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장동성당 게시판

로마서 8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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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희성 [lhopeter] 쪽지 캡슐

2010-11-25 ㅣ No.2125

 


로마서 8장은 주로 ‘영’에 관한, ‘성령’에 관한 말씀입니다. 그래서 ‘성령장’(聖靈章)이라고 이름붙일 수 있겠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7장 끝부분에서 “나 자신이 이성으로는 하느님의 법을 섬기지만, 육으로는 죄의 법을 섬깁니다.”(로마 7,25) 하며, “누가 이 죽음에 빠진 몸에서 나를 구해 줄 수 있습니까?”(로마 7,24) 하고 물었습니다. 이에 대한 해답이 8장에 나오는 ‘성령의 법’입니다.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생명을 주시는 성령의 법이 그대를 죄와 죽음의 법에서 해방시켜 주었습니다”(로마 8,2). ‘하느님의 영이요 그리스도의 영’(로마 8,9 참조)을 모시게 된 그리스도인들이 그 성령에 따라 살아가는 법이 “성령의 법”(로마 8,2)입니다. 7장의 율법이나 ‘이성의 법’은 구원을 가져다주지 못하지만, ‘성령의 법’은 생명과 평화의 법이요, 해방과 구원의 길입니다.


1절에서 ‘단죄를 받을 일이 없다’는 말씀은 ‘무죄 판결, 무죄 선언을 받는다’는 뜻입니다. “한 번의 범죄 뒤에 이루어진 심판은 유죄 판결을 가져 왔지만, 많은 범죄 뒤에 이루어진 은사는 무죄 선언을 가져왔습니다”(로마 5,16).


3절에서 “육으로 말미암아 나약해져”, “죄 많은 육의 모습으로”, “육 안에서 죄를 처단하셨습니다.”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여기에서 ‘육’은 단순히 ‘육체’를 가리킨다기보다는 ‘인간 본성’ 또는 ‘연약한 인성(人性)’을 뜻하는 것으로 이해하면 좋겠습니다. 예전 공동 번역 성서에서는 “육으로 말미암아 나약해져” 대신에 “인간의 본성이 약하기 때문에”로 옮겼습니다. 요한 복음 1장의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요한 1,14)에서도 여기 나오는 ‘사람’의 그리스 말 원어는 로마서 8장 3절의 ‘육’과 동일하게 ‘사륵스’(σαρξ)입니다. 하느님이신 말씀께서 살로 이루어진 연약한 인간이 되셨다는 것입니다. 물론 인간은 구원하시려고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6절과 7절에서 “육의 관심사는 죽음”(로마 8,6), “육의 관심사는 하느님을 적대하는 것”(로마 8,7)이라고 하였는데, 여기에서의 ‘육’은 ‘연약한 인성’ 중에서도 로마서 1장의 ‘불경’과 ‘불의’를 저지르는 ‘육’으로 이해할 수 있겠습니다. “모든 불경과 불의에 대한 하느님의 진노가 하늘에서부터 나타나고 있습니다”(로마 1,18). 하느님을 적대하여 불경과 불의를 저지르는 ‘육’의 종말은 ‘죽음’입니다.


창세기는 흙으로 빚어진 사람이 하느님의 숨을 받아 생명체가 되었다고 가르칩니다. “주 하느님께서 흙의 먼지로 사람을 빚으시고, 그 코에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명체가 되었다”(창세 2,7). 이렇듯, 첫 사람이 ‘하느님의 숨’으로 생명을 얻었듯이, 원죄로 타락한 우리 인간도 영원한 생명을 누리려면 ‘하느님의 영’을 받아야 합니다.


구약 시대에는 모든 사람에게 성령이 내리지 않고 일부 사람에게만 내렸습니다. 민수기 11장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이 고기를 먹고 싶다고 불평을 합니다. 날마다 만나만 먹으니 다른 음식이 먹고 싶었던 것이지요. 모세가 주님께 탄식을 하니, 주님께서는 이스라엘 원로 가운데 70명을 뽑으라고 하시고는, 모세에게 있는 영을 조금 덜어 내어 그들에게 나누어 주십니다. 이제는 그들이 모세와 함께 이스라엘 백성을 짊어집니다. 그러나 모세의 희망은 온 백성이 주님의 영을 받는 것이었습니다. “주님의 온 백성이 예언자였으면 좋겠다. 주님께서 그들에게 당신의 영을 내려 주셨으면 좋겠다”(민수 11,29).


* 민수 11,24-25

24 모세는 밖으로 나와 주님의 말씀을 백성에게 전하였다. 그는 백성의 원로들 가운데에서 일흔 명을 불러 모아, 천막 주위에 둘러 세웠다

25 그때에 주님께서 구름 속에서 내려오시어 모세와 말씀하시고, 그에게 있는 영을 조금 덜어 내시어 그 일흔 명의 원로들에게 내려 주셨다. 그 영이 그들에게 내려 머무르자 그들이 예언하였다.


하느님의 계획은 모든 사람에게 주님의 영을 부어 주시는 것입니다. 구약 시대의 예언자 요엘은 모든 사람이 예언하기를 희망하며 이렇게 하느님 말씀을 선포하였습니다. “나는 모든 사람에게 내 영을 부어 주리라. 그리하여 너희 아들딸들은 예언을 하고 노인들은 꿈을 꾸며 젊은이들은 환시를 보리라. 그날에 남종들과 여종들에게도 내 영을 부어 주리라”(요엘 3,1-3,2).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신 뒤에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어 “성령을 받아라.”(요한 20,22) 하셨고, 지상 임무를 모두 마치고 승천하신 뒤에는 오순절 성령 강림이 이루어짐으로써 새로운 하느님 백성 공동체, 그리스도인 공동체, 교회 공동체가 시작되어 하느님 나라를 향한 구원의 행진이 본격화되었습니다.


오늘날 몸(육체)에 대한 관심이 아주 높습니다. ‘몸짱’이라는 말이 긍정적으로 쓰이고, 헬스클럽, 휘트니스 센터 등 몸매 관리와 체력 강화를 돕는 시설을 흔하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산은 주말이면 수많은 등산객으로 붐빕니다. 몸의 건강을 위하여 노력하는 것은 좋은 일이겠습니다만, 관심이 ‘몸’에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인간은 흙으로만 구성된 존재가 아니며 하느님의 숨을 받아 생명체가 되었다는 성경 말씀을 명심해야 합니다. 요컨대, ‘육’에 대한 관심 이상으로 ‘영’에 대한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잊어지고 있는 ‘영성’(靈性)을 회복해야 합니다. 영성의 회복이란 하느님의 숨을 끊임없이 들이마시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우선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는 하느님의 영을 호흡하는 것입니다. 밥이 육신 건강에 필수적이듯이, 기도는 영혼 건강에 필수적입니다. 하느님 말씀을 읽고(lectio divina), 하느님 말씀을 듣고(audio divina), 피조물을 통해서 하느님을 보고(video divina), 하느님의 뜻을 실천함으로써(actio divina), 우리의 영뿐 아니라 육도 성화되어, 완덕에 이릅니다.


4절에서 ‘육이 아니라 성령에 따라 산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5절에서 ‘육에 속한 것’을 추구하지 않고, ‘성령에 속한 것’을 추구하는 일은 어떻게 할 수 있을까요? 이 일은 우리 스스로 할 수 없고, ‘하느님의 영’, ‘그리스도의 영’, 곧 성령께서 오셔야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몸도 본래 죽을 몸이었으나, 성령께서 오시면 살 수 있습니다. 성령께서는 생명을 주시는 분이시므로, 그분이 오시면 우리의 영뿐 아니라, 죄로 죽은 몸도 생명을 얻습니다(로마 8,11 참조). “너희에게 힘줄을 놓고 살이 오르게 하며 너희를 살갗으로 씌운 다음, 너희에게 영을 넣어 주어 너희를 살게 하겠다. 그제야 너희는 내가 주님임을 알게 될 것이다”(에제 37,6). 우리의 몸은 성령의 힘으로 이전의 “몸의 행실”(로마 8,13), “세상에 있는 모든 것, 곧 육의 욕망눈의 욕망살림살이에 대한 자만”(1요한 2,16)을 죽이고,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고 형제를 사랑하는 일에 힘씁니다. 이로써 우리의 몸은 죄에 죽고, 성령으로 다시 살아납니다. 우리가 어려운 이웃을 방문하여 도울 때에, 우리의 몸은 죄에 죽고 성령으로 다시 사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령에 “빚을 진 사람”(로마 8,12)입니다. 이렇게 하느님의 종이 되어 살다 보면, 마침내 하느님 나라에 이르고 영원한 생명을 선물로 받습니다. “하느님의 종이 되어 얻는 소득은 성화로 이끌어 줍니다. 또 그 끝은 영원한 생명입니다”(로마 6,22). 반대로, “욕망은 잉태하여 죄를 낳고, 죄가 다 자라면 죽음을 낳습니다”(야고 1,15). “하느님께서는 각자에게 그 행실대로 갚으실 것입니다”(로마 2,6).


그런데 우리는 로마서 6장을 공부하면서,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힘으로써 더 이상 죄의 종노릇을 하지 않게 되었다고 배웠습니다. “우리의 옛 인간이 그분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힘으로써 죄의 지배를 받는 몸이 소멸하여, 우리가 더 이상 죄의 종노릇을 하지 않게 되었습니다”(로마 6,6). 로마서 8장에는 “생명을 주시는 성령”(로마 8,2)이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그렇다면 우리를 죄와 죽음에서 해방시켜 주신 분은 예수 그리스도이실까요, 아니면 성령이실까요? 삼위일체 교리에 따르면, 성부 성자 성령은 한 분이시요 같은 분이시므로, 어느 누구라고 해도 상관없습니다. 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일체의 신비를 깨닫지 못하는 우리로서는 결코 명쾌하게 대답할 수 없는 질문입니다. 다만, 로마서 6장 6절이 8장 2절의 근거라고 이해해도 좋겠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시공을 뛰어넘어 우리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셨으므로, 성령께서 역시 시공을 뛰어넘어 우리 각 사람에게 죄의 용서와 구원의 은총을 베푸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승천하신 뒤에 성령을 보내 주셨습니다. 이는 성령을 통하여 역사적 그리스도께서 보편적 그리스도가 되셨으며, 그리스도의 구원 은총이 시공을 초월하여 모든 시대, 모든 사람에게 미치게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태어나기도 전에, 우리가 죄를 짓기도 전에, 우리 죄를 몸소 짊어지시고 고난과 죽음을 겪으심으로써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셨습니다. 2천 년 전에 있었던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오늘날 우리와 연결시켜 구원 은총을 선사해 주시는 분이 성령이십니다. 단순히 연결만 해 주시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들어오시고, 나를 새롭게 하십니다. “너희에게 새 마음을 주고 너희 안에 새 영을 넣어 주겠다. 너희 몸에서 돌로 된 마음을 치우고, 살로 된 마음을 넣어 주겠다”(에제 36,26). 예전 공동 번역 성서의 표현인 “새 마음을 넣어주며 새 기운을 불어넣어 주리라. 너희 몸에서 돌처럼 굳은 마음을 도려내고 살처럼 부드러운 마음을 넣어주리라.”가 더 익숙하신 분들도 있겠습니다. 「가톨릭 기도서」에 실린 ‘일을 시작하며 바치는 기도’에서도 알 수 있듯이, 우리 교회는 전통적으로 성령께서 우리 마음에 오시어 사랑의 불이 타오르게 하시고, 우리를 새롭게 해 주시고, 바르게 생각하게 해 주시고, 위로해 주시기를 간청하였습니다.


<일을 시작하며 바치는 기도>

○ 오소서, 성령님.

저희 마음을 성령으로 가득 채우시어

저희 안에 사랑의 불이 타오르게 하소서.

주님의 성령을 보내소서. 저희가 새로워지리이다.

또한 온 누리가 새롭게 되리이다.

† 기도합시다.

하느님, 성령의 빛으로 저희 마음을 이끄시어

바르게 생각하고

언제나 성령의 위로를 받아 누리게 하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그리스도의 영을 모시기 전에, 우리는 ‘이성과 양심의 법’대로 살려고 노력하였지만 바라는 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돌로 된 마음’, ‘돌처럼 굳은 마음’ 때문입니다. ‘죄와 죽음의 법’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입니다(로마 7,23 참조). “육적인 존재, 죄의 종으로 팔린 몸”(로마 7,14)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와 하나 되는 세례를 받음으로써, 그리스도와 하나 되는 죽음, 그리스도와 하나 되는 부활의 영광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그리스도와 하나 될 수 있는 것은 바로 성령 덕분입니다. 그리스도의 영, 하느님의 영이 내 영을 새롭게 하셨기에, 그리스도와 하나 되고, 하느님의 자녀가 되고, 죄의 종살이에서 풀려났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님 덕분에 죄와 죽음에서, 율법과 ‘단죄’에서 풀려났지만, 그리스도께서는 어떤 고난, 어떤 죽음을 겪으셨습니까? 구약의 이사야 예언자는 이미 그리스도의 수난 모습을 보고 다음과 같이 예언하였습니다.


* 이사 53,2-7

2 그는 주님 앞에서 가까스로 돋아난 새순처럼, 메마른 땅의 뿌리처럼 자라났다. 그에게는 우리가 우러러볼 만한 풍채도 위엄도 없었으며 우리가 바랄 만한 모습도 없었다.

3 사람들에게 멸시받고 배척당한 그는 고통의 사람, 병고에 익숙한 이였다. 남들이 그를 보고 얼굴을 가릴 만큼 그는 멸시만 받았으며 우리도 그를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4 그렇지만 그는 우리의 병고를 메고 갔으며 우리의 고통을 짊어졌다. 그런데 우리는 그를 벌받은 자, 하느님께 매맞은 자, 천대받은 자로 여겼다.

5 그러나 그가 찔린 것은 우리의 악행 때문이고 그가 으스러진 것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다. 우리의 평화를 위하여 그가 징벌을 받았고 그의 상처로 우리는 나았다.

6 우리는 모두 양 떼처럼 길을 잃고 저마다 제 길을 따라갔지만 주님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이 그에게 떨어지게 하셨다.

7 학대받고 천대받았지만 그는 자기 입을 열지 않았다. 도살장에 끌려가는 어린 양처럼 털 깎는 사람 앞에 잠자코 서 있는 어미 양처럼 그는 자기 입을 열지 않았다.


누가 예수님을 이렇게 만들었습니까? 예수님을 찌르고 으스러뜨린 것은 누구의 뜻이었습니까? 바로 하느님 자신의 뜻이었고 하느님의 계획이었습니다. “그를 으스러뜨리고자 하신 것은 주님의 뜻이었고 그분께서 그를 병고에 시달리게 하셨다. 그가 자신을 속죄 제물로 내놓으면 그는 후손을 보며 오래 살고 그를 통하여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리라”(이사 53,10).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 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요한 3,16). 하느님께서 당신 외아드님을 내 주신 이야기는 “하느님의 벗”(야고 2,23) 아브라함이 외아들 이사악을 봉헌한 이야기를 상기시킵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 나의 벗 아브라함(이사 41,8)이라고 하셨나 봅니다.


14절 이하의 말씀처럼, - 아!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 성령을 받으면 누구나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로마 8,15)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우리는 더 이상 ‘죄의 종’이 아니라, ‘하느님의 자녀’이며, ‘하느님의 상속자’입니다. “성령께서 몸소,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임을 우리의 영에게 증언해 주십니다”(로마 8,16). “자녀이면 상속자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상속자입니다. 그리스도와 더불어 공동 상속자인 것입니다. 다만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누리려면 그분과 함께 고난을 받아야 합니다”(로마 8,17). 이 세상에서 고난을 받지 않는다면, 저 세상에 받을 영광이 없습니다.


‘되찾은 아들의 비유’(루카 15,11-32)을 살펴봅시다. 이 비유에서, 비록 작은아들이 아버지에게서 받은 가산을 모두 챙겨 아버지를 떠나 먼 고장으로 가서 모든 재산을 탕진하였을지라도(루카 15,13-14 참조), 다시 아버지께 돌아갔을 때에 아들 대접을 받습니다. 아버지는 작은아들의 손에 반지를 끼우고 발에 신발을 신겨 주라고 합니다. 반지는 권위의 표징이고, 신발은 자유인을 상징합니다. “파라오는 손에서 인장 반지를 빼어 요셉의 손에 끼워 주고는, 아마 옷을 입히고 목에 금 목걸이를 걸어 주었다”(창세 41,42). 이처럼 한 번 하느님의 자녀요 상속자가 되면, 비록 하느님에게서 멀리 떠나는 일이 있더라도 제 발로 돌아오기만 한다면, 자비하신 하느님께는 여전히 자녀요 상속자 대접을 받습니다. 이 비유에서 작은아들이 아버지에게 돌아가기로 결심한 직접적 이유는 무엇이었습니까? 굶어 죽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나는 여기에서 굶어 죽는구나.”(루카 15,17)였습니다. “나는 과연 비참한 인간입니다.”(로마 7,24)라는 깨달음과 아버지에 대한 믿음입니다. 아버지를 떠나면 굶어 죽습니다. 비록 작은아들이 아버지께 돌아온 이유는 굶어 죽지 않으려는 것이었지만, 자비로운 아버지는 멀리서 아들을 알아보시고 가엾게 여기시고 달려가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추시는 분입니다(루카 15,20 참조). 죄를 지었다고 고백하는 아들에게 죄를 캐묻기는커녕, “나의 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도로 찾았다.”(루카 15,24) 하시며, 아들을 되찾은 기쁨에 잔치까지 여시는 분입니다.


우리는 작은아들입니다. 그러기에 행복합니다.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로마 8,15)라고 부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진정 여러분이 자녀이기 때문에 하느님께서 당신 아드님의 영을 우리 마음 안에 보내 주셨습니다. 그 영께서 “아빠! 아버지!” 하고 외치고 계십니다”(갈라 4,6). “아빠! 아버지! 아버지께서는 무엇이든 하실 수 있으시니,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가 원하는 것을 하지 마시고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것을 하십시오”(마르 14,36).] 비록 우리가 아버지를 떠나 방황하고 때로는 못된 짓을 저지르더라도, 다시 일어나 아버지께 돌아가기만 하면 죄를 고백하기도 전에 달려와 따뜻하게 껴안아주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을 떠나는 것은 죽는 것이고, 하느님께 돌아오는 것은 다시 살아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떠나 죽어서는 안 됩니다. 죽어도 그리스도와 함께 죽어야 하고, 살아도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야 합니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 육신 안에서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위하여 당신 자신을 바치신 하느님의 아드님에 대한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갈라 2,20). 우리는 이 믿음으로 구원을 받습니다.


복음서에는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는 말씀이 일곱 번 나옵니다(마태 9,22; 마르 5,34; 마르 10,52; 루카 7,50; 루카 8,49; 루카 17,19; 루카 18,42). 이 밖에 믿음과 구원의 연관성을 표현하는 신약성경 구절은 다음과 같습니다.


- 에페 2,8: 여러분은 믿음을 통하여 은총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는 여러분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 1티모 2,15: 믿음과 사랑과 거룩함을 지니고 정숙하게 살아가면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 야고 5,15: 믿음의 기도가 그 아픈 사람을 구원하고, 주님께서는 그를 일으켜 주실 것입니다. 또 그가 죄를 지었으면 용서를 받을 것입니다.

- 1베드 1,9: 여러분의 믿음의 목적인 영혼의 구원을 얻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17절로 돌아갑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누리려면 그분과 함께 고난을 받아야 합니다”(로마 8,17). 그리스도와 함께 받는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계시될 영광에 견주면 아무것도 아닙니다(로마 8,18 참조). 우리가 고난을 받으며 이 세상에서 사는 것도, 피조물이 진통을 겪는 것도, 모두 하느님께서 허락하신 일입니다. 우리는 하느님께 속한 사람들이지만, 아직 악마의 지배 아래 놓여 있는 세상에 살고 있으니, 고난을 받는 것은 필연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하느님께 속한 사람들이고 온 세상은 악마의 지배 아래 놓여 있다는 것을 압니다”(1요한 5,19). “피조물이 허무의 지배 아래 든 것은 자의가 아니라 그렇게 하신 분의 뜻이었습니다”(로마 8,20). 악을 허용하시는 것은 더 큰 선, 더 좋은 것을 이루시려는 하느님의 뜻입니다. “사실 하느님께서 모든 사람을 불순종 안에 가두신 것은, 모든 사람에게 자비를 베푸시려는 것입니다”(로마 11,32).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들, 그분의 계획에 따라 부르심을 받은 이들에게는 모든 것이 함께 작용하여 선을 이룬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로마 8,28).


우리가 이 세상에 사는 동안은, ‘죽음에 빠진 몸’에서 또 ‘죄와 죽음의 법’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없습니다. “성령을 첫 선물로 받은 우리 자신도 하느님의 자녀가 되기를, 우리의 몸이 속량되기를 기다리며 속으로 탄식하고 있습니다”(로마 8,23). “사실 우리는 희망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로마 8,24). 주님께서는 당신께 희망을 두는 이들을 구원하십니다.


- 이사 25,9: 보라, 이분은 우리의 하느님이시다. 우리는 이분께 희망을 걸었고, 이분께서는 우리를 구원해 주셨다. 이분이야말로 우리가 희망을 걸었던 주님이시다.

- 다니 13,60: 그러자 온 회중이 크게 소리를 지르며, 당신께 희망을 두는 이들을 구원하시는 하느님을 찬미하였다.

- 1티모 1,1: 우리의 구원자이신 하느님과 우리의 희망이신 그리스도 예수님


그리스도 예수님은 우리의 희망이며 구원자이십니다. 그러나 그분을 향한 우리의 믿음과 희망이 약해서, 성령께서 우리를 도와주십니다. 악마의 지배 아래 놓여 있는 세상에서 고난받는 나약한 우리를 위하여 성령께서 도와주십니다. 기도할 줄 모르는 우리를 위하여 인간의 언어와는 전혀 다르게 탄식하시며 기도해 주십니다. “우리는 올바른 방식으로 기도할 줄 모르지만, 성령께서 몸소 말로 다 할 수 없이 탄식하시며 우리를 대신하여 간구해 주십니다”(로마 8,26).


29절과 30절에는 하느님께서 당신 ‘아드님과 같은 모상’이 될 사람, 당신 ‘아드님의 형제들’을 미리 정하셨고 부르셨고 의롭게 하셨고 영광스럽게 하셨다는 말씀이 나옵니다. 이 말씀은, 구원받을 사람이 미리 정해져 있다고 이해하기보다는, “많은 형제 가운데 맏이”(로마 8,29)가 되신 그리스도 예수님 덕분에 “상속의 보증”(에페 1,14)을 받았고, 이미 의로워지고 영광스럽게 되었다는 것으로 이해하면 좋겠습니다. “성령께서 우리가 받을 상속의 보증이 되어 주셨다”(에페 1,14).


우리가 간혹 죄와 죽음의 법에 사로잡히는 때가 있을지라도, 우리는 더 이상 “죄의 종”(로마 7,14)이 아닙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 우리를 기다리고 계심을 믿고 바라는 사람은 더 이상 ‘죄의 종’이 될 수 없습니다. 이 믿음과 희망으로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가 받을 상속, 곧 영원한 생명과 구원을 받았습니다.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리스도 안에서 믿게 되었을 때, 약속된 성령의 인장을 받았습니다”(에페 1,13).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로 영원한 생명을 상속받을 수 있는 것은 ‘하느님의 사랑’ 때문입니다.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에게서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로마 8,39) 때문입니다. 이 사랑은 우리 구원을 위하여 필요한 것이라면 무엇이든 베푸는 사랑입니다. 결국, 하느님의 외아드님, 하느님 자신을 내어 주셨습니다.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사랑은 말 그대로 ‘죽기 살기로 하는 사랑’하는 것이었습니다. 인간을 위하여 죽으셨고 인간을 위하여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우리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은 어느 힘보다 강해서 그 무엇도 이 사랑을 막을 수 없습니다. “무엇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갈라놓을 수 있겠습니까? 환난입니까? 역경입니까? 박해입니까? 굶주림입니까? 헐벗음입니까? 위험입니까? 칼입니까?”(로마 8,35) “저희는 온종일 당신 때문에 살해되며 도살될 양처럼 여겨집니다”(로마 8,36; 시편 44,23). “나는 확신합니다. 죽음도, 삶도, 천사도, 권세도, 현재의 것도, 미래의 것도, 권능도, 저 높은 곳도, 저 깊은 곳도, 그 밖의 어떠한 피조물도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에게서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습니다”(로마 8,38-39). 그리하여 “우리는 우리를 사랑해 주신 분의 도움에 힘입어 이 모든 것을 이겨 내고도 남습니다”(로마 8,37). “나에게 힘을 주시는 분 안에서 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필리 4,13). 바오로 사도의 격려 말씀에도 불구하고, 악에 굴복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는 끔찍합니다. 차라리 하느님의 사랑, 성령의 법, 의로움의 길을 모르는 편이 더 나았을지 모릅니다.


* 2베드 2,20-22

20 우리의 주님이시며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앎으로써 이 세상의 더러움에서 벗어난 그 사람들이 그것에 다시 말려들어 굴복을 당하게 되면, 그들의 끝은 처음보다 더 나빠집니다

21 의로움의 길을 알고서도 자기들이 받은 거룩한 계명을 저버린다면, 차라리 그 길을 알지 못하였던 편이 나을 것입니다

22 “개는 자기가 게운 데로 되돌아간다.” 그리고 “돼지는 몸을 씻고 나서 다시 진창에 뒹군다.”는 속담이 그들에게 그대로 들어맞았습니다.


죄짓는 기회를 피하도록 노력합시다. 어떤 성직자는 젊은 여자를 만나면 그 여자 얼굴은 보지 않고 구두 끝만 본다고 합니다. 어떤 분은 어머니 얼굴도 마주치지 않으려고 했다는 전설적인 이야기도 있습니다. 자신이 이성에게 약하여 죄지을 위험이 있다고 여기면, 다소 어색한 상황이 되더라도 감수하는 것이 겸손한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마, 욥 성인도 젊은 여자에게 약했나 봅니다. “나는 내 눈과 계약을 맺었는데 어찌 젊은 여자에게 눈길을 보내리오?”(욥 31,1) 자신이 없으면 피해야 합니다. 자신의 약점을 알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렇다면, 사탄에게 약점 잡힐 기회, 범죄로 이어질 만한 기회를 피하도록 합시다!


우리도 바오로 사도처럼 “나는 어떠한 처지에서도 만족하는 법을 배웠습니다.”(필리 4,11)라고 말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도는 지독한 고생을 했습니다.


* 2코린 11,24-27

24 마흔에서 하나를 뺀 매를 유다인들에게 다섯 차례나 맞았습니다

25 그리고 채찍으로 맞은 것이 세 번, 돌질을 당한 것이 한 번, 파선을 당한 것이 세 번입니다. 밤낮 하루를 꼬박 깊은 바다에서 떠다니기도 하였습니다

26 자주 여행하는 동안에 늘 강물의 위험, 강도의 위험, 동족에게서 오는 위험, 이민족에게서 오는 위험, 고을에서 겪는 위험, 광야에서 겪는 위험, 바다에서 겪는 위험, 거짓 형제들 사이에서 겪는 위험이 뒤따랐습니다

27 수고와 고생, 잦은 밤샘, 굶주림과 목마름, 잦은 결식, 추위와 헐벗음에 시달렸습니다.


바오로 사도처럼 우리도 배부르거나 배고프거나 넉넉하거나 모자라거나, 주님 안에서 기뻐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배고파도 모자라도 주님에 대한 믿음이 흔들리지 않아야 합니다. 무엇을 희생하느냐에 따라 신앙의 무게가 결정됩니다. 어떤 사람이 고민 끝에 검은 돈 2천만 원을 포기하였더니, 자신의 신앙이 2천만 원짜리가 된 것 같아 뿌듯하였답니다. 신앙 때문에 포기한 그것이 신앙의 값어치입니다. 믿음으로 의롭게 되고 구원을 받는다고 하였는데, 그 믿음이 검은 돈 몇 십만 원 때문에 흔들리거나, 젊은 여자 멋진 남자에 흔들린다면, 과연 그 믿음으로 구원을 받을 수 있을까요? 운동할 시간, 쇼핑할 시간, 놀러갈 시간, 잠잘 시간 다 빼고 ‘부스러기 시간’을 예수님께 드리는 사람은 ‘부스러기 신앙’을 가진 사람이라고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여러분의 신앙은 얼마입니까? 과연 그 믿음으로 구원받을 수 있겠습니까? 한 주간 묵상 주제로 삼으시고, 그 뒤로도 자주 묵상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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