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인들의 영성

성 이시도로 주교 학자 [ St. Isidorus, E. et D.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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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현숙 [hsryu] 쪽지 캡슐

2001-04-05 ㅣ No.24

성 이시도로 주교 학자 [ St. Isidorus, E. et D. ]

 

                                                       축일 4월 4일

 

  성 이시도로의 가문은 스페인 왕실과 친척 관계에 있고, 특히 몇 명의 성인을 배출함으로써 더욱 유명해졌다. 이시도로의 아버지는 카르타지나(Carthaginis) 주의 총독이었고, 어머니는 테오리히 왕의 후예였다. 이러한 부모에게 태어난 4남매, 즉 레안드로(Leandro), 풀젠시오(Fulgentio), 이시도로 그리고 플로렌디나가 모두 성인품에 올랐고, 먼저 세 사람은 주교가 되고 막내인 여동생 플로렌디나는 수녀가 되어 많은 수도원을 보살피게 된 것도 우연한 일이 아니다. 맏형 레안드로는 우선 수사가 되었고, 그 뒤 세빌리아의 주교로 임명되었다. 그는 자신이 세운 학교에서 친히 막내동생 이시도로를 교육했는데, 거의 과도할 만큼 엄격한 태도로 임했다. 그는 종종 이시도로를 몹시 꾸짖을 때도 있었다. 그러나 이시도로에게는 아무 효험이 없었다. 이시도로는 부지런했지만 어려서는 학업 성적이 그다지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마도 그 당시에는 아둔한 이 소년이 장차 유명한 대 학자가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어느 날 호되게 꾸중을 들은 이시도로는 학교에서 도망해 마을 밖까지 달아났으나 아주 피곤해져서 우물가에 주저앉았다. 얼핏 보니 한 바위 구석에 움푹 파진 데가 있었다. 그 원인을 생각해도 좀처럼 알 길이 없었다. 얼마 뒤 물 길러 온 여인에게 물어보니 "오랜 세월 물방울이 떨어져 그와 같이 파졌지요" 하고 대답하는 것이었다. 이를 듣고 그는 문득 깨달은 바가 있었다. 즉 재주가 없는 자기로서도 꾸준히 노력만 한다면 반드시 학문으로 성공하는 때가 다가올 것이라 생각했다. 그리하여 그는 다시 용기를 내어 학교로 돌아가서 꾸준히 노력한 결과 눈에 띄게 학문이 진보하게 되었고 수 년 후에는 당시의 모든 학문을 다 배울 수가 있었다. 이 때에 왕위에 있던 레오질도는 이시도로의 한 자매인 테오도라와 결혼하고 헤르메네질도와 리카르도라는 두 왕자를 낳았지만 유감스럽게도 아리우스의 이단에 빠져 교회를 배반했다. 그 후 곧 세빌리아의 주교가 된 이시도로의 형 레안드로는 과감하게 그 이단과 싸웠으므로 이에 왕의 비위를 크게 거슬러 마침내 국외로 추방을 당하게 되었다. 그를 가련히 생각한 이는 왕자 헤르메네질도였는데, 백부인 주교를 콘스탄티노플의 황제에게 추천해 준 덕분에 레안드로는 그 지방으로 가게 되었다. 그가 성 그레고리오와 서로 우정을 교환한 것도 이 시절의 일이다. 그러던 중 그의 동생 이시도로가 추방된 형 대신 주교 위에 올랐다. 그리고 형과 같이 언변과 문필로써 눈부신 활동을 했다. 조카인 헤르메네질도는 이시도로에 대해서 많은 원조를 해 주었다. 레오질도 왕은 지은 죄를 뉘우치고 586년 레안드로 주교를 소환하고 나서 곧 서거했으며 그의 아들 리카르도가 그의 뒤를 이었다. 이 새로운 왕은 회개하여 다시 교회와 화목해졌다. 이시도로는 형 레안드로에게 주교직을 양도하고 자신은 고요한 곳에 물러가서 오로지 기도와 연구에 몰두하게 되었다. 이를 안 사제들이나 백성들은 물론 국왕까지 그가 마을에 머물러있기를 간청했지만, 이시도로는 형인 주교가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거처에서 나온 때가 없었다.

   시끄러운 세상을 떠나 조용한 생활을 하게 된 그는 대단히 행복스러웠다. 기도로 혹은 묵상으로 마음껏 영신의 수양을 할 수도 있었고, 학문의 연구에 아무 거리낌없이 골몰할 수가 있었다. 그러므로 그는 어디까지나 그런 생활을 계속하고자 돌아가신 형의 후임 주교로서 취임해 줄 것을 원하는 국왕, 백성, 사제들 뜻마저 사양하려 했으나, 마지못해 사람들의 의사를 하느님의 뜻으로 생각하고 그들의 소원대로 하기에 이르렀다.

   그 뒤 이시도로는 하느님의 영광과 사람들의 영혼 구원을 위해 눈부신 활동을 시작했다. 하느님께서도 이를 어여삐 보시고 풍부한 강복을 내려 주셨다. 그의 심원한 학식, 숭고한 덕성은 형 레안드로 주교가 착수한 사업을 완성시키게 했을 뿐 아니라 아리우스파의 이단을 소멸시켰다. 그는 수차 회의를 열어 현명한 규칙을 정하고 교회의 전례나 학교교육을 위해서도 전력하였다. 또한 그는 저술에도 능숙해 그의 저작은 후세까지도 사람들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다. 뿐만 아니라 이시도로는 그리스어, 히브리어의 연구를 활발하게 하고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장려하였다. 그는 실제로 교회의 학자라는 이름에 합당한 인물이었지만, 그보다 더 성인이라 부르기에 합당했다. 그는 박학했지만 그 일면에 겸손하고 이웃을 사랑하였으며 가난한 이에게 자선, 희사하는 것을 좋아하였다.

   600년, 그는 용무를 위해 로마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나르본느에 들르니, 때마침 매우 가물어 곤궁에 빠진 많은 사람들이 성인에게 비를 주실 것을 하느님께 기도해 주기를 간절히 원했다.  그들과 함께 기도를 하니 곧 비가 충분히 내려 말랐던 곡식이 다시 살아나게 되었다 한다.

   이시도르는 미리부터 자기의 임종 날짜를 예언하고 있었다.  그는 6개월 전부터 임종 준비를 시작하였으며 그 날이 닥쳐오자 성당에 가서 죄의 용서를 청하고 자신의 재산 전부를 빈민에게 나누어주도록 부탁하고 눈을 감았다. 636년 4월 4일이다. 그는 1722년에 교회박사로 선언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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