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일강론

사순 제4주일(나해) 요한 3,14-21; ’24/03/10

인쇄

심흥보 [peters1] 쪽지 캡슐

2024-02-24 ㅣ No.5689

사순 제4주일(나해) 요한 3,14-21; ’24/03/10

 

언젠가 한 번 어느 분이 오셔서, ‘고해성사를 보라고 하니까, 보긴 봐야 하는데, 죄가 무엇인지 모르겠다.’라고 하소연하였습니다. 죄는 직간접적으로 그리고 알게 모르게 받은 사랑에 대해 감사하지 않는 것과 그에 대한 보답으로 사랑하지 않는 것이며, 그로 인하여 사랑으로 이루어져야 할 관계가 사랑보다는 탐욕과 시기와 질투 그리고 그에 따른 일방적인 요구와 강요로 빚어지는 관계에서 벌어지는 아픔입니다.

 

오늘 복음의 서두에서 예수님께서는 유다인 니코데모에게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들어 올린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들어 올려져야 한다.”(요한 3,14) 라고 말씀하십니다. 뱀 이야기는 무엇입니까? 민수기 21장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에집트에서 탈출하고 나서 이스라엘로 정착하러 가는 과정에서 광야를 거쳐가면서 일종의 영신교육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과정이 길고 지루하다고 조급한 마음에 하느님과 모세에게 불평을 쏟아 붓게 됩니다. “당신들은 어쩌자고 우리를 이집트에서 올라오게 하여, 이 광야에서 죽게 하시오? 양식도 없고 물도 없소. 이 보잘것없는 양식은 이제 진저리가 나오.”(민수 21,5) 그러자 하느님께서는, 감사드릴 줄 모르고 불평만 쏟아내는 백성들을 혼내기 위하여, 불 뱀들을 보내 물려 죽게 합니다. 이를 두고 모세가 주님께 호소하자, 주님께서는 모세에게 너는 불 뱀을 만들어 기둥 위에 달아 놓아라. 물린 자는 누구든지 그것을 보면 살게 될 것이다.”(8) 라고 일러주셨고, 모세는 구리 뱀을 만들어 그것을 기둥 위에 달아 놓았다. 뱀이 사람을 물었을 때, 그 사람이 구리 뱀을 쳐다보면 살아났다.”(9)고 전해줍니다.

 

결국 하느님께서는 구약에서 하느님의 은혜에 감사드리기는커녕 광야에서 불평불만만을 쏟아내다가 뱀에 물린 사람을 죽지 않도록 하기 위해 구리로 만든 뱀을 쳐다보도록 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렇다면 그렇게 구리뱀이 뱀에 물린 사람을 살린 것처럼, 주 하느님께서는 신약에 와서 예수님이 사람들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심으로써 죽을 운명에 놓인 사람을 살린다는 이야기입니다.

 

이어지는 성경구절도 같은 의미를 제시해 줍니다. “믿는 사람은 누구나 사람의 아들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요한 3,15)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사람들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그 죗값을 치르셨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나를 살리기 위해 대신 돌아가셨다는 것을 믿는 사람은 부활하신 주 예수님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보시기에 좋도록”(창세 1장 참조) 만드셨지만, 사람들이 그 좋은 세상에서 만족하고 살아가기 보다는 더 이상의 무엇을 얻고 싶은 탐욕과 다른 이들이 가지고 누리는 것에 대한 시기와 질투로 죄를 짓고 악을 들여오게 되었습니다. 사람이 지은 죄는 악에 힘입어 그 속도를 더하여 더 크고 넓고 깊숙이 퍼짐으로써, 점점 사람들의 통제 밖으로 벗어나 사람들 스스로 되돌릴 수 없는 한계에까지 이르러, 거꾸로 죄악의 노예가 되어 버렸습니다.

 

주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죄악의 세력에 갇혀 스스로의 힘으로는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안타까워하셨습니다. 사람들을 죄악의 노예로 계속 살아가게 둘 것인지, 아니면 저들을 어떻게 하면 다시 자유롭고 행복한 주님의 자녀로 살아가도록 구할 수 있을 것인지 고민하셨습니다. 급기야 주 하느님께서는 아들 예수님에게 사람들의 죄악을 대신 짊어지고 그 죗값을 치르는 희생양이 되기를 원하셨고, 아들 예수님은 그 소명을 다하셨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예수님의 희생제사로 자기 죄악의 대가인 죽음으로부터 구원되어 새 생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요한 3,16)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는 사람은, 예수님께서 저 십자 나무 위에서 우리를 살리기 위해 희생제사를 봉헌함으로써, 우리가 더 이상 죄악으로 단죄받지 않고 예수님의 피로 우리 죄가 사해지고 새생명을 얻게 되었다는 사실에 감사드리며, 이러한 업적을 이루신 주 하느님과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 찬미와 영광을 드립니다.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17)

 

부모는 자식을 키우면서 갖은 희생을 다 하시면서 커가는 자식을 바라보며 보람을 느낍니다. 그 자식에게 부모가 바라는 것은 떳떳하고 힘있게 살아가는 것이지, 부모가 바친 희생에 대해 부담이나 죄책감을 갖기를 바라는 것이 아닙니다. 부모는 사랑으로 자식을 위해 희생하셨고, 자식은 사랑으로 바쳐주신 그 희생을 감사히 받아들이는 것뿐입니다.

 

자식을 제대로 사랑하지 않는 부모나 부모의 사랑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하거나 부족하다고 불평하는 자식들은 이 사랑의 고리에서 오는 기쁨과 행복을 얻지 못합니다. “아들을 믿는 사람은 심판을 받지 않는다. 그러나 믿지 않는 자는 이미 심판을 받았다. 하느님의 외아들의 이름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18) 또한 부모의 희생적인 사랑에 감사드리기보다 당연한 것으로 여기거나 거꾸로 그 희생을 요구하는 자식이 있다면 그 관계는 커다란 고통을 초래합니다.

 

그 심판은 이러하다. 빛이 이 세상에 왔지만, 사람들은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하였다. 그들이 하는 일이 악하였기 때문이다.”(19) 부모와의 관계에서 보듯이, 우리가 자신에게 주어진 인생 이상의 것을 탐하고 자신의 더 낳은 인생을 위해 다른 사람의 희생을 요구하게 되면, 주 하느님과 인간관계가 어긋나기 시작하고, 사랑으로 비롯된 자유와 기쁨보다는 죄악으로 비롯된 속박과 참담함이 대신하게 되며, 그것이 현세에서 우리가 겪게 되는 죄와 벌입니다.

 

죄로 얻은 일시적인 쾌락은 더 크고 높은 쾌락을 추구하게 되고, 또 다른 사람의 부정한 쾌락을 바라보는 사람 역시 같은 쾌락을 얻도록 충동질합니다. “악을 저지르는 자는 누구나 빛을 미워하고 빛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자기가 한 일이 드러나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20) 그래서 죄악은 죄에 죄를 더하여 더욱 더 커지게 되고 그것을 추구하는 사람을 더 피폐하게 만들고 결국에는 죄악의 노예로 전락시키고 맙니다.

 

사도 성 바오로는 한 사람을 통하여 죄가 세상에 들어왔고 죄를 통하여 죽음이 들어왔듯이, 또한 이렇게 모두 죄를 지었으므로 모든 사람에게 죽음이 미치게 되었습니다.”(로마 5,12) 라고 지적했습니다. 아울러 그리스도 예수님의 희생제사와 그로 인한 새 생명과 연관하여 한 사람의 범죄로 모든 사람이 유죄 판결을 받았듯이, 한 사람의 의로운 행위로 모든 사람이 의롭게 되어 생명을 받습니다.”(18) 라고 일러주신 바 있습니다. 오늘 독서에서 사도 성 바오로는 자비가 풍성하신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으로, 잘못을 저질러 죽었던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습니다. 여러분은 이렇게 은총으로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에페 2,4-5) 라고 말씀하시고, “여러분은 믿음을 통하여 은총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는 여러분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선물입니다.”(8) 라고 결론을 내립니다.

 

오늘 주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부모님과 가족, 형제자매들이웃과 우리가 살도록 마련해주신 자연 이 모든 것에 감사드립시다. 부활 승천하신 이후에도 매일 노심초사하시면서 우리를 구원의 길로 이끄시는 주 예수님과 성령께도 감사드립시다.

 

현실이 우리를 아프게 하지만, 현실의 조건 개선보다 현실의 관계들을 재조명하고 서로 그 부족하고 빈 점을 사랑으로 메우면서 행복을 만들어갑시다. 여유가 된다면 쓸쓸하고 힘겨운 이들에게 사랑의 손길을 뻗읍시다. 그러면 우리를 위해 쏟아부은 주님 사랑에 대한 보답이 될 것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신 주 예수님의 힘으로 우리 가운데 사랑의 나라를 이루어갑시다.

 

진리를 실천하는 이는 빛으로 나아간다. 자기가 한 일이 하느님 안에서 이루어졌음을 드러내려는 것이다.”(요한 3,21)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43 0

추천 반대(0)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