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기경님께 드리는 사랑의 편지

사랑의 회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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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환추기경 [cardinal] 쪽지 캡슐

1999-10-31 ㅣ No.696

민주현에게,

보내준 편지에 이렇게 늦게 답을 써서 미안해요. 할아버지는 그동안 너무 바빴어요.

헨리.뉴엔은 나도 좋아하는 저자이지요.그분이 쓴 책을 참 좋아 하는데 너무 일찍 천국으로 가셨습니다.

그런데 그 친구 되시는 분, "하느님의 영광 때문에 봉사가 되었다"는 말씀 때문에 하느님의 사랑도 존제도 의심한 나머지 "하느님이란 도대체 없다"하고 신앙에 종지부를 찍었다는 이야기는 참으로 가슴 아픕니다. 그 말씀 "하느님의 영광...."은 요한 복음 9장에 나오는 태생 소경에 관한 이야기 인가요? 그러면 성경의 표현과는 조금 차이가 있습니다.그러나 그것이 문제가 아니지요.어느 것이든 문제는" 하느님이 사랑이시라면 당신의 영광을 위해 (또는 당신의 놀라운 일을 들어내기 위해) 사람을 소경으로 만들고 그렇게 오랜 세월 고통을 격게하느냐?""그런 하느님이 어떻게 사랑의 하느님이라 할 수 있느냐?" 따라서 "하느님은 없다"는 결론을 내린 것인가요? 무고한 어린이가 고통을 격는 것을 그냥 버려 두는 하느님.. 나의 사랑하는 자식을 교통 사고로 죽도록 버려둔 하느님.. 그런 하느님이 하느님인가?

이런 의문으로 신앙의 위기를 격거나 심지어 그 친구처럼 하느님은 없다고 단정하여 무신론자가 된 사람도 없지 않습니다.이른바 현대의 실존 철학자인 Camus나 Sartre가 대표적인 예 이겠지요. 참으로 몇 마디 말로 설명하기 힘든 중요하고 오래 된 문제 입니다.

그런데 하느님은 결코 당신의 영광을 위해 우리 인간을 고의로 괴롭히거나 고통 속에 버려두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그분은 오히려 우리 인간이 스스로 지은 죄로 자초한 죄와 영원한 죽음에서 구원하기 위해 당신의 가장 사랑하는 와아들을 세상에 보내셨고(요한3,16 참조), 외아들 그리스도는 우리 모두의 죄를 대신지시고 당신 자신을 십자가에 속죄의 제물로 바치셨습니다. 이렇게 까지 우리를 사랑하시는 분이 하느님이 십니다. 그러나 이런 말이 그 친구의 마음을 바꾸게 할 수 있을 지는 의문입니다.

단지 한가지 문제는 그 친구가 제기한 하느님의 존재에 대한 문제는 성경 안에도 있고. 믿지 않은 사람들은 그 옛날 부터 "하느님은 없다. 하느님은 없다" 이렇게 수 없이 주장 했으나 여전히 하느님은 계시다는 것 입니다. 그들이 내거는 주장만으로는 하느님은 없다는 증거가 될 수 없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하느님이 없으면 "고통이 왜 있는지. 사람은 어디서 오고 어디로 가는지? 왜 죽는지?" 문제 해결이 됩니까? 인생은 더욱 알아 들을 수 없는 수수께끼로 남고. 오히로 하느님을 지워도 여전히 있는 고통과 죽음의 문제는 우리를 더 큰 고뇌에 빠트릴 것입니다. 하느님이 있으면 원망이라도 하고 욕이라도 퍼 부울 수 있을 터인데.????

가톨릭 신자인 소설가 박완서 씨는 사랑하는 남편을 사별하고 일년도 안되어 외아들마저 잃게 되자, 26세 밖에 안되고 의사로서 미래가 창창한 아들이 었는데 그런 아들이 죽자 십자가를 방바닥에 내팽개치기 까지 하였답니다. 그녀는 아들까지 데리고 간 하느님을 도저히 받아드릴 수 없어 수 많은 날을 하느님을 원망하고 증오하였답니다. 그때 그 분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온 종일 신을 죽이고 또 죽였다. 일백번 고쳐 죽여도 죽일 여지가 남아 있는 신, 증오의 마지막 극치인 살의, 내 살의 (죽이고 싶은 마음)를 위해서도 신은 있어야만 해"  

그러나 시간이 약이라듯 상처가 어느 정도 아물게 된 훗날 그 분은 다음과 같은 고백을 하였읍니다.

  "만일 그때 나에게 포악을 부리고 질문을 던질 수 있는 그분 조차 안 계셨드라면 나는 어떻게 되었을까 가끔 생각해 봅니다. 살긴 살았겠지요. 사람 목숨이란 참으로 질기고 모진 것이니까요.그러나 지금보다 훨씬 더 불쌍하게 살았으리라는 것만은 눈에 환히 보이는듯 합니다"

시몬느 베이유라는 이는 이렇게 말 했읍니다.

   "그리스도교가 월등하게 위대한 것은 고통을 없이하는 약을 주기 때문이 아니라 고통을 올 바르게 볼 수 있게 해주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친히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수난하시고 죽으심으로써 많은 고통을 겪으셨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그분은 그 죽음의 고통의 시간에 인간들로 부터 뿐 아니라 아버지 하느님으로 부터도 버림 받은 고독의 극치에 계셨습니다.

그분은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대로 "몸소 우리의 허악함을 맡아주시고 우리의 병고를 짊어지셨읍니다"(마태오 8,17참조)

 

참고로 송봉모 신부님의 <고통 그 인간적인것> 바오로 딸 출판  ...이 책을 읽으시기를 권합니다. 너무 길어 졌군. 이만하자.  그 친구 신앙을 다시 찾게 되기를 간절히 빌어요. 안녕히!

 

                                        혜화동 할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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