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파발성당 게시판

살아갈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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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향 [carolo] 쪽지 캡슐

2000-01-15 ㅣ No.223


 

박하사탕이라는 영화를 보았습니다.

실로 오래간만에 만난 좋은 영화였습니다.

달리는 지하철 안에서 많은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영화평이라는 흐뭇한 지적유희를 즐기기에 바빴습니다.

개인과 사회의 역사 안에서의 관계맺음에 대하여 떠드느라

구걸하는 할머니의 스피커 찢는 음악소리도 듣지 못했습니다.

 

 

      진드기

                                  -신경림-

 

      지금 우리는 너무

      쉽게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너무 편하게만 살려고 드는 것은 아닌가,

      우리가 먹고 자고 뒹구는 이 자리가

      몸까지 뼛속까지 썩고 병들게 하는

      시궁창인 걸 모르지 않으면서도,  

      짐짓 따스하고 편하게 느껴지는 이 자리가

      암캐의 겨드랑이나 돼지의

      사타구니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서도.

       

      음습한 그곳에 끼고 박힌 진드기처럼

      털과 살갛의 따스함과 부드러움에 길들여져

      우리는 그날 그날을 너무 쉽게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시큼한 냄새와 떫은 맛에 취해

      너무 편하게 살려고만 드는 것은 아닌가,

      암캐나 돼지가 다 죽는 날

      활활 타는 큰 불길 속에 던져져

      함께 타 죽으리라고는 생각도 못하고서.

 

 

강론이 시작되기 전에 지갑을 놓고 온 것을 알았습니다.

주머니를 뒤져 보니 잡히는 동전이 천원은 될 것 같습니다.

도저히 한 주먹 가득히 동전을 쏟아 놓을 자신이 없었습니다.

한참을 망설이다 결국 성당에서 나와 천원짜리로 바꾸었습니다.

누군가 똑같은 경험을 하고 제게 이 이야기를 해 주었다면 아마도

있는 그대로 살면 되지, 사람들 눈치를 왜 보냐고 물었을 것입니다.

 

 


 

 

살아갈수록 사는 것이 아는 것과 같지 않아 속이 상합니다.

 

살아갈수록 사는 것이 말과 같지 않아 역겹습니다.

 

언제나 말은 쉽고 행동은 어려운 법!

 

입만 천당에 보내려나 봅니다.

 

 

그럼에도 역겨울 수 있다는 것은 그만큼 더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더 나아지지 못해 괴로운 그 때가 더 나아지고 있는 때일 것입니다.

 

그 모든 것이 나를 다듬어 내시는 님의 손길임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이만큼 오늘 내가 역겹다면, 그만큼 님의 눈길을 닮아감일 것입니다.

 

 

있는 그대로 산다는 것은 결코 체념이나 자포자기일 수 없습니다.

 

끊임없이 스스로를 채찍질해야 하는 님사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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