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장동성당 게시판

로마서 7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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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희성 [lhopeter] 쪽지 캡슐

2010-11-25 ㅣ No.2124

 

 

로마서 7장은 율법에서의 해방에 관한 말씀입니다. 여기에서의 율법은 모세의 율법, 구약성경의 율법으로 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로마 신자들도 그리스도교 교리를 배울 때에 이 율법을 들었을 것이기에, 바오로 사도는 1절에서 “여러분이 율법을 아는 사람들”이라고 말했을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글로 쓰인 모세 율법에 대해서는 그리 호의적인 태도를 보이지 않습니다. 6절에 따르면, 마치 율법은 상종해서는 안 되는, 반드시 벗어나야 하는 것으로 생각하게 합니다. “우리가 이제는, 우리를 사로잡고 있던 율법과 관련해서는 죽음으로써 그것에서 벗어났습니다. 그리하여 법전이라는 옛 방식이 아니라 성령이라는 새 방식으로 하느님을 섬기게 되었습니다”(로마 7,6) “율법의 저주”(갈라 3,13)라는 표현까지 하였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스스로 저주받은 몸이 되시어, 우리를 율법의 저주에서 속량해 주셨습니다”(갈라 3,13). 이방인들에게 유다인의 율법을 강요해서는 안 된다는 입장에 서 있던 바오로 사도에게는 당연한 선택이었다고 봅니다.


로마서 7장 2-3절에서, 바오로 사도는 ‘혼인한 여자’의 예를 들어 ‘율법’의 효력을 설명합니다. 혼인한 여자는 남편이 살아 있는 동안에만 율법으로 남편에게 매여 있다는 것입니다. 남편이 죽으면 여자는 남편과 관련된 율법에서 풀려납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율법’은 첫 남편과 비슷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세례를 받아 그리스도를 새 남편으로 맞이하고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됨으로써 ‘율법’이라는 첫 남편에게서 벗어나게 됩니다. “나의 형제 여러분, 여러분도 이와 같이 그리스도의 몸 덕분에 율법과 관련해서는 죽음으로써, 다른 분 곧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신 분의 차지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느님을 위한 열매를 맺게 되었습니다”(로마 7,4). 다만, ‘혼인한 여자’의 비유와 다른 점은 그 여자의 남편은 죽지만, 율법은 그대로 남아 있으면서 영향력을 행사한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율법과 관련해서 죽는 것’은 그리스도인 자신입니다. 율법과 관련해서 죽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율법에서 풀려난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율법에서 풀려나게 된 것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덕분입니다.


율법 앞에서 인간은 모두 죄인입니다. 누가 율법을 완전하게 지킬 수 있겠습니까? 이웃의 아내, 이웃의 재산에 욕심조차 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율법입니다. 율법은 거룩하고 영적인데, 인간에게는 거룩함과 속됨, 영과 육이 섞여 있습니다. “그러니 하느님 앞에서는 아무도 율법으로 의롭게 되지 못한다는 것이 분명합니다”(갈라 3,11). 이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구해 주신 분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스스로 저주받은 몸이 되시어, 우리를 율법의 저주에서 속량해 주셨습니다”(갈라 3,13). 우리가 받아야 할 저주를 예수님께서 대신 받으셨습니다. 죄 없으신 분이 죄인들의 죄를 짊어지고 죄 값을 치르셨습니다. 율법을 완전하게 지키신 분이 율법의 저주, 율법에 따른 최고형인 사형을 당하심으로써, 우리는 율법의 저주에서 해방되었습니다. ‘혼인한 여자’의 비유로 설명하자면, 새 남편 그리스도는 ‘율법’의 모든 것을 충족시켰기에, 곧 율법을 완전하게 지켰으면서도 율법이 정한 최고형을 받았기에, 아내에게 자유를 선사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피, 곧 생명을 바쳐 우리가 벌을 받지 않도록 하셨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를 통하여 속량을, 곧 죄의 용서를 받았습니다”(에페 1,7).


의로운 이의 죽음, 무죄한 이의 희생은 무한한 가치를 지닙니다. 우리 삶에서도 이와 비슷한 상황이 올 수 있습니다. 자기 자신의 탓 없이 고통을 당하는 일이 있습니다. 이때가 공덕을 쌓을 절호의 기회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죽었다가 다시 부활할 수 있는 기회입니다. 예수님을 본받아 악을 선으로 갚고, 나에게 고통을 주는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며, 결코 사랑의 마음을 잃지 않도록 힘씁시다.


그런데, 과연 우리가 세례를 받은 뒤에 율법에서 자유로워졌습니까? 율법을 실천하지 않는 데서 오는 죄책감에서 자유로워졌습니까? 우리는 여전히 율법을 온전히 지키지 못하고 죄책감도 여전히 지니고 있습니다. 이 세상 삶이 끝날 때까지는 우리는 죄와 싸워야 합니다. 율법은 여전히 위력을 발휘하고 있습니다. 옛 남편은 죽지 않았습니다. 율법은 죄를 진단하는 청진기와 같습니다. 자신의 죄를 진단하지 못한다면, 죄의 용서를 청하거나 죄에서 벗어나는 것도 어려울 것입니다. 율법으로부터의 자유란 율법을 완전하게 지킨다는 것보다는 죄인을 사랑하시는 하느님의 자비를 믿고 그 자비에 의탁함으로써 하느님께서 주시는 평화를 누리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자비 덕분에, 우리는 이 세상에 사는 동안, 죄에서 온전히 벗어나지 못하면서도 가끔 기쁨과 평화를 누리곤 합니다. 우리가 좌절하지 않도록, 희망을 잃지 않도록, 더 열심히 노력하도록 격려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죄의 역설입니다. 죄는 우리로 하여금 하느님께 등을 돌려 하느님의 은총에서 멀어지게 하지만, 동시에 하느님의 은총을 빨아들이는 스펀지 같은 것입니다. “죄가 많아진 그곳에 은총이 충만히 내렸습니다”(로마 5,20). 바오로 사도가 주님의 은총으로 회심한 뒤에 걸어온 길이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가 할 일은, 우리를 지극히 사랑하시는 주님께 지극한 감사를 드리면서 세례 때에 이룬 그리스도와의 결합을 굳게 유지하고 “하느님을 위한 열매”(로마 7,4)를 맺는 것입니다. 예수님에게서 떨어져 나가면 그분의 부활에도 참여할 수 없습니다. 또한 그분께 붙어 있더라도 열매를 맺지 않으면 아버지께서 다 쳐내십니다. “나에게 붙어 있으면서 열매를 맺지 않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다 쳐내시고, 열매를 맺는 가지는 모두 깨끗이 손질하시어 더 많은 열매를 맺게 하신다”(요한 15,2). 정성스럽게 영성체를 하고, 그리스도와 하나 되는 성체성사의 은총을 충만히 받읍시다. 인간의 죽음은 하느님께서 내리신 벌이 아니라 인간이 지은 죄의 결과입니다. 생명의 근원이신 하느님께 등을 돌리고 떨어져 나왔으니 생명을 잃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하느님께 붙어 있는 방법으로, 하느님과 일치하여 있을 수 있는 방법으로 하느님께서 처음에 제시하신 방법은 ‘계명’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담에게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에서는 따 먹으면 안 된다. 그 열매를 따 먹는 날, 너는 반드시 죽을 것이다.”(창세 2,17)라고 금식 명령을 내리셨습니다. 하느님께서 첫 인간에게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에서는 따 먹으면 안 된다.”(창세 2,17)고 명령하신 이유는 인간이 죽지 않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그 열매를 따 먹는 날, 너는 반드시 죽을 것이다”(창세 2,17). 그러므로 율법이 주어진 것에 대해서 불평할 것은 없습니다. 율법이 문제가 아니라, 율법을 지키지 않는 것이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율법의 역할은 또한 죄를 알게 하는 것입니다. “율법을 통해서는 죄를 알게 될 따름입니다”(로마 3,20). 율법은 죄가 하느님을 거스르는 것임을 드러냅니다. “율법이 없었다면 나는 죄를 몰랐을 것입니다”(로마 7,7). 바오로 사도는 율법이 하느님에게서 온 거룩한 것, “영적인 것”(로마 7,14)임을 인정합니다. “계명도 거룩하고 의롭고 선한 것”(로마 7,12)이라고 합니다.


그 열매를 따 먹는 날, 너는 반드시 죽을 것이다.”(창세 2,17)라는 하느님 말씀은 이루어졌을까요? 겉으로 드러난 성경 말씀만 보아서는 당장 죽음의 벌을 받지는 않습니다. 뱀과 여자와 사람에게 각각 벌을 내리시고 에덴동산에서 내치시지만 당장 죽이지는 않으십니다. 그렇다면 하느님께서 거짓말을 하신 것일까요? “하느님께서는 각자에게 그 행실대로 갚으실 것입니다.”(로마 2,6)라는 말씀도 있지 않습니까?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죽음’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죽음’은 단지 육신의 숨이 끊어지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죽음’은 하느님과 함께 친근하게 이야기하던 관계의 단절을 의미합니다. 하느님은 ‘생명’이시오, ‘생명을 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에덴동산에서 추방당하는 것은 곧 ‘죽음’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또한 알고 있습니다. 생명이신 하느님의 죽음으로 우리는 죽음을 면하고 새 생명을 얻게 되었다는 것을 말입니다. 우리는 빵과 포도주를 봉헌하고 주님의 살과 피를 받아 모십니다. 사람이 하느님의 생명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셨습니다. ‘신성과 인성의 교환’, 이것을 ‘거룩한 교환’(sacrosanctum commercium)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미사 때 사제의 예물 기도와 영성체 후 기도에서 ‘놀라운 교환’, ‘거룩한 교환’이라는 말씀을 종종 듣습니다. “주님, 오늘 인간의 본성이 그리스도 안에서 주님과 결합되었으니, 이 축제의 제물을 기꺼이 받아들이시어, 저희가 이 거룩한 교환의 신비로 그리스도의 모습을 닮게 하소서”(성탄 밤 미사 예물 기도). “주님, 저희가 바치는 이 예물을 받으시고 놀라운 교환을 이루시어, 주님께 받은 것을 바치는 저희가 주님을 합당히 모시게 하소서”(성탄 시기 목요일 예물 기도). “주님, 저희가 거룩한 교환의 제사에서 구원의 성체를 받아 모시고 비오니, 현세의 삶을 잘 살도록 도와주시고, 마침내는 영원한 행복을 얻게 하소서”(부활 제6주간 화요일 등의 영성체 후 기도).


로마서 7장 7절의 탐내서는 안 된다.는 계명은 탈출 20,17(“이웃의 집을 탐내서는 안 된다. 이웃의 아내나 남종이나 여종, 소나 나귀 할 것 없이 이웃의 소유는 무엇이든 탐내서는 안 된다.”), 신명 5,21(“이웃의 아내를 탐내서는 안 된다. 이웃의 집이나 밭, 남종이나 여종, 소나 나귀 할 것 없이 이웃의 재산은 무엇이든지 욕심내서는 안 된다.”)과 연관됩니다. 하느님께서 이 같은 십계명을 내려 주신 이유도 우리가 주님의 은총 안에서 잘 살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너는 주 너의 하느님이 너에게 주는 땅에서 오래 살고 잘될 것이다”(신명 5,16). 반대로 계명을 지키지 않는 자들에게는, “나를 미워하는 자들에게는 조상들의 죄악을 삼 대 사 대 자손들에게까지 갚는다.”(탈출 20,5)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이들에게는 천대에 이르기까지 자애를 베푼다”(탈출 20,6). [“이 율법의 말씀들을 존중하여 실천하지 않는 자는 저주를 받는다”(신명 27,26). “주님은, 주님은 자비하고 너그러운 하느님이다. 분노에 더디고 자애와 진실이 충만하며 천대에 이르기까지 자애를 베풀고 죄악과 악행과 잘못을 용서한다. 그러나 벌하지 않은 채 내버려 두지 않고 조상들의 죄악을 아들 손자들을 거쳐 삼 대 사 대까지 벌한다”(탈출 34,6-7).] 이제 계명을 지키지 않는 사람들의 마음에는 죄책감이 생깁니다. 자신뿐 아니라 자신의 삼 대 사 대 후손까지 저주와 벌을 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나만 혼자 착실하게 산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이, 특히 나와 가까운 사람이 죄를 저지르면 나에게도 피해가 옵니다. 인류는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인류가 한 백성이 되어 사랑의 공동체, 형제자매 공동체로서 당신을 찬미하기를 바라십니다.


에덴동산의 금식 명령은 낙원에서 하느님과 더불어 생명을 누리는 데 필요한 것이었지만, 이미 낙원에서 추방된 인류에게도 유익한 계명입니다.


베네딕토 16세 교황님은 2009년 사순 시기 담화문에서 “단식이 중요한 수덕 실천, 곧 우리 자신의 무질서한 온갖 집착에 맞서 싸우는 영적 무기”라고 강조하며, 이렇게 설명합니다. “음식이나 다른 물질이 주는 즐거움을 스스로 멀리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원죄로 나약해진 한 인간 전체에 부정적 영향을 미치는 본성의 욕망을 다스리는 데 도움이 됩니다.” 교황님의 사순 시기 담화문을 더 살펴보겠습니다.


[성경과 모든 그리스도교 전통은 단식이 죄로 이끄는 모든 것과 죄를 멀리하는 데 커다란 도움이 된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구원의 역사는 단식에 대한 권유로 넘쳐납니다. 바로 성경의 첫 머리에서 주님께서는 사람에게 금지된 과일을 먹지 말라고 명령하십니다. 그리고 주 하느님께서는 사람에게 이렇게 명령하셨다. ‘너는 동산에 있는 모든 나무에서 열매를 따 먹어도 된다. 그러나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에서는 따 먹으면 안 된다. 그 열매를 따 먹는 날, 너는 반드시 죽을 것이다’”(창세 2,16-17). 이러한 하느님의 명령을 해설하면서 바실리오 성인은 “낙원에서 단식이 제정”되었으며 “이러한 의미에서 첫 계명이 아담에게 전해졌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래서 바실리오 성인은 “‘먹지 마라’는 말씀은 단식과 금육의 법이다.”(‘단식에 관한 설교’, 『그리스 교부 총서』[PG], 31, 163, 98)라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우리 모두가 죄와 그 결과에 짓눌려있기에 하느님과 친교를 회복하기 위한 수단으로 우리에게 단식이 권유된 것입니다. ...... 니네베 사람들은 요나의 회개 촉구에 따라 자기네 진심의 표지로 단식을 선포하며,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 다시 마음을 돌리시고 그 타오르는 진노를 거두실지 누가 아느냐? 그러면 우리가 멸망하지 않을 수도 있다”(요나 3,9). 하느님께서는 여기에서도 그들의 행위를 보시고 그들을 살려주셨습니다. ...... 신약에서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의 태도를 나무라시면서 단식의 깊은 뜻을 밝혀 주셨습니다. 바리사이들은 율법의 규정을 엄격히 준수하면서도 마음은 하느님을 멀리하고 있었습니다. 거룩하신 스승님께서 다른 곳에서도 되풀이 말씀하신 것처럼 참다운 단식은 “숨은 일도 보시고 …… 갚아 주시는”(마태 6,18)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는 것입니다(마태 4,4). 그래서 참다운 단식은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는 ‘참된 양식’을 먹는 것입니다(요한 4,34 참조). 비록 아담이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에서는 따 먹으면 안 된다.”고 하신 주님의 명령을 어겼지만, 신자들은 단식을 통하여 하느님의 자애와 자비를 믿으며 하느님께 자신을 낮추어야 합니다.]


우리는 첫 인간의 범죄 장면에서 주님의 계명을 뱀이 간교하게 악용하는 것을 봅니다. 뱀의 유혹에 빠지지 않는 방법은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거듭 되새기고 굳게 믿고 충직하게 실천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거듭 되새긴다는 것은 성경 말씀을 자주 읽고 묵상하는 것이며, 기도 중에 주님과 친밀한 대화를 나누는 것입니다. 이로써 주님께서 선물로 주시는 믿음을 더욱 굳게 하고, 이 믿음을 삶 안에서 실천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듣지도 읽지도 않고, 주님과 대화 나누는 일을 게을리 한다면, 뱀의 간교한 유혹을 이겨낼 수 없을 것입니다.


* 창세 3,1-6

1 뱀은 주 하느님께서 만드신 모든 들짐승 가운데에서 가장 간교하였다. 그 뱀이 여자에게 물었다. “하느님께서 ‘너희는 동산의 어떤 나무에서든지 열매를 따 먹어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셨다는데 정말이냐?” 

2 여자가 뱀에게 대답하였다. “우리는 동산에 있는 나무 열매를 먹어도 된다. 

3 그러나 동산 한가운데에 있는 나무 열매만은, ‘너희가 죽지 않으려거든 먹지도 만지지도 마라.’ 하고 하느님께서 말씀하셨다.” 

4 그러자 뱀이 여자에게 말하였다. “너희는 결코 죽지 않는다. 

5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 너희 눈이 열려 하느님처럼 되어서 선과 악을 알게 될 줄을 하느님께서 아시고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다.” 

6 여자가 쳐다보니 그 나무 열매는 먹음직하고 소담스러워 보였다. 그뿐만 아니라 그것은 슬기롭게 해 줄 것처럼 탐스러웠다. 그래서 여자가 열매 하나를 따서 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자, 그도 그것을 먹었다. 


로마서 7장 14-23절은 그리스도의 은총을 받지 못한 사람의 비참한 처지를 묘사합니다. 그것을 요약한 것이 25절의 뒷부분입니다. “나 자신이 이성으로는 하느님의 법을 섬기지만, 육으로는 죄의 법을 섬깁니다.” 인간은 참으로 나약합니다. ‘죄종’(罪宗)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다른 죄들과 악습들을 낳는 악습’을 가리키는데, 보통 일곱 가지가 있다고 합니다. 일곱 죄종, 곧 칠죄종은 교만, 인색, 질투, 분노, 음욕, 탐욕, 나태입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 가운데 한두 가지 이상은 가지고 있지 않나 생각하며 더욱 겸손한 마음으로 죄종들에 대항해야 하겠습니다. “악습들은 그와 반대되는 덕에 따라 분류할 수 있고, 또 죄종(罪宗)과 연관시킬 수 있다. 죄종(peccata capitalia)은 요한 카시아누스 성인과 대 그레고리오 성인의 뒤를 이어 그리스도인들의 경험으로 식별되었다. 이 악습들을 죄종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그것들이 다른 죄들과 악습들을 낳기 때문이다. 죄종은 교만, 인색, 질투, 분노, 음욕, 탐욕, 나태이다.”(「가톨릭 교회 교리서」, 1866항).


로마서 7장과 8장에는 여러 가지 법 또는 법칙이 나옵니다. 우선, (모세) 율법이 있고, “하느님의 법”(로마 7,21.25), “내 이성의 법”(로마 7,23), “죄의 법”(로마 7,23.25), “성령의 법”(로마 8,2)이 나옵니다. ‘하느님의 법’은 내적 인간 또는 이성이 섬기는 법입니다. 내적 인간은 인간의 이성적인 부분을 가리키는데, 아직은 성령으로 거듭나지 못한 옛 인간의 한 단면입니다. ‘내 이성의 법’은 모든 사람에게 있는 양심의 법입니다. 이 법으로는 인간의 비참한 상태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죄의 법’도 내 안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로마 7,17). 이 법 때문에 “선을 바라면서도 하지 못하고, 악을 바라지 않으면서도 그것을 하고 맙니다”(로마 7,19). ‘죄의 법’이 ‘하느님의 법’, ‘내 이성의 법’과 대결합니다. 이 대결의 소용돌이에서 허우적거리는 것이 인간 모습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죄의 법에 사로잡혀 있는 인간의 비참한 상황을 고백하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러한 처지에서 구해 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나는 과연 비참한 인간입니다. 누가 이 죽음에 빠진 몸에서 나를 구해 줄 수 있습니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를 구해 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로마 7,24-25).


나는 과연 비참한 인간입니다.”라는 탄식은 참으로 복된 고백이며, 하느님의 은혜로운 선물입니다. ‘하느님의 법’과 ‘죄의 법’ 사이에서 방황하고 범죄하는 자신을 직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비참한 사람인 줄도 모르는 사람은 얼마나 더 비참한 사람입니까? 만일 자신의 비참함을 전혀 인식하지 못하는 신앙인이 있다면 그 사람의 신앙은 심각한 위험에 빠져 있는 것입니다. 물론 자신의 비참함을 탄식만 하고 있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25절 말씀처럼, 비참한 처지에 있는 자신을 구해 주신 사랑의 주님을 믿어 고백하고 감사하며, 많은 열매를 맺음으로써 보답하여야 하겠습니다.


하느님의 영으로 새로 난 그리스도인이 기꺼이 따르는 ‘성령의 법’에 관해서는 로마서 8장에서 공부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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