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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 필립비인들에게 보낸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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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흥보 [peters1] 쪽지 캡슐

2003-02-12 ㅣ No.75

 

 

신약 필립비인들에게 보낸 편지 해제

 

 

-진 토마스, 한국 천주교회 200주년 기념 신약성서8b 필립비서 필레몬서, 분도출판사, 1991

 

 

 

1. 배경

1) 필립비

필립비는 그리스 북부 지방인 마케도니아의 한 도시였다. 기원전 358∼357년경 알렉산더 대왕의 아버지인 필립 2세 국왕이 이 도시를 건설하고 자기 이름을 따라 '필립비'라 부르게 했다. 167년에 로마인들이 마케도니아를 정복했고, 147년에는 이 지방을 로마 속주(屬州)로 만들었다. 기원전 31년 아우구스토 황제는 필립비 도시에 여러 가지 특전을 베풀고 많은 로마군 퇴역병들을 이곳에 정착시켰다. 오늘날에는 폐허가 되고 말았으나 그 당시의 필립비는 로마와 아시아를 잇는 도로변에 위치한 상업 중심지요 군사 요충지였다. 또한 바오로 시대에 이 도시는 로마식의 자치 행정을 실시하고 있었다.

 

2) 필립비 교회의 설립

제2차 전도여행 때(50∼52년경)에 바오로 사도는 실라 및 디모테오와 함께 아시아에서 그리스로 건너와서 맨 먼저 필립비에서 복음을 선포하여 교회를 세웠다(사도 16,11-40). 따라서 필립비는 유럽에서 제일 먼저 바오로의 복음 선포를 받아들인 도시이다. 이 도시에는 유대인들이 별로 많지 않아서 그들의 조직적인 모임이나 회당은 없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시외 강가에 있는 기도소 같은 곳에 모이곤 했다. 바오로는 그 가운데 몇 사람을 입교시킬 수 있었다. 그 중에 리디아라는 부인이 있었는데, 그는 소아시아 티아디라 출신의 자색 옷감 장수로서 유대교로 개종한 여자였다. 이 여자가 바오로를 자기 집에 모시어 머물게 했기 때문에 그 집은 필립비 교회의 요람이 되었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바오로는 시민들과 관청의 훼방으로 투옥되었다가 필립비를 떠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필립비 교회는 주로 이방인들로 구성되어 있었을 것이다.

  바오로는 그 후에 여행할 때에도 몇 차례 마케도니아를 경유하였으니, 필립비 교회의 신자들을 여러번 만날 수 있었다(1고린 16,5; 2고린 2,13; 7,5; 사도 20, 1-6). 이 교회는 다른 곳의 어느 교회보다도 사도와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였다. 바오로는 언제나 보수 없이 복음을 선포하기 위하여 자기 손으로 노동하여 생계비와 전도비를 마련하였다(1데살 2,8; 2데살 3,7-9; 1고린 4,12; 9,15; 2고린 11,9). 그러나 가장 친숙한 필립비 신자들의 물질적인 도움만은 기꺼이 받아들였다(필립 4,15-16; 2고린 11,8-9).

 

2. 집필 상황

1) 집필 동기

바오로는 자신이 옥중에 있을 때 필립비 신자들이 도와준 데 대해 고마운 뜻을 전하려고 이 편지를 썼다. 필립비 교회는 에바프로디도라는 신자를 바오로에게 보내어 위문품(금전?)을 전하고 시중들게 하였다. 그러나 에바프로디도는 바오로와 함께 지내다가 중병을 앓게 되어서 바오로는 그를 돌려보냈는데 그 기회에 이 편지를 써 보냈던 것이다(2,25-30).

 

2) 집필 장소와 연대

이 편지를 쓸 때에 바오로가 감옥에 갇혀 있었던 것은 틀림없으나 정확히 어느 곳에 갇혀 있었는지는 아직 토론중에 있다. 사도행전에 의하면, 바오로는 먼저 팔레스티나의 가이사리아에서, 그 다음에는 로마에서 수년간 영어(囹圄) 생활을 했다(사도 23,23-28,31). 그래서 로마를 집필 장소로 보는 신약학자들이 상당수 된다. 그렇다면 집필 연도는 63년경이 된다. 1,13의 "부대"(원어 "프라이또리온")와 4,22의 "카이사르의 집안"은 이런 가정과 부합한다.

  그러나 현재 많은 학자들은 에페소를 집필 장소로 간주하고 있다. 사실 사도행전은 일지처럼 사도의 모든 행적을 낱낱이 보고한 책이 아니라, 그가 벌인 선교 활동의 중요한 노선과 골자만을 소개한 책이다. 따라서 거기에 기록되지 않은 사연도 많이 있을 수 있다. 특히 사도행전에 의하면 바오로는 2∼3년간이나 에페소에 머물러 있었는데(사도 18,8-10) 그 동안의 사건들 중 극소수만 보고되었다. 그러나 고린토 전ㆍ후서에 의하면 바오로는 가이사리아와 로마에서 옥고를 치르기 전에도 몇 차례 투옥된 적이 있고(2고린 11,23), 특히 에페소에서 많은 고생과 위험을 겪었다고 한다(1고린 15,32; 2고린 1,8-10).

  지리적 상황을 고려하면 로마보다도 에페소에서 이 편지를 썼을 가능성이 훨씬 많다. 에페소는 그 당시 로마 제국 아시아주(오늘의 터키 서부)의 수도로서, 그리스 해안에 가까운 항구 도시였다. 따라서 그리스북부 마케도나아와의 왕래가 비교적 수월했다(왕복에 걸리는 시일은 15일). 그런데 본서에 의하면, 바오로가 옥살이를 하는 동안 그와 필립비교회 사이에 자주 연락이 오고갔다. 우선 바오로가 옥에 갇혔다는 소식이 필립비에 전해졌다. 필립비 신도들은 에바프로디도를 뽑아 바오로에게 보냈다. 이 후 그들은 에바프로디도의 발병 소식을 들었다. 이어서 바오로는 에바프로디도를 필립비로 돌려보냈다. 그리고 바오로는 장차 디모테오를 필립비에 보낼 요량을 하고(2,19) 자기도 석방되면 곧 그리로 가려는 계획을 세웠다(1,25-26). 이렇게 잦은 왕래는 필립비와 에페소 사이에서나 가능했을 것이다.

  그리고 필립비서에 엿보이는 바오로의 계획은 에페소에서 써 보낸 고린토 전서의 내용과도 잘 부합한다. 1고린 4,17-19; 16,5-10에 의하면 그는 디모테오를 고린토로 보냈고 자기 자신도 마케도니아를 거쳐 고린토로 건너가겠다고 했다. 사도행전 19,21; 20,1-2에서도 이 여정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바오로가 로마에서 영어생활을 하기 전에 마케도니아를 여러 차례 왕래한 사실이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본서 1,26,.30을 눈여겨보면 그가 필립비 교회를 세운 이후 한번도 그곳에 돌아간 적이 없다는 인상을 준다. 그뿐 아니라 바오로가 로마에 있을 때에는 마케도니아로 돌아갈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고 여겨진다. 로마 15,19-20.22-28에 의하면, 그는 지중해 동부의 전도를 모두 마쳤다고 생각하고, 장차 로마와 스페인에서 전도할 뜻을 분명히 드러냈던 것이다. 1,13의 "부대"는 우선 로마에 있는 친위대 사령부를 가리키는 말이기는 하지만, 각 주에 있는 총독의 관저(군부대, 재판소, 감옥 포함)도 그렇게 불렀다. 그리고 "카이사르의 집안"(4,22)은 황제의 친척뿐 아니라 황제의 노예와 그리고 노예로 있다가 해방된 사람도 가리킬 수 있으니, 에페소에는 그런 사람이 많았을 것이다. 그 가운데 바오로의 설교를 듣고 개종한 사람들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에페소를 집필 장소로 보면 본서는 고린토 전ㆍ후서와 같은 무렵에 씌어졌다. 따라서 그 집필 연도는 56∼57년이다. 본서의 내용과 문체도 바오로의 친저성이 의문시되는 여타 옥중 서간들보다 바오로가 친히 쓴 다른 서간들에 더 가깝다. 이제까지 집필 장소와 연대에 관해서 학계의 통설을 몇 가지 소개하였다. 집필 장소와 연대를 완전히 확실하게 논중할 수는 없는 실정이다.

 

3. 친저성과 통일성

오늘날, 이 편지가 바오로의 친서임을 의심하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이 편지가 한목에 집필된 것이 아니라 친서 몇 통을 하나의 서간으로 편집한 소산이라고 보는 학자들이 적지 않다. 그 중에도 이 편지를 같은 필립비 교회에 보낸 두 통의 편지로 나누는 설이 유력하다. 이 성을 따르는 이들은 본서를 감사의 편지(1,1-3,1; 4,10-23)와 이단을 경고하는 편지(3,1-4,9)로 나눈다. 이 근거로는 특히 3,1과 3,2 사이에 연결이 안된다는 사실과, 앞부분과 뒷부분의 내용 및 문체가 너무 다르다는 사실을 들 수 있다(3,1의 각주 참조). 그러나 이런 현상들을 달리 설명할 수도 있으니, 예컨대 바오로가 구술(口述)을 중단했다가 상당한 시일이 지난 후 다시 받아쓰게 했다고 본다면 그 동안에 생각과 기분이 상당히 변할 수도 있다고 추론할 수 있다. 필립비 교회에서 두 통 이상의 바오로 서한을 한데 묶어 편집했다는 가설을 가볍게 배격할 수는 없지만, 확실한 것을 알 수 없기 때문에 여기서는 하나의 통일된 편지로 다루었다.

 

4. 내용

본서의 줄거리를 간단히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편지 서두에 바오로는 수신인들을 위해 기도하고(1,3-11) 자신의 처지를 설명한 다음(1,12-26), 신자들을 훈계한다(1,27-2,18). 그 다음에 바오로는 에바프로디도와 디모테오의 파견 및 자신의 여행 계획을 밝힌다(2,19-30). 그리고 3장에서는 이단을 경고한다. 끝으로, 다시 신자들을 훈계하며(4,1-9) 그들이 베푼 도움에 감사한다(4,10-20). 소식과 기도, 훈계와 감사가 어우러진 필립비서는 필레몬서와 함께 바오로의 편지들 가운데서도 가장 개성적이고 정다운 면을 보여 주고 있다.

 

1) 친교

본서는 바오로가 옥중에서 기록한 글이지만 희망과 기쁨으로 가득 차 있다. 특별히 친밀한 관계를 맺었던 교회에 보낸 편지이기에 바오로의 서간 가운데서도 가장 인정이 넘치는 편지이다. 바오로는 비록 몸으로는 멀리 떨어져 있어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친교를 통해 교우들 가까이 있다. 바오로가 특히 염려하는 것은 신자들의 화목과 일치 문제이다. 2,11-11에서 친교를 요구하는 훈계를 집중적으로 개진하고 있는 점으로 미루어, 필립비 교회 안에 화목과 일치를 위협하는 요소가 있었다는 것을 추측할 수 있다. 1,27의 표현("한 영으로")과 4,2에서 언급하는 화목의 촉구와 1,4-8에서 거듭되는 "모두"라는 표현도 이 사실을 암시하는 것 같다. 그러니까, 필립비 교회에는 고린토 교회와 달리 노골적인 분열은 없었지만 긴장과 갈등이 생겼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바오로는 이를 염려한 나머지, 겸손하게 서로 섬기는 신도들이 되라고 한다. 이를 위해 바오로는,. 자신을 낮추어 십자가의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신 그리스도를 본보기로 내세운다. 이것이 저 유명한 "그리스도 찬가"이다(2,6-11). 이 찬가는 신학과 전례에 심대한 영향을 끼쳤다.

 

2) 이단 경고

3,1b-4,1은 그 문체와 내용으로 미루어, 이 편지의 다른 부분과 구별된다. 내용인즉 이단자들에 대한 경고이다. 여기 이단자들은 영지주의의 영향을 받은 유대계 수구파 그리스도인들이다. 그들은 할례와 율법의 준수를 요구하는 한편, 신앙인은 능히 이 세상에서 완성의 경지에 이른다고 주장하며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무시했다. 바오로가 여기서 반대하는 이단자들은 갈라디아서나 고린토 전ㆍ후서에서 반박한 이단자들과 비슷한 것 같다. 그들이 이미 필립비 교회에 등장하였는지, 아니면 바오로가 다른 데서의 그들의 작태를 보고 미리 필립비 신도들에게 조심하라고 당부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아직까지는 이단자들이 필립비 신자들을 크게 유혹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만은 확실하다. 본서의 분위기가 시종 밝고 희망에 차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우리는 본서에서 바오로의 풍부한 인간성, 그의 운명과 처지, 무엇보다도 그의 사상의 핵심에 접할 수 있다. 동시에 우리는 1세기 중엽의 한 지역교회의 상황을 어느 정도 엿볼 수 있다. 바오로와 수신인들의 교회는 오로지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살고 있다. 그리스도는 그들의 모든 사랑과 희망의 초점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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