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장동성당 게시판

로마서 9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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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희성 [lhopeter] 쪽지 캡슐

2010-11-25 ㅣ No.2126

 


로마서 8장은 예수님에게서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에 대한 확신을 장엄하게 고백하는 것으로 끝을 맺었습니다. “나는 확신합니다. 죽음도, 삶도, 천사도, 권세도, 현재의 것도, 미래의 것도, 권능도, 저 높은 곳도, 저 깊은 곳도, 그 밖의 어떠한 피조물도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에게서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습니다”(로마 8,38-39). 그런데 바오로 사도는 9장에서 갑작스럽게 이스라엘 동포에 대한 슬픔과 아픔을 토로합니다(2절). 이것이 진심임을 밝히고자 그리스도와 성령을 증인으로 내세우기도 합니다(1절).


참으로 자랑스러운 역사와 조상을 둔 이스라엘, 하느님께 선택받은 아브라함의 후손인 이스라엘이 어쩌다가 구원의 길에서 멀어지게 되었는지, 바오로 사도는 답답하고 안타까웠을 것입니다. 답답함과 안타까움을 넘어서 “커다란 슬픔과 끊임없는 아픔”(로마 9,2)을 절감하였습니다. 메시아를 기다리기는 하였지만 메시아가 왔을 때 정작 그분을 알아보지 못한 이스라엘의 운명을 어떻게 될까요?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구원이 예수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믿지 못하고 받아들이지 못한 이스라엘 백성은 정녕 구원에서 제외될 것인가?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선민 이스라엘은 구원받을 수 있을까요?) 이 고통스러운 문제와 치열한 싸움 끝에 바오로 사도가 도달한 결론은, 이스라엘에게 선포된 하느님의 말씀은 결코 실패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하느님의 말씀이 허사로 돌아갔다는 것은 아닙니다”(로마 9,6). “형제 여러분, 나는 여러분이 이 신비를 알아 스스로 슬기롭다고 여기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그 신비는 이렇습니다. 이스라엘의 일부가 마음이 완고해진 상태는 다른 민족들의 수가 다 찰 때까지 이어지고 그다음에는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게 되리라는 것입니다”(로마 11,25-26). 이 말씀은 오늘날 우리 교회에도 위로를 줍니다.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이 마침내 구원을 받게 된다면, 신약의 교회도 다소 굴곡이 있더라도 구원받으리라는 희망을 더욱 갖게 해 주기 때문입니다.


구약의 하느님 백성이 이스라엘 백성이라면, 신약의 하느님 백성은 교회입니다. 그런데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이 걸은 어리석은 길을 신약의 교회는 전혀 걷지 않고 있다고 말하기는 어렵겠습니다. 하느님 나라가 완성될 때까지 지상의 나그네인 교회의 구성원들은 넘어지고 일어나는 일을 무수히 되풀이할 것입니다. 교회는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이 저지른 잘못을 반복하지 않아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그리스도를 믿지 않고 오히려 살해한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아야 합니다. 율법을 지킴으로써 구원을 받는다고 믿은 이스라엘 백성처럼, 우리도 단지 교회가 정한 법과 규정과 의무를 지킴으로써 구원을 받는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1주일에 한 번 주일미사에 참석한다고, 1년에 두 번 고해성사를 한다고, 교무금 한 달에 4-5만 원씩 봉헌한다고, 더 나아가 매일 묵주 기도 다섯 단씩 바친다고 구원을 자신할 수 있겠습니까? 숫자가 전혀 중요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아무리 많은 숫자라도 구원을 보장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중요할까요? 창조주요 구원자요 생명을 주시는 분을 믿음으로써, 그리고 이러한 믿음을 율법 준수와 사랑의 실천으로 표현함으로써 구원의 방주 안에 있음을 어느 정도 자신할 수 있을 것입니다.


율법을 온전히 지킬 수 있는 사람은 없기에 율법으로는 아무도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또한 율법의 외적 준수로는 율법을 온전히 지킨다고 할 수도 없습니다. 율법이 담고 있는 정신, 곧 사랑의 실천이 더욱 근본적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시대에 바리사이들이 비판을 받은 것은 바로 율법의 정신을 실현하기보다 율법의 외적 준수에 집착하였기 때문입니다. 율법을 지키지 못하는 사람들을 멸시하기까지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율법을 완성하셨다는 것은 사랑을 완성하셨다는 뜻입니다. 교회가 걸어가야 할 길은 바리사이들의 길이 아니라 예수님의 길입니다.


* 루카 13,10-17

10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어떤 회당에서 가르치고 계셨다.

11 마침 그곳에 열여덟 해 동안이나 병마에 시달리는 여자가 있었다. 그는 허리가 굽어 몸을 조금도 펼 수가 없었다.

12 예수님께서는 그 여자를 보시고 가까이 부르시어, “여인아, 너는 병에서 풀려났다.” 하시고,

13 그 여자에게 손을 얹으셨다. 그러자 그 여자가 즉시 똑바로 일어서서 하느님을 찬양하였다.

14 그런데 회당장은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병을 고쳐 주셨으므로 분개하여 군중에게 말하였다. “일하는 날이 엿새나 있습니다. 그러니 그 엿새 동안에 와서 치료를 받으십시오. 안식일에는 안 됩니다.”

15 그러자 주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위선자들아, 너희는 저마다 안식일에도 자기 소나 나귀를 구유에서 풀어 물을 먹이러 끌고 가지 않느냐?

16 그렇다면 아브라함의 딸인 이 여자를 사탄이 무려 열여덟 해 동안이나 묶어 놓았는데, 안식일일지라도 그 속박에서 풀어 주어야 하지 않느냐?

17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니 그분의 적대자들은 모두 망신을 당하였다. 그러나 군중은 모두 그분께서 하신 그 모든 영광스러운 일을 두고 기뻐하였다.


로마서 9장 1절에서 바오로 사도가 이제부터 자신이 하는 말의 진실성을 인정받으려고 그리스도와 성령을 증인으로 내세우는 것(2코린 2,17; 갈라 1,20 참조)은 율법에서 요구하는 두 증인을 염두에 둔 것으로 보입니다. “어떤 사람이 저지르는 모든 잘못과 관련하여, 그의 어떤 죄나 잘못이든지, 증인 한 사람만으로는 그 증언이 성립되지 못하고, 증인 둘이나 셋의 증언이 있어야 유죄가 성립된다”(신명 19,15).


3절의 “저주를 받아”는 그리스 말 ‘아나테마’를 옮긴 것입니다. ‘아나테마’에 해당하는 히브리 말은 ‘헤렘’인데, 이 용어에는 하느님의 적과 그에게 딸린 인적·물적 소유를 완전히 파괴한다, 전멸시킨다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신명 7,26: “역겨운 것을 너희 집에 들여놓아서는 안 된다. 그러면 너희도 그것처럼 전멸할 것이다. 그것은 전멸하게 되어 있는 물건이므로, 너희는 그것을 철저히 혐오하고 역겨워해야 한다.”). 이것이 신약성경에 와서는 저주의 의미를 띄게 되는데, 이것은 보통 “저주”가 아닙니다. 이것을 받은 자는 공동체에서 축출될 뿐만 아니라, 스스로 자신을 저주함으로써 그 저주의 내용을 계속 짊어지게 됩니다(사도 23,12; 1코린 12,3; 16,22; 갈라 1,8 참조).


바오로의 이 극단적인 발언은, 그가 자기 민족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잘 보여 줍니다. 동족을 위하는 바오로 사도의 마음이 값지고 아름답습니다. 자신을 박해한 동족이었지만, 바오로 사도의 마음은 동족에 향한 사랑으로 넘쳤습니다. 그토록 사랑하는 동족이 구원받지 못하고 멸망의 길로 치닫는 것을 보고, 고통스러웠습니다. 이와 비슷한 장면을 구약에서 볼 수 있습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이 금으로 수송아지를 만들어 숭배하고 축제를 벌여 하느님의 큰 노여움을 샀을 때에, 자신의 생명을 걸고 이스라엘 백성의 용서를 청합니다. “아, 이 백성이 큰 죄를 지었습니다. 자신들을 위하여 금으로 신을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들의 죄를 부디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하시지 않으려거든, 당신께서 기록하신 책에서 제발 저를 지워 주십시오”(탈출 32,31-32). 아브라함도 소돔과 고모라를 파멸에서 구하고자 하느님의 노여움을 받을 것을 무릅쓰고 여섯 번에 걸쳐서 간청하였습니다.


* 창세 18,23-32

23 아브라함이 다가서서 말씀드렸다. “진정 의인을 죄인과 함께 쓸어버리시렵니까? 

24 혹시 그 성읍 안에 의인이 쉰 명 있다면, 그래도 쓸어버리시렵니까? 그 안에 있는 의인 쉰 명 때문에라도 그곳을 용서하지 않으시렵니까? 

25 의인을 죄인과 함께 죽이시어 의인이나 죄인이나 똑같이 되게 하시는 것, 그런 일은 당신께 어울리지 않습니다. 그런 일은 당신께 어울리지 않습니다. 온 세상의 심판자께서는 공정을 실천하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26 그러자 주님께서 대답하셨다. “소돔 성읍 안에서 내가 의인 쉰 명을 찾을 수만 있다면, 그들을 보아서 그곳 전체를 용서해 주겠다.”

27 아브라함이 다시 말씀드렸다. “저는 비록 먼지와 재에 지나지 않는 몸이지만, 주님께 감히 아룁니다. 

28 혹시 의인 쉰 명에서 다섯이 모자란다면, 그 다섯 명 때문에 온 성읍을 파멸시키시렵니까?” 그러자 그분께서 대답하셨다. “내가 그곳에서 마흔다섯 명을 찾을 수만 있다면 파멸시키지 않겠다.”

29 아브라함이 또다시 그분께 아뢰었다. “혹시 그곳에서 마흔 명을 찾을 수 있다면 …… ?” 그러자 그분께서 대답하셨다. “그 마흔 명을 보아서 내가 그 일을 실행하지 않겠다.”

30 그가 말씀드렸다. “제가 아뢴다고 주님께서는 노여워하지 마십시오. 혹시 그곳에서 서른 명을 찾을 수 있다면 …… ?” 그러자 그분께서 대답하셨다. “내가 그곳에서 서른 명을 찾을 수만 있다면 그 일을 실행하지 않겠다.”

31 그가 말씀드렸다. “제가 주님께 감히 아룁니다. 혹시 그곳에서 스무 명을 찾을 수 있다면 …… ?” 그러자 그분께서 대답하셨다. “그 스무 명을 보아서 내가 파멸시키지 않겠다.”

32 그가 말씀드렸다. “제가 다시 한 번 아뢴다고 주님께서는 노여워하지 마십시오. 혹시 그곳에서 열 명을 찾을 수 있다면 …… ?” 그러자 그분께서 대답하셨다. “그 열 명을 보아서라도 내가 파멸시키지 않겠다.”


예수님께서도 이스라엘의 불충과 반역을 안타까워하셨습니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예언자들을 죽이고 자기에게 파견된 이들에게 돌을 던져 죽이기까지 하는 너! 암탉이 제 병아리들을 날개 밑으로 모으듯, 내가 몇 번이나 너의 자녀들을 모으려고 하였던가? 그러나 너희는 마다하였다”(마태 23,37; 마르 13,34).


구원의 믿음과 희망이 클수록,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에 대한 고통이 큽니다. 믿음 없는 형제자매에게 무관심하다면, 우리 믿음도 안심할 수 없습니다. 그러한 믿음은 구원을 보장할 수 없습니다. 바오로 사도의 고통에 우리도 동참하는 은혜를 베풀어 주시도록 주님께 간청합시다. 자신만 기쁨에 넘치고 다른 사람에게는 무관심한 사람은 주님께서 자신에게 무관심하셔도 할 말이 없습니다. (영화 ‘밀양’에서 아동 유괴 살인범이 교도소에서 주님을 영접하였다며 기쁨에 차 있고, 그것을 보고 기가 막히고 황당해 하던 여주인공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그 살인범은 마땅히 자신이 살해한 아이의 어머니의 슬픔과 고통을 함께 나누어야 했을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각자에게 그 행실대로 갚으실 것입니다”(로마 2,6).


바오로 사도의 슬픔이 컸던 이유 가운데 하나는 자신이 그리스도 예수님을 믿는 기쁨을 충만하게 누렸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들이 이 좋은 것을 누리지 못하니 얼마나 마음이 아팠겠습니까? 바오로 사도가 누렸던 그 기쁨을 우리도 만끽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의 성심에서 흘러나오는 물과 피에 자신을 맡긴 기쁨과 행복을 함께 나누지 못하는 내 가족, 내 친구, 내 이웃을 보며 바오로 사도처럼 슬픔과 아픔을 갖기를 바랍니다. 바오로 사도의 믿음과 더불어 그 슬픔과 아픔을 배우는 것은 참으로 유익한 일이고 커다란 은총입니다. 먼저 내 가족을 비롯한 가까운 사람들부터 전교 대상으로 삼아야 합니다. 이것이 전교의 기본 원리입니다. 자주 기도하고 좋은 표양을 꾸준히 보여야 합니다. 어떻든 예수라는 이름을 들려 줄 수 있습니다. 기도라는 말도 들려 줄 수 있습니다. 기회가 좋든 나쁘든 성령의 도우심을 청하며 복음을 전해야겠다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본당 예비신자들 가운데 기존 신자의 인도를 받은 사람과 스스로 제 발로 온 사람의 비율을 생각해 봅시다. 4대 6이면 매우 좋은 전교 성적입니다. 3대 7도 괜찮습니다. 그러나 2대 8 이하라면 크게 반성해야 합니다.


4절과 5절에서는 하느님께 선택된 “이스라엘 사람”의 여덟 가지 특권이 열거됩니다. “이스라엘”은 야곱이 하느님에게서 받은 이름입니다(창세 32,29: “네가 하느님과 겨루고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으니, 너의 이름은 이제 더 이상 야곱이 아니라 이스라엘이라 불릴 것이다.”).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은 야곱의 자손으로서 하느님께 선택을 받은 이들을 가리킵니다. 이 이름은 바빌론 유배 이후 유다인들을 가리키는 존칭이 되었습니다. 바로 이 선택이라는 특권에서 다른 것들이 흘러나옵니다. 우선, 하느님의 자녀로 입양됨으로써 그분의 첫아들이 되는 권리입니다(탈출 4,22: “이스라엘은 나의 맏아들이다.”). 또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 한가운데에 기거하시고 당신 자신을 드러내 보이심을 가리키는 그분의 “영광”입니다(시편 85,10 “정녕 그분을 경외하는 이들에게는 구원이 가까우니 우리 땅에 영광이 머무르리라.”; 이사 40,5 “이에 주님의 영광이 드러나리니 모든 사람이 다 함께 그것을 보리라.”). 하느님께서는 노아(창세 6,18; 9,9), 아브라함(창세 15,18), 야곱-이스라엘(창세 32,29), 모세(출애 24,7-9), 다윗(2사무 7,11-16; 시편 89,29)과 계약을 맺으셨고, 그분의 뜻을 밝히는 율법을 주셨으며, 참 하느님께 드리는 예배, 메시아에 관한 여러 약속, 계약의 수혜자인 조상들, 그리고 특권 그 자체, 곧 그리스도가 태어나는 민족이라는 명예를 주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은 그리스도께서 그들 가운데 태어나시게 되는 그 여덟 번째 특권을 배척하였습니다.


이제 하느님께서는 새로운 이스라엘 백성을 모으십니다. 혈육에 따른 이스라엘 백성이 아니라 성령에 따른 이스라엘 백성을 일으키십니다. 사실, 혈육만으로는 참 이스라엘 백성임을 보장받지 못합니다. 성조 이스라엘의 자손 가운데에는 하느님의 선택을 받은 참 백성, “하느님의 이스라엘”(갈라 6,16: 이 법칙을 따르는 모든 이들에게, 그리고 하느님의 백성 이스라엘에게 평화와 자비가 내리기를 빕니다.)에 속하지 않은 자들이 있었습니다. “사실 이스라엘 자손이라고 다 이스라엘 백성이 아닙니다”(로마 9,6). 다른 한편, 이스라엘 백성의 여덟 번째 특권을 받아들인 사람들이 남아 있습니다. 구약의 율법 대신에,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통한 의화를 받아들인 사람들만이 “남은 자”(로마 9,27; 11,5)가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의 수가 바다의 모래 같다 하여도 남은 자들만 구원을 받을 것이다”(로마 9,27).


6절(“이스라엘 자손이라고 다 이스라엘 백성이 아닙니다.”)과 7절(“아브라함의 후손이라고 다 그의 자녀가 아닙니다.”)의 말씀은 우리 교회에, 우리 자신에게도 적용됩니다. 세례를 받았다고 해서, 성체를 모셨다고 해서, 구원이 보장되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지금 구원의 여정에 있는 나그네일 뿐입니다. 교회라는 방주를 타고 하느님 나라를 향하여 나아가는 탑승자입니다. 하느님 나라까지 가려면 수많은 역경을 거쳐 정화되어야 합니다. 하느님의 뜻과 자신의 뜻을 일치시키려는 부단한 노력이 있어야 합니다. 물론 우리의 노력만으로 이룰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하느님께 붙어 있어야 합니다. 붙어 있으면서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나에게 붙어 있으면서 열매를 맺지 않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다 쳐내시고, 열매를 맺는 가지는 모두 깨끗이 손질하시어 더 많은 열매를 맺게 하신다”(요한 15,2).


8절에 “육의 자녀”, “약속의 자녀”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아브라함에게는 이스마엘과 이사악, 그리고 후처 크투라에게서 얻은 여섯 아들이 있었지만(창세 25,1 참조), 여덟 명 가운데 오직 이사악만이 “약속의 자녀”(로마 9,8)였습니다. 혈육이라고 해서 ‘약속의 자녀’가 될 수 없습니다. “육의 자녀”(로마 9,8)로는 부족합니다. 육에 영이 더해져야 비로소 “생명체”가 될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주 하느님께서 흙의 먼지로 사람을 빚으시고, 그 코에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명체가 되었다”(창세 2,7). 하느님의 성령을 받아야 비로소 하느님의 자녀, 약속의 자녀가 될 수 있습니다.


만일 혈육으로만 약속의 자녀가 된다면, 우리에게는 희망이 없습니다. 약속의 자녀는 하느님의 전적인 선택입니다. 이사악은 태어나기도 전에 아브라함의 상속자로 선택을 받았고 메시아의 조상으로 선택을 받았습니다. 우리도 하느님의 선택을 받았습니다. 그것을 어떻게 확인할 수 있을까요? 그 확실한 기준은 ‘입으로 고백하기’, ‘마음으로 믿기’입니다. “예수님은 주님이시라고 입으로 고백하고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일으키셨다고 마음으로 믿으면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로마 10,9). 그러므로 약속의 자녀는 ‘약속을 믿는 사람’이기도 합니다. 무슨 약속일까요?


9절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약속이라는 것은, ‘이맘때에 내가 다시 올 터인데 그때에 사라에게 아들이 있을 것이다.’ 하신 말씀입니다.” 이는 창세기 18장 10절과 14절을 자유롭게 인용한 것입니다. 백 살 노인 아브라함에게 하신 하느님의 이 약속은 참으로 믿기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사라의 반응은 이러하였습니다. “사라는 속으로 웃으면서 말하였다. ‘이렇게 늙어 버린 나에게 무슨 육정이 일어나랴? 내 주인도 이미 늙은 몸인데’”(창세 18,12). 그러나 하느님의 약속대로 이사악이 태어났을 때 사라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느님께서 나에게 웃음을 가져다주셨구나. 이 소식을 듣는 이마다 나한테 기쁘게 웃어 주겠지.”(창세 21,6). 첫 번째 웃음은 ‘하느님의 약속을 불신하는 듯한 냉소’였지만, 두 번째 웃음은 ‘하느님께 올리는 감사의 제사 같은 웃음’이었습니다.


희망이 없어 보이는 상황에서 희망을 갖는다는 것은 무척 어려운 일이기는 하지만, 세례 받은 신앙인이라면 지극히 당연한 일입니다. 2009년 5월 23일 서거한 노무현 전 대통령은 부산교구 사제인 송기인 신부님에게 유스토라는 세례명으로 세례를 받았지만, 하느님께서 주시는 희망의 약속을 알지 못하였거나 믿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는 “희망이 없어도 희망”(로마 4,18)하였던 아브라함의 믿음을 지니지 못하였나 봅니다. 오히려 그의 유서에 표현되어 있듯이, “여생도 남에게 짐이 될 일밖에 없다.”는 절망감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 짐을 예수님께 맡겨 드리고 자신은 예수님께서 맡기시는 짐을 지면 더 좋았을 것입니다. 최후의 승리자이신 하느님을 믿고 하느님께 희망을 두었더라면, 예수님처럼 자신의 뜻보다는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먼저 찾고 그 뜻과 자신의 뜻을 일치시켰더라면, ‘자살’이라는 금지된 행동을 피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사실 우리는 누구도 하느님의 자비가 아니고는 희망도 구원도 없습니다. 하느님을 잃으면 희망도 잃습니다.


세례를 받아도 세례의 열매, 곧 하느님께서 주시는 믿음, 희망, 사랑을 받아 누리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 이유는 기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기도는 무엇입니까? 기도는 영혼의 호흡입니다. 무엇을 호흡합니까? 하느님의 숨, 성령, 자비, 평화, 감사를 들이마시고 내쉼으로써 영혼은 나날이 건강해지고 아름다워집니다. 성 비오 신부님(Padre Pio, 1887-1968년)의 말씀을 상기하는 것이 유익하겠습니다. “기도하십시오. 마지못해서라도 기도하십시오. 많이 기도하는 사람은 구원받습니다. 적게 기도하는 사람은 위태롭습니다. 그리고 기도하지 않는 사람은 벌 받을 것입니다. 의지(지향)를 보시고 상을 주시는 것이지 감정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뿌리에서 영양분을 섭취하지 못하는 나뭇가지는 말라 죽게 마련입니다.


10-13절에서는 이사악의 쌍둥이 아들, 곧 에사우와 야곱 이야기가 나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 쌍둥이가 태어나기도 전에 벌써 야곱의 자손들만 약속의 자녀가 되리라고 결정하십니다. 형을 선택하건 동생을 선택하건 그것은 온전히 하느님의 몫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절대적 자유로 사람을 선택하십니다. 야곱의 선택처럼 예상 밖의 선택도 있습니다. 하느님의 선택이 우리의 예상과 다르다고 해도 불안해하거나 불만을 가질 필요가 없습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크신 사랑을 이미 잘 알고 있지 않습니까? “약속의 자녀”가 아니었던 이스마엘도 큰 복을 받았고(창세 21,18 “내가 그를 큰 민족으로 만들어 주겠다.”), 에사우도 유복한 삶을 살았습니다(창세 33,9 “내 아우야, 나에게도 많다. 네 것은 네가 가져라.”). 하느님은 우리가 충분히 믿을 만한 분이시고, 우리의 지극한 사랑을 받을 만한 분이십니다.


세상의 구원이, 세상의 평화와 정의가 사람의 손에 달려 있지 않고 ‘하느님께 달려 있다’는 말씀이 얼마나 큰 위로입니까? 만일 세상의 평화와 정의가 ‘나에게 달려 있다’고 생각하면 그 짐을 감당할 수 없을 것입니다. 좌절과 절망은 뻔한 결말입니다. 우리의 힘은 보잘것없어서 “머리카락 하나라도 희거나 검게 할 수 없기 때문”(마태 5,36)입니다. 그러나 전능하신 사랑의 하느님께서는 하시고만 하시면 무엇이든 하실 수 있습니다.


13절의 “나는 야곱을 사랑하고 에사우를 미워하였다.”는 말라 1,2-3을 인용한 것으로, 에사오보다 야곱을 선호하였다는 히브리 말식 표현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14절 이하에서 하느님의 자유로운 선택의 정당성을 역설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무엇이라고 말해야 합니까? 하느님 쪽이 불의하시다는 것입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로마 9,14). 오히려 하느님의 자유롭고 자비로운 개입이 없다면, 인간은 결코 의로움에 이를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은 의로움의 율법을 추구하였지만 그 율법에 이르지 못하였습니다”(로마 9,31). “그러므로 그것은 사람의 의지나 노력이 아니라 하느님의 자비에 달려 있습니다”(로마 9,16).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삼으시기로 미리 정하셨습니다. 이는 하느님의 그 좋으신 뜻에 따라 이루어진 것입니다”(에페 1,5).


17절의 파라오 이야기는 파라오 개인의 잘못을 지적하려는 것이 아니라, 파라오의 박해조차 하느님의 구원 계획의 일부를 이루어 그 계획의 실현에 일조하였다는 점을 상기시킵니다. 비록 세상의 조화가 하느님의 구원 계획과는 다른 것처럼 보여도, 하느님께서는 모든 상황의 절대적 주도권을 쥐고 계심을, 결국은 하느님의 힘이 드러나고 온 세상에 그분 이름이 거룩히 빛날 것임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 당신이 원하시는 대로 어떤 사람에게는 자비를 베푸시고 또 어떤 사람은 완고하게 만드신다면(로마 9,18 참조), 그러한 완고함에 대한 책임을 하느님께서 물으실 수 있는가 하는 의문을 제기할 수 있습니다(로마 9,19 참조). 이에 대하여 바오로 사도는 “아, 인간이여! 하느님께 말대답을 하는 그대는 정녕 누구인가? 작품이 제작자에게 ‘나를 왜 이렇게 만들었소?’ 하고 말할 수 있습니까?”(로마 9,20) 하고 화를 내듯이 말하며, 곧이어 구약성경에 자주 나오는 ‘옹기장이’ 표상을 가지고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절대적 주권을 역설합니다. “옹기장이가 진흙을 가지고 한 덩이는 귀한 데 쓰는 그릇으로, 한 덩이는 천한 데 쓰는 그릇으로 만들 권한이 없습니까?”(로마 9,21) “아, 거꾸로 행동하는 너희들! 진흙이 옹기장이와 똑같이 인정받을 수 있느냐? 작품이 제작자를 두고 ‘그가 나를 만들지 않았다.’ 할 수 있느냐? 빚어진 것이 자기를 빚은 자를 두고 ‘그는 아무것도 모른다.’ 할 수 있느냐?”(이사 29,16) 죄인은 본래 할 말이 없는 것이 정상인데, 오히려 죄인일수록 말이 많습니다. 의인이 하느님께 ‘나를 왜 이렇게 만드셨습니까?“ 하겠습니까? 그렇게 따지는 사람은 흔히 어리석은 죄인이기에 바오로 사도는 그 어리석음을 꾸짖으며 강하게 대꾸를 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 죄의 책임을 돌리는 것은 인류의 역사와 더불어 시작되었습니다.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따 먹지 말라는 하느님 명령을 거역한 다음에, 아담의 변명은 어떠하였습니까? “당신께서 저와 함께 살라고 주신 여자가 그 나무 열매를 저에게 주기에 제가 먹었습니다”(창세 3,12). 이 대답은 여자에게 책임을 돌리는 동시에 하느님께 책임을 돌리는 것입니다. ‘제가 언제 여자가 필요하다고 했습니까? 그런데 당신이 주신 여자가 열매를 주었으니 결국 당신이 제게 열매를 주신 것이 아닙니까?’ 기막힌 책임 전가입니다. 하느님은 더 이상 사람과 대화하지 않으시고, 사형 선고를 내리십니다. “너는 흙에서 나왔으니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양식을 먹을 수 있으리라. 너는 먼지이니 먼지로 돌아가리라”(창세 3,19). 사람이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하느님 탓을 하면 더 이상의 대화는 불가능합니다. 하느님의 영이 그 안에 머물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영이 떠나면 사람은 죽습니다.


하느님이 독재자인 것 같지만 하느님은 충분히 그럴 만한 자격이 있으신 분입니다. 그분만큼 사람을 사랑하는 자가 있습니까? 그분은 모든 그릇의 온갖 더러움을 씻어 주시려고 대신 더러워지신 분입니다. 사람의 진홍빛 죄악을 씻어 주시려고 대신 십자가 형벌을 받으신 분입니다. 피조물을 살리려고 기꺼이 죽음의 길에 오르시는 창조주요 구원자이십니다.


22절의 “멸망하게 되어 있는 진노의 그릇들”은 하느님의 길을 깨닫지 못하고 죄 속에 머물러 있음으로써 하느님께서 내리시는 진노의 표적이 되는 사람들, 곧 멸망하게 되어 있는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그러나 바오로는 하느님께서 이들을 자기들의 행동과는 무관하게 멸망하도록 만드셨다고는 말하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진노는 불경과 불의를 저지르는 자들에게 지금도 나타나고 있습니다. “불의로 진리를 억누르는 사람들의 모든 불경과 불의에 대한 하느님의 진노가 하늘에서부터 나타나고 있습니다”(로마 1,18).


또 23절의 “영광을 받도록 미리 마련하신 자비의 그릇들”은 하느님께서 무상으로 베푸시는 자비의 대상이 되는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앞 절에서와 달리 바오로는 여기에서, 이 “자비의 그릇들”이 하느님에게서 영광을 받도록 미리 만들어졌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약속의 자녀”이며 “자비의 그릇들”입니다. 하느님의 약속을 굳게 믿고 하느님에게서 멀어지지 않으면 됩니다. 풍성하게 부어지는 하느님 은총을 막으려고 뚜껑만 덮지 않으면 됩니다. 뚜껑을 덮는다는 것은 죄를 짓는다는 뜻입니다. 죄를 짓는 것은 하느님께 등을 돌리고 하느님에게서 멀어지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약속은 이제 유다인만이 아니라 다른 민족들 가운데서도 실현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유다인 가운데에서만이 아니라 다른 민족들 가운데에서도 불러 주셨습니다”(로마 9,24). 호세아 예언자의 말대로, 그동안 하느님의 사랑을 받지 못하던 민족들도 하느님의 백성이 됩니다. “나는 내 백성이 아닌 자들을 ‘내 백성’이라 부르고 사랑받지 못한 여인을 ‘사랑받는 여인’이라 부르리라”(로마 9,25).


기원전 8세기 사람인 호세아는 무척 별난 예언자입니다. 주님 말씀을 따라 창녀를 아내로 맞아들였습니다. 그 자녀들의 이름도 유별납니다. 큰 아들 이름 ‘이즈르엘’은 이스라엘 땅을 가리키기도 하지만, 못된 짓을 한 아합 임금의 아내 이제벨이 개들에게 뜯어 먹힌 지역 이름이기도 합니다(2열왕 9,19). 딸 이름 ‘로-루하마’는 ‘가엾이 여김을 받지 못하는 여자’라는 뜻이고, 둘째 아들 이름 ‘로-암미’는 ‘나의 백성이 아니다’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그날이 오면, 이즈르엘은 땅에 뿌리를 내려 정착하고, 로-루하마는 가엾이 여김을 받으며, 로-암미는 주님 백성이 될 것입니다. “나는 그를 이 땅에 심고 로 루하마를 가엾이 여기리라. 또 내가 로 암미에게 “너는 내 백성이다.” 하고 그는 “저의 하느님!” 하고 말하리라”(호세 2,25).


창녀 아내의 못된 짓에도 불구하고 호세아는 그 여자를 사랑하라는 명령을 주님께 받습니다. “너는 다시 가서, 다른 남자를 사랑하여 간음을 저지르는 여자를 사랑해 주어라. 주님이 이스라엘 자손들을 사랑하는 것처럼 해 주어라”(호세 3,1). 호세아 이후에 ‘창녀짓’은 이스라엘의 불충을 가리키는 말로 쓰입니다. 새로운 하느님 백성인 교회는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과 비교할 때 어떻습니까? 또 우리 자신은 어떻습니까?


호세아서는 참으로 희망을 주는 예언서입니다. 당신 백성이 지독하게 못된 짓을 하여도 주님께서는 결코 사랑을 완전히 거두지 않으심을 보여 주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느님 자리를 다른 것들, 곧 우상에게 내어 주는 삶을 선택하곤 합니다. 하느님의 뜻 대신에 나의 뜻, 나의 쾌락을 선택하곤 합니다. 그래서 ‘되찾은 아들의 비유’(루카 15,11-32)의 작은아들처럼 한참 동안 비참한 생활을 하다 보면, 다시 아버지를 찾고 되돌아갑니다. 이때 죄를 묻지 않으시고 받아주시는 분이 하느님이십니다.


27-29절에서는 ‘남은 자’에 관한 이사야 예언자의 말을 인용합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의 수가 바다의 모래 같다 하여도 남은 자들만 구원을 받을 것이다”(로마 9,27). “남은 자들”은 예언자들이 한 설교의 중심 주제 가운데 하나입니다. 예언자들은 이스라엘 백성의 작은 일부만 곧 “남은 자들”만 시련의 의미를 깨닫고 회개하여 메시아 시대의 행복을 누리리라고 끊임없이 선포합니다(이사 10,20-21 그날에 이러한 일이 일어날 것이다.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과 야곱 집안의 생존자들이 더 이상 자기들을 친 자에게 의지하지 않고,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 주님께만 충실히 의지할 것이다. 남은 자들이 돌아올 것이다. 야곱의 남은 자들이 용맹하신 하느님께 돌아올 것이다.; 예레 23,3; 아모 3,12; 5,15; 미카 4,6-7; 스바 3,12-13; 하까 1,12; 즈카 8,6-11; 13,8-9. 그리고 시편 18,28; 73,1 참조).


30-33절에서는 이스라엘의 잘못된 열성을 지적합니다. “이스라엘은 의로움의 율법을 추구하였지만 그 율법에 이르지 못하였습니다”(로마 9,31). 이스라엘은 율법이 이끌어 주게 되어 있는 목표에 도달하지 못합니다. 한쪽으로는 율법을 준수하지 않았기 때문이고(2,21-23; 마태 23,3; 사도 15,10), 다른 한쪽으로는 율법의 목적과 정신을 깨닫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잘못된 열성으로는 구원받을 수 없기에 하느님께서는 여러 방법을 쓰시다가 마침내 쓰러트리십니다. 이제는 그들을 쓰러지게 한 바위, 곧 그리스도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보라, 내가 시온에다 걸려 넘어지게 하는 돌을, 부딪쳐 쓰러지게 하는 바위를 놓는다. 그를 믿는 이는 부끄러운 일을 당하지 않으리라”(로마 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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