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동성당(明洞聖堂) 농성 관련 게시판

신부님 힘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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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이 [pear] 쪽지 캡슐

1999-07-10 ㅣ No.119

명동......

그 이름은 저에게도 조그만 아픔이 있는 곳이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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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년

대학 일 학년 때,

아무 것도 모르는 채로 학교 시위에 참가했어요.

그 날이 5.17계엄 전 전 날이었나봐요.

선배님들이 서울역 광장에서 모이기로 했다며..

어린 저희들은 학교를 지키다가

하나둘씩 후문으로 빠져 나와

(정문에는 삼엄한 무장군인들이 지키고 있었거든요.)

서울역으로 집결하라는 거였어요.

 

언니들이...

'어서 모여 하나가 되자'

노래를 가르쳐 주는데...

내가 왜 이 자리에 있어야 하는지  어리둥절 하면서도

가슴이 찢어질 듯이 아팠던 이유를 지금도 저는 잘 모르겠어요.

 

뭣도 모른 채로 대열의 선두에 섰다가...

무더기로 최루탄을 들이 마셨어요.

'이건 최루탄이 아니야...'

눈물만이 아니라

내장까지 다 쏟아져 나오는 거 같았어요.

그러면서도 알 수 없는 분노와 서글픔으로 그 자리를 떠날 수가 없었지요.

 

비가 내리기 시작하면서

서울역으로 모이라던 선배님들의 명령이 떠올랐어요.

지금도 비가 옵니다.

비가 오면 ....

가끔씩 그 날들의 기억이 가슴을 후비는 것처럼 나를 흔들어 놓곤하지요.

그 날의 학내 시위에서도 비가 내리기 시작하면서...

전 후문으로 서울역을 향하여 발길을 돌렸습니다.

책가방은 학교에서 잃어 버리고

우산도 없이...

그 때까지 내게 남아 있던 매운 자극때문에

눈물은 계속 흘러내리는데

유행가 가사가 떠오르더라구요.

'내눈에 흐르는 눈물이 눈물인지 빗물인지......'

너무나 너무나 혼란스러웠어요.

내가 왜 여기에서 이 비를 맞으며 울고 있는 건지....

 

그 때 어느 아주머니 한 분이 우산을 씌워주셨습니다.

"학생 엄마가 기다리시는데 빨리 집으로 가" 하시면서요.

그 날은 시내의 교통이 모두 두절된 상태라서 그 아주머니도

목적지를 향하여 걸어 가고 계시던 중이었나봅니다.

 

저희 집이 그 당시에 서울역이랑 아주 가까운 곳이었는데요.

지척에서 울리는 함성소리를 저버리고 저는 울면서

아니 비를 얼굴에 묻히면서 집으로 도망가고 말았어요.

왜냐하며 단순히 무서웠기 때문이었지요.

아마 그날 ,,,,

서울역에 집결한 학생들이

다시 명동에 모였었던 거 같구요.

그 때 너무 어렸기 때문에

함께 하지 못했던 아픔이 제게 아직도 남아 있답니다.

비겁함의 기억이지요...

 

명동하면 떠오르는 아픈 기억 중의 하나이지요.

 

그리곤 며칠후에

광주의 소식이 들려 왔어요.

19년 전 비오던 오월의 기억이 아직도 아련한 아픔으로 제게 남아 있을진댄

하물며

광주 사람들의 피눈물은 어떠할지요?

또한 생존을 위해

이 비오는 밤에도 명동을 투쟁의 마지막 보루로 사수하는 이들의 눈물을

제가 어찌 감히 왈가왈부 할 수 있겠는지요?

 

그 해

그러니까

제가 지옥 같던 입시경쟁을 뚫고

야무진 낭만의 꿈을 키우려던 대학 일학년은 우울 그 자체였습니다.

신자는 아니었지만

저는 보속과 같이 명동성당을 찾았었지요.

그 땐 보속이란 말도 몰랐었지만..

일종의 위안을 얻고 싶었던 거 같습니다,

신자가 아니었기에

미사중

앉았다 일어 났다 하는 절차와

'서로 평화의 인사를 나누십시오' 하면

신자들이 서로 인사를 할 때

그 곳에 은신해 있는 이방인인 저를 누군가 알아보고 쫒아낼 것 같은

두려움과 어색함..

그 중에서 느껴지는 평화로움은

말로 표현 할 수가 없어요.

 

학년이 올라가면서

학내시위나

가투에서 전경들의 손아귀를 피하는 방법만 배웟던거 같아요.

그 즈음에

정의구현 사제단이란 아주 생소한 이름을 들었습니다.

천주교에 대한 신선한 희망이었지요.

그러다가....

그러다가....

결혼을 하고 잊고 살았었는데....

신자가 되고....

 

명동에 갈 일이 생길 때마다

그 곳에 머무르고 있는

시위대들을 보면

고개를 들 수가 없어요.

제가 너무 많이 누리고 살기 때문이겠지요.

함께 할 수 없는 두려움이란 건지....

게다가 소위 의식있는 학생이었다는 저에게까지 느껴지는

거부감을  정당화내지 합리화시킬 수가 없는 죄스러움인지...

 

저는 요즘 명동에 가서 그들(그들이라 하지요.)을 보면

고개 숙이는 일 밖에 할 일이 없었습니다.

제가 신자가 되었다는 이유로

명동을 찾는, 가끔은 너무도 터무니 없어 보이기도 하는

그들을 어찌 받아 들여야 하는 건지 ....

함께 하겠노라 했던 철없던(?)

하지만 너무나도 순수했던 다짐은 커녕

따뜻한 눈길 한 번 건내주지 못하는 어른이 되어 버린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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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까지가  주저리 주저리 늘어 놓고 싶은 저의  이야기 입니다.

사실은 제가 오늘 여기 게시판을 찾은 이유는

명동에 사시는 많은 분들의 힘겨운 고단함을

위로해 드리고 싶었던 것이었는데....

죄송합니다.

 

 

이 곳 게시판을 읽다보면

신부님의 지극한 정성에

제 사는 모습이 너무나도 부끄러워집니다.

그리고 그 중에서도 언제나 약한 이들의 편에서

하느님의 이름을 부르시는 모습은 신앙의 귀감이 되는 듯 하구요.

신부님!

정말로 감사합니다.

가끔씩 화도 내시고

힘들어 하시는 모습에

더한 정겨움이 느껴지지요.

 

신부님!

힘내세요.

신부님이 바치시는 수고와 사랑을

마음으로 느껴 함께 하고픈 이들이 신부님 뒤에 서 있으니까요.

 

 

                                           비겁한 배나무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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