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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외아들을 믿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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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2-10-18 ㅣ No.6

[교리 해설] 그 외아들을 믿나이다 (1)
 
하성호 요한(주교회의 사무차장 · 본지 주간 · 신부)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예수님이 명동성당에 나타나셔서 이렇게 묻는다면 뭐라고 대답하겠는가? “당신은 나의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고백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오히려 정신나간 사람 취급이나 하지 않을지! 나는 과연 어떤 대답을 할까?
 
 
예수는 ‘하느님의 외아들’
 
사도 신경의 두 번째 조항은 예수를 하느님의 아들로 고백한다.
 
참으로 알아듣기 힘든 내용이다. 그 어려움이야 어디 오늘만의 얘기이겠는가! 이미 초세기 때부터 그 내용을 이해하고 해석해 보려고 무진장 애썼다. 그러다 보니 대부분의 그리스도교 이단들이 이 문제에 걸렸다. 하느님께서는 유일하신 분이신데, 예수님이 하느님이시라면 하느님이 두 분이라는 모순에 빠지든지, 유일 신관(唯一神觀)을 포기하든지 해야 하는 문제에 봉착하게 되었고, 결국 예수님의 신성(神性)을 거부하는 이단들이 많았다. 그런가 하면 반대로 영지주의에 물든 이단자들 가운데는 예수님의 신성은 인정하나 하느님께서 악한 물질 세계에 속한 우리와 같은 육체를 취할 수는 없다고 하면서 예수님의 인성(人性)을 부인하였다.
 
예수님은 ‘참 하느님이신 동시에 참 인간’이라는 신앙 고백은 오늘날의 우리에게도 뛰어넘기 힘든 커다란 걸림돌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그리스도교의 존폐는 바로 이 신앙 고백을 받아들이느냐 거부하느냐에 달려 있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독일 신학자 발터 카스퍼 주교는 “하느님의 아들로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고백은 전그리스도교적 신앙의 본질적인 것과 특수한 것을 표현하는 하나의 약식 고백(略式告白)이다. 하느님의 아들로서 예수께 대한 고백에 그리스도교적 신앙의 사활과 존폐가 달려 있다.”(“예수 그리스도”, 박상래 역, 분도 출판사, 1977, 288쪽)고 말한다.
 
신약에서 예수 그리스도만이 ‘하느님의 아들’로 고백되고, 그 칭호도 예수 그리스도께만 적용된다. 그런데도 예수님 자신은 메시아와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칭호를 명백하게 사용하지 않으셨다. 이러한 사실이 우리를 더욱 곤혹스럽게 만드는 것도 사실이다. 그렇다면 예수께서 이 지상에 계셨을 때 자신의 전생애를 사로잡았던 자아 의식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하느님의 아들’에 대한 신앙 고백의 신학적 의미는 무엇인가?
 
 
구약에서의 ‘하느님의 아들’
 
사실 고대 신화에서는 대개 제신들을 이야기할 때 출산 관계를 이야기하였고, 또 그런 사회에선 자주 통치자들을 신의 아들로 얘기한다. 예를 들어 에집트에선 지배자들을 태양신의 아들로 보면서, 지배자의 권위를 절대화 · 신격화시키려 했다. 로마 제국에서도 황제를 ‘신의 아들’이란 칭호로 불렀다. 구약에서도 이 ‘하느님의 아들’이란 명칭이 여러 번 다양하게 사용되었다. 이스라엘 백성(출애 4,22-23; 호세 11,1), 이스라엘의 직분자들과 왕(1사무 7,14; 시편 2,7), 혹은 후기 유다교에선 경건하고 의로운 이들(시편 73,15; 잠언 14,26; 집회 4,10)을 ‘하느님의 아들’이라 불렀다. 그러나 구약에서 그렇게 불렀다 해서 당시 고대 사회에 널리 통용되었던 신화적 사고나 정치적 종교적 영향을 받았다는 것은 아니다.
 
구약에서 ‘하느님의 아들’이란 명칭을 다양하게 사용하였다 해도 언제나이는 엄격한 유일신 사상에 바탕을 둔 신정(神政) 사상에 근거한다. 야훼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뜻을 이 세상에 전하고 당신이 뜻하신 사명을 수행할 이들을 선택하셨는데 바로 이들을 ‘하느님의 아들’이라 불렀고, 이들을 통하여 인간의 역사에 깊숙이 개입하셨다. 즉 구약에서 ‘하느님의 아들’이 담고 있는 의미는 어떤 위대한 인물을 신격화시키기 위한 것이 하느님의 아니라, 구원 개입과 하느님과 선택된 이가 가지는 관계를 설명하는 맥락에서 찾아볼 수 있다.
 
 
‘하느님의 아들’(아버지와 아들)
 
선약에서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들’로 고백하는 내용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위에서 간략하게 설명한 구약의 역사에 대한 이해를 염두에 두어야 한다. 다시 말해 하느님과 그분의 구원 개입에서 우선 ‘하느님의 아들’이란 칭호를 이해해야 한다. 그러나 신약에서는 제자들이 예수님만을 ‘하느님의 아들’로 인식하게 되는데, 그 근거는 바로 파스카 사건이다. 제자들이 고백하는 신앙은, 예수님은 하느님의 외아드님이시며 이 세상에 오신 하느님이시라는 것이다. 또한 이는 신약의 신앙 고백의 중심축이다. 이때 신약의 의미는 구약에서와 완전히 다른 의미로 인식하게 된다.
 
이러한 맥락에서 예수님은 자신의 메시지를 통하여 해방자이신 하느님을 선포하시고 하느님의 구원 개입을 보증하시면서 그분을 자신의 아버지 · 압바라 주장하셨다. ‘하느님의 아들’이란 칭호가 드러내는 신앙 고백의 내용은 아버지 하느님과 예수 그리스도께서 갖는 유일한 관계를 드러내는 것이다. 이것은 아버지와 아들이 본질적인 일치를 이룬다는 것을 표현한다. 마태오 복음의 ‘감사의 기도’에서는 바로 이 점이 강조된다. “나의 아버지께서는 내게 모든 것을 넘겨주셨습니다. 그래서 아버지가 아니면 누구도 아들을 알아보지 못합니다”(11,27).
 
아버지와 아들이 서로 안다는 것은 결국 같은 본성을 지닌다는 표현으로서, 예수님의 신성을 긍정하는 중요한 대목이다. 또한 아버지와 아들이 갖는 본질적인 일치에 관한 주제는 요한 복음의 중심을 이루고 있다. “나를 본 사람은 이미 아버지를 보았습니다.”(14,9)는 구절이나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는 것을 당신은 믿지 않습니까?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는 내 (말)을 믿으시오.”(14,10-11) 등의 구절들이 그 대표적이다.
 
아버지와 아들이 갖는 본질적인 일치는 예수 그리스도의 전생애를 통해 드러난다. 이는 예수께서 바로 하느님의 결정적인 구원 개입 그 자체임을 말하는 것이고. 예수 자신은 이를 확신하였다. 세례 장면이나 베드로의 고백(마태 16,13 이하), 그리고 거룩한 변모의 장면에서 공적으로 예수는 ‘하느님의 아들’로 선포될 뿐만 아니라, 이는 복음서가 전반에 걸쳐 제공하는 예수님의 자아 의식이기도 하다. 예수께서 가지신 ‘하느님의 아들’이란 자아 의식은 그분 안에서 하나의 중심축을 이루고 있다.
 
 
‘하느님의 아들’(구원 역사)
 
또한 구원 역사의 측면에서 생각해 볼 때, ‘하느님의 아들’이란 칭호가 담고 있는 신학적인 내용은, 하느님께서 우리 인간 역사 속으로 들어오시는 하느님의 Exodus(여기서 말하는 엑소더스는 ‘~을 향하여 떠나감’을 뜻한다.)이다. “그분은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하느님과 같음을 노획물인 양 중히 여기지 않으시고, 도리어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셨으니 사람들과 비슷하게 되시어 여느 사람 모양으로 드러나셨도다. 자신을 낮추시어, 죽음, 곧 십자가의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셨도다”(필립 2,6-8). 당신을 비우시고,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당신을 낮추시는 그리스도의 자기 비하는 인간을 향한 하느님의 엑소더스이며, 동시에 ‘하느님의 아들’을 이해하는 바탕이 된다. 사랑하는 벗을 위해 이 세상에 오신 ‘하느님의 아들’은, 사랑 때문에 당신을 철저히 비우시고 ‘내려오시는’ 하느님의 엑소더스이기 때문이다.
 
“하느님께서는 이 세상을 이토록 사랑하시어 외아들을 주시기까지”(요한 3,16) 하셨던 인간을 향한 하느님의 엑소더스에 철저히 응답하시기 위해, 예수께서는 당신이 몸소 이룩하신 파스카의 사건을 통하여 하느님을 향한 또 하나의 엑소더스를 이룩하셨다. 사실 예수의 영광스런 변모의 장면에서 루가 복음 사가는 예수님의 죽음을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님과 함께 예수님의 엑소더스에 관해 이야기한다고 말한다(루가 9,31 참조).
 
나자렛 예수의 역사, 특히 그의 죽음과 부활 사건 안에서 이루어진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엑소더스와 하느님을 향한 인간의 엑소더스는 바로 ‘그리스도의 신성’에 대한 사도 신경이 고백하는 신앙의 바탕이 된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의 신성’에 대한 이해는 사변적인 개념에 바탕을 두고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구원과 해방의 차원에서 신앙으로 받아들이는 고백의 내용이다. 만일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오신 하느님이 아니시고 하느님과 유사한 분이실 뿐이라면, 예수의 역사는 결코 인간을 향한 하느님의 엑소더스가 될 수 없으며, 인간을 향한 하느님의 진정한 엑소더스가 없었다면 하느님을 향한 인간의 진정한 엑소더스도 있을 수 없다. 그리스도께서는 바로 자신의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이 두 방향의 엑소더스를 확인시켜 주셨으며 자신의 신성을 탁월하게 입증하셨다.
 
‘하느님의 아들’에 대한 이해는 구원 역사를 해석해 주는 시금석이 됨과 동시에 우리의 구원 운명과 직결되어 있다. 왜냐하면 그 칭호를 전용하신 그분은 바로 인간을 극진히 사랑하시고 염려하시며, 인간을 온전히 받아들이시고 인간과 새로운 관계를 맺으시기 위하여 하느님의 유일하신 아들로서 우리에게 오신 하느님이시기 때문이다. 공관 복음서는 그분이 아버지로부터 파견되어 오신 사명을 이렇게 전한다.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사람들을 위하여 목숨을 바쳐 몸값을 치르러 온 것이다”(마르 10,45).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당신 자신이 속죄의 희생 제물이 되심으로써 당신께서 누리시던 ‘하느님의 아들’의 지위에 모든 이를 초대하신다. 그럼으로써 우리 인간들은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으로 새로이 창조된 삶을 살게 된다. 그래서 사도 바오로는 “우리에게 당신의 자녀가 되는 자격을”(갈라 4,5) 주시기 위해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아들을 파견하셨다고 말한다. 또한 이러한 의미에서 니케아 신경은 “우리를 위하여 또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내려오시어”라는 표현을 쓴다. 이제 하느님의 자녀가 된 우리들이 해야 하는 것은,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우리 인간을 위해 내려오셨듯이, 우리도 하느님께로 올라가야 하는 것이다. [경향잡지, 1994년 2월호]


[교리 해설] 그 외아들을 믿나이다 (2)
 
 
그리스도인들은 “선생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십니다”(마태 16,16)는 시몬 베드로의 고백을 오늘날에도 여전히 자신들의 신앙으로 고백한다. 무슨 이유에서일까? “하느님은 이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보내 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여 주셨다.”(요한 3,16)는 말씀에 매력을 느끼기 때문일 것이다.
 
 
‘하느님의 아들’에 대한 이해는 파스카의 신앙 고백
 
초대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주님(Kyrios)이란 영예로운 칭호를 예수님께 부여하였다. “모두 입을 모아 예수 그리스도는 주님이시라고 고백하여 하느님 아버지께 영광을 드리게 하셨도다”(필립 2,11).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는 신앙은 예수 그리스도의 파스카 사건에 대한 제자들의 체험에 뿌리를 둔다. 부활을 체험한 제자들의 확산은 하느님께서 예수님의 이 지상 역사를 통하여 결정적이고 완전한 모습으로 당신 자신을 인간들에게 드러내 보이시고 인간들과 친교를 맺으신다는 것이다. 그들은 이러한 신앙 체험에서 단호하게 예수님의 신성을 확언했다. “그리스도의 인성 안에는 하느님의 완전한 신성이 깃들어 있습니다”(골로 2,9).
 
파스카 사건은 단지 예수님의 생애와 죽음에 관한 의미만을 밝히는 데 의의가 있는 것이 아니다. 무엇보다도 하느님 아버지의 개입을 통한 부활은 예수님 운명의 완성을 의미하고, 그분이 “권능을 지닌 하느님 아들”(로마 1,4)로 확인되신 것을 의미한다.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들’로 고백하는 제자들의 신앙은 부활 현양에 밀접하게 결부되어 있다. “너는 내 아들, 나 오늘 너를 낳았노라.”(시편 2,7) “내 오른편에 앉아 있어라.”(시편 110,1) 등의 메시아에 관한 말씀이 부활 현양으로 성취되었다고 보았다. 그러므로 제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현양을 체험함으로써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들이신 주님으로 선포하였다.
 
동시에 부활 현양 체험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원을 재해석하는 실마리가 된다. 다시 말해 예수 그리스도는 부활로 하느님의 아들이 되신 분이 아니라 처음부터 하느님의 아들이셨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아들을 죄 많은 인간의 모습으로 보내어 그 육체를 죽이심으로써 이 세상의 죄를 없이 하셨습니다”(로마 8,3.32; 갈라 4,4 참조). 이와 같이 부활 체험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전생애를 재조명하게 되었고, 그분의 강생과 희생 역시 그분이 이 세상에 파견되신 ‘하느님의 아들’이시라는 선앙 고백 안에서 재해석된다.
 
또한 “때가 찼을 때 하느님께서 당신의 아들을 보내셨으니”(갈라 4,4)라는 논리에 따라오는 당연한 물음은 예수 그리스도는 이 세상 탄생부터 하느님의 아들이셨는가 아니면 영원부터 하느님의 아들이셨는가 하는 그분의 선재(先在)에 관한 물음이다. 이 물음에 관해서는 요한 복음이 탁월하게 설명한다. 우선 요한 복음에 따르면 예수께서는 당신이 하느님 아버지께로부터 파견을 받았으며(요한 5,23-37; 6,38 이하; 7,28 이하 등), 또한 당신은 ‘하늘로부터’(요한 3,13; 6,38.51) 혹은 ‘위로부터’(8,23) 내려왔고 아버지로부터 나왔다는 말씀을 여러 차례 거듭하신다.
 
예수 그리스도의 선재 사상에 해결사 역할을 하는 요한 복음의 머리말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한 처음, 천지가 창조되기 전부터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고 하느님과 똑같은 분이셨다. 말씀은 한 처음 천지가 창조되기 전부터 하느님과 함께 계셨다.”(요한 1,1-2). 여기서 말하는 말씀은 누구인가? “말씀이 사람이 되셔서 우리와 함께 계셨다.”(요한 1,14). 나자렛에 탄생하신 예수 그리스도라는 역사적 인물은 ‘맨 처음’부터 계셨던 분임을 말한다. ‘말씀’은 맨 처음에 이미 존재하고 있었다는 표현은 시간 속에 창조되신 분이 아니라, 영원부터 존재하신 분이심을 말한다. 영원부터 “말씀이 하느님과 함께 계셨기” 때문에 예수께서는 “아버지와 나는 하나이다.”(요한 10,30)고 말씀하신다. 여기에서도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바로 이 세상에 오선 하느님이시라는 것과, 그분은 영원부터 존재하셨던 분이시라는 것을 진술한다. 이러한 예수 그리스도 이해는 삼위 일제 이해의 바탕이 됨을 알 수 있다.
 
 
‘하느님의 아들’에 관한 니케아 신경의 표현
 
니케아 신경에는 사도 신경에 포함되지 않은 다섯 가지 표현이 있다. (1) “모든 세대에 앞서 성부께로부터 나신 천주의 외아들이시며”(그리스어로 된 신경에는 없지만 라틴어로 된 신경에는 “천주로부터 나선 천주시요”라는 부분이 첨가되어 있다), (2) “빛으로부터 나신 빛이시요, 참 천주로부터 나신 참 천주로서” (3) “창조되지 않고 나시어” (4) “성부와 일체이시며” (5) “만물이 다 이분으로 말미암아 창조되었음을 믿나이다.”
 
두 분의 신이 존재하지 않고서 어떻게 예수가 주님이 되고, 그의 아버지가 하느님이 되느냐는 것은 여기에서도 이해하가가 어려운 부분이다. 만일 예수가 반신(半神)으로서 신과 인간 사이에서 태어난 존재라면 이해하가가 쉬울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된다면 다른 어떤 사람의 아들도 예수와 같은 그런 아들일 수는 없지만, 예수 역시 아버지의 창조물에 지나지 않게 되고, 이는 변질된 이단으로 끌고 갈 뿐이다.
 
이러한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해 니케아 신경은 “천주의 외아들”이란 표현에서 ‘유일한 출생’이란 뜻을 설명하기 위해 ‘우니제니툼’(unigenitum)이라는 단어를 선택했다(사도 신경에서는 단순히 unicum이란 단어를 사용한다) unigenitum이라는 라틴어 단어는 unus(유일한, 그리스어는 monoghene)와 genitus(출생, 그리스어는 gennethenta)의 합성어이다. 여 기서 genitus라는 단어가 암시하는 것은 성자의 탄생은 창조가 아니라는 것이다. 신경 안에서 이 용어는 성부께서 본질의 분할 없이 성자를 탄생시키고, 성자는 하느님의 본질을 지니신 한 개별 실체임을 신학적으로 설명하고, 또한 이러한 행위는 오로지 하느님 안에서만 일어난 영원하고 변함 없는 행위임을 설명한다. 성부께로부터 나셨다 해서 성자는 존재가 없었다가 존재로 생겨난 분도, 또 잠재 실체로 계시다가 실체로 드러나신 분도 아니며, 영원부터 계신 분이심을 이 용어를 통해 설명한다. 이것은 결국 하느님 안에서의 영원하고 완전한 관계를 말한다.
 
성자의 유일한 출생(unigenitum)을 말하는 첫 번째 설명에서 니케아 신경은 “성부께로부터 나선”을 첨가함으로써 성자의 출생은 ‘성부에 의해 창조된’ 것이 아님을 설명한다. 성부께로부터 나셨다면 언제 나셨는가? 모든 창조물은 각기 자신의 ‘시작’을 갖고 있다. 그렇다면 성자께서도 시간 안에 자신의 ‘시작’을 갖고 계신가? 그렇지 않음을 설명하기 위해 “모든 세대에 앞서”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이 표현은 영원성을 설명하는 것으로 성자의 출생은 시작이 없으시다는 것을 말한다(“모든 세대에 앞서”라는 표현도 시간적 관념 안에서 이해되기 때문에 그리스 교부들은 차츰 ‘영원’이란 표현을 선호했다).
 
세 번째 첨가는 전문 용어로 “창조되지 않고 나시어”(geniturn non factum)란 말을 사용한다. 하늘과 땅은 창조주께서 창조하시고 만드신 것이다. 이 표현은 성자의 출생과 관계된 하느님의 행위와 하느님의 창조 행위는 다르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 사용한 표현이다. 즉 성자는 성부께로부터 나셨지만, 성부께서 창조하신 것이 아니라는 것과, 성자의 출생이 성부의 신성을 손상시키지도 않고, 성자께서도 성부와 같은 신성을 지니신 분이심을 다른 창조 행위에 대조시켜서 말한다.
 
공의회 교부들은 성부로부터 나신 성자의 출생을 성서 속의 용어로 설명하려 했었다. 그들은 하느님의 계시를 떠나 인간의 철학 속으로 빠져드는 것을 가급적 막기 위해, 이미 성서에 들어 있는 말이 아니면 어떠한 단어나 문장도 넣지 않기를 바랐다. 왜냐하면 결국 인간의 언어는 또 다른 이단을 탄생시킨다는 것을 뼈저리게 경험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니케아 공의회 교부들은 성부와 성자께서 본질을 같이하고 있다는 것을 설명해 주는 적절한 성서적 표현을 발견하지 못했다. 사실 니케아 공의회는 오늘날의 터키 이스탄불 약간 남쪽에 위치한 지역에서 열렸기 때문에, 주도적인 신학과 철학은 희랍적이었다. 그러한 배경에서 네 번째 첨가인 “일체이시며”(그리스어 homoousion)란 신조어를 만들게 되었고, 이를 통해 성자의 ‘발생’과 우주 만물의 ‘창조’ 사이에는 어떠한 모호성의 여지도 없이 상이함을 말하려 했다.
 
당시 공의회가 이단으로 단죄했던 아리우스의 입장은 예수 그리스도는 성부의 창조물 가운데 하나이며, 인간들보다는 높은 지위에 높임을 받긴 했지만 신성을 가지지는 않았다고 주장했었다. 이러한 이단에 직면하여 골머리를 앓던 당시의 교부들에게 이 ‘일체’라는 단어는 참으로 반가운 신조어였다. 아리우스의 견해에 반대하여 니케아 교부들은 성자께서는 영원으로부터 창조되지 않고 태어나셨으며, 성부와 호모우시온(homoousion : 동일 본질)이심을 주장했다. homoousion은 ‘같은’(humo)과 ‘본질’(ousion)이란 두 단어의 합성어로서 뜻 그대로 ‘같은 본질’을 의미한다. 성부와 성자께서 한 몸이심을 그러한 전문 용어를 만들어 강조하면서 니케아 교부들은 당대에 상당히 세력을 확장했던 아리우스의 신학을 반박했다.
 
이 용어는 바로 보편화되지도 않았고, 계속 논쟁의 초점이 되기도 했지만, 많이 사용하면서 신학 전문 용어로 정착되어 갔다.
 
신경의 두 번째 조항에 관해 설명한 것을 요약하면, 우리는 하느님을 믿고, 또 그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신 예수님을 믿는데, 예수님은 바로 그리스도교 신앙 본질을 포함하신 주님이시다. 그러면서도 오로지 한 분의 하느님만이 계시는데, 아버지도 하느님이시고, 예수 그리스도도 하느님이시다. 신경의 두 번째 조항이 주장하는 것은 예수는 하느님이시고, 성자이심을 믿으며, 외아드님이 사람이 되셨음과 하느님은 오로지 한 분뿐이심을 믿는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분의 역사 속에서 그분을 추종하는 것이다. [경향잡지, 1994년 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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