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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4주일] 새롭고 권위 있는 가르침 (마르 1,21ㄴ-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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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업 [rlawhddjq] 쪽지 캡슐

2018-01-28 ㅣ No.81

 

 

[연중 제4주일] 새롭고 권위 있는 가르침 (마르 1,21ㄴ-28)

 

 

 

모세는 백성에게, 너희 하느님께서 너희 동족 가운데에서 나와 같은 예언자를 일으켜 주실 것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야 한다고 말한다. (신명 18,15-20)
모세가 백성에게 말하였다. 15 “주 너희 하느님께서 너희 동족 가운데에서  나와 같은 예언자를 일으켜 주실 것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야 한다.
16 그것은 너희가 호렙에서 집회의 날에 주 너희 하느님께 청한 것이다. 그때에 너희는 이렇게 말하였다. ‘다시는 저희가 주 저희 하느님의 소리를 듣지 않게 하시고  이 큰 불도 보지 않게 해 주십시오. 저희가 죽지 않게 해 주십시오.’
17 그러자 주님께서 나에게 말씀하셨다. ‘그들이 한 말은 옳다.

18 나는 그들을 위하여  그들의 동족 가운데에서 너와 같은 예언자 하나를 일으켜, 나의 말을 그의 입에 담아 줄 것이다. 그러면 그는 내가 그에게 명령하는 모든 것을 그들에게 일러 줄 것이다.
19 그가 내 이름으로 이르는 말을 듣지 않는 사람은 내가 직접 추궁할 것이다.
20 또한 내가 말하라고 명령하지도 않은 것을  주제넘게 내 이름으로 말하거나, 다른 신들의 이름으로 말하는 예언자가 있으면, 그 예언자는 죽어야 한다.’


시편 95(94),1-2.6-7ㄱㄴㄷ.7ㄹ-9(◎ 7ㄹ과 8ㄴ)
◎ 오늘 주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라. 너희 마음을 무디게 하지 마라.
○ 어서 와 주님께 노래 부르세. 구원의 바위 앞에 환성 올리세. 감사하며 그분 앞에 나아가세. 노래하며 그분께 환성 올리세. ◎
○ 어서 와 엎드려 경배드리세. 우리를 내신 주님 앞에 무릎 꿇으세. 그분은 우리의 하느님, 우리는 그분 목장의 백성, 그분 손이 이끄시는 양 떼로세. ◎
○ 오늘 너희는 주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라. “므리바에서처럼, 마싸의 그날 광야에서처럼, 너희 마음을 무디게 하지 마라. 거기에서 너희 조상들은 나를 시험하였고, 내가 한 일을 보고서도 나를 떠보았다.”◎


바오로 사도는, 여러분이 걱정 없이 살기를 바란다며, 세상일이 아니라 주님의 일을 걱정하라고 한다. (1 코린 7,32-35)
형제 여러분, 32 나는 여러분이 걱정 없이 살기를 바랍니다. 혼인하지 않은 남자는 어떻게 하면 주님을 기쁘게 해 드릴 수 있을까 하고  주님의 일을 걱정합니다.
33 그러나 혼인한 남자는 어떻게 하면 아내를 기쁘게 할 수 있을까 하고  세상일을 걱정합니다.
34 그래서 그는 마음이 갈라집니다. 남편이 없는 여자와 처녀는 몸으로나 영으로나 거룩해지려고  주님의 일을 걱정합니다. 그러나 혼인한 여자는 어떻게 하면 남편을 기쁘게 할 수 있을까 하고  세상일을 걱정합니다.
35 나는 여러분 자신의 이익을 위하여 이 말을 합니다. 여러분에게 굴레를 씌우려는 것이 아니라,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서  품위 있고 충실하게 주님을 섬기게 하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시어 권위를 가지고 가르치시며,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을 고쳐 주신다. (마르 1,21ㄴ-28)
카파르나움에서, 21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셨는데,
22 사람들은 그분의 가르침에 몹시 놀랐다. 그분께서 율법 학자들과 달리 권위를 가지고 가르치셨기 때문이다.
23 마침 그 회당에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이 있었는데, 그가 소리를 지르며 말하였다.
24 “나자렛 사람 예수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저희를 멸망시키러 오셨습니까?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25 예수님께서 그에게“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하고 꾸짖으시니,
26 더러운 영은 그 사람에게 경련을 일으켜 놓고 큰 소리를 지르며 나갔다.
27 그러자 사람들이 모두 놀라, “이게 어찌 된 일이냐? 새롭고 권위 있는 가르침이다. 저이가 더러운 영들에게 명령하니 그것들도 복종하는구나.”하며  서로 물어보았다.
28 그리하여 그분의 소문이 곧바로 갈릴래아 주변 모든 지방에 두루 퍼져 나갔다.

 

연중 제4주일 제1독서 (신명18,15-20)

 

"너희 하느님께서 너희 동족 가운데에서 나와 같은 예언자를 일으켜 주실 것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야 한다."(15)


하느님의 말씀을 위탁받아 전하는 자기 동족 가운데에서 나와야 한다고 말한다.

여기서 '메아헤카'(meaheka; '너희 동족(형제) 가운데에서')가 강조된 것은 하느님의 계시를 받은 자는 반드시 하느님의 계약으로 맺어진 백성의 역사를 체험하고 이해하는 자여야 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느님의 계시를 전하는 예언자는 그 자신이 하느님의 구원 역사의 동참자이기에 누구보다 하느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가지는 존재이다. 또한 살아계신 하느님의 계시를 전하는 자이기에 살아계신 하느님의 뜻만을 전해야 한다.

모세에 의해서 백성에게 선포된 말씀은 영속적인 예언자의 계보를 세우시겠다는 말씀으로 이해해야 한다.


하느님께서 예언자 제도를 세우시는 주된 목적은, 혼란한 이교도의 영적인 세력에 맞서서 하느님의 분명하신 계시의 말씀을 전하시고자 하시는 것이다.

여기서 '나와 같은 예언자'는 모세 자신이 행했던 예언자의 활동과 동일한 수준의 활동을 행하는 예언자의 의미가 아니고, 하느님의 대변자로서의 모습만을 가리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구절은 메시아의 도래를 의미한다. 신약시대에 살던 유대인이 이 예언자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으로 보아 본문의 예언자가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한다는 사실도 알아야 한다(요한1,45; 6,14; 7,40; 사도3,20~22; 7,37).


그리고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는 말씀은 단순히 귀로 듣는다는 뜻이 아니라 '그를 향하여 순종한다'는 뜻을 가진다. 여기서 누구를 향하여 순종할 것인가가 문제가 된다.

즉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가나안의 박수들이나 잡신들을 접한 자들이나 혼을 불러들이는 초혼자들의 말을 듣거나 순종해서는 안되며, 유일하신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예언자의 말을 순종하라는 것이다.


"그것은 너희가 호렙에서 집회의 날에 주 너희 하느님께 청한 것이다.  그때에 너희는 이렇게 말하였다.

'다시는 저희가 주 저희 하느님의 소리를 듣지 않게 하시고,  이 큰 불도 보지 않게 해 주십시오.  저희가 죽지 않게  해 주십시오.' " (16)


탈출기 20장 19절의 기록을 살펴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느님의 음성을 듣게 되자 자신들이 죽게 될까봐 하느님을 직접 만나지 아니하고, 모세가 자신들을 대신해서 만나기를 모세에게 간청한다.


"온 백성은 우렛소리와 불길과 뿔 나팔 소리와 연기에 싸인 산을 보고 있었다.  백성은 그것을 보고 떨면서 멀직이 서 있었다.  그들이 모세에게 말하였다. "우리에게는 당신이 말해 주십시오.  우리가 듣겠습니다. 하느님께서 직접 우리에게 말씀하시지 않도록  해 주십시오. 그랬다가는 우리가 죽습니다." "(탈출20,19~20)


'저희 하느님'에 해당하는 '엘로하이'(elohai) '하느님'을 가리키는 명칭 '엘로힘' 1인칭 단수 접미어가 붙은 형태이다.

여기서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느님을 이처럼 '저희(나의) 하느님'으로 부르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본문이 모세 오경 안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하느님을 자신의 개인적이며 인격적인 하느님으로 고백한 유일할 곳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하느님께서 호렙산에서 그들과 계약을 세우실 때, 이스라엘 백성들 개개인이 직접적이고 실제적인 반응을 보였다는 증거가 된다.


'저희가 죽지 않게 해 주십시오'에 해당하는 '웰로 아무트'(welo amuth)앞의 두 가지 요청과 함께 원어에 충실하게 번역하면 '나로 하여금 듣지 않고 보지 않게 하셔서 내가 죽지 않게 해주소서'이다.

이것은 죽음에 대한 공포에 휩싸여 드리는 요청이 아니라, 죄인인 인간이 거룩하신 하느님을 직접 대면하면 죽는다는, 하느님의 거룩함을 바로 인식한 자의 자연스러운 요청이라고 할 수 있다.

즉 본문이 강조하는 것은 나약한 인간으로서 가질 수 있는 단순한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고, 하느님께 대한 올바른 경외심이다.


주님을 '나의 하느님'으로 고백한 자가 어찌 그 하느님을 오직 자기를 죽일 자로만 바라 보아야 겠는가?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앞에서 이스라엘 백성과 같은 요청을 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자 주님께서 나에게 말씀하셨다. '그들이 한 말은 옳다.  나는 그들을 위하여 그들의 동족 가운데에서 너와 같은 예언자 하나를 일으켜,  나의 말을 그의 입에 담아 줄 것이다.  그러면 그는 내가 그에게 명령하는 모든 것을 그들에게 일러 줄 것이다."(17~18)


'그들이 한 말은 옳다'는 것은 '그들이 한 말은 잘한 말이다'라는 뜻으로 경우에 맞는 말을 했다는 하느님의 칭찬이다.  하느님께서는 거룩하신 분이시므로 중재자를 세워 죽음을 면하게 해달라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태도는 하느님의 거룩하심을 체험한 자가 해야 할 옳은 말이라고 하느님께서 인정하신 것이다.

'나의 말을 그의 입에 담아 줄 것이다'는 것은 단순히 모세의 입을 사용하겠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의 입이 하느님의 말씀의 보관소가 되게 하겠다는 것이다.


예레미야 5장 14절에는 하느님께서 필요하실 때에 예언자의 입에 보관된 말을 꺼내어 사용하실 것을 말씀하신다. 

'나 이제, 네 말이 너의 입에서 불이 되게 하고,  이 백성은 장작이 되게 하여 그 불이 그들을 삼키게 하리라.'


참된 예언자는 자신의 뜻대로 예언하지 아니하고 하느님의 말씀만을 전한다. 그러므로 예언자들은 자신이 하느님의 말씀만을 전하는 참 예언자임을 보이기 위해 '주님께서 말씀하신다'(이사1,18; 예레4,1)라는 관용적 표현을 사용한다.


또한 에제키엘 3장 10절에는 '내가 너에게 하는 말을 모두 마음에 받아들이고 귀담아 들어라'는 명령이 나온다. 이는 말씀이란, 단순히 입술에만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내면의 생각에까지 하느님의 말씀이 있어야 함을 알게 한다.


뿐만 아니라 예레미야서 1장 9절'이제 내가 너의 입에 내 말을 담아 준다'는 표현은 하느님께서 직접적으로 내리시는 계시에 대한 표현일 뿐만 아니라, 예언자를 세우시고 사명을 부여하시기 위해 하느님께서 부르시는 순간을 나타내는 것이다.

 예언자로 임명하시는 장면을 나타내는 표현이다.


결국 본문은 예언자라고 할지라도 자의로 말해서는 안되며, 오직 하느님의 말씀을 그대로 전하는 자들이 바로 예언자라는 메세지를 주고 있다. 

"그가 내 이름으로 이르는 말을 듣지 않는 사람은 내가 직접 추궁할 것이다. 또한 내가 말하라고 명령하지 않은 것을 주제넘게 내 이름으로 말하거나, 다른 신들의 이름으로 말하는 예언자가 있으면,그 예언자는 죽어야 한다."(19~20)


실제로 이스라엘은 하느님께서 세우시고 그 입에 말씀을 주어 선포하게 하신 예언자들의 말을 듣지 않음으로써, 결국 이방 나라들의 포로로 끌려가게 되었다. 그리고 여기서 예언자가 선포하는 그 말이 하느님으로부터 오지 않는 경우로는 두 가지 상황이 있음을 밝힌다.


하나 하느님의 이름으로 말하지만, 전하는 내용을 자신의 마음대로 지어낸 경우이고, 다른 하나 하느님이 아닌 다른 존재로부터 받은 내용을 그 존재의 이름으로 말하는 경우이다.

전자는 십계명 가운데 하느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말라는 제2계명의 내용을 범하는 것이고, 후자 우상 숭배에 관한 제1계명을 범하는 것이다. 그리고 모두 하느님으로부터 오지 않은 내용을 전한 것이라는 점에서는 일치한다.


여기서 '주제넘게'로 번역된 '야지드'(jazid) '끓어 오르다', '끓다'뜻이 있는'지드'(zid)동사의 사역 능동형 미완료형으로서 '주제넘게 행동하다', '건방지게 행동하다','방자하게 행동하다'란 뜻이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거짓 예언자의 주제넘은 선포 행위하느님께서 결코 인정하지 않는, 자기 속에 끓어 오르는 개인의 생각을 불쑥 내미는 행동이다. 인간은 교만하기 때문에 자기에게 유리한 쪽으로 권위를 세워 주제넘게 나서기 쉽다.

거짓 예언자 부르심을 받지 않았음에도, 그렇게 행동하도록 권위를 부여받은 척하여 감히 하느님의 이름으로 말하는 자이다.


이것은 그 예언자 개인의 충동적 행동이라기 보다는, 그의 악한 영들에 의해 영향받은 행동이라고 할 수 있다(탈출18,11; 예레23,9~32; 에제13장). 뿐만 아니라 이러한 태도의 배후에는 종종 사람들 기쁘게 하려는 의도도 숨겨져 있다(이사30,10~11; 예레14,14~15; 미카2,11; 3,11).


오늘날 교회에 이 문제를 적용해 볼 때, 오늘의 말씀은 하느님의 말씀을 사람들 앞에서 전하는 자들에게 매우 중대한 경고를 주고 있다. 강론 때나 강단에 섰다고 해서 모두 참된 설교자나 강사가 아니고, 오직 하느님께서 세우신 자만이 참된 설교자요, 강사이다.

따라서 모든 성직자들과 수도자들, 그리고 하느님 말씀의 봉사자들은 날마다 자신이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있는가, 아니면 하느님의 이름으로 자신의 인간적 생각을 전하고 있지는 않는가를 돌아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말씀을 자신의 뜻대로 마음대로 풀어 전하는 거짓 예언자가 당할 최후는 죽음 뿐이기 때문이다(신명13,6).


"주하느님께서는 나에게 제자의 혀를 주시어  지친 이를 말로 격려할 줄 알게 하신다.  그분께서는 아침마다 일깨워 주신다.  내 귀를 일깨워 주시어  내가 제자들처럼 듣게 하신다."(이사50,4)


하느님께서 아침마다 열어 주시고 입과 귀에 하느님의 말씀을 담아 영적으로 궁핍하고 갈증을 느끼는 자들에게 그 말씀을 들려주려는 간절한 마음을 가지고 있고, 이런 일에 소명을 받은 자가 오늘 날 하느님의 말씀을 맡은 봉사자로서 바른 자세를 갖춘 사람이다.

 

 연중 제4주일 복음(마르1,21ㄴ~28)

 

예수님께서 그에게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 하고 꾸짖으시니, 더러운 영은 그 사람에게 경련을 일으켜 놓고 큰 소리를 지르며 나갔다. (25~26)

 

마르코 복음 1장 24절에서 더러운 영이 예수님께 대하여 '나자렛 사람 예수님'이라고 부른다. 나자렛이 예수님의 출생지는 아니지만, 유년 시절을 보내신 곳이므로 실질적인 출신지라고 볼 수 있다.

 

당시 나자렛은 유대인에 의해 경멸받던 지명이므로(요한1,46), 더러운 영이 갈릴래아를 대표할 수 있는 큰 도시인 카파르나움에서 사람들 앞에 예수님을 그렇게 부른 것은 예수님의 권위를 떨어뜨리려는 의도에서였다.

 

그리고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에 해당하는 '티 헤민 카이 소이'(Ti hemin kai soi; what do you want with us)를 직역하면, '우리가 당신에게 무엇입니까?'이다. 

말하자면 예수님과 더러운 영 사이에는 아무런 관계가 없으므로 우리를 괴롭히지 말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여기서 더러운 영은  자신들을 가리켜, '우리','저희'라는 표현으로 쓰고 있는데,  더러운 영이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과 자신을 복수 위격으로서 말하고 있기 때문일 수도 있고, 아니면 더러운 영이 더러운 영에 들린 사람의 입을 빌어 말하는 악한 영이 하나가 아니고 여럿이기 때문에 이러한 표현을 썼다고 말할 수 있다.

 

또한 '저희를 멸망시키러 오셨습니까?'라는 표현은 악한 영들이 내용적으로 몰라서 묻는 것이 아니라, 조롱하며 자신을 방해하는 투설의적 형태의 문장이다. 

그러니까 영적으로 상당한 지적 능력을 가지고 있던 악한 영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중요한 목적 중의 하나를 정확하게 지적하고 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은 사탄의 권세를 멸망시켜서 사탄의 죄와 죽음의 권세 아래 고통 당하고 있는 당신의 백성들을 구원하러 오신 것이다(마르2,10; 1요한3,8).

 

그리고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에 해당하는 '호 하기오스 투 테우'(ho hagios tou theou; the Holy One of God)마르코 복음 1장 23절'더러운 영'에 해당하는 '프뉴마티 아카타르토'(pneumati akatharto; an evil spirit; an unclean spirit)대조되는 개념으로서 예수님의 신성(神性)을 정확하게 깨달을 수가 있는 것이다(잠언1,7; 야고2,19).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하고 꾸짖으시니 

여기서 '꾸짖으시니'이 해당하는 '에페티메센'(epetimesen; rebuked)의 원형 '에피티마오'(epitimao)'엄하게 경고하다','책망하다'는 뜻이다. 

당시에 마술사들은 독특한 도구를 사용해서 주술적 행위를 하여 더러운 영들을 쫓아내는 시늉을 했지만, 예수님께서는 오로지 당신 자신의 말씀의 권위를 사용하셔서 더러운 영들을 쫓아내셨다.

 

그리고 구마행위를 하시는 예수님의 선포'조용히 하여라'와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두 가지 명령으로 나눌 수 있다. 

'조용히 하여라'는 첫번째 명령은 더러운 영이 이미 알고 있는 메시야로서의 예수님의 정체에 대한 발설을 엄하게 금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이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 전에 미리 알려지면, 사람들에 의해 정치적 메시야로 옹립되어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데 지장을 받을 수가 있기 때문이다.

 

특히 '조용히 하여라'에 해당하는 '피모테티'(phimotheti; he quiet; hold your peace)의 원형 '피모오'(phimoo)라는 단어가 '입에 재갈을 물리다'라는 의미가 있다는 점을 고려할 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기 직전까지 그 함구령이 얼마나 비밀스럽게 지켜져야 했는지를 알 수 있다.

 

또한 '나가라'에 해당하는 두번째 명령은 직접적으로 '치유 행위'와 관련이 된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에게 항변하는 더러운 영을 잠잠케 하시는 데 그치지 않고, 이어서 더러운 영에 들려 고생하는 부마자로부터 더러운 영을 쫓아내시는 구마 행위를 하신다.

 

여기서 '나가라'에 해당하는 '엑셀테'(ekselthe; come)기본형은 '에르코마이'(erchomai)인데, 앞에 '안으로'에 해당하는 '에이스'(eis; into)라는 접두사가 붙으면 '들어가다'는 뜻의 '에이세르코마이'(eiserchomai)가 되고, 앞에 '밖으로'에 해당하는 '에크'(ek; out of)라는 접두어가 붙으면 '나가다'라는 뜻의 '엑세르코마이'(ekserchomai)가 된다.

 

그래서 마르코 복음 1장 21절의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해당하는 '에이셀톤'(eiselthon; he entered)과 마르코 복음 1장 25절 '나가라'에 해당하는 '엑셀테'(ekselthe; come)대조가 되어, 예수님께서 '회당 안으로 들어오심'더러운 영의 '회당 밖으로 (사람 밖으로) 쫓겨남' 원인이 되고 있다.

그리고 예수님의 들어 오심과 더러운 영의 쫓겨남 사이에는 예수님의 권위있는 말씀의 선포가 놓여 있다(마르1,22).

 

'경련을 일으켜 놓고 큰 소리를 지르며 나갔다' 

예수님의 말씀은 하느님께서 보내신 자로서의 신적 능력과 권세가 있었다. 그래서 더러운 영은 자신의 지혜에 근거한 항변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거주하던 사람으로부터 나올 수밖에 없었다. 

마르코 복음사가는 당신의 장면을 '경련을 일으켜 놓고'에 해당하는 '스파락산'(sparaksan; had torn; shook violently)'(큰 충격에 의한) 큰 소리'에 해당하는 '포네 메갈레'(phone megale; with a shriek; with a loud voice)라는 두 단어를 사용해서 더러운 영이 예수님의 말씀의 권세 아래 저항하지 못하는 모습을 시각과 청각적인 이미지를 사용하여 묘사하고 있다.

 

마르코 복음사가는 더러운 영이 자신이 머물렀던 사람에 대해서 행하는 최후의 학대 장면인 경련의 모습을 실감나게 그리면서도, 그가 내지르는 죽음에 이르는 듯한 비명과 통곡의 소리를 동시에 표현함으로써 더러운 영의 극한 상실감과 마지막 저항을 묘사했다. 

이것은 공관 복음서 안에서 마르코 복음사가만의 독특한 표현인데, 사탄의 세력의 완전한 패배를 강력하게 암시하는 것이다.

 

 

연중 제4주일(2/01)


<회당에서 더러운 영을 쫓아내시다.>


“사람들은 그분의 가르침에 몹시 놀랐다.

그분께서 율법 학자들과 달리 권위를 가지고 가르치셨기 때문이다(마르 1,22).”


여기서 ‘권위’ 라는 말은 ‘하느님의 힘’을 뜻합니다.

사람들이 명확하게 하느님의 힘을 느낀 것은 아니지만,

그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에 자기들을 압도하는 어떤 힘이 있음을 느꼈습니다.

(그랬는데 마귀가 예수님의 명령에 복종하는 것을 본 뒤에는

그 힘이 하느님의 힘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당시의 율법 학자들의 가르침에는 그런 힘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말과 행실이 다른 자들이었고(마태 23,3),

또 그들의 가르침은 자기들의 지식을 자랑하는 일이었을 뿐이기 때문입니다.


“마침 그 회당에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이 있었는데, 그가 소리를 지르며

말하였다. ‘나자렛 사람 예수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저희를 멸망시키러 오셨습니까?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마르 1,23-24)”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이라는 말은, ‘마귀 들린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마귀를 ‘더러운 영’이라고 표현한 것은, 그것들은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고

하느님의 일을 방해하기만 하는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마귀와 ‘마귀 들린 사람’을 구분해서 생각해야 합니다.

또 마귀 들린 것과 마귀의 유혹에 넘어간 것도 구분해야 합니다.

마귀 들린 상태는 자기의 의지와 상관없이 병에 걸린 것과 같은 상태입니다.

여기서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이 하는 말은, 사실은 마귀가 하는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더러운 영’과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을 구분하지 않은 채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을 함부로 판단하고 있는,

매일미사 책의 오늘의 묵상은 잘못된 글입니다.)


마귀는 영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예수님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섬기는 것은 아닙니다.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라는 말은, 자기들이 하는 일에

상관하지 말라는 뜻이고, “저희를 멸망시키러 오셨습니까?” 라는 말은,

자기들을 멸망시키지 못할 것이라는 으름장이고,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라는 말은, 자기가 예수님보다 우위에 있다는 뜻으로 한 말입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라는 말은, 예수님의 신원을

폭로함으로써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을 방해하려는 의도로 한 말입니다.

(마귀는 자기가 쫓겨날 수밖에 없음을 알지만, 끝까지 반항하려고 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은,

하느님께 예배를 드리는 회당 안에 마귀가 들어와 있었다는 점입니다.

성전이라고 해서 마귀가 들어가지 못하는 것은 아닙니다.

마귀는 하느님께 기도를 드리는 거룩한 시간에도 사람들을 방해합니다.

그리고 마귀는 도대체 쉬는 때가 없습니다.

호시탐탐 노리고 있다가 우리가 방심하기만 하면 우리를 유혹하거나,

우리를 사로잡아서 자기의 지배 아래 두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 하고 꾸짖으시니,

더러운 영은 그 사람에게 경련을 일으켜 놓고

큰 소리를 지르며 나갔다(마르 1,25-26).”

마귀는 예수님에 대해서 말할 자격이 없습니다.

또 마귀가 사람을 사로잡고 사람 안에서 머무르는 것은,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일, 즉 불법적인 일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침묵을 지키라고 명령하시면서 마귀를 쫓아내십니다.

마귀가 그 사람에게 경련을 일으켰다는 것은

쫓겨나는 것에 대한 반항의 표시로 그 사람에게 고통을 주었다는 뜻입니다.

큰 소리를 질렀다는 것은 쫓겨나는 순간에도 발악을 했다는 뜻입니다.


만일에 마귀가 예수님의 명령에 복종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러면 곧바로 지옥으로 떨어졌을 것입니다.

지옥은 마귀가 벌을 받는 감옥입니다.

묵시록에 이런 말이 나옵니다.

“그 천사가 용을, 곧 악마이며 사탄인 그 옛날의 뱀을 붙잡아

천 년 동안 움직이지 못하도록 결박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를 지하로 던지고서는 그곳을 잠그고 그 위에다 봉인을 하여,

천 년이 끝날 때까지 다시는 민족들을 속이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그 뒤에 사탄은 잠시 풀려나게 되어 있습니다(묵시 20,2-3).”

“천 년이 끝나면 사탄이 감옥에서 풀려날 것입니다(묵시 20,7).”

지옥은 마귀들도 두려워하는 곳입니다.

그러니 죄를 짓고 지옥으로 떨어지는 것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면 안 됩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모두 놀라,

‘이게 어찌 된 일이냐? 새롭고 권위 있는 가르침이다.

저이가 더러운 영들에게 명령하니 그것들도 복종하는구나.’ 하며 서로 물어보았다.

그리하여 그분의 소문이 곧바로 갈릴래아 주변 모든 지방에

두루 퍼져 나갔다(마르 1,27-28).”


사람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들었을 때 느꼈던 ‘힘’이 곧 하느님의 힘이라는 것을

마귀가 쫓겨날 때 알게 됩니다.

“새롭고 권위 있는 가르침이다.” 라는 말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놀라운 하느님의 말씀이다.” 라는 뜻입니다.

“이게 어찌 된 일이냐?” 라는 말은, 그들이 보기에 그냥 ‘사람’일 뿐인 예수님이

‘하느님의 힘’을 사용하는 것에 대한 놀라움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마귀는 사람의 명령에는 복종하지 않는 존재입니다.

그것들은 오직 하느님의 명령에만 복종합니다.

그런데 이제 예수님의 명령에 복종하는 것을 보게 되었으니

사람들은 놀랄 수밖에 없습니다.

“서로 물어보았다.” 라는 말은, “수군거렸다.” 라는 뜻입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의 권능과 권한에 대해서 놀라기는 했지만

예수님을 믿은 것 같지는 않습니다.

복음 말씀에 사람들이 믿게 되었다는 말이 없는 것은,

‘놀라움’이 믿음으로 이어진 것은 아니라는 것을 나타내는 것으로 해석됩니다.

누구든지 신기한 일을 보면 놀라게 되지만, 그리고 소문을 퍼뜨리기도 하지만,

믿음을 갖게 되는 것은 사람마다 다릅니다.

(똑같은 기적을 보아도 믿는 사람이 있고, 안 믿는 사람이 있습니다.)

안 믿으려고 하는 사람의 눈에는 그저 신기한 일로 보일 뿐입니다.

그러나 믿으려고 하는 사람의 눈에는 하느님의 기적으로 보입니다.

믿음은 은총이면서, 동시에 우리 자신의 응답입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2월 3일 (녹) 연중 제4주일

“오늘 주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라. 너희 마음을 무디게 하지 마라.” 시편 저자의 말씀은 참된 신앙인이 향해야 할 중요한 영의 감각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내가 가진 감각은 언제나 무엇인가를 향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무엇을 보고, 듣고, 느끼려고 하는지에 따라 우리 인생의 가치와 태도가 달라지는 것입니다. 


회당에 모인 이들이 예수님의 가르침에 놀란 것은, 그들이 듣고 보지 못했던 새로운 감각이었습니다. 더러운 영에 들린 사람이란, 사람들이 혐오하고, 가까이하고 싶지 않은 소외된 이를 뜻합니다.  
영이 더러운 사람은 영이 맑은 사람을 보면 시기와 질투가 납니다. 비교되는 자신을 보는 것이 싫기 때문입니다. 그런 더러운 영이 예수님을 하느님의 거룩한 분으로 알아본 것은 당연합니다. 자신이 더 이상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게 하는 분이 나타나셨으니 두려워하는 것도 당연합니다.


예수님께서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고 꾸짖으시자 더러운 영이 달아났고, 그 광경을 목격한 사람들은 예수님의 모습에 “새롭고 권위 있는 가르침이다.” 하고 칭송하면서도 자신들의 더러운 면도 밝혀질 것을 두려워하지는 않았을까 싶습니다. 


우리도 맑은 영을 가진 사람을 보면 왠지 부끄러움을 느낍니다. 서로의 아름다움을 볼 줄 알고, 서로의 영을 맑게 해 주는 사람들이 만나면 빛이 납니다. 우리가 꿈꾸는 교회의 모습입니다. 여전히 더러운 영이 지배하는 세상이지만, 성령께 의탁하면 우리는 맑은 영을 되찾게 될 것입니다.


 (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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