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생각하며

성모 마리아- 믿음의 어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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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미연 [aldus119] 쪽지 캡슐

2005-03-04 ㅣ No.364

 

 

 

어제 어느 개신교 방송에서 전화 인터뷰를 청해왔습니다. 몇몇 개신교 신자분들이 가톨릭 교회에 대해 지니고 있는 생각을 전해주면서, 그에 대한 제 의견을 묻더군요. 대부분 가톨릭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의 나열이었습니다. '가톨릭은 예수님보다 성모 마리아를 더 중요하게 여긴다.', '교황이 하나님을 우선한다', '가톨릭은 그리스도를 믿지 않아도 구원 받을 수 있다.' '사제들 통해서만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해성사와 관련해서)'등등. 이 중에서 특별히 마리아에 대한 것은 자주 가톨릭과 개신교의 단골 논쟁거리가 됩니다. 아마도 개신교 신자들이 가톨릭의 마리아 공경에 대해 이해가 부족한 것, 그리고 유감스럽게도 가톨릭 교회 내의 과장된 마리아 공경 때문에 그렇게 된 것 같습니다.

가톨릭 교회에서는 전통적으로 마리아를 공경해왔습니다. 하지만 개신교 일각에서 주장하듯이 마리아를 숭배하지는 않습니다. 가톨릭에서는 숭배라는 용어 자체를 쓰지 않지요. 숭배 대신 '흠숭'(欽崇)이란 단어를 쓰는데, 이 표현은 하느님께만 사용합니다. 가톨릭은 마리아를 흠숭하는 것이 아니라 공경(恭敬)할 뿐입니다. 정확히 말하면 최상의 공경, 즉 상경(上敬)의 예로서 마리아를 대합니다. 기도할 때에도 엄격하게 구분을 하지요. 예수님께는,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소서.", 성모님께는 "저희를 위하여 (하느님께) 빌어주소서."하고 기도합니다.

그러면 가톨릭은 오해와 비난을 받아가면서도 왜 마리아를 공경할까요? 왜냐하면 마리아는 하느님의 충만한 은총을 받아(루가1,30) 구세주의 어머니가 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성모님이 단지 육신적으로 예수님의 어머니이기 때문에 그분을 공경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왕조시대에 대비(大妃)가 왕을 낳아준 어머니기 대문에 공경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지요.

마리아가 예수님의 어머니가 되신 것은 하느님의 은총에 믿음으로 응답하였기 때문입니다. 즉 마리아는 구세주가 세상에 오실 수 있도록 단지 피동적으로 자신의 몸을 빌려드린 것이 아니라, 능동적으로 믿음과 순종으로 응답하신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네 고향과 친척을 떠나 가나안 땅으로 가라'는 하느님의 말씀에 믿음으로 순종해서(창세 12,1-4) '믿음의 조상'(로마 4,13-25)이 되었습니다. 이와 유사하게 마리아는 처녀의 몸으로 구세주를 잉태할 것이라는 천사의 말에 믿음으로 순종함으로써 구세주의 어머니가 되신 것입니다. "이 몸은 주님의 종입니다. 지금 말씀대로 제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가 1,38). 바로 이런 믿음으로 인해서 마리아는 친척 엘리사벳에게 칭송을 받습니다. "주님께서 약속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 믿으셨으니 정녕 복되십니다."(루가 1,45) 가톨릭 교회는 엘리사벳의 칭송을 이어받아 성모님이 복된 분이라고 공경하고 있습니다.

성모 마리아는 구세주를 잉태할 때 보였던 그 믿음과 순종을 계속 견지하셨습니다. 비록 자신이 모든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상황에서도 말입니다. 열 두 살의 예수님을 예루살렘에서 잃어버렸다가 사흘 만에 다시 찾았을 때, '왜 이렇게 부모의 속을 애태웠느냐'는 어머니의 말씀에 이해할 수 없는 대답을 하십니다. 여기서 성모님은 아들의 말이 무슨 뜻인지는 몰랐지만, 이 모든 일을 마음 속에 간직하였습니다(루가 2,41-52). 즉 아들을 다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아들에게 믿음과 신뢰를 보인 것이지요. 요한 복음 2장의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도 이와 비슷한 일이 일어납니다. 성모님이 아들에게 잔치 집에 포도주가 떨어졌다고 하자 예수님은 이해할 수 없는 대답을 하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모님은 시중드는 사람들에게 '무엇이든지 그가 시키는 대로 하라'(요한 2,5)고 당부하십니다. 여기서 성모님은 비록 아들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어도 그 아들을 굳건히 믿고 신뢰한 분으로 나타납니다. 이런 점에서 성모님은 신앙인들에 탁월한 모범이 됩니다. 우리는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을 만나면 하느님을 곧잘 원망하고 의심합니다. 하지만 성모님은 당신의 삶으로써 이런 순간에도 하느님을 굳건히 신뢰하라고 가르쳐 주십니다.

그리고 성모님은 아들에 대한 이런 굳은 신뢰 때문에 아들의 처참한 죽음을 보면서, 시메온이 예언한 대로 '마음이 예리한 칼에 찔리는 것 같은 고통'(루가 2,35)을 당하십니다. 우리는 예수님에 대한 믿음 때문에 목숨을 내놓거나 고통을 당한 사람을 우러러 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목격하고 그 고통을 함께 나눈 성모님을 우러러 본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겠지요. 이런 맥락에서 예수님이 돌아가시기 직전에 성모님을 사도 요한에게(또한 그를 통해서 우리에게) 어머니로 맡기신 것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 분이 네 어머니이시다"(요한 19,27).

바로 이런 성모님의 모범적인 믿음의 자세 때문에 우리는 그분을 존경하고 공경합니다. 신앙의 길은 혼자가 아니라 함께 가는 것입니다. 특이 우리에 앞서 훌륭하게 신앙의 길을 간 사람들의 발자취를 보면서 많은 도움과 힘을 얻습니다. 성모님은 아브라함에 못지 않은 훌륭하고 모범적인 신앙인이기에 가톨릭 교회는 물론 동방 교회에서는 그분을 존경하고 공경합니다.

사실 성모님이 믿음과 순종에서 탁월한 모범이라는 점에서는 종교 개혁자 루터도 동의를 했습니다. 하지만 루터 이후의 개신교 신자들은 성모님께 기도를 청하는 것을 반대해 왔습니다. 이와는 달리 가톨릭 교회는 성모님께 기도를 청합니다. 왜 그럴까요? 요한 복음 2장 가나의 혼인 잔치집에서 포도주가 떨어졌을 때 성모님은 아들 예수님께 도움을 청하였고, 그분의 이해할 수 없는 대답에도 불구하고 아들에 대한 굳건한 신뢰를 보였습니다. 바로 이것이 실마리가 되어 물이 포도주로 변하는 기적이 일어났지요. 가톨릭 교회는 여기에 근거를 두고서 성모님이 우리를 위해 하느님께 필요한 바을 청해서 얻게 해주실 수 있다고 믿어왔습니다. 그래서 가톨릭 교회는 하느님과 그분의 아들 예수님께 '자비를 베풀어주시라고 청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성모님께 우리를 위해 빌어달라고 간청합니다. 개신교 신자들도 자신들이 어려울 때에는 혼자 하느님께 기도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믿음이 좋은 목사님이나 다른 신자들에게 기도를 청합니다. 개신교의 이런 태도가, 가톨릭 신자들이 탁월한 믿음의 여인 마리아에게 기도를 청하는 것과 크게 다르다고 할 수 있을런지 의문입니다.

물론 가톨릭 신자들이 반성해야 할 것도 있습니다. 성모님에 대한 공경이 지나쳐서 마치 예수님이나 예수님을 가리는 것처럼 행동하는 모습입니다. 그래서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교회헌장 >67항>에서 마리아 공경과 관련해 '그릇된 과장을 피하고, 갈라진 형제들과 믿지 않는 이들이 오해를 품게하는 말고 행동을 삼가하라'고 당부합니다.

성모님께 기도의 중재를 청하지만, 그 기도를 들어주시는 분은 하느님입니다. 성모님은 여신이 아닙니다. 그분은 우리와 똑같은 인간으로서, 탁월한 믿음을 통해 구세주의 어머니가 되신 분입니다. 그분은 우리에 앞서 우리와 똑 같은 조건에서 신앙의 길을 가신 분이고, 아들 때문에 큰 고통도 감수하신 분입니다. 하지만 이제는 하느님 곁에 계시면서 모든 은총의 근원인 하느님께 우리를 위해 간청하고 도움을 얻어주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성모 마리아는 "당신의 모성애로 아직도 나그넷길을 걸으며 위험과 고통을 겪고 있는 당신 아드님의 형제들을 돌보시며 행복한 고향으로 이끌어 주신다."(<교회헌장> 62항) / 손희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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