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장동성당 게시판

로마서 10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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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희성 [lhopeter] 쪽지 캡슐

2010-11-25 ㅣ No.2127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을 향한 유다인들의 열성을 인정하였지만 그것이 깨달음에 바탕을 둔 것이 아님을 지적합니다. 그들이 ‘하느님의 의로움’보다는 ‘자기의 의로움’을 내세웠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에게서 오는 의로움을 알지 못한 채 자기의 의로움을 내세우려고 힘을 쓰면서, 하느님의 의로움에 복종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로마 10,3). 열성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진리에 바탕을 두지 않은 열성은 오히려 위험합니다. 그릇된 확신으로 큰 해악을 끼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의로움’이 무엇인지 모르면 ‘자기의 의로움’을 하느님의 것으로 착각합니다. 물론, 아는 것과 행동하는 것은 다릅니다. ‘하느님의 의로움’이 무엇인지 안다고 해도, 그 앎이 곧바로 그분의 의로움을 추구하는 삶으로 이어지지는 않습니다. 머리(앎)에서 가슴(공감)으로 오는 데도 시간이 많이 걸린다고 합니다. 또 가슴에서 손발(행동, 실천)까지 오는 데는 더 많은 시간이 걸린다고 합니다. ‘하느님의 의로움’을 추구하는 삶이란 먼저 자기 자신을 버리는 삶입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루카 9,23-24).


참된 의로움은 “율법에서 오는 나의 의로움이 아니라,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로움, 곧 믿음을 바탕으로 하느님에게서 오는 의로움”(필리 3,9)입니다. 그러므로 참된 의로움은 하느님에게서 오며, 하느님에 대한 믿음이 없이는 참된 의로움에 도달할 수도 구원받을 수도 없습니다. ‘자기의 의로움’보다 ‘하느님의 의로움’을 먼저 추구하신 분은 그리스도 예수님이십니다. 그분은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마태 6,33)라고 말씀하셨고, 당신 스스로 그렇게 하셨습니다. 겟세마니 동산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 하실 수만 있으시면 이 잔이 저를 비켜 가게 해 주십시오. 그러나 제가 원하는 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대로 하십시오”(마태 26,39). 아버지 뜻에 따라 십자가에 달리셔서는 신 포도주를 드신 다음에 “다 이루어졌다.”(요한 19,30) 하시고는 고개를 숙이시며 숨을 거두셨습니다. 자신의 뜻을 ‘다 이루었다’고 하지 않으시고, 아버지의 뜻이 ‘다 이루어졌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의로움’이 무엇인지, ‘하느님의 의로움을 추구하는 삶’이 무엇인지는 예수님의 삶과 죽음 안에서 온전히 밝혀집니다.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루카 9,23)는 예수님 말씀, 곧 ‘자신을 버리는 것’, 또 ‘제 십자가를 지는 것’이 내 삶 안에서 어떻게 구체적으로 실현되어야 하는지 알아내고 또 실현하려고 노력하는 것은 자신의 몫입니다.


믿음으로 구원받는 일이 쉬운 일일까요, 아니면 어려운 일일까요? 로마서 10장에서는 그것이 어려운 일이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늘로 올라갈 필요도 없고, 지하로 내려갈 필요도 없다고 하십니다. 그러나 방향을 잘못 잡으면 구원받기 힘듭니다. 율법을 실천하면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것들을 실천하는 이는 그것들로 살 것이다.”(로마 10,5). “그것들”은 율법의 규정들입니다. 그러나 누가 율법을 완전히 지킬 수 있겠습니까? 율법을 철저히 지킨다는 자들이 율법의 완성자, 율법 정신의 완성자, 곧 사랑의 완성자를 처형함으로써, 오히려 율법의 원수가 되었습니다.


로마서 10장 6-7절은 그 자체만 보면 이해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8절과 신명기 30,11-14절을 통해서 그 뜻을 들여다 볼 수 있습니다. “그 말씀은 너희에게 가까이 있다. 너희 입과 너희 마음에 있다.’ 이것이 우리가 선포하는 믿음의 말씀입니다”(로마 10,8).


* 신명 30,11-14

11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령하는 이 계명은 너희에게 힘든 것도 아니고 멀리 있는 것도 아니다

12  그것은 하늘에 있지도 않다. 그러니 ‘누가 하늘로 올라가서 그것을 가져다가 우리에게 들려주리오? 그러면 우리가 실천할 터인데.’ 하고 말할 필요가 없다. 

13  또 그것은 바다 건너편에 있지도 않다. 그러니 ‘누가 바다 저쪽으로 건너가서 그것을 가져다가 우리에게 들려주리오? 그러면 우리가 실천할 터인데.’ 하고 말할 필요도 없다. 

14  사실 그 말씀은 너희에게 아주 가까이 있다. 너희의 입과 너희의 마음에 있기 때문에, 너희가 그 말씀을 실천할 수 있는 것이다.”


하늘에 올라가서 별을 따오는 일이 아닙니다. 바다 속으로 들어가서 진주를 캐오는 일이 아닙니다. 말씀과 구원은 우리 입과 마음에 있습니다. 뱉지 않고 그냥 삼키면 됩니다. 마음에 그대로 간직하면 됩니다. 구원은 아주 가까이 있습니다. 지금 이 자리에도 구원의 말씀이 계십니다. 말씀을 듣고 공감을 하면 말씀은 귀에서 마음으로 들어옵니다. 그 말씀을 손과 발로, 온 몸으로 실천하며, 또 입으로 전하게 됩니다. 우리는 말씀의 은총과 진리가 충만한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보았다. 은총과 진리가 충만하신 아버지의 외아드님으로서 지니신 영광을 보았다”(요한 1,14). 그분은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빛”(요한 1,9)이십니다.


어떤 고약한 임금이 어떤 죄수에게 자신이 내는 문제를 맞히면 살려 주고, 틀리면 죽이겠다고 하였습니다. 그 문제가 무엇인가 하면, 그 임금이 손에 작은 새를 쥐고 자신이 새를 죽이겠는지 살리겠는지 알아맞히는 것이었습니다. 지혜로운 죄수는 “그것은 임금님 마음대로지요.”라고 대답하였답니다. 그렇습니다. 새가 죽고 사는 것이 이 임금 마음에 달려 있듯이, 내가 구원을 받고 못 받고는 마음먹기에 따라 크게 좌우됩니다. 마음을 잘 먹으면 구원도 가깝습니다. 좋은 결심은 좋은 열매를 맺습니다.


바오로 사도가 제시한 구원받는 방법은 매우 간단해 보입니다. “예수님은 주님이시라고 입으로 고백하고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일으키셨다고 마음으로 믿으면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로마 10,9). 믿는 사람은 부끄러운 일을 당하지 않을 것이며, 풍성한 은혜를 받으리라는 약속도 나옵니다(로마 10,10-11 참조). 마음에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충만하면, 누가 시키지 않아도 찬양과 고백이 나오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바오로 사도가 로마서를 쓸 당시에 예수님을 주님이시라고 공개적으로 고백하는 것은 목숨을 걸어야 하는 행위였다고 합니다. 굳은 믿음 없이 건성으로 하는 신앙 고백은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마태 7,21). 미사 때의 신앙 고백, 묵주 기도 때의 사도신경을 어떻게 하고 있는지 반성해야겠습니다. 또한 고백하는 그 믿음대로 살고 있는지도 되돌아보아야 하겠습니다. 입과 마음에 간직한 믿음을 하느님 뜻의 실천으로 표현하여야 하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다만, 하느님 뜻의 실천을 마치 율법 준수처럼, 달리 말해서 율법을 준수함으로써 의로움을 인정받고 구원받을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사실, 예수님의 크고 놀라운 은혜를 체험하고 감격해 하는 사람은 자신의 선행이나 봉사를 보잘것없는 것으로 여길 수밖에 없습니다. 자신의 선행이나 봉사를 과시하려는 사람은 교만의 죄에 빠져 자신의 선의조차 오염시키고 평화를 잃고 맙니다. 다른 사람에게는 오히려 비웃음거리가 될 수도 있습니다.


주님의 이름을 받들어 부르는 이는 모두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로마 10,13). “그런데 자기가 믿지 않는 분을 어떻게 받들어 부를 수 있겠습니까? 자기가 들은 적이 없는 분을 어떻게 믿을 수 있겠습니까? 선포하는 사람이 없으면 어떻게 들을 수 있겠습니까?”(로마 10,14) 구원을 주는 이름, 곧 예수 그리스도를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는 것은 참으로 고귀하고 아름다운 일입니다. 이땅에 복음을 전하고자 들어와 순교까지 하신 외국인 선교사들에 대한 고마움을 잊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이들의 발이 얼마나 아름다운가!”(로마 10,15) 이사야서 52장 7절을 인용한 이 말은 본래 유다인들이 바빌론 유배에서 해방되어 시온으로 돌아온다는 “기쁜 소식”을 알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미 유다교에서부터 메시아적으로 해석됩니다. 이 본문은 또 신약성경과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기쁜 소식” 곧 “복음”이라는 낱말을 채택하는 데에도 공헌하였음이 틀림없습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오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이루어집니다”(로마 10,17). 믿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는 데서 옵니다. 그러므로 먼저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성경 공부를 해야 하고, 미사 시간에 강론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이렇게 말씀을 들음으로써 믿음을 키운 다음에는, 우리 모두 기쁜 소식을 전하는 아름다운 발을 지닌 사람들이 됩시다. 대신에 죄를 지으러 가는 발은 부러져 버리기를 바랍니다. 바오로 사도와 같이 복음을 전하려고 애쓰는 사람들은 생명의 책에 기록됩니다. “이들은 클레멘스를 비롯하여 나의 다른 협력자들과 더불어 복음을 전하려고 나와 함께 싸운 사람들입니다. 이 모든 이들의 이름이 생명의 책에 적혀 있습니다”(필리 4,3). “생명의 책에 기록되어 있지 않은 사람은 누구나 불 못에 던져졌습니다”(묵시 20,15). “부정한 것은 그 무엇도, 역겨운 짓과 거짓을 일삼는 자는 그 누구도 도성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오직 어린양의 생명의 책에 기록된 이들만 들어갈 수 있습니다”(묵시 21,27).


그러나 모든 사람이 복음에 순종한 것은 아닙니다”(로마 10,16). 많은 이스라엘 백성은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말씀을 들었지만 믿음이 생기지 않았습니다. 하느님의 혼인 잔치 초대를 거절한 것입니다. 믿음으로 용서와 구원을 받는다는 위대한 잔치에 초대를 받았으나 그것을 수락하지 않았습니다. 하느님께서 직접 찾아와 초대하셨는데도 초대에 응하기는커녕 하느님을 잡아 십자가에 매달아 죽였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거짓 지도자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거짓 지도자들의 선동에 넘어갔기 때문입니다. 거짓 지도자들은 로마 제국의 식민 통치 아래서 자신들이 누리던 기득권을 놓치지 않으려다가, 자기 잇속을 채우려다가 그 탐욕에 눈이 멀어 예수님의 본모습을 알아보지 못하였고, 군중은 그 장단에 놀아났던 것입니다.


하느님의 초대 말씀을 듣고도 ‘세상 걱정과 재물의 유혹’ 때문에 초대를 거절하는 일이 없도록 합시다. 우리 마음의 밭에 떨어진 말씀 씨앗이 싹이 트고 자라나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노력합시다. “그는 말씀을 듣기는 하지만, 세상 걱정과 재물의 유혹이 그 말씀의 숨을 막아 버려 열매를 맺지 못한다”(마태 13,22). 아무리 풍족한 혼인 잔치라도 거기에 가지 않으면 잔치 음식을 먹을 수도 없고 잔치의 기쁨을 나눌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혼인 잔치 초대를 거절하자, 하느님께서는 이방인들을 초대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잔치에 초대할 사람을 얼마든지 만들어 낼 수 있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라. 그리고 ‘우리는 아브라함을 조상으로 모시고 있다.’는 말은 아예 혼잣말로라도 꺼내지 마라. 내가 너희에게 말하는데, 하느님께서는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녀들을 만드실 수 있다”(루카 3,8). 초대받은 사람들이 할 일은 혼인 잔치에 합당한 예복을 갖추어 입는 것입니다. “지난날의 생활 방식에 젖어 사람을 속이는 욕망으로 멸망해 가는 옛 인간을 벗어 버리고, 여러분의 영과 마음이 새로워져, 진리의 의로움과 거룩함 속에서 하느님의 모습에 따라 창조된 새 인간을 입어야 한다는 것입니다”(에페 4,22-24). 혼인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은 잔치에 참여할 수 없습니다. 아! 그런데 “부르심을 받은 이들은 많지만 선택된 이들은 적다.”(마태 22,14) 하시니, 혼인 예복을 갖추어 입는 일에 전력을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 마태 22,1-14 혼인 잔치의 비유 (루카 14,15-24) 

 1  예수님께서는 또 여러 가지 비유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2  “하늘 나라는 자기 아들의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에게 비길 수 있다. 

 3  그는 종들을 보내어 혼인 잔치에 초대받은 이들을 불러오게 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오려고 하지 않았다

 4  그래서 다시 다른 종들을 보내며 이렇게 일렀다. ‘초대받은 이들에게, ′내가 잔칫상을 이미 차렸소. 황소와 살진 짐승을 잡고 모든 준비를 마쳤으니, 어서 혼인 잔치에 오시오.′ 하고 말하여라.’ 

 5  그러나 그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어떤 자는 밭으로 가고 어떤 자는 장사하러 갔다. 

 6  그리고 나머지 사람들은 종들을 붙잡아 때리고 죽였다. 

 7  임금은 진노하였다. 그래서 군대를 보내어 그 살인자들을 없애고 그들의 고을을 불살라 버렸다. 

 8  그러고 나서 종들에게 말하였다. ‘혼인 잔치는 준비되었는데 초대받은 자들은 마땅하지 않구나. 

 9  그러니 고을 어귀로 가서 아무나 만나는 대로 잔치에 불러 오너라.’

 10  그래서 그 종들은 거리에 나가 악한 사람 선한 사람 할 것 없이 만나는 대로 데려왔다. 잔칫방은 손님들로 가득 찼다. 

 11  임금이 손님들을 둘러보려고 들어왔다가, 혼인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 하나를 보고, 

 12  ‘친구여, 그대는 혼인 예복도 갖추지 않고 어떻게 여기 들어왔나?’ 하고 물으니, 그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였다. 

 13  그러자 임금이 하인들에게 말하였다. ‘이자의 손과 발을 묶어서 바깥 어둠 속으로 내던져 버려라. 거기에서 울며 이를 갈 것이다.’ 

 14  사실 부르심을 받은 이들은 많지만 선택된 이들은 적다.”


이스라엘이 예수 그리스도를 배척한 것이 우리 같은 이방인에게는 구원의 계기되었습니다. 여기에 구원의 비밀이 있습니다. 하느님의 놀라운 섭리가 있습니다. ‘혼인 잔치의 비유’에서도 볼 수 있듯이, 하느님의 아드님을 배척하고 살해한 것은 최악의 범죄였지만, 하느님께서는 거기에서도 놀라운 업적을 이루어 내십니다. 이스라엘의 범죄는 하느님의 구원 계획을 막을 수 없었습니다.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도 자기 몫을 다했습니다. 열두 사도와 바오로 사도는 모두 유다인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이 예수님을 거부한 것은 그리 새삼스러운 일도 아닙니다. 이스라엘은 과거에도 하느님께서 보내신 예언자들을 배척하였습니다. 그러나 받아들이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늘 당신께 충실한 자들을 남겨두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역사의 각 시대마다, 사실은 백성 전체가 아니라 아브라함 후손 가운데 한 부분만이 선택을 받았습니다. 이스마엘이 아니라 이사악(9,7-9), 에사오가 아니라 야곱이 그러하였고(9,10-13), 엘리야 시대라든가(11,2-5) 이사야 시대처럼(9,27-29) 일부 ‘남은 자들’이 그러하였습니다(11,1-5). 어떻게 해서든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을 포기하지 않으시고 하느님께로 이끌어 들이시듯,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우리도 어떠한 상황에서도 하느님을 향한 마음과 믿음을 포기하지 맙시다. “저희는 당신께 희망을 둡니다. 당신께서 이 모든 것을 만드셨기 때문입니다”(예레 14,22). “희망은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받은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어졌기 때문입니다”(로마 5,5). “내 영혼아, 오직 하느님을 향해 말없이 기다려라, 그분에게서 나의 희망이 오느니!”(시편 62,6) “행복하여라, 야곱의 하느님을 도움으로 삼는 이, 자기의 하느님이신 주님께 희망을 두는 이!”(시편 146,5)


다른 사람들도 하느님의 계획에서 부정적이기는 하지만 계속 어떤 역할을 수행합니다. 그러나 결국은 모든 것이 모든 이의 구원을 향하여 움직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이에게 자비를 베푸시려고 그들을 불순종 속에 그대로 내버려 두셨던 것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들, 그분의 계획에 따라 부르심을 받은 이들에게는 모든 것이 함께 작용하여 선을 이룬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로마 8,28).


바오로 사도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그들의 잘못을 깨닫고 돌아오게 하려고 모세의 율법과 이사야 예언서를 들어 이야기합니다. “나는 민족도 아닌 무리를 너희가 시기하게 하고 어리석은 민족에게 너희가 분노하게 하리라.”(로마 10,19; 신명 32,21)는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시기와 분노를 일으켜서라도 당신께 돌아오게 하려는 하느님의 애틋한 심정을 느끼게 합니다. 또 “나를 찾지도 않는 자들을 내가 만나 주었고 나에 관하여 묻지도 않는 자들에게 나를 드러내 보였다.”(로마 10,20; 이사 56,1)는 말씀에서는 새삼 하느님의 애절한 사랑이 느껴집니다. 사람에게 조금이라도 가까이 오시려고 애쓰시는 모습이 떠오릅니다. 더 나아가 “복종하지 않고 반항하는 백성에게 나는 온종일 팔을 벌리고 있었다.”(로마 10,21; 이사 65,2)는 말씀에서는 너그러운 속없음이 느껴집니다. 사랑이 없다면 결코 할 수 없는 일들입니다. 이러한 마음을 지니신 하느님은 참으로 당신 마음대로 하셔야 합니다. 만일 하느님께서 사랑과 자비의 그 마음대로 하시지 않는다면 이 세상은 어찌 되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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