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4동성당

[연중 제19주일] 생명의 빵 (요한 6,4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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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업 [rlawhddjq] 쪽지 캡슐

2018-08-11 ㅣ No.120

 


 2018.08.12.

[연중 제19주일] 생명의 빵 (요한 6,4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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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야에서 엘리야는 천사가 준 빵과 물을 먹고 마신 다음 사십 일을 걸어 하느님의 산 호렙에 이른다. (1열왕 19,4-8)
그 무렵 엘리야는 4 하룻길을 걸어 광야로 나갔다. 그는 싸리나무 아래로 들어가 앉아서, 죽기를 간청하며 이렇게 말하였다. “주님, 이것으로 충분하니 저의 목숨을 거두어 주십시오. 저는 제 조상들보다 나을 것이 없습니다.”
5 그러고 나서 엘리야는 싸리나무 아래에 누워 잠이 들었다. 그때에 천사가 나타나 그를 흔들면서, “일어나 먹어라.” 하고 말하였다.
6 엘리야가 깨어 보니, 뜨겁게 달군 돌에다 구운 빵과 물 한 병이  머리맡에 놓여 있었다. 그는 먹고 마신 뒤에 다시 누웠다.
7 주님의 천사가 다시 그를 흔들면서, “일어나 먹어라. 갈 길이 멀다.” 하고 말하였다.
8 엘리야는 일어나서 먹고 마셨다. 그 음식으로 힘을 얻은 그는 밤낮으로 사십 일을 걸어, 하느님의 산 호렙에 이르렀다.


바오로 사도는 사랑받는 자녀답게 하느님을 본받는 사람이 되라고 권고한다. (에페 4,30─5,2)
형제 여러분, 30 하느님의 성령을 슬프게 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속량의 날을 위하여 성령의 인장을 받았습니다.
31 모든 원한과 격분과 분노와 폭언과 중상을 온갖 악의와 함께 내버리십시오.
32 서로 너그럽고 자비롭게 대하고, 하느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을 용서하신 것처럼  여러분도 서로 용서하십시오.
5,1 그러므로 사랑받는 자녀답게 하느님을 본받는 사람이 되십시오.
2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또 우리를 위하여  당신 자신을 하느님께 바치는 향기로운 예물과 제물로 내놓으신 것처럼, 여러분도 사랑 안에서 살아가십시오.


예수님께서는, 당신은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며, 그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당신의 살이라고 하신다. (요한 6,41-51)
그때에 41 예수님께서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빵이다.” 하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유다인들이 그분을 두고 수군거리기 시작하였다.
42 그들이 말하였다. “ 저 사람은 요셉의 아들 예수가 아닌가? 그의 아버지와 어머니도 우리가 알고 있지 않는가? 그런데 저 사람이 어떻게 ‘나는 하늘에서 내려왔다.’고 말할 수 있는가?”
43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 너희끼리 수군거리지 마라.
44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어 주지 않으시면 아무도 나에게 올 수 없다. 그리고 나에게 오는 사람은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릴 것이다.
45 ‘그들은 모두 하느님께 가르침을 받을 것이다.’라고 예언서들에 기록되어 있다. 아버지의 말씀을 듣고 배운 사람은 누구나 나에게 온다.
46 그렇다고 하느님에게서 온 이 말고 누가 아버지를 보았다는 말은 아니다. 하느님에게서 온 이만 아버지를 보았다.
47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믿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
48 나는 생명의 빵이다.
49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고도 죽었다.
50 그러나 이 빵은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으로,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죽지 않는다.
51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

 

 

 연중 제19주일 제1독서(1열왕19,4~8)

  

그 무렵 엘리야는 하룻길을 더 걸어 광야로 나갔다.

그는 싸리 나무 아래로 들어가 앉아서, 죽기를 간청하며 이렇게 말했다.

"주님, 이것으로 충분하니 저의 목숨을 거두어 주십시오.

 저는 제 조상들보다 나을 것이 없습니다." (4)

 

'엘리야'는 해당하는 원문은 '자기는'으로 번역되는데, '자기는'에 해당하는 '웨후'

(wehu)는 인칭대명서 '후'(hu)에 접속사 '와우'(wau)가 결합된 형태로서 '그러나

그 자신은'(but he himself)이란 뜻이다.

 

앞선 3절에서 시종을 브에르 세바에 남겨 두고, 엘리야 자신이 홀로 광야로 들어갔음을

나타낸다.

 

일반적으로 히브리어 문장에서 인칭대명사는 생략됨에도 불구하고, 본문에서는 굳이 사용되어서

동사 앞에 인칭 대명사가 주어를 강조하고 있다.

 

따라서 본문은 엘리야 자신 스스로 광야로 들어갔음을 강조하는 것이다.

 

이처럼 엘리야가 스스로 혼자 광야로 들어간 것을 강조하는 것은 그가 무엇인가 결단을 하고

광야로 들어갔을 뿐 아니라, 이곳에서 특별한 일이 일어날 것이라는 암시를 준다.

 

엘리야는 단순히 이제벨의 추적을 피하기 위함도 아니고 다른 누군가를 만나기 위함도

아니며, 오직 하느님만을 만나 무엇인가 극단의 조치를 취하기 위하여 스스로

광야로 들어갔던 것이다.

 

여기서 '하룻길'은 구약 시대 히브리인들이 거리를 나타낼 때 일반적으로 사용하던 표현이다.

 

'하룻길'의 정확한 거리를 환산하기 여렵지만, 대충 32~40km 정도의 거리를 나타낸다.

 

엘리야가 북부 이스라엘에서 멀리 떨어진 남부 유다의 최남단 브에르 세바에서도,

이렇게 멀리 떨어진 곳까지 단독으로 계속 여행하는 것에서 독자들은 긴장감을 느끼고

사태의 추이를 주시하게 된다.

 

'싸리나무 아래로 들어가 앉아서'

 

'싸리나무'로 번역된 '로템'(rothem; juniper tree)사막의 메마른 골짜기나

하천 바닥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관목이다.

 

콩과의 식물로 흰 꽃이나 연보라색 꽃을 피우는데, 대개 1~2m 정도의 크기로 자란다.

이 나무는 잔가지가 많아서 바람과 햇볕을 잘 막아준다.

 

한편 욥기 30장 4절에서도 '싸리나무'로 번역했다.

 

본문에서는 '로템' '유일한', '하나의'란 뜻을 갖는 '예하트'(ehath)로 수식하고 있으나,

'로뎀나무'(싸리나무)를 가리키는 '로템'이 남성 명사이므로 이것을 남성형으로

'예하드'(ehad)로 읽을 것을 주장하는 학자도 있다.

 

어쨌든 본문은 광야에 유일하게 한 그루만 있는 싸리나무(로뎀나무) 아래

힘없이 앉아있는 엘리야의 초라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것으로  충분하니'

 

'충분한'(enough)에 해당하는 '라브'(rab)는 형용사로서 '많은'(창세13,6), '너무 많은'

(풍부한)(창세36,7), '많은'(번성한)(1역대4,27), '많은'(족한)(창세33,9) 등으로 번역되었다.

 

여기서 이 말은 복합적인 의미로 사용되었다고 볼 수 있다.

 

먼저 이 표현에는 하느님께서 자신에게 베푸신 은혜가 충분하므로 더 이상의 은혜를

바라지 않으며,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는 지금까지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충분히 감당했다는 의미로,

자신으로서는 더 이상의 일을 감당할 수 없으니, 이제 자신의 목숨을 거두어가

달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엘리야는 하느님이 주신 큰 능력으로 갖가지 기적을 일으켰고, 카르멜 산에서 바알과

아세라 우상 숭배자들을 척결하는 큰 일을 행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 자신이

이제벨에게 쫓기는 처지가 되자 자신의 한계를 깊이 인식하고, 하느님을 향해 이처럼

복합적 의미가  담긴 말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저는 제 조상들보다 나을 것이 없습니다'

 

이유를 나타내는 접속사 '키'(ki)가 사용된 본문은 하느님께서 자신의 목숨을 취하여 가시기를

간구하는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즉 자신이 조상들보다 나은 것이 전혀 없기 때문에 지금 당장 죽기를 간구했던 것이다.

 

'나을 것이'에 해당하는 '토브'(tob)'좋은'(창세27,9), '선한'(2사무2,6), '아름다움'

(2사무11,2)등으로 번역되는 형용사인데, 여기서는 질이나 가치에 있어서 상대적인

우수성을 나타내기 위하여 사용되었다.

 

본문에서 엘리야는 죽기를 간청하면서 '조상'과 자신을 비교하는데, 여기서 '조상'

복수형으로 사용되어 어떤 특정한 조상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이미 고인이 된

사람들을 포괄적으로 지칭하기 위해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본문에서 강한 부정의 의미를 갖는 부정 부사 '로'(lo)가 사용되었는데, 이것은

결코 자신이 모든 조상들과 마찬가지로 평범한 인간에 지나지 않음을 고백하는 것이며,

더 나아가서는 이들 조상들이 이미 고인이 된 것과 마찬가지로 자신 역시 죽을 사람이

되었다는 의미까지 포함되어 있다.

 

이처럼 무기력한 고백은 당시 엘리야가 얼마나 낙담하였으며, 자신의 처지를

얼마나 깊이 비관했는지를 잘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고 나서 엘리야는 싸리나무 아래에 누워 잠이 들었다.

그때에 천사가 나타나 그를 흔들면서, '일어나 먹어라'하고 말하였다." (5)

 

앞선 3~4절에는, 엘리야가 자신의 목숨을 취하고자 하는 아합의 처 이제벨을 피하여 긴급히

도망하였으며, 하느님을 향하여 낙심에 찬 절규를 하였음이 보도되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5~8절에는 절망 가운데 있는 엘리야에 대한 하느님의 위로와

엘리야의 호렙산 도피사건이 기록된다.

 

그 가운데 본절은 엘리야가 로뎀나무 아래서 잘 때, 천사가 그를 흔들어 깨우며

먹을 것을 권유하는 내용이다.

 

하느님께서 당신의 종 엘리야를 위해 파견한 천사가 엘리야를 어루만졌음을 보도하는 본문은

문자적으로 '그런데 이것을 보라! 천사가 그를 만지고 있었다'로 번역된다.

 

새 성경이 번역을 생략한 '웨힌네 제'(wehinne ze)에서 '웨힌네'(wehinne)'보다'

뜻의 주의를 환기시키는 역할을 하는 감탄사 '힌네'(hinne)에 접속사 '와우'(wau)가 결합한

형태로 '그런데 보라!'란 뜻이며, '제'(ze)'이것'이란 뜻의 지시 대명사이다.

 

저자가 이처럼 '그런데 이것을 보라!'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것은 엘리야가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여 죽기를 간청한 후 지쳐서 로뎀나무 아래서 잠이 들었을 때, 하느님의 사자(천사)가

엘리야를 만진것이 전혀 뜻밖의 사건이었음을 보여주기 위해서이다.

 

'흔들면서'에 해당하는 '노게아으'(nogeah; touched) '만지다', '닿다'(레위15,23),

'접촉하다', '건드리다'(시편144,5), '괴롭히다', '건드리다'(2사무14,10), '치다'

(창세32,32)란 뜻을 지닌 '나가으'(nagah)의 분사형이다.

 

여기서 분사형이 사용된 것은 천사가 엘리야를 만지고 있는 상황을 현장감있고 생생하게

나타내기 위함이다.

 

'나가으'(nagah)는 기본적으로 어떤 사람이나 사물이 다른 사람이나 사물과

물리적으로 접촉하는 것을 나타내는 동사이다.

 

그런데 이 동사가 하느님께 대하여 사용되면, 그 대상에 따라 크게 두 가지 의미로 구분한다.

 

하나악인을 '만지시는'것이다.

이것은 악인에 대한 하느님의 심판을 의미한다(창세12,17; 32,25; 1사무6,9).

 

그러나 악인이 아닌 다른 대상에 대한 만지심이 있다.

 

이러한 하느님의 만지심은  권한을 부여하는 상징성을 가진다(이사6,7; 다니10,16; 예레1,9).

그것이 산이든(시편104,32), 제물이든(판관6,21), 사람이든(1사무10,6) 간에

이러한 하느님의 만지심을 통해 그 대상에게 권위가 부여되는 것이다.

 

여기서 엘리야에 대한 하느님의 사자(천사)의 어루만짐은 후자에 해당한다.

 

천사가 엘리야를 어루만졌다고 하는 사실그에게 위로와 격려를 주는 행위일 뿐 아니라

그가 다시 사명감을 회복하고 사명을 감당할 수 있도록 권능을 부여하는 행위라 할 수 있다.

 

이처럼 하느님은 실의와 절망에 찬 그의 종을 위로하실 뿐만 아니라

그에게 새 힘을 주시기 위해 적절한 조치를 취하신다.

 

이 얼마나 놀라운 사랑과 애정의 표현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느님께서는 찬미받으시기를 빕니다.

 그분은 인자하신 아버지시며 모든 위로의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환난을 겪을 때마다 위로해 주시어,

 우리도 그분에게서 받은 위로로, 온갖 환난을 겪는 사람들을

 위로할 수 있게 하십니다." (2코린1,3~4)

  

"엘리야가 깨어 보니, 뜨겁게 달군 돌에다 구운 빵과 물 한 병이 머리맡에 놓여 있었다.

 그는 먹고 마신 뒤에 다시 누웠다." (6)

 

천사는 단순히 엘리야를 어루만지며 말로써 위로하는데 그친 것이 아니라

실제로 엘리야가 힘을 회복할 수 있도록 음식을 공급하였다.

 

지쳐 누워있는 엘리야의 머리맡에 빵과 물을 가져다 둔 것이다.

 

여기서 '뜨겁게 달군 돌에다 구운'으로 번역된 '레차핌'(retsaphim)의 원형은 '레체프'

(retseph)인데, 구약 성경에서 오직 이곳에서만 사용되는 단어이다.

 

말하자면 '뜨거운 돌 위에 구운'(baked on hot stones)이란 뜻이다.

 

왜냐하면 고대 근동의 유목민들은 돌을 불에 달구어 뜨겁게 한 후,

그 위에  빵을 구워 먹었기 때문이다.

 

하느님께서는 아무 것도 먹지 못하고 허기에 지쳐 누운 엘리야를 위해

친히 먹을 것과 마실 것을 준비하여 주신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이전에도 도피중에 있는 엘리야의 일용한 양식을 까마귀를 통해서(1열왕17,6)

혹은 가난한 사렙타 과부를 통해서(1열왕17,13~16) 공급하신 적이 있는데, 이제는

초자연적 존재인 천사를 보내셔서 공급하시고 있다.

 

'그는 먹고 마신 뒤에 다시 누웠다'

 

'다시'로 번역된 '와이야사브'(waiyashab) '돌아가다'(창세18,33), '돌아오다'(창세18,10)란

뜻을 지닌 '슈브'(shub)의 미완료형에 접속사 '와우'(wau; and)가 결합되어 '와우' 연속법으로

사용되었고, '누웠다' 역시 '눕다' 란 뜻의 '샤카브'(shakab)의 미완료형에 '와우' 접속사가

결합되어 '와우' 연속법으로 사용되었다.

 

이 두 동사 뿐만 아니라 이에 앞서 나오는 '먹고 마신'에 해당하는 '와이요칼 와이에셌테'

(waiyokal waishethe)도 역시 '와우' 연속법으로 사용되어 엘리야의 행동이 중단없이

연속적으로 이루어졌음을 보여주고 있다.

 

엘리야는 천사의 어루만짐 및 빵과 물을 공급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기력을 차리지 못하고

다시 자리로 돌아가 눕고 만 것이다.

 

이것은 얼마나 그가 영육간에 지쳐 있었는지를 잘 보여준다.

 

하지만 놀라운 것은 하느님의 계속적인 돌보심이다.(7절)

 

루카복음 22장 43절에는 겟세마니에서 피땀 흘리시며 고뇌에 싸여 간절히 기도하시는 예수님께

'그때에 천사가 하늘에서 나타나 그분의 기운을 북돋아 드렸다'라고 나온다.

 

우리도 하느님의 일과 뜻과 사명을 수행하다가 엘리야처럼, 예수님처럼

한계에 도달할 때가 있다.

 

그렇더라도 절망하거나 낙담하거나 우울해 하거나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

 

그 순간에도 하느님 아버지께서 끝까지 보고 계시며 동행하시고,

당신의 천사들을 통해 위로해 주심을 잊지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이 일은 하느님 아버지의 일이시기 때문이다.



 연중 제19주일 복음(요한6,41~51)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있는 빵이다.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  (51)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이 주실 빵이 당신 자신의 살이라고 주장하심으로써,

당신 몸을 많은 사람을 위한 대속의 제물로 내어 주실 것을 내비치셨다(마르10,45).
 

하지만 이러한 선언은 영적 지각력이 결핍된 유다인들에게는 생소하기만 하고,

이해하기 힘든 말씀이었다.

 

여기서 '내가 줄'에 해당하는 '에고 도소'(ego doso; I will give)'나는',

'내가'라는 뜻을 지닌 인칭 대명사 '에고'(ego)가 생략되어도 의미 전달에는

전혀 문제가 없지만, 세상의 생명을 위해 '살'주신 분이 바로 예수님 자신임을

강조하기 위해 쓰인 강조 용법이다.

 

이것은 요한 복음 6장 51절 서두에 나오는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있는 빵이다'에서

예수님의 신성(神性)과 자의식을 표현하기 위해 자주 사용되는 '나는~이다'

'에고 에이미'(ego eimi; I am)가 사용된 것과 같은 맥락이다.


 요한 복음 6장 51절 전체에서는 예수님께서 당신 자신이 유다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인물인

모세보다 월등히 우월하심을 나타낸다.

 

모세는 하느님의 집에 종으로서 충성을 다했지만,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집안을 맡은

아드님으로서 자신의 직무를 행하신 것이다(히브3,5.6).


모세나 다른 어떤 사람도 하느님께서 공급하시는 것을 가지고 '에고 도소'(ego doso),

'내가 준다'거나 '내가 줄 것이다'라고 말할 수 없다.


'에고 도소'(ego doso; I will give)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그것의 소유자,

주인뿐이다.
 

여기서 '도소'(doso; will give)'디도미'(didomi)의 미래 시제로서 예고적인 의미

뿐만 아니라 진행적인 의미도 있다.


세상의 생명을 위한 빵은 예수님만이 지금 현재도 주시고, 앞으로도 주실 수 있는

매우 특별한 것이다.
 

영혼의 구원은 우리를 위한 화해의 제물이 되시어 십자가상에서 죽으신

예수님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예수님 이외에 다른 길이 없기 때문에, 누구든지 예수님을 거부하면

그는 멸망할 수밖에 없다(사도4,12).

 

요한 복음 6장 51절에서 당신 자신의 살을 빵으로 비유하고, 이것을 먹으면 영원히

살게 된다는 예수님의 언급성만찬에서 빵을 나누는 의미와 같다(마태26,26).

 

요한 복음사가는 자신의 복음서에서 성체성사 제정 기사를 생략하였다.

  

하지만 요한 복음 6장 51절과 더불어 55절 이하에 기록된 예수님의 살과 피에 대한

교훈으로 성체 성사 제정 기사를 대신한다고 볼 수 있다.

 

요한 복음사가는 공관 복음서와 중복을 피하면서도, 자신의 독특한 기록 방법에 따라

그리스도교의 진수와 신비를 설득력있게 전달하고 있다.

 

 

2015년 8월 9일 연중 제19주일

 

복음은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의 기원이신 하느님과 당신을 먹는 이에게 생명을 주시는 살아 있는 빵이신 예수님, 이 두 주제를 제시합니다. 우리는 믿음을 통하여 하느님과 만날 수 있습니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빵이다.” 하신 예수님 말씀은 유다인들에게 대단한 오만으로 보였습니다. 유다인들의 논리에 따르면, 이 말씀은 하느님 육화에 언제나 현실적인 걸림돌이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선물인 믿음을 통해서만 당신 신비를 이해할 수 있다고 하십니다.
주님께서는 과거형이나 미래형이 아닌 현재형으로, “아버지의 말씀을 듣고 배운 사람”, 곧 “믿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지금 여기에서 이루어집니다. 곧 영원함이 시간 속에 들어오신 것입니다. 현재나 과거에 이루어진 요한 복음의 종말은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릴 것이다.”라는 미래에 이루어질 종말을 통하여 완성됩니다. 그러나 이 믿음의 선물은 먼저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다는 책임감 있는 태도를 전제합니다. “아버지의 말씀을 듣고 배운 사람은 누구나 나에게 온다.”
또한 구약의 하느님처럼 “나는 ……이다.”라는 계시의 형식을 통하여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영원한 생명을 주는 빵이라고 정의하십니다. 광야에서 먹었던 만나와 결정적 차이점은, 만나는 그 자체로 썩어 없어질 뿐만 아니라 이를 먹었던 사람의 죽음을 막을 수 없었다는 데에 있습니다. 반면에 예수님께서는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참생명에 동참하는 것이기에, 예수님을 믿는 이들에게 그분은 “생명의 빵”이십니다.

(안봉환 스테파노 신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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