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인들의 영성

파올라의 성 프란치스코 증거자 [ St. Franciscus de Paola, 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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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현숙 [hsryu] 쪽지 캡슐

2001-04-03 ㅣ No.23

파올라의 성 프란치스코 증거자 [ St. Franciscus de Paola, C. ]

 

                                                          축일 4월 2일

 

   이탈리아의 파올라에 사는 야고보 말도리라 부부는 자녀가 없음을 자못 비관하면서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에게 전구를 청하며 자녀를 주실 것을 하느님께 간청하였다. 그 결과 1416년 드디어 한 남자아이를 낳게 되었는데, 전구 해주신 성인에게 감사의 정을 표시하기 위해 그의 이름도 프란치스코라고 이름지었다. 그런데 그 아이가 눈병에 걸렸으므로 양친은 재차 성 프란치스코의 전구를 청하며 만일 낫게 해주신다면 장차 아이를 반드시 당신의 수도원에 보내어 하느님께 봉헌할 것을 맹세하였다. 그러자 그 눈병도 즉시 완치되었다. 아버지 자신도 엄격한 생활을 하는 사람으로서 아들에게도 똑같이 엄한 교육을 받게 하였고 그것은 종교 교육이었다. 프란치스코가 13세에 달했을 때 양친은 맹세대로 그를 어느 수도원에 들여보냈다. 그는 온갖 규칙을 충실히 지키며 순명하고 겸손하며 엄한 고행도 잘 해 나갔다. 그러나 하느님의 계시로 자신의 사명이 다른 곳에 있다는 것을 깨달은 그는 1년이 지나서도 서원을 발하지 않고 수도원을 떠나 자신의 집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그 뒤 그는 양친과 더불어 아시시나 로마나 몬테 카시노 등에 순례의 여행을 떠났으나 돌아와서는 부모의 승낙을 얻어 자기 스스로 하나의 조그마한 바위굴을 만들고 자기 집의 고요한 방과 또 다른 두 군데서 여유 있게 은수자와 같은 생활을 하였다. 그는 끊임없이 기도하고 묵상하며 가끔 단식하고 또 밤새우며 매질하고 고신극기를 해 음식물로는 산채 외에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 프란치스코는 되도록 남몰래 살려고 했으나, 이 같은 생활이 곧 세상에 알려졌다. 1435년 그가 겨우 19세 때 이미 청년 몇 명이 그의 덕을 사모하여 제자가 되어 함께 같은 생활을 하겠다고 간청하였다. 그러므로 신심 깊은 그의 양친은 자기 아들과 그의 동료를 위해 하나의 작은 성당과 몇 개의 조그마한 방을 지어 주었다. 세월이 흐름에 따라 이런 생활을 갈망하며 모여오는 이가 많아졌다. 그러므로 그 지방의 주교는 그에게 큰 수도원과 부속 성당의 건축을 허가했다. 그 공사가 시작되고 보니 그에 대한 세인의 존경이 얼마나 컸다는 것을 확실히 알게 되었다. 그 이유는 그를 사모하는 이들이 부탁을 안 했어도 사방에서 너도나도 서로 경쟁하며 기꺼이 그 공사에 협력해 주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그 뒤 몇 가지 기적이 일어났으므로 그에 대한 존경은 삽시간에 더 증가했다. 한 예로, 그의 조카(여동생의 아들)는 평소 백부인 프란치스코를 사모하던 끝에 그의 수도원에 들어가서 같이 완덕의 길을 걸으려고 했지만 그의 어머니는 승낙하지 않았다. 그러자 아들은 뜻밖에 병에 걸려 죽고 말았다. 어머니는 이를 자기에 대한 천벌로 생각하고 유해를 수도원의 성당에 운반하고 미사 선제 후 즉시 매장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프란치스코는 이를 만류하고 조카의 시체를 자기 방으로 옮기게 하고 밤새도록 눈물을 흘리며 기도하였다. 그의 성심에서 우러나온 기도로 조카는 소생하게 되었고 프란치스코는 그의 여동생에게 지금은 아들을 수도원에 들여보낼 마음이 없느냐고 물었더니, 그녀는 아직 아들의 소생을 모르는 상태였으므로 "살아있다면 수도원이든 어디든 제 가고 싶은 대로 맡길 겁니다. 그러나 이제는 늦었습니다" 하고 탄식하며 대답했다. 이에 프란치스코는 "승낙만 하면 됩니다" 하고 말하고 나서 조카에게 수도복을 입히고 즉시 여동생에게 면회시켰다고 한다.

   프란치스코가 뭇사람에게 존경과 사랑을 받은 것은 이 같은 기적을 행한 이유만이 결코 아니다. 오히려 누구에게든지 선량하고 동정이 깊고 친절했기 때문이라고 하는 것이 적당할 것이다. 따라서 그에게는 형제들을 지도하고 인도하는 것이 조금도 어렵지 않았다. 훈계하거나 결점을 고쳐주고 하는 것은 어찌되었든 상대에게 불쾌한 감을 주기 쉬운 것인데, 그가 사랑에 넘치는 태도로 차근차근 설명해 주면 누구나 기꺼이 그의 훈계를 받아들이는 것이었다. "사랑을 위해 이것을 하십시오. 사랑을 위해서는 이것을 해서는 안됩니다." 그의 명령 방법은 늘 이와 같았다.

    그의 수도원은 나날이 번성해 갔고 딴 곳에도 같은 수도원을 세우려고 1473년 회의 규칙에 대해 정식으로 교황 식스토 4세의 허가를 얻어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의 山修士회라고 부르게 되었다. 이는 그 회의 규칙이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의 것을 기초로 하고 다시 준엄한 생활을 행하게끔 고친 데 기인한 것이다. 그러나 그 후 교황 알렉산드르 6세는 ’가장 작은 자의 회’ 라고 그의 이름을 변경했다. 교황의 인가를 얻은 그 수도회는 이탈리아 뿐 아니라 프랑스, 스페인, 독일 등에도 설립했다. 특히 프랑스에 있어서 프린치스코회는 영국 왕에게 존대를 받고 성인의 기적을 전해들은 루도비코 11세가 중병에 걸렸을 때 사신을 보내어 성인의 방문을 간청했다. 프란치스코는 교황의 명령도 있고 하여 1482년 4월 24일 그의 궁전을 방문하게 되었는데 그 때의 환영은 마치 교황을 맞아들이는 것처럼 성대했다. 국왕은 그의 앞에 무릎을 꿇고 그의 손에 친구하며 자신의 병을 낫게 해 줄 것을 간구 하였다. 이에 대하여 프란치스코는 영원한 생명만이 중요하다는 것을 설명하고 천국을 위해 공로를 쌓을 것과 하느님의 섭리에 몸을 의탁할 것을 가르쳤다. 이리하여 국왕은 통회하며 병자 성사를 받고 고요히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때는 1483년 8월 4일이었다. 그 뒤 계속 가롤로 8세와 루도비코 12세도 성인을 대단히 존경했으므로, 그는 그들의 원조로 몇 군데에 수도원을 더 세울 수가 있었다. 그러던 중 그가 세상을 작별할 날이 다가왔다. 일찍이 그것을 예감한 프란치스코는 형제들에게 하느님을 사랑하고 또한 서로 사랑해야 된다는 것을 훈계한 뒤 성인으로서 적합한 선종을 하였다. 1507년 4월 2일이었고 93세였다. 시성식은 레오 10세 교황시대에 이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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