 

여러분 앞에 있는 이 김웅열 신부는 생각해봅니다.

나는 그 분들보다 훨씬 더 많이 사제 생활을 해왔는데,

천국에 가면 최 신부님이 나에게 고맙다고 하실까? 김대건 신부님은 무슨 말씀을 하실까?’

 

사실 나는 김대건신부님에게 많은 빚을 지고 있는 사제입니다.

그래서 늘 어떻게 하면 그 은혜를 갚을까 생각해왔어요.

지금 7년간 배티에서 살면서 김대건 신부님에게 진 빚을

친구 최양업 신부님께 갚으라는 뜻으로 여기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요.

 

제가 김대건 신부님에게 무슨 빚이 있는가?

예전 제 강론을 통해, 제가 얼마나 어렵게 사제서품을 받았는지 아시는 분도 있으실 겁니다.

성소도 드라마틱하게 받았고, 또 사제가 되기까지도 그렇게 쉽지 않았습니다.

 

제가 김대건 신부님께 빚진 이야기는 길지만 들려드리겠습니다.

부제가 되었어요.

1년만 있으면 사제가 되어 하느님과의 약속을 지킬 수 있다 생각하니 좋았습니다.

사제품 받으면 드릴 첫 미사도 미리 정해놓고 있었지요.

그런데 부제품 받은 지 4개월쯤인가?

아침에 일어나니 오른쪽 다리가 마비가 온 거예요. 그리고 걸을 때마다 너무 아파요.

운동을 잘한 저는 건강은 누구보다 자신이 있었는데, 병원 가니 허리디스크라는 거예요.

지금처럼 레이저시술이 있던 시대도 아니고, 칼을 대는 것이기에 나는 안하겠다고 했지요.

그렇게 반년동안 수업도 제대로 못 들어가고, 침대에 누워 후배들이 타다주는 밥 먹었어요.

이러다보니 불안했지요.

이렇게 해도 신부가 되는 거야?

 

교구에서는 아무 말이 없었어요.

그래서 서품제의도 맞추고, 첫 미사 때 나누어드릴 상본도 다 만들고 준비했지요.

드디어 1983126이 다가왔어요.

서품일 전날 동창 4명과 주교님께 인사드리고 교구청 옆에 있는 방에서 잠을 잤어요.

이 밤이 지나고 10시 반이면 우리 넷은 신부가 된다고 설레어 새벽 3-4시에 잠이 들었어요.

그런데 새벽에 사무처장 신부님이 나만 깨우더니 조용히 나오라는 거예요.

느낌이 이상했지요.

 

주교님이 새벽 2시에 결정을 내리셨어. 네 몸이 사제가 될 몸이 아니래.”

그러면서 밖에 차가 대기하고 있으니 수원에 있는 빈센트 병원에 가라는 겁니다.

 

저희 부모님은 버스대절해서 인천부터 청주 주교좌성당 근처 여관에서 주무시고 계셨었어요.

서품식 때 아무것도 모르시는 부모님은 입장하는 친구들 보면서 아들은 안 나오니 노심초사!

그 때 식장에서는 난리가 났대요. 별 이야기가 다 돌았어요.

부제 인물 반반하더니 여자가 낚아채갔다. 밤에 도망쳤다.

 

저는 빈센트 병원 입원실에 가니 대략 서품식 시간, 제 마음이 어떠했을지 짐작은 가시지요?

참담함 그 자체였지만, 저는 포기할 수 없었어요.

죽은 우리 아버지도 살려주신 하느님인데, 고치시려면 이 디스크정도야 일도 아니신 거지요.

 

2달 후 진통제 한 보따리를 들고 주교좌성당으로 발령이 나서 갔어요.

진통제로 버티면서 레지오 꾸리아 훈화, 공소예절, 교리 등을 다 맡았어요.

그렇게 2달을 버티다가 진통제도 말을 듣지 않고 더 이상 못 참겠더군요,

이러다 죽겠다싶어 고향으로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짐을 다 싸놓고 주님께 말했어요.

주님, 우리 아버지 살려주시어 그 때 신학교 간다고 약속하고 들어왔습니다.

하지만 제가 싫어서가 아니라 기를 쓰고 해도 몸이 안 따라줍니다.

이제 부모님 계신 곳으로 가겠습니다.”

주교님께 인사드리러 가는데, 레지오 단원들이 꽃가마를 무언가를 모시고 오는 거예요.

전국을 순회하던 김대건 신부님의 유해였어요.

 

제대 앞에 예쁘게 유해를 모셔놓았어요.

그래서 주교님께 가려다 김대건신부님께 부탁드려보고 싶었어요.

한밤중에 유해 앞에서 담요 둘둘 말고 제 나름대로 철야기도를 했어요.

그런데 그 앞에서도 허리 낫게 해달라는 기도는 안 나왔어요.

속보이는 것 같고. 그냥 유해보며, 아이구! 형님, 제 신세 알지요?”

그렇게 3일을 저녁마다 들어가서 새벽에 나왔어요.

 

그런데 3일째 되는 날, 새우잠을 자다 눈을 뜨니 이상하게 몸이 개운했어요.

몸을 일으키니 일어나지는 거예요.

허리디스크 환자들은 몸을 한 바퀴 굴러서 일어날 수밖에 없거든요

! 이상하다? 어떻게 한 번에 일어나지?’

오른쪽 다리를 꼬집어 봤어요.

일 년간 감각이 없었거든요. 아파요.

! 감각이 살아났네?

살살 일어나보았어요.

디스크판이 신경을 눌러 대꼬챙이로 찌르는 듯 아팠는데, 그냥 걷게 되는 거예요.

뛰어 보아도 괜찮고, 허리를 돌려봐도 잘 돌아가는 거예요.

처음에는 제가 상상 임신하듯이 너무 낫고 싶은 마음에 통증을 못 느낀다고 생각했어요.

 

일주일간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진통제를 끊었는데 괜찮은 거예요.

! 김대건신부님이 내 허리를 낫게 해 주셨네.’

병원에 가서 정밀검사를 받았더니, 의사가

부제님, 빠져나왔던 디스크가 들어갔어요. 의학적으로 설명 불가능하지만, 나았어요.”

김 신부님이 낫게 해주셨네요.”

그 분이 누구신대요?”

김대건신부님이요.”

 

그리고 일주일 후에 주교님을 모시고 교구 체육대회가 있었어요.

나는 뭔가 보여주어야 하잖아요?

그래서 릴레이에 출전하여, 바톤을 잡고 주교님 앞을 지날 때 막 손을 흔들었어요.

처음에는 저를 못 알아보다가, “김 부제 맞아?”

그 때 주치의가 주교님 옆에 계셨는데,

주교님, 이유는 모르지만 부제님은 의학적으로 허리디스크가 나았습니다.”

 

그 날 밤 주교님이 저를 부르셨어요.

 김부제, 허리 다 나았다며? 서품식 준비해!.”

부모님께 소식을 전하니 너무 좋아하셨지요.

다른 것을 준비할 것은 없었지만, 126일로 박혀있는 상본이 문제였어요.

새로 할 수는 없고, 일일이 자대고 줄을 긋고 그 밑에 514일이라 적었어요.

이 세상 새 신부 상본 가운데서 줄긋고 지우고 밑에 날짜 고친 상본은 없을 거예요.

 

이렇게 514일 성모님의 달, 사제 서품을 위해 입장을 했어요.

서품식 때 절대 안 울리라 결심을 했건만!

할머니들이 뒷줄에서부터 울기 시작해서 눈물이 봇물처럼 터진 거예요.

얼굴에 골이 패일정도로 울었어요.

지금도 34년 전 사제 받을 때 동영상이 카페에 올려져있어요.

 

사제서품 받을 때 앞쪽에는 김대건신부님 유해가 모셔져 있었어요.

그래서 저는 유해 앞에서,

형님, 고맙습니다. 이런 고통이 있었기에 적어도 신부되어 건방지게 살지 않을 것 같습니다.

형님은 13개월만 살았지만, 어느 누구보다도 깊이 사시다 간 분입니다.”

그리고 약속했어요. “언제가 첫 성당을 대건 안드레아 성당으로 봉헌하겠어요.”

저는 그 약속을 군종신부로 들어가서 12사단 천도리에 첫 성당을 지어 지켰어요.

밖에서는 을지 성당이라 하지만, 신자들은 대건안드레아 성당이라 불렀지요.

지금도 있고, 1년에 한 번씩 가면 들려서 기도드려요.

김대건 신부님 유해도 정말 어렵게 구해서 그 성당에 모셨지요.

 

나는 이 어른께 빚이 많아서, 예전에는 피정 때 김대건신부님 이야기 참 많이 했지요.

그런데 여기오니 이 분 이야기 할 시간이 없어!

서운하실까 카톡 드리니, 빚이 있다고 생각하면 최양업신부님에게 갚으래요.

그래서 기를 쓰고 최양업 신부님 성인 만들어 드리려고 애썼어요.

이렇게 김대건신부님과 최양업신부님은 떼려야 뗄 수 없어요.

또 이 두 분의 삶과 저 김웅열 신부도 뗄 수가 없어요.

그러니 기도해주세요. 최양업신부님 빨리 시복, 더 나아가서 시성되기를요.

한 분은 한국교회의 주춧돌이고 한 분은 기둥이었으니, 내 나중에 죽는 날,

나는 그 위에 기왓장 몇 얹었다라는 마음으로 죽어야겠지요.

 

2017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 대축일 경축 이동(7/2)

배티성지 김웅열(느티나무)신부님 강론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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