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4동성당
[연중 제6주일] 행복하여라 (루카 6,17.20-2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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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6주일] 행복하여라 (루카 6,17.20-26)
예레미야 예언자는, 주님을 신뢰하는 이는 복되어, 물가에 심긴 나무 같아 가문 해에도 열매를 맺는다고 한다. (예레 17,5-8)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께서 되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우리의 믿음은 덧없다고 한다. (1코린 15,12.16-20)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사람들은 하느님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니 행복하다고 하시며, 부유한 사람들은 이미 위로를 받았으니 불행하다고 하신다. (루카 6,17.20-26)
연중 제6주일제1독서 (예레17,5-8)
"그러나 주님을 신뢰하고 그의 신뢰를 주님께 두는 이는 복되도다. 그는 물가에 심긴 나무와 같아, 제 뿌리를 시냇가에 뻗어, 무더위가 닥쳐와도 두려움 없이 그 잎이 푸르고, 가문 해에도 걱정 없이 줄곧 열매를 맺는다." (7~8) 앞의 예레미야서 17장 5~6절에서는 사람의 힘을 의지하며 주님을 떠난 자에게 내릴 저주가 선언되었다.
이제 예레미야서 17장 7~8절에서는 주님을 의지하고 신뢰하는 자에게 내릴 복이 선언된다.
이 두 가지를 비교할 때 복을 받을 사람과 저주를 받을 사람의 차이는 한 가지 다. 즉 복을 받을 사람은 오직 주님 만을 의지한다는 것이다.
한편 예레미야서 17장 5절의 본문은 '주님을 신뢰하고 주님께서 그의 신뢰가 되는 그 사람은'이다. 여기서 예레미야서 17장 5절의 후반부 문장의 주어는 '주님' 즉 '예흐와' (yehwa)이며, '그의 신뢰'에 해당하는 '미브타호'(mibtaho;
whose confidence; whose hope)는 '의뢰', '의지', '신뢰'(시편40,4), '희망'(시편71,5) 등으로 번역되는 '미브타흐'(mibtah)에 3인칭 단수 접미어가 결합된 형태이다.
그리고 이 명사는 '의지하다'라는 뜻의 동사 '빠타흐'(batah)에서 유래한 명사로 그 의미는 동사와 같다. 따라서 예레미야서 17장 7절은 한 어근을 중복적으로 사용하여 그 의미를 더욱 강조하고 있다.
축복을 받을 사람은 오로지 주님만을 신뢰하는 사람임을 강조하고 있다. 또한 이 구절과 대조되는 예레미야서 17장 5절과 연관지어 생각하면,
'사람이 아닌 주님을 의지하고, 군대나 군사력이 아닌 전능하신 주님의 능력을 신뢰하며, 그 마음이 주님만을 향하여 있는 그 사람은 복을 받을 것이다'는 의미가 내포된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한편 저주 받을 사람 즉 '사막의 덤불'과 극명한 대조를 이루는 '물가에 심긴 나무'와 같은 축복 받을 사람의 상황이 예레미야서 17장 8절에 진술되고 있다.
'광야의 메마른 곳', '인적 없는 소금 땅'(예레17,6) 즉 사람이 살지 않는 땅에서의 삶은 죽음과도 같은 것이다. '무더위'나 '가문 해'에 그러한 곳의 삶은 사실상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하지만 주님을 신뢰하고 의지하는 사람에게 '무더위'나 '가문 해'는 아무런 고통이나 걱정을 안겨주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는 '물가에 심긴 나무와 같아'서 '그는 시냇가에 심겨
제때에 열매를 내며 잎이 시들지 않는 나무와 같아 하는 일마다 잘 되리라'(시편1,3)고 했기 때문이다.
한편 '무더위가 닥쳐와도 두려움 없이'에서 '두려워하다'라는 뜻의 동사 '야례' (yare)는 예레미야서 17장 6절의 '보다'라는 뜻의 동사 '라아'(raah)와 함께 예레미야서에 자주 사용되어 언어 유희(word play)를 보여주고 있다.
저주 받은 사람은 좋은 일(예를 들면, 저주의 끝)이 찾아들어도 그것을 보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축복 받은 사람은 가뭄(저주)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가뭄이 올지라도 생수의 근원이신 하느님께서 그의 곁에 계시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반된 상황의 대조는 유사음을 지닌 두 히브리어 '야레'(yare)와 '라아'(raah)의 언어 유희를 통해 더욱 강조되고 있는 것이다.
주님이 말씀하시는 행복 처지가 어려우면 어려울수록 더 간절하게 그분께 의탁하고 매달려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은혜의 길이며 축복받는 길입니다.
만일에 자신의 일이 잘 안된다 해서 하느님보다는 세속의 지혜로 처신을 하려고 한다면 그는 그 자체로 하느님을 모독할 뿐만 아니라 참된 복을 저버리는 우를 범하게 됩니다. 그러나 믿는 이들마저도 그 행복을 세상의 기준으로만 판단합니다.
돈이 있으면 행복하고 권력 이 있으면 행복하며 사는 것이 편하면 행복한 줄 압니다. 그래서 모 든 수단을 동원해서 그 행복을 잡기에 안간힘을 씁니다.
그러나 그 것들은 엄밀한 의미에서 참 행복은 아닙니다. 바람이 불면 부서지는 우상들이기 때문입니다.
현실적으로는 사람을 믿는 것이 더 쉽게 보이며 또 안전하게 보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인간은 인간을 속입니다. 세상도 우리를 속입니다.
하느님만이 진실하시며 하느님만이 안전한 피난처가 되십니다.
예를 들어 자녀가 믿을 수 있는 분은 우선은 자기 부모입니다. 그리고 그 부모에게 순명하고 그분 뜻에 따르는 것이 결국은 행복입니다. 거기서 복이 옵니다.
그런데 자녀가 자기 부모는 신뢰하지 않고 어떤 건달이나 불량배들을 더 따르고 신뢰한다면 그럼 그 부모는 무엇입니까. 바로 거기에 불행의 원인이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 보면 행복한 사람에 대한 주님의 말씀이 나옵니다.
가난한 사람이 행복하고 굶주린 사람이 행복하며 우는 사람이 행복하고 그리고 욕을 먹고 누명을 쓰면 행복하다고 했습니다. 이게 도 대체 무슨 말씀입니까.
그리고 부요한 사람이 불행하고 배부른 사람 이 불행하며 웃는 사람이 불행하고 그리고 칭찬을 받는 사람이 불행하다고 했습니다. 이건 또 무슨 사연입니까. 그러나 그것은 잠시 지나가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세속의 사정에 만족하기 때문에 하느님을 붙잡지 않습니다. 자기 재물, 자 기 지혜, 자기 권력에 의존하려 합니다. 그래서 그들이 불행한 것입니다. 하느님을 떠나기 때문에 불행한 것입니다. 배고픈 사람이나 억울하게 당해서 우는 사람이나 그리고 어디 하소연할 데가 없는 사람은 세상에 붙잡을 것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자연히 하느님께 의지합니다. 그런데 이들은 바로 그 이유 때문에 행복합니다. 하느님을 차지하기 때문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큰놈은 큰놈대로 제 일을 제가 처리하기 때문에 부모께 의존하는 것이 약합니다. 둘째도 셋째도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린 아기는 전적으로 부모의 손에 의탁되어 있습니다. 붙잡을 것이라곤 부모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어린 아기가 더 행복한 것입니다. 부모님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겐 정말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그들은 바로 그 이유 때문에 행복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따뜻한 방에서 많은 것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더 이상 하느님을 붙잡지 않습니다. 안 붙잡아도 편하게 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또 불행합니다! 하느님과 떨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복 자체이시기 때문에 그분과 가까이 있으면 어떤 처지에서도 행복하지만 그분과 멀리 있으면 아무리 잘살아도 실은 불행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참 지혜를 알아야 합니다. 참 행복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은 재산으로 계산하는 것이 아니고 지금 편하고 즐거운 것으로만 판단해서도 안됩니다.
누가 더 하느님께 의지하고 신뢰하느냐에 행복의 기준이 그어져 있습니다.
힘들고 어려우면 더 그분을 신뢰하고 그분 뜻에 따르도록 합시다. 그것이 바로 참 행복입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행복 선언과 불행 선언을 전하고 있습니다.
마태오 복음에는 여덟 가지 행복 선언이 산 위에서 선포되는데, 오늘 우리가 들은 루카 복음에서는 네 가지 행복 선언과 네 가지 불행 선언이 예수님께서 산에서 내려오시어 평지에서 하신 말씀으로 나옵니다. 반대로 부유한 사람들, 배부른 사람들, 지금 웃는 사람들, 칭찬받는 사람들은 불행하다고 선언하십니다.
스스로 행복하다고 느끼려면 가난보다는 재물이, 슬픔보다는 기쁨이, 굶주림보다는 풍요로움이 당연히 필요해 보이는데, 예수님께서는 이 모든 것을 뒤집어 놓으십니다.
가난이 행복의 조건이라는 말씀도, 가난을 행복으로 알고 참으라는 말씀도 하지 않으신 것입니다. 그러나 부유한 사람들은 재물을 믿고 재물에 의지하며, 부족한 것이 없기에 하느님께 쉽게 기대려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서로 나눔으로써 가난한 사람도 부유한 사람도 함께 행복해질 수 있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이성근 사바 신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