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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30주일]소경치유 (마르 10,46ㄴ-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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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업 [rlawhddjq] 쪽지 캡슐

2018-10-28 ㅣ No.131

 

 [연중 제30주일]소경치유  (마르 10,46ㄴ-52)

 

예레미야 예언자는, 주님께서 당신 백성과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을 구원하시리라고 한다. (예레 31,7-9)
7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야곱에게 기쁨으로 환호하고 민족들의 으뜸에게 환성을 올려라. 이렇게 외치며 찬양하여라. ‘주님, 당신 백성과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을 구원하소서!’
8 내가 이제 그들을 북녘땅에서 데려오고 땅끝에서 모아들이리라. 그들 가운데에는 눈먼 이와 다리저는 이  아이를 밴 여인과 아이를 낳는 여인도 함께 있으리라. 그들이 큰 무리를 지어 이곳으로 돌아오리라.
9 그들은 울면서 오리니 내가 그들을 위로하며 이끌어 주리라. 물이 있는 시냇가를 걷게 하고 넘어지지 않도록 곧은길을 걷게 하리라. 나는 이스라엘의 아버지가 되었고 에프라임은 나의 맏아들이기 때문이다.”


 히브리서의 저자는, 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께 부르심을 받아 대사제가 되셨다고 한다. (히브 5,1-6)
1 모든 대사제는 사람들 가운데에서 뽑혀  사람들을 위하여 하느님을 섬기는 일을 하도록 지정된 사람입니다. 곧 죄 때문에 예물과 제물을 바치는 것입니다.
2 그는 자기도 약점을 짊어지고 있으므로, 무지하여 길을 벗어난 이들을 너그러이 대할 수 있습니다.
3 그리고 연약한 탓에 백성의 죄뿐만 아니라 자기의 죄 때문에도  제물을 바쳐야 합니다.
4 이 영예는 어느 누구도 스스로 얻는 것이 아니라, 아론과 같이 하느님에게서 부르심을 받아 얻는 것입니다.
5 이처럼 그리스도께서도 대사제가 되는 영광을 스스로 차지하신 것이 아니라, 그분께 “너는 내 아들. 내가 오늘 너를 낳았노라.” 하고 말씀하신 분께서  그렇게 해 주신 것입니다.
6 또 다른 곳에서 말씀하신 그대로입니다. “너는 멜키체덱과 같이 영원한 사제다.”


예수님께서는 다시 볼 수 있게 해 달라며 자비를 부르짖는 눈먼 거지의 믿음을 보시고 그를 고쳐 주신다. (마르 10,46ㄴ-52)
그 무렵 46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많은 군중과 더불어 예리코를 떠나실 때에, 티매오의 아들 바르티매오라는 눈먼 거지가 길가에 앉아 있다가, 47 나자렛 사람 예수님이라는 소리를 듣고, “다윗의 자손 예수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외치기 시작하였다.
48 그래서 많은 이가 그에게 잠자코 있으라고 꾸짖었지만, 그는 더욱 큰 소리로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외쳤다.
49 예수님께서 걸음을 멈추시고, “ 그를 불러오너라.” 하셨다. 사람들이 그를 부르며, “용기를 내어 일어나게. 예수님께서 당신을 부르시네.” 하고 말하였다.
50 그는 겉옷을 벗어 던지고 벌떡 일어나 예수님께 갔다.
51 예수님께서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하고 물으시자, 그 눈먼 이가 “스승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하였다.
52 예수님께서 그에게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하고 이르시니, 그가 곧 다시 보게 되었다. 그리고 그는 예수님을 따라 길을 나섰다.

 

연중 제30주일 제1독서 (예레31,7-9) 

 

"내가 이제 그들을 북녘땅에서 데려오고, 땅끝에서 모아들이리라. 그들 가운데에는 눈먼 이와 다리저는 이,  아이를 밴 여인과 아이를 낳는 여인도 함께 있으리라. 그들이 큰 무리를 지어 이곳으로 돌아오리라."  (8)

 

주님께서는 당신께서 행하실 구원을 선언하시면서, 먼저 그 백성을 북녘땅과 땅끝에서부터 구원하실 것을 밝히신다. 이러한 내용을 시작하는 본문의 '이제'(혹은 '보라')에 해당하는 '히느니'(hinni)는  주의를 환기하는 표현인 '헨'(hen)1인칭 접미어가 결합 형태이다. 이것은 주님께서 주도하시는 내용이 제시됨을 나타낸다.

 

그리고 여기에서 '북녘땅' 은 선민이 포로되어 끌려가 흩어져 살던 곳으로서 주님의 백성에게 치명적인 위협을 주었던 장소이다.(예레6,22.23)

그러나 주님의 권능은 그와 같은 세상 권세를 이기고도 남음이 있기에, 그의 백성이 아무리 절망적인 상황에 처해있다 할지라도, 능히 주님께서는 구원의 역사를 이루실 수 있다.

 

또한 '땅끝'에 해당하는 '야르케테 아레츠'(yarkethe arets)'북녘땅'을 심화하여 나타낸 표현이다. 이것은 장소적으로 남부 유다 땅에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곳을 나타낼 뿐 아니라 선민이 고국으로 돌아오기에는 혼자만의 힘으로 불가능한 상황을 대변하는 표현이기도 하다.

 

주님의 구원은 인간의 이러한 모든 불가능을 뛰어 넘는 구원이다. 그리고 주님께서 이끄시는 구원은 그 혜택을 받는 자들에게 관련해서 볼 때 차별이 없으며 보편적이고 포괄적인 성격을 지닌다.

 

본문에 진술된 네 종류의 사람들 즉 눈먼이,다리저는 이,아이를 밴 여인,아이를 낳는 여인모두 다 자기 힘으로는 귀환하는 것이 불가능할 뿐 아니라 짧은 거리의 여행조차도 감당하기 어려운 사람들이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건장한 자들이나 장정들만을 구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이처럼 연약하고 비천한 사람들까지도 구원의 대열에 참여케 하신다. 여기에 주님의 자비하심이 잘 드러난다.

 

고대 근동의 문화적 배경을 고려하면, 인간적인 시각에서는 이들이 사회 재건에 별 기회가 없는 것으로 여겨질 수 있다. 하지만 자비가 풍성하신 주님의 시각에서는 이들이 단지  주님의 형상을 닮은 존귀한 자들이며, 생명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 한 가지만으로도(창세1,26) 더없이 귀한 존재들이다.

 

사회에서 천히 여김을 받으며 극히 약하고 무기력한 자들로 여겨지던 그들에게 주님의 구원이 임한다는 것은 구약의 여러 예언자들이 이구동성으로 예언하는 바이기도 하다.(이사35,5,6; 미카4,6-8 ; 스바3,19.20)

 

한편 구약의 성전 제사 규정 및 봉사와 관련하여 눈먼 이나 다리저는 이들은 주님께 가까이 나아갈 자격이 아예 없는 사람들이었다.(레위21,17-24) 또한 해산하는 여인도 부정한 자로 간주되어 정해진 기간동안 성소에 가까이 할 수 없었다.(레위12,1-8)

 

그러나 앞선 예레미야서 31장 6절의 외침 즉 "일어나 시온으로 올라가 주 하느님께로 나아가자." 라는 외침은 여기에 예언되고 있는 자들에게도 해당되는 것이다. 이것을 감안할 때, 본문은 주님의 구원이 완전히 이루어지는 시점에는 과거 그러한 모든 의식적 제한들이 다 해제될 것임을 나타낸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것은 궁극적으로 이 예언이 그리스도안에서 남자도,여자도,유다인도,그리스도인도, 불구자도,일반인도 없는 즉 그 모든 구별이 사라지는 신약 시대, 곧 종말론적 구원의 완성과 성취를 내다보고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로마10,12)

 

'큰 무리를 지어 이곳으로 돌아오리라.'

 

본문은 귀환하는 자들의 숫자가 많을 것임을 나타낸 것일 뿐 아니라 그들이 주님 앞에 예배하는 큰 공동체의 성격을 띠고 돌아올 것임을 암시한다. '무리'에 해당하는 '카할'(qahal)은 구약 성경에서 주로 주님 대전에서 그의 말씀을 듣고 예배를 드리는 종교적 공동체를 나타내는 데 사용된 단어이다.(레위4,14 ; 민수16,33)

 

구약 시대의 그 회중은 정상적인 남자들로만 구성되어 있었으나,주님의 구원이 시행될 때에는 앞의 네 종류의 사람들까지 포함되며 여러 구약적 맥락의 제한 규정이 해제된다. 즉 본문은 장차 이루어질 구원의 포괄성을 예언하고 있다.

 

"그들은 울면서 오리니, 내가 그들을 위로하며 이끌어 주리라.  물이 있는 시냇가를 걷게 하고 넘어지지 않도록 곧은 길을 걷게 하리라."  (9)

 

주님께서 남부 유다 백성을 이끌어 고향 땅으로 들어가게 하실 때에 그들은 울면서 돌아올 것이다. 그런데 구원의 여정에서 눈물을 흘린다는 것은 어울리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더욱이 '울면서' 에 해당하는 '삐뻬키'(bibek ; with weeping)의 원형 '뻬키'(beki)감당하기 힘든 슬픔을 당할 때 매우 큰 소리로 통곡하면서 우는 것을 의미하는 표현이다.(신명34,8; 2사무13,36)

 

구원의 여정이 슬픔이 아니기 때문에 혹자는 이를 기쁨의 표시로 우는 울음이라고 해석한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원어의 의미를 임의적으로 해석한 것이라 받아들이기 힘들다. 따라서 이보다는 뒤에 이어지는 예레미야서 31장 18,19절의 내용과 관련하여 과거 자신들의 죄악에 대한 회개의 표시로 흘리는 눈물로 보는 것이 더 적합하다.

 

이제 남부 유다 백성들이 회개하는 가운데 귀환의 길을 걸어 고향 땅으로 돌아올 때 주님께서는 그들을 위험한 곳으로 방치하지 않고,안전한 길로 인도하실 것이다. 그들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해 주시고,주님 대전에 바른 존재로 서도록 역사하실 것이다.

 

강수량이 적은 근동에서 '물'이 있는 시냇가는 풍성한 삶을 살기 원하는 사람들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요소이다. 특히 광야에서의 삶은 물이 없을 경우 생명을 지탱하기도 힘들었다. 그래서 주님께 복을 받은 사람들은 그 모습이 시냇가에 심겨져 사시사철 잎이 시들지 않는 나무로 비유한다.(시편1,3)

 

과거 선민은 주님께서 공급해 주시는 물이 아닌 그들 스스로 저수 동굴(웅덩이)을 파서 물을 얻으려고 애를 썼다.(예레2,13) 다시 말해서 그들은 생수의 원천이신 주님을 버리고, 주님 밖에서 무언가 자신들의 심령과 삶을 충족시켜 줄 것을 얻기 위해 웅덩이를 팠다. 하지만 그 웅덩이는 물을 담아 두지 못하는 갈라진 웅덩이였다.

 

그러나 주님께서 자기 백성을 회복시키실 때에는 과거처럼 허망하게 그렇게 애쓸 필요가 없으며 주님께서 전적으로 채워주심으로 그들은 만족을 누릴 것이다. 이것을 구원사적 관점에서 접근하면, 본문에서 말하는 물이 있는 시냇가란 인간의 심령을 충만하게 채워 영적으로 기쁨 가운데서 살아갈 수 있도록 역사하시는 성령의 임재와 연결된다.(요한7,37-39)

 

한편 '곧은 길'에 해당하는 '뻬데레크 야샤르'(bederek yashar)비유적 측면의 의미를 지닌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원래 이 단어는 조금도 구부러짐이 없는 올곧은 상태를 나타낸다.(욥기1,1)  구약 성경에서 120회나 사용되는데, 대부분 주님께서 보시기에 의롭거나 인격적으로 정직하거나 올바른 상태를 가리킨다.(신명12,25; 32,4; 1열왕15,5; 욥기1,1)

 

과거에 고난을 당하기 전에는 선민들이 자기 욕심대로 행하며 그릇된 삶을 살았다. 하지만 이제 그들이 울며 회개하는 가운데 돌아오는 길은 주님의 성령으로 충만할 것이며 그들의 인격과 행위는 의롭고 온전한 것으로 변모할 것이다.

 

 

연중 제30주일 복음 (마르10,46ㄴ-52) 


"그는 겉옷을 벗어 던지고 벌떡 일어나 예수님께 갔다." (50)

 

마르코 복음사가는 예수님께서 소경을 불러오라고 명하시고, 그에 따라 사람들이

소경을 부르고 있는 장면을 생생하게 기록하였으며, 또한 예수님의 부르심에 대해

소경 바르티매오가 어떻게 반응하였는지를 현장감있게 생생하게 기록하여

역동감을 더해 준다.

 

여기서 '겉옷'해당하는'히마티온'(himation; garment; cloak)

70인역(LXX)에서 '겉옷' '의복'의 두 가지 뜻을 모두 나타내는

히브리어 '베게드'(beged)에 대한 역어로 나온다.

 

겉옷은 일교차가 큰 팔레스티나에서는 밤에 이불의 역할을 했다.

 

따라서 이것은 생활 필수품이었으며, 특히 거지 바르티매오에게는 낮에는

거지 행세를 할수 있는 유니폼이었다.

 

낮에는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거지 노릇을 할 수 있는 유니폼이요,

밤에는 이부자리가 되는 '겉옷'을 벗어 던지고, 예수님께 갔다는 것은

대단한 모험이요 용기였다.

 

만일에 그가 예수님께 갔다가 치유받지 못한다면, 그는 모든 것을

잃어버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경 바르티매오는 예수님의 소리가 들리는

그 방향으로 재빨리 나아가는데 있어서 그 겉옷이 방해물이 되자

그토록 자신에게 중한 것이었지만, 미련없이 가차없이 내어 버렸다.

 

참으로, 단 한번만이라도 예수님을 가까이 대면하고 싶었던 그의 간절하고

뜨거운 마음과, 예수님을 만난다면 자신이 반드시 치유받을 수 있으리라는

내적 확신(믿음)과 희망이 이런 행동을 가능케 했다고 본다.

 

영적인 눈을 뜨게 되기를 바랍니다

 반영억라파엘신부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주님께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사랑하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당신의 사랑을 살 수 있기를 기대하십니다. 멀쩡히 눈뜨고 있으면서도 영적인 눈이 감겨있으면 얼마나 슬픈 일인지요?“스승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하였던 바르티매오의 청을 들어 주셨듯이 우리의 간절한 바람을 들어주시리라 믿으며 주님의 사랑에 새롭게 눈 뜰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제가 대학교에 근무할 때 졸업생의 결혼 주례를 몇 차례 하였습니다. 그 중에 가밀라라는 학생이 있었는데 그는 시각 장애인과 결혼을 하였습니다. 일찍부터 봉사활동을 다니다가 장애인 선생님을 만났는데 7년이라는 긴 기간 동안 서로의 마음을 주고받았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부모님의 반대를 극복하고 결혼을 하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자녀 셋을 두고 행복하게 잘 살고 있습니다.

 

저는 그들의 결혼주례를 하면서‘육신의 눈 보다 영적인 눈을 뜬 가밀라를 맞이한 신랑은 행복하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영적인 눈을 뜨도록 만들어준 신랑의 사랑을 받아들인 신부도 또한 행복하다’고 했습니다. 하느님 안에서 영의 눈을 뜨면 세상 사람이 생각하는 장애는 결코 장애가 아닙니다. 오히려 세상이 생각하는 그릇된 편견이 장애일 뿐입니다.

 

우리 눈을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는 육적인 눈, 속을 헤아리는 마음의 눈, 앞을 내다보는 혜안으로 구별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지녀야 할 눈은 혜안으로 영적인 눈입니다. 다른 눈을 지녔다고 할지라도 영적인 눈을 지니지 못하면 아무것도 지니지 못한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영적인 눈을 지니면 모든 것을 소유한 것입니다. 우리 자신에 대해서도 내가 나를 바라보는 눈이 있고, 남이 나를 바라보는 눈이 있으며 하느님께서 바라보는 눈이 있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눈에 들어야 합니다. 내가 만족하고 많은 사람이 인정하더라도 하느님 눈에 들지 않으면 아무소용이 없습니다. 우리의 생각과 말과 행위가 하느님 눈에 꼭 들기를 희망합니다. 육적인 눈으로는 볼 수 없는 것이 하느님의 얼굴이요, 하느님의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바르티매오라는 눈먼 거지가 길가에 앉아 있다가 나자렛 사람 예수님 이라는 소리를 듣고, “다윗의 자손 예수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외쳤습니다. 그러자 많은 사람이 그에게 잠자코 있으라고 꾸짖었습니다. 그는 더욱 큰 소리로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외쳤습니다. 유다인의 표현으로 자비라는 것은 애간장, 애타는 심정을 말합니다. 호세아서에서는 인간을 향한 하느님의 이 마음을 “내 마음이 미어지고 연민이 북받쳐 오른다”(11,18)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애간장이 녹는 안타까움! 이것이 바로 인간을 향한 하느님의 자비이며 사랑입니다. 바르티매오는 바로 그 자비를 간구했습니다.

 

겉으로 보면 눈먼 사람은 바르티매오였지만 좀 더 깊이 생각하면 눈 먼 사람은 주변 사람입니다. 이웃의 어려운 처지를 보고도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잠자코 있으라”고 외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는’(마르8,18)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위신, 체면을 생각하지 않고 눈먼 거지의 절박한 사정에 공감하며 그를 도왔다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그러나 그들은 영적인 눈이 멀었습니다. 볼 것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 사람이 바로 나입니다. 그렇지만 바르티매오는 자기를 낫게 해 줄 분이 누구신지 알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애타게 불렀습니다.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라도 붙잡으려는 심정으로 발버둥 치듯이 그렇게 절박하고 간절하게 매달렸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예수님의 걸음을 멈추게 했고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자비를 입었습니다.

 

옛말에 “마음의 바탕이 밝으면 어두운 방에서도 푸른 하늘을 볼 수 있고, 생각이 어두우면 환한 햇빛 속에서도 악마를 만나게 된다.”(채근담)고 했습니다. 이웃을 향한 마음이 열려 있고 또 사랑을 하면 우리 눈이 맑아져서 하느님을 뵈올 수 있는 능력을 받게 됩니다. 그러나 이웃에 무관심하면 그 자체가 어둠이요, 그 삶은 악마의 삶입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을 주셨고 또 그 사랑이 우리를 구원한다는 것도 압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을 살지 않는다면 스스로 하느님을 저버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의 성 요한은 “이웃을 진정으로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까지 미워하는 셈이며 멸시하는 사람입니다”라고 했습니다. 마태복음(25,31-46)에서도 최후심판의 기준을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라고 하시며 이웃사랑의 실천에 두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사랑에 눈을 떠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걸음을 멈추시고 바르티매오를 불러오도록 명하시자 사람들은 태도를 바꿔 눈먼 거지 바르티매오에게 “용기를 내어 일어나게. 예수님께서 당신을 부르시네”합니다. 바르티매오는 그 소리를 듣고는 “겉옷을 벗어 던지고 벌떡 일어나 예수님께 갔습니다”. 겉옷은 그의 모든 재산입니다. 낮에는 햇빛가리개요, 던져주는 돈을 받는 돈주머니요, 밤에는 이불입니다. 그를 감싸주는 유일한 도구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던져 버렸습니다. 이 시점에서 겉옷은 오히려 장애물이 될 뿐입니다.

 

제자들이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른 행위와 같은 것입니다. 우리에게 있어서도 마찬가지 입니다. 내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버리지 않고는 이웃에게 관심을 기울일 여유는 늘 없게 마련입니다. 내 것을 희생해야 이웃 사랑을 실천할 수 있습니다. 모처럼 맞은 휴일 쉬고 싶지요. 당연한 것입니다. 우리는 하고 싶은 것이 많습니다. 하고 싶은 것 해야지요. 그래서 돈도 벌어야 합니다. 그러나 주님이 재촉하시면 일어서야 합니다. 사랑이 나를 부르면 바르티매오처럼 벌떡 일어나야 합니다. 생각하고 말고 할 것이 아닙니다. 이것저것 다 따져보고 언제 사랑을 실천할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은 사랑을 실천할 기회를 꼭 잡으시기 바랍니다. 축복의 때를 놓치지 마십시오.

 

그리고 주님께서는 우리의 자유의지를 존중해 주십니다. 그래서 묻습니다.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예수님께서는 무엇이든 다 해 주실 수 있는 분이시지만 우리의 인격을 존중해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기도할 때 확실히 나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말씀드려야 합니다. 두루뭉실하게 기도하면 주님이 들어주셔도 기도의 열매라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기회가 왔을 때 망설임 없이 말씀드릴 수 있도록 분명한 기도를 해야 합니다.

 

바르티매오는 분명하게 말했습니다. “스승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이 간청은 “영적으로 눈 뜨게 해 주십시오.”라는 말입니다. 영적으로 눈을 떠서 주님을 본다는 것이 인간에게 가장 큰 영광입니다. 시편저자는 말합니다.“주님, 저는 당신께서 계시는 집과 당신 영광이 깃드는 곳을 사랑합니다. 제 영혼을 죄인들과 함께, 제 생명을 살인자들과 함께 거두지 마소서.”(시편26,8-9). 저는 여러분이 영적인 눈을 떠 주님께서 계시는 집과 주님의 영광이 깃드는 곳에 마음을 두고 마침내 주님의 얼굴을 꼭 마주하시면 좋겠습니다.

 

눈을 떠서 본다는 것은 곧 구원을 얻는 것입니다. 눈을 뜨지 못하면 구원을 얻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구원은 하느님이 나에게 주시는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큰 선물을 주셔도 보지 못하면 받을 수 없습니다. 눈을 뜨고 볼 수 있어야 제대로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신앙의 눈을 떠서 우리를 위한 사랑 때문에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제대로 보시기 바랍니다. 왜냐하면 “십자가에 관한 말씀이 멸망할 자들에게는 어리석은 것이지만, 구원 받을 우리에게는 하느님의 힘”(1고린1,18)이기 때문입니다. 한 주간, 먼저 내가 눈먼 이라는 것을 깨닫고 간절함으로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하고 기도하며 구원을 얻기를 기도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신부님과 조폭의 공통점이 있답니다. 1.검은 옷을 즐겨 입는다. 2.보스를 모신다. 하느님이나 주교님. 3. 관할 구역을 갖는다. 4.식사 후 식비를 내지 않는다. 5. 반말을 즐겨한다.

 

다른점도 있대요. 1.조폭은 칼이라는 연장을 쓰지만 신부님은 십자가라는 연장을 쓴다. 2. 조폭은 몸에 문신을 새기지만 신부님은 십자가로 성호를 그어 새긴다. 3. 조폭은 피를 보지만 신부님은 예수님의 피를 마신다. 4. 조폭은 보스를 위해 희생하지만 신부님의 보스는 십자가에 달리셨다. @@@ 우리는 비신자와의 다른 점이 무엇일까요?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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