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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교회 교리서 해설92: 성경 안에서 만나는 기도의 달인9 - 길 위의 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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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4-11-18 ㅣ No.349

[신나고 힘나는 신앙 - 차동엽 신부의 가톨릭 교회 교리서 해설]
(92) 성경 안에서 만나는 기도의 달인 (9) - 길 위의 기도

내가 몰랐구나! 여기 주님 계시는데…

 

■ 도망자

“죽여버리겠다”(창세 27,41 참조).

이는 에사우의 입에서 발설된 분노였다. 불콩죽 한 그릇에 ‘장자권’을 말아먹은 이후, 야곱이 밀가루로 팔에 에사우표 털북숭이를 위장하여 아버지 이사악의 축복까지 가로챘다는 사실을 알게 된 즉시의 반사반응이었다. 짧은 폭발음이었지만, 그 안에는 마그마가 부글부글 대고도 남았을 것이 자명하다.

“이 여우같이 교활한 야곱, 장자권을 속아서 판 것도 슬슬 억울한 판인데, 이젠 축복까지 가로채! 내 이놈을 잡기만 해 봐라. 죽여 버릴 테다!”

요행히 어머니 레베카의 레이더에 다혈질 에사우의 울분이 포착된다. 야곱의 편이었던 레베카는 긴급히 이 사실을 전한다.

“야곱, 빨리 튀어! 네 형이 너를 죽인대. 네 형 성격 알지? 당장 하란의 삼촌 집으로 피해!”

워낙에 사냥을 즐긴 나머지 평소 피흘림에 익숙한 에사우였기에 만일 야곱이 그 자리에서 잡히기만 했다면 결코 칼부림을 면할 길이 없었으리라. 이를 익히 알고 있던 야곱! 그는 즉시 삼촌 라반이 살고 있던 하란으로 줄행랑을 친다.


■ 돌베개

졸지에 집을 떠나 길 위의 도망자가 된 야곱! 길은 멀다. 장장 350Km. 며칠을 걸었을까, 어디까지 왔을까. 어느덧 뉘엿뉘엿 해는 지고, 야곱은 사막 그 허허벌판에서 잠을 청해야 했다. 그는 그곳의 돌 하나를 주워 베개 삼아 그 자리에 누웠다(창세 28,11 참조).

돌베개! ‘돌베개’는 무엇을 뜻하는가? 사람이 아무리 ‘없이’ 여행을 떠나도 옷 보따리에 비상식량쯤은 가지고 다닌다. 그리고 잘 때는 그것을 베고 잔다. ‘돌베개’는 야곱에게 몸에 지닌 것, 그 흔한 괴나리봇짐도 없었음을 시사한다.

얼마나 급했으면, 아무것도 준비하지 못한 채 도망쳤을까. 불같은 형의 성격을 너무 잘 알았던 것이다. 잡히면 죽는 것이다. 이를 알고서 즉시 튀다시피 해서 여기까지 와 보니 축복이고 뭐고 아무것도 없다. 축복은 나중 일이고 살아남는 일이 당장의 문제였다.

허나 피로에 배고픔도 두려움도 모른 채, 졸음이 깊어진다. 잠결에 하늘에서 사다리가 내려온다. 이 사다리는 하늘에서 땅을 향하여 세워졌다. 땅에서 하늘을 향하여 세워진 것이 아니다. 이런 연유로 지금도 서양에서는 구름 틈새로 햇빛이 비치는 현상을 ‘야곱의 사다리’라 부른다.

야곱이 꿈속에서 천사들이 땅을 향해 세워진 사다리를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을 보고 있을 때, 주님께서 하늘에서 몸소 그에게 축복을 약속해 주셨다. 꿈에서 깬 야곱은 깨닫는다.

“진정 주님께서 이곳에 계시는데도 나는 그것을 모르고 있었구나.… 이 얼마나 두려운 곳인가! 이곳은 다름 아닌 하느님의 집이다. 여기가 바로 하늘의 문이로구나”(창세 28,16-17).

위대한 깨달음의 순간이다. 돌베개를 베고 자는 상황은 우리에게도 수시로 발생한다. ‘의지가지’ 하나 없는 상황, 같이 사는 사람에게도 도움을 청하기 어려운 상황은 언제고 들이 닥친다. “내가 의지할 것은 돌멩이 하나구나…. 이거 돌베개구나!”

바로 그 순간이 “여기 주님께서 계셨는데!”를 고백해야 할 때다. 야곱은 별난 사람이 아니다. 단지 하늘을 우러르는 시선을 지녔던 범부일 따름. 그러기에 돌베개를 베고 쓸쓸히 잠을 청해야 하는 처지에로 내몰린 오늘의 인생 나그네들은 ‘돌베개 탄식’에서 ‘돌베개 깨달음’을 건져볼 일이다.

나, 노지에서 빈털터리로 잠을 청하네.
괴나리봇짐도 없어, 돌베개에 목을 뉘었네.
배는 쫄쫄거리는데 졸음은 구만 냥, 중력에 맥없이 누웠네.
말도 사치, 생각도 낭만, 힘듦도 외로움도 절망도 모르네.
신의 부재, 하늘의 침묵 앞에서도 두려움을 모르네.

홀연, 화들짝하고 깨어나네.
꿈 속 하늘 사다리, 천사들의 오르내림, 그리고 우주보다 더 큰 손의 축복,
생시인 듯 선연하네.

오호라, 내가 몰랐구나!
여기 주님께서 계시는데,
여기가 하느님의 집이요 하늘의 문인데,
공연히 공황의 나락에 떨어져 망연자실하고 있었구나.
여기, 천지사방 쓸쓸한 적막만 흐르고 있던 여기,
여기가 ‘두려운 땅’인 줄, 미처 몰랐구나.


■ ‘마스터 키’ 응답

거기, 그 ‘경외의 땅’에, 야곱은 기념 기둥을 세운 후 그곳 이름을 베텔이라 불렀다. 거룩한 장소를 발견하면 이름을 지어주던 관습을 따른 것이었다. 베텔이란 ‘하느님의 집’을 의미한다. 거기서 그는 기도를 바쳤다.

“하느님께서 저와 함께 계시면서 제가 가는 이 길에서 저를 지켜 주시고, 저에게 먹을 양식과 입을 옷을 마련해 주시며, 제가 무사히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게 해 주신다면, 주님께서는 저의 하느님이 되시고, 제가 기념 기둥으로 세운 이 돌은 하느님의 집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저는 당신께서 주시는 모든 것에서 십분의 일을 당신께 바치겠습니다”(창세 28,20-22).

기도가 다소 장황하면서도 구체적이다. 멀고 황량한 사막 길, 생존마저 보장되지 못한 여정이기에, 저런 기도가 나오는 게 당연하다. 십일조까지 들먹였을 만큼, 그의 사정은 절박했다. 기도란 이렇게 하는 것이다. 구체적이면서도 집요하게, 있는 논리 없는 설득, 다 동원해야 한다.

그런데! 주님의 응답이 대조적으로 짧았다.

“야곱! 내가 너와 함께 하리라”(창세 28,15 참조).

성경에서 기도 응답으로 이러한 하느님의 약속을 받은 경우는 야곱이 첫 번째였다. 후에 이 약속은 이스라엘 백성의 많은 지도자들, 곧 모세, 여호수아, 기드온 등에게도 반복되어 내려진다. 실제로 하느님은 ‘임마누엘’ 곧 ‘우리와 함께 계신 하느님’(이사 7,14 참조)이시다.

인간적인 잔꾀에 하느님께서 내린 지혜까지 지니고 있었던 야곱은 이 짧은 응답 속에 사실상 그가 청한 모든 것이 함께 보장되어 있음을 즉시 알아챘다. 그가 내심 흥분하며 기뻐했을 것은 의심할 나위가 없다.

앗싸, 주님께서 내게 마스터 키를 주셨구나.
“내가 너와 함께 하리라.”
얼쑤, 주님께서 어떤 문제도 풀 만능 열쇠를 주셨구나.
내가 너와 함께 하리라!
이제로부터 죽는 날까지 내가 청한 모든 것과 내가 청할 모든 것을
이 짧은 한 마디에 바리바리 챙겨서 내리셨구나.

*
차동엽 신부는 오스트리아 빈대학교에서 성서신학 석사, 사목신학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현재 인천가톨릭대학교 교수 및 미래사목연구소 소장으로 활동 중이다.

[가톨릭신문, 2014년 11월 16일, 
차동엽 신부(미래사목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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