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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6월2일(5월31일) 니코시아의 성 펠릭스♬Brother Sun and Sister Mo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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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화정 [wjyou57] 쪽지 캡슐

2005-12-26 ㅣ No.1917



축일 6월2일(5월31일)
니코시아의 성 펠릭스,  OFM Cap.
San Felice da Nicosia Religioso Cappuccino 
Nicosia, 5 novembre 1715 - Nicosia, 31 maggio 1787
Fu dichiarato Beato da papa Leone XIII il 12 febbraio 1888.
Canonized: Papa Benedetto XVI, 23 ottobre 2005
Felice = contento, dal latino

 

  


  니코시아의 성 펠릭스는 1715년 11월 5일 시칠리아(Sicilia) 섬의 니코시아에서 아버지 필리포 아모로소(Filippo Amoroso)와 어머니 카르멜라 피로(Carmela Pirro)의 아들로 태어나 그날로 바로 필리푸스 야고보(Philippus Jacobus)라는 이름으로 세례성사를 받았다. 그의 아버지는 작은 구둣가게를 운영하던 제화공이었는데, 그가 태어나기 한 달 전쯤인 10월 12일에 아내와 세 자녀를 남겨두고 먼저 세상을 떠났다. 그의 가족은 비록 가난했지만 매우 깊은 신앙심을 갖고 있었다.

   어린 소년 시절에 펠릭스는 카푸친 작은 형제회 수도원에서 가까운 곳에 있는 조반니 카바렐리(Giovanni Cavarelli) 제화공의 작업장에서 구두 만드는 일을 했다. 그러면서 종종 수도원 공동체를 방문할 기회를 얻어 수도원에 대해 알게 되면서부터 그들의 삶의 방식을 동경하기 시작했다. 당시 대부분의 시칠리아 섬의 소년들처럼 그 역시 학교를 다니지 못했다. 하지만 펠릭스는 더 많은 시간을 수도원에서 보내면서 수도자들의 생활, 즉 그들의 자발적인 엄격함과 자유로운 가난, 참회와 기도, 애덕과 선교 정신에 더 깊이 빠져들게 되었다.

   20살 때 그는 니코시아 수도원의 원장에게 평수사로 입회할 수 있도록 메시나(Messina)의 관구장 신부에게 말해달라고 요청하였다. 문맹이었던 그는 성직자가 될 수는 없었지만 평수사로서의 성소는 그의 겸손하고 단순한 천성에 비추어 더 적합해 보였다. 하지만 그의 뜻은 쉽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는 8년 동안 계속해서 입회를 요청했지만 매번 돌아온 것은 거절의 답변뿐이었다. 그래도 그는 실망하지 않고 자신의 성소를 더욱 굳건히 키워갔다. 이렇듯 그는 충분한 숙고의 기회를 통해 오랜 시간 동안 잘 준비한 성소자였다. 그토록 많은 거절을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다른 비슷한 수도회에 입회할 시도를 하지 않은 것은 분명 놀라운 일이었다. 사실 그에게 있어서 하느님의 사람과 카푸친 작은 형제회는 하나이자 같은 존재였기 때문이었다.

   1743년 메시나의 관구장 신부가 니코시아를 방문한다는 소식을 들은 펠릭스는 그를 만나 오랫동안 간직해온 자신의 소망을 설명하고자 청했고, 마침내 관구장 신부로부터 입회 허락을 받고 미스트레타(Mistretta)에 있는 수도원에서 수련기를 시작하게 되었다. 1743년 10월 10일 수련기에 들어가면서 그는 펠릭스라는 수도명을 선택했다. 그에게 있어서 수련기는 많은 덕행들을 실천하며 지낸 특별한 해였다. 그의 전기를 쓴 모든 작가들은 펠릭스 수사야말로 순명과 순결, 금욕에 대한 사랑과 천사적 인내에 있어서 그 수도원에서 가장 두드러진 존재였다고 말했다. 이런 덕행들을 간직한 채 그는 1년간의 수련기를 마치고 1744년 10월 10일 첫 서원을 발했다.

   첫 서원 후 미스트레타의 수도원장은 평소 관례와는 달리 펠릭스 수사를 고향인 니코시아의 수도원으로 보냈다. 사실 젊은 수도자가 고향 마을로 파견되는 것은 친척과 지인들로부터 어려움을 겪을 수도 있기 때문에 일반적인 예는 아니었다. 하지만 수도원장은 이 세상의 모든 애착으로부터 초연한 펠릭스 수사라면 그곳에서도 영적 성장을 이루는데 있어 아무런 해가 되지 않을 것으로 믿었다. 펠릭스 수사는 성 프란치스코(Franciscus)의 금언대로 수도자는 이 세상에서 순례자요 이방인으로서 살아야 한다는 것을 이미 몸으로 실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니코시아 수도원에서 구호금 모금의 소임을 받는 그는 매일같이 거리를 돌아다니며 탁발에 나섰다. 그는 부자들의 대문을 두드리며 그들의 부유함을 나누도록 초대했고, 가난한 이들의 초라한 대문을 두드리면서는 그들이 매일 필요로 하는 구호품을 제공하였다. 거리에서 이집 저집으로 옮겨 다니면서도 그는 늘 평온함과 신중함을 간직했다. 그는 어떤 것을 받든지 항상 ‘감사합니다.’라고 인사했으며, 심지어 그를 함부로 대하는 사람에게조차 ‘하느님의 사랑이 함께 하시길 빕니다.’라고 응답하였다. 그는 글을 읽고 쓸 수가 없어 교리조차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고 성경을 제대로 읽을 수도 없었지만 마음으로 배우고 삶으로 풀어가며 영혼을 풍요롭게 만들어갔다. 그는 수도원 식탁에서 들려주는 교훈적인 책의 한 구절 한 구절을 온몸으로 느끼고자 노력했고, 니코시아 성당에서 강론을 들을 기회 또한 놓치지 않았다.

   그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께 대한 깊은 신심을 갖고 있었는데, 매주 금요일마다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묵상하고, 3월의 매 금요일에는 단단히 굳은 빵과 물만 먹으며 십자가 모양으로 두 팔을 치켜 올리고 무릎 꿇은 상태로 십자고상 앞에서 깊은 명상에 잠겼다. 그는 또한 성체성사에 대한 특별한 경외심을 갖고 있었기에 매일의 고된 일들을 마친 후에도 감실 앞에서 몇 시간씩을 보내곤 했다. 그는 하느님의 어머니에 대해서도 깊은 신심을 갖고 있었다. 엄격한 참회와 금욕 생활의 결과로 육체적으로 병약해져 모든 의무에서 벗어난 펠릭스 수사는 수도원의 병실에 머물면서도 늘 다른 병든 수사들을 위해 어떠한 봉사든지 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건강은 점점 더 나빠졌지만 하느님께 대한 그의 집중과 기쁨 그리고 단순한 순명의 정신은 더욱 더 강해졌다.

   1787년 5월 말경 정원에서 일하던 펠릭스 수사에게 갑작스런 고열이 찾아왔다. 마카리오(Macario) 원장 신부는 그에게 순명의 자세로 누워서 쉬라고 요구하였다. 자신의 마지막이 다가왔음을 깨달은 그는 약을 처방하는 의사에게 이제는 그 모든 것이 소용없다고 말하고, 5월 31일 새벽 2시에 지상에서의 삶을 마감하고 하느님의 품으로 돌아갔다. 그의 유해는 1891년에 니코시아의 주교좌성당으로 옮겨 안치되었다.

   성 펠릭스 수사는 일생 동안 엄격한 고행과 탁발로써 큰 덕을 쌓았으며 이웃에게 하느님의 한없는 사랑을 표현하며 살았다. 또한 그에게는 육체는 물론 영적인 병을 앓는 사람까지 치유하는 놀라운 은사가 있었기에 수많은 사람들이 그로부터 위로를 받고 회개하였다. 60세가 지난 후에도 그는 늘 하느님께 간구하며 병자들을 치료하고 노동을 계속하였다. 허가 없이 행한 일은 아무 것도 없을 정도로 일생을 순명하며 살았던 그는 1888년 2월 12일 교황 레오 13세(Leo XIII)에 의해 시복되었다. 그리고 2005년 10월 23일 바티칸의 성 베드로 광장에서 교황 베네딕투스 16세(Benedictus XVI)에 의해 성인품에 올랐다. 카푸친 작은 형제회에서는 그의 축일을 6월 2일에 기념하고 있다
(가톨릭홈에서)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 축일:10월4일.게시판1403번.
*성프란치스코의 거룩한 상흔 축일:9월17일.게시판1369번.



성 펠릭스는 72년 동안 수련기 1년을 제외하곤
이태리 시실리에 있는 지리학 센터 부근의 Demone 계곡에 위치한 니코시아의 고향 마을에서 살았다.

1715년 11월 5일에 구두 수선공인 아버지에게서 야고보라는 세례명으로 태어났다.

그의 집은 매우 가난했기에 학교에 갈 나이가 되었으나 가지 못하고

구두 만드는 기술을 배우기 위해 구두를 잘 만들어 호황을 누리고 있는 장인에게 어린 견습공으로서 보내졌다.

아버지는 그가 능숙한 구두 수선공이 되어 명성을 얻고 고객들을 확보함으로써

가족의 생계가 잘 보장되길 바랬다. 

그의 가족은 매일 기도와 전례에 참석했다.

가족들은 고된 일과 피곤함에도 불구하고 매일 저녁 가족을 위해 묵주기도를 했다.

기적의 성모 마리아 성당에서 일요일은 기념할 만한 특별한 날이었다.

가족들은 카푸친 작은 형제들에 의해 지도되는 Cappuccinelli로 알려진 성체회의 회원으로 등록되었다. 

그는 성장하면서 내적 고요에 머무는 것을 습득했고,

“주님의 사랑을 위해서”를 자주 반복하는 기도와 포기하고 수긍하는 태도를 계발시켰다.

성당의 저녁 종이 울릴 때, 그는 그의 동료들을 기도로 이끌곤 했다.

그가 그의 직업을 그만두었을 때 그가 쓰던 구두 수선 탁자는

“야고보가 일하던 장소”로서 존경받을 만큼 그는 높은 존경심을 받았다.[다음에 계속]-카푸친카페에서...




하느님 사랑을 위한 전형적 순종, 니코시아의 성 펠릭스  

죽기 직전, 처음으로 제 이름으로 불렸다!
1787년 5월 31일 오후 8시, 니코시아(Nicosia) 카푸친 형제회 내의 양로원에서는 자신을 ‘형제회의 작은 당나귀’로 묘사하기를 좋아했던 한 늙은 형제가 죽음을 맞이하고 있었다. 그는 종부성사를 받고 나서 침대에 누워 자신을 성 프란치스코의 ‘못 박힌 손(mani ‘nchiuvati)’에 내맡긴 채, 성모님의 도움에 의지하고 있었다. 그는 이미 수호자 마카리오 형제에게 두 번이나 죽어도 괜찮겠냐고 허락을 구한 상태였고, 고스란히 두 번 다 거절을 당한 상태였다. 그는 수도생활 평생을 모든 사람들 앞에서 수호자 마카리오 형제로부터 ‘개으름뱅이’, ‘위선자’, ‘대중의 사기꾼’, ‘불만 형제(fra Scuntentu)’와 같은 호칭으로 모욕을 받으며 살아왔다. 마카리오 형제는 평생에 단한 번도 그의 이름을 제대로 불러준 적 없었는데, 임종 상태에 다다른 상태인데도 여전히 그는 자신의 태도를 바꿀 생각이 없어보였다. 담당 의사가 마카리오 형제에게 그의 심장이 오후 3시쯤에 이미 멈췄고 이제는 그가 영으로 말하고 있을 뿐이라고 말하자, 마침내 마카리노 형제는 평생을 순종의 삶을 살아온 그 형제에게 세상을 떠날 허락을 하기 위해 병실로 들어갔다. 그때서야 마카리노 형제는 생전 처음으로 그에게 ‘펠릭스 형제’라고 이름을 불러 주었고, ‘영원한 삶으로 가기 위해서 이제 세상을 떠날 때가 왔습니다.’라며 그를 강복해 주었다. 그러자 니코시아의 펠릭스 형제는 울먹이며 모든 형제들에게 감사를 표했고(심장은 멈춘 상태지만 5시간 동안 말을 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동안 자신이 일으켰던 모든 스캔들에 대해 용서를 빌고 나서 ‘하느님의 사랑을 위하여’라고 한 번 더 말한 뒤 고개를 떨어뜨리고 숨을 거두었다. 




칸탈리체의 성 펠릭스처럼
니코시아의 펠릭스 형제는 살아있을 때나 죽어서나 언제나 순종을 지킨 카푸친의 작은 형제였다. 44년 전, 그가 카푸친 작은 형제회에 입회할 때에 평형제이자 카푸친의 첫 성인이었던 ‘칸탈리체의 성 펠릭스’의 이름을 수도명으로 받았다. 칸탈리체의 성 펠릭스는 카푸친 성덕에 겸손과 가난과 기쁨의 특색을 잘 부여한 성인이었고, 그 때문에 성덕을 꿈꾸는 많은 카푸친 형제들에게 대표적 모범이 되었다. 이탈리아 시칠리아 섬, 니코시아에서 태어난 ‘필립보 야고보 아모로소(니코시아의 성 펠릭스의 본명)’에게도 역시 성 펠릭스가 그러한 모범이 되었다.




모범적인 젊은 제화공
야고보의 아버지 필립보 아모로소(Amoroso)와 어머니 카르멜 피로(Pirro)는 어려운 상황에서 대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했다. 하지만 힘든 중에서도 하느님을 섬기는 그들의 생활은 언제나 풍요로웠다. 어둑한 골방에서 제화공으로 일하며 근근히 생계를 꾸려가던 아버지 필립보는 아들이 제화사업의 창업자가 될 것을 꿈꾸고 있었다. 아들이 나이가 차자 필립보는 그를 도시에서 가장 유명한 양화점에 견습생으로 보냈다. 많은 일꾼들이 일하는 요한 챠바렐리(Ciavarelli)의 그 구두공장과 양화점에서 야고보는 제화의 기술을 차분히 잘 습득해 나갔다.
 



일자리는 그의 첫째 경당

신앙심 깊은 야고보는 젊어서부터 카푸친 형제회에 속한 ‘카푸치넬로(Cappucinelli)’ 이라는 신심단체에 가입하여 그곳에서 열심히 활동하였다. 그곳에서 배운 카푸친 영성을 자신의 삶과 작업 분야에 잘 적용시켜 생활하였는데, 그래서인지 작업대 한 구석에서 조용히 일하는 성실한 그의 모습에서 동료들은 왠지 모를 경건함을 느꼈다고 한다. 양화점 동료였던 한 사람은 이렇게 증언했다. “그는 가게에 들어서면 늘 모자를 벗고 ‘매시간과 매순간, 지극히 복되신 성사이신 성체께서는 늘 찬양받으소서!’라고 모든 이에게 인사하곤 했습니다. 그리고 또 하느님께서는 어디에나 계시므로 공경과 존경과 경의를 항상 드려야 한다며 늘 모자를 벗고 돌아다녔습니다.” 그리고 야고보는 카푸친 경당의 종소리를 들으면 언제 어디에서든 무릎을 꿇었고, “끝기도 시간 종이 울리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종 여러분, 복되신 동정녀의 묵주기도를 바칩시다.” 라며 함께 기도할 것을 권했다고 한다. 또 그는 누군가에게 놀림을 받을 때 ‘하느님의 사랑을 위하여’라고 대답하곤 했었는데, 이 대답은 그의 일생의 모토가 되어버렸다.


여러 번 입회거절 당했다가 결국 카푸친이 되다!
어릴 적부터 도의적으로 모범적이었던 야고보였지만 성소의 여정은 그리 쉬운 길이 아니었다. 야고보는 카푸친 형제가 될 운명을 분명히 타고난 것 같았다. 하지만 그 운명은 오랜 기다림을 동반하고 있었다. 만 18살 때, 형제회 문을 두드려 평형제(그는 문맹이었기 때문에 평형제를 지망했음)로 입회할 허락을 여러 번 청했지만, 너무나 궁핍한 가족의 돈 문제 때문에(야고보가 입회하면 가족은 생계가 힘들었으므로) 입회 허락이 매번 거절당했다. 결국 부모가 사망한 다음, 한 번 더 입회 허락을 청했는데 그 당시 새로운 카푸친 관구봉사자(알카라(Alcara)의 보나벤투라 형제)는 야고보를 받아들이기로 결정했다. 그것은 카푸치넬로 단원으로서 10년을 기다려 이룬 성과였다. 그때가 1743년 10월이었다.

1743년, 야고보는 미스트레타(Mistretta)의 카푸친 수련원에 수련자로 들어갔다. 그곳에서 성 펠릭스의 이름을 수도명으로 받았는데, 30여년 전 시성된 그 거룩한 형제의 기질과 모범을 닮고자 하는 마음에서였다. 실제로 이 두 사람은 유사한 점들을 많이 가지고 있었다. 둘 다 만 28살 때에 수련자가 되었고, 만 29살 때에 서약을 했다. 그리고 둘 다 43년 동안 동냥(니코시아에서와 로마에서 각각)의 임무를 맡았고, 둘 다 만 72세에 선종했다.
 



영웅적인 동냥자루’
니코시아의 성 펠릭스의 전기를 쓴 사람은 그를 ‘영웅적인 동냥자루’라고 일컬었다. 그 호칭이 말해주듯 그의 생활은 결코 쉬운 길이 아니었다. 펠릭스 형제는 마스트레타에서 수련기를 마치고 니코시아에 돌아와 그 이후로 죽을 때까지 그곳에서 동냥 생활을 해야만 했다. 사실 한 지역에서 몇 년씩 머문다는 것은 그 당시의 카푸친에서는 비정상적인 것으로서 아주 드문 일이었다. 하지만 그 때문에 펠릭스 형제는 그 도시(니코시아)를 대표하는, 어느 누구도 다른 곳으로 이동시킬 수 없는, 저명한 영성인으로 우뚝 설 수 있게 되었다.

펠릭스 형제는 동냥 외에 문지기와 원예사, 제화공과 간호사 등의 임무도 충실히 이행했다. 동냥에 있어서 펠릭스는 도시의 경계를 넘어 카피치(Capizzi)와 체라미(Cerami)와 갈랴노(Gagliano)와 미스트레타 등과 같은 줄레 지방까지 그 활동 범위를 확장시켰다.그는 늘 묵주를 손에 들고 묵상하며 집집마다 걸어 다녔는데, 이 모습을 본 어떤 사람은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그는 침묵의 동굴 속에 있는 사람 같았습니다. 두 눈을 지그시감은 그의 모습을 바라보자면 그는 항상 하느님께 빠져 있는 사람 같았습니다.” 그리고 그가 기쁨과 감사를 표현할 때는 늘 ‘하느님의 사랑을 위하여’라고 했고, 주변 모든 사람들은 그 말을 항상 들을 수 있었다.



펠릭스의 고유한 복음화 방법
펠릭스는 매일 동냥 짐을 지고 귀가하는 자기 자신을 ‘형제회의 작은 당나귀’로 묘사하기를 좋아했다. 그리고 길을 가다가 어린이들을 만나면 빵과 콩을 나누어 주면서 교리를 가르쳤는데, 그에게는 어린이들의 관심을 끌기 위한 특이한 교육 방법이 있었다. 주머니에서 호두 하나를 꺼내어 주면서 한 분 뿐이신 하느님을, 호두 세 개를 꺼내어 주면서 삼위일체를, 콩 다섯 개를 꺼내어 주면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의 오상을, 콩 열 개를 꺼내어 주면서 하느님의 십계명을 기억하도록 가르쳤다. 이러한 펠릭스 형제의 자상함은 어린이들의 교리 수업에 좋은 결과를 나았다. 그리고 칸탈리체의 성 펠릭스처럼 펠릭스 자신도 기도나 향주삼덕에 관하여 짧은 노래들을 만들어 가르치곤 했다.


모든 사람을 도와주었다
사람들의 고통은 펠릭스의 마음속에서 깊게 요동쳤다. 궁핍한 사람들을 위해 무엇을 도와줄 수 있을지 늘 전전긍긍 했으며, 낮이나 밤이나 항상 병자들을 위해 마음을 썼다.일요일이 되면 감옥의 죄수들을 방문하여 그들에게 빵을 나누어 주었고, 길거리에서 무거운 짐을 지는 사람이라도 만나면 그냥 지나치지 않고 늘 도와주었다. 그의 수호자였던 니코시아의 마카리오 형제는 펠릭스 형제에 대해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그는 모든 사람을 도와주었습니다. 현실적이든 영적이든 자신이 할 수 있는 만큼 모든 일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늘 궁핍한 사람들을 위해 빵과 고기를 준비했고, 허락을 받았다면 자기 입에 있는 음식도 기꺼이 꺼내어 줄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매일 같이 전국 방방곡곡 돌아다니며 부자들에게 옷과 구호품을 달라고 청하곤 했는데, 어쩌다 어려운 이들에게 도움을 주지 못할 때면 상당히 괴로워했습니다.”

 


천대받았지만 겸손하여 견뎠다!
23년 동안, 펠릭스의 영성지도를 맡았던 수호자 마카리오 형제는 펠릭스를 아주 심하게 다루었다. 기회 있을 때마다 외부 사람들 앞에서 욕을 하고 굴욕감을 주었다. 하지만 펠릭스는 이에 언제나 ‘하느님의 사랑을 위하여’라고 응수할 뿐이었다. 뿐만 아니라 수호자는 펠릭스에게 형제들의 모인 식당에서 카니발 축제 때나 입는 굴욕적인 옷을 입히고 어릿광대 짓을 시켰고, 또 머리에 바구니를 이게 하고 재로 반죽을 값비싼 리코타 치즈인 척하면서 형제들과 손님들에게 나누어 주도록 시켰다. 그러던 중 신기하게도 형제들과 수호자에게 건넨 그 재 반죽이 진짜 리토타 치즈로 변하는 기적이 일어났다.

 

성체와 통고의 성모님과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님께 대한 신심이 깊었다
문맹인 펠릭스 형제의 신심은 단순했다. 그의 말은 지적이기보다는 현실적이었다. 그는 성체 안에 계신 예수님과 통고의 성모님과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님께 대한 깊은 신심을 가지고 있었다. 글을 읽을 줄 몰랐기에 한번 들었던 성경 말씀과 영성서적의 내용을 최선을 다해 외웠고, 그 구절들을 마음 기도의 좋은 주재로 삼아 늘 묵상했다. 니코시아의 형제회의 제의실 담당이었던 간지(Gangi)의 프란치스코 형제는 펠릭스 형제를 이렇게 기억했다. “그는 저에게 마음기도, 특히 예수님의 수난에 대한 마음기도를 하는 방법을 항상 일러주곤 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을 묵상하고 생각하는 사람은 누구나 지옥의 벌을 피할 것이라고 알려 주었습니다. 그리고 이 말을 저에게 할 때 그는 열정에 사로 잡혀 눈물을 흘렸습니다. 제의실 담당 임무 때문에 그를 만날 자주 있었는데, 그는 눈물을 흘리며 저를 포옹해 주었고,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에 관하여 기도하라고 일러주곤 했습니다.”

일생 동안 마치 꽃처럼 피어난 그의 수많은 일화들을 얘기하자면 끝이 없다. 그러나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 한 가지 있다. 그것은 바로 그의 거리낌 없는 ‘폴리자’ 신심이다. 그는 모든 악을 근절한다는 성모님의 ‘폴리자(polize, 라틴어와 시칠리아 사투리로 성모 신심기도를 적은 종이 조각)’를 항상 지니고 다녔다. 그리고 그것들을 자주 신자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병자들이나 가난한 사람들이 사는 집에 걸어 주었고, 구걸해 온 술통에도 붙이곤 했다. 한번은 불붙은 밀짚에 이 폴리자를 던져 화재를 진압하는 기적을 행하기도 했고, 또 한 번은병충해로 검게 썩어 들어간 곡식 안으로 이것을 던져 그 곡식을 원래대로 되돌려 놓기도 했다. 또 가뭄으로 인해 마르고 갈라진 물통 안으로 던져 가뭄을 끝나게도 했다. 폴리자를 통한 이 많은 기적들은 대다수가 하느님 섭리에 의해 이루어진 장난질인 것 같다.




죽기까지 순종했지만, 하느님께서는 그를 높이 올리셨다.
건강이 안 좋아진 펠릭스 형제는 결국 모든 책임에서 자유로워졌다. 그동안 극심한 고행과 보속으로 인해 몸이 이미 많이 병들어 있는 상태였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펠릭스 형제는 모두에게, 특히 형제회 양로원의 병자 형제들을 위해 기꺼이 봉사하곤 했다. 노년의 그의 육신은 날로 약해졌지만 하느님께 대한 열정과 기쁨, 그 순명은 날로 늘어났다. 성 프란치스코에게 ‘기도의 인격화’가 드러났다면, 펠릭스 형제에게는 온화한 사랑이 빗어낸‘순종의 인격화’가 잘 드러났다고 할 수 있다. 이 순종에 대한 모범이야말로 펠릭스 형제가 전해 주는 최종적 교훈이라고 볼 수 있다.

1787년 5월말 펠릭스 형제는 병자들을 위해서 몸소 가꾸던 약초밭에서 그만 쓰러지고 말았다. 그는 자신이 불치병에 걸렸다는 것을 의사에게 통보 받았다. 그리고 1787년 5월 31일 수호자로부터 세상을 떠날 허락과 강복을 받은 다음 니코시의 펠릭스 형제는 선종했다. 그가 죽자 그를 기리는 엄청난 무리들이 몰려와 그의 수도복과 밧줄 끈을 잘라갔다. 그 바람에 시신에게 여러 번 새 수도복을 입혀야 했다고 한다.

그의 시신은 카푸친 형제회의 지하 성당에 묻혔다가 1887년, 이탈리아 정부가 카푸친 작은 형제회를 폐쇄하는 바람에 주교좌성당으로 옮겨졌다. 31년이 지난 후, 그의 시신은 카푸친들의 새로운 성당으로 옮겨졌다. 1888년, 레오 13세 교황에 의해 시복되었고, 2005년, 베네딕토 16세 교황에 의해 시성 되었다.


 

"가난한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이어서 그들은 반듯이 존경을 받아야 합니다.  그 작고 가난한 이들안에서 그리고 병자들 안에 하느님을 알아보고, 우리의 온 심정으로 그리고 우리 각자의 고유 능력에 따라 그들을 도와주어야 합니다.  달콤한 말로 앓고 있는 가난한 이들을 위로해야 하며 그들에게 기꺼이 도움을 전해주어야 합니다. 현명하게 사랑하는 자세로 길을 잃은 그 사람들을 끊임없이 바로잡아 봅시다." - 니코시의 성 펠릭스
(카푸친작은형제회홈에서)

 

 

*카푸친작은형제회 성인들 Capuchin Franciscans...

비테르보의 성 크리스피노(축일:5월21일(19일),게시판1773번.1891번)
단순성과 기쁨.칸탈리체의 성 펠릭스 (1587년.축일:5월18일.게시판1770번.1166번)
만디츠의 성 레오폴드 사제(축일:5월12일,게시판1759번,1890번)
라코니의 성 이냐시오 수도자(축일:5월11일.게시판1757번)
신앙을 수호하다 순교한 식마린겐의 성 피델리스 사제(축일:4월24일.게시판1727번,1119번)
빠르잠의 성 곤라도 수도자(축일:4월21일.게시판1722번)
성 요셉 레오네사(축일:2월4일.게시판1601번)
꼬를레오네의 성베르나르도 수도자(축일:1월12일(19일),게시판1564번)
아크리의 복자 안젤로(축일:10월30일.게시판1444번)
성 세라피노(축일:10월12일.게시판1417번,691번)
캄포로쏘의 성 프란치스코 마리아(축일:9월20일(25일)게시판1384번)
오상의 (피에트렐치나의) 성 비오 사제(축일:9월23일.게시판1379번)
복자 오피다의 베르나르도(축일:8월26일(23일)게시판1334번)
복자 아가탄젤로와 카시아노 동료순교자(축일:8월7일.게시판1305번)
브린디시의 성 라우렌시오 사제 학자(축일:7월21일.게시판1283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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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푸친은 기도의 교사로서

 

플라비오 로베르또 형제(o.f.m.cap. 전 총봉사자)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는 기도의 사람이기도 하고, 기도의 교사이기도 했다.

첼라노의 토마스는 우리에게 프란치스코가 "기도하는 사람이기 보다는 기도 그 자체가 된 사람이었다"

(2 첼라노 95)고 이야기해준다. 

 

성 보나벤뚜라는  프란치스코가 그 기도 안에서 찾게 된 관계를  다음과 같이 잘 요약한다.

 "현시를 봄으로써 그분의 영혼이 녹았고 십자가에 못 박히신 주님의 상처들이 항상 그 눈앞에 있게되는

그 만큼 그리스도님의 수난에 대한 기억은 그 정도로 긴밀하게 그 분의 마음에 되새겨 있었다.........

프란치스코가 자기가 그 숨은 보물 , 그 값진 밝은 진주를 찾아냈다고 느끼게 되었다......."(대 전기 1.4)

 

프란치스코의 둘레에 있는 이들을 따뜻하게 하는 불은 기도의 결과인 그 불이었다: 

그 불을 다른 사람들이 매력적인 것으로 보아서 그 불은 그들을 이끌어

프란치스코를 기도의 선생님으로 삼아 그에게 찾아가게 하였다. 

그러나 타인과 그 개인 경험을 나눌 수 있기 전에 프란치스코의 기도는 발전하여 성숙해져야 했다.

고상 앞에서 바쳤던 그의 첫 기도에서 우리는 건전한 내적인 모습을 볼 수 있다:

"주님의 거룩하고 진실한 뜻을 실행하도록.....제 마음의 어두움을 밝혀 주소서".

이 초기 때에 프란치스코는 그리스도님으로 가득 차게 되었는데

 "사실 예수님께서 그분의 마음을 사로잡으셨다..."(1 첼라노 115) 

 

’주의 기도 풀이’에 이르렀을 때에는 프란치스코의 기도가 조금씩 변화된 것으로 보인다.

자기에 대한 근심은 타인과 함께 기도하는 것으로 변모되어 있는 것이다:

"하늘에 계신 지극히 거룩하신 우리 아버지 ...

모든 이를 당신은 사랑하도록 저희이 힘이 닿는 대로 그들을 이끌어...

저희 몸과 같이 저희 이웃을 사랑하게 하소서"

 

프란치스코의 "태양의 노래"에서 그 기도의 사회적 일면은 더욱 더 깊게 된다.

맨 처음으로 서방 그리스도의 영성에서

자연의 요소들은 "형제 자매" 라는 친밀한 용어로 묘사되는 존경을 받는다.

프란치스코는 그와 함께 기도하도록 온 누리(우주)를 초대한다.

같은 주제는 1221년의 회칙 23장에 영향을 끼친다.

형제들의 기도에 달려있는 그 기쁨은 그들과 함께 노래하며

하느님을 찬미하고 싶어했던 사람들에게 매력적으로 되기 시작했다.

 

프란치스코와 그 첫째 형제들은 교회에 새롭고 놀라은 것을 가져다 주었다.

즉 그들은 수도승원에서만 찾게 되었던 그 기도와 하느님께 대한 그 경험을 장터에 가져 나갔다.

프란치스칸 샘들에서 프란치스코와 그의 형제들은

어떻게 은둔을 찾았다가 그 은둔의 열매를 다른 사람들과 나누어주었느냐는 여러 개의 예들로 가득 차 있다.

그들의 기도는 흘러 넘쳐서 다른 사람들을 향했다.

그들은 하느님께 접근하는 것에 관하여 새 교훈을 세상 만민에게 가르쳐 주었다.

 

프란치스코와 그의 제자들이 다른 이들에게 남겨 준 가르침의 초점들은 다음과 같다.

1. 하느님께 완전히 점령되도록 우리는 은둔의 분위기를 창조할 필요가 있다. .

(은둔소를 위해 쓰신 회칙; 제1회칙 7장, 인준 받은 회칙 5장과 8장,2 첼라노 96)

2. 기도는 사람이 하는 행위가 아니라 ...사람이 되는 그러한 것이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종들은 기도나 어떤 올바른 일에 항상 종사해야 합니다"(제 1회칙 7장)

3. 정신적 기도와 관상은 길러질 일이다.(보나벤뚜라 대 전기 4장3절)

4. 형제들의 첫째로 가는 성소는 기도하는 것이다.

   일과 학문은, 이들이 "거룩한 기도와 거룩한 신심의 영을 끄지 않을 그 만큼만"

(인준 받은 회칙5장, 안또니오 성인에게 보내신 편지) 허가 되어있다.

5. 기도는 인간 수고의 결과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주신 은혜 또는 선물이다.(제 1 회칙 17장)

6. 깨끗한 마음과 단순한 의향은 기도 생활에 있어서 깊어질 조건이다.(인준 받은 회칙 5장,제1회칙 22장)

 

프란치스코는 이 교훈들을 형제들에게도 다른 이들에게도 말로써 가르쳤다.

그러나 이 가르침들을 가장 많이 입증하는 것은 그가 살았던 기도 자체였다. 

프란치스코가 기도와 은둔에 집중한 바로 그것은 16세기의 카푸친 개혁의 회원들이 가장 소중히 여긴것이었다.

첫 카푸친 형제들이 알바치나에 있는 산타마리아 델라콰렐라라의 성지에서 1529년에 모였을 때에

그들은 기도와 관상과 관련되어 있는 프란치스코의 가르침과 생애의 전면에 온전히 집중하였다.

 

"은둔 생활 양식의 더욱 작은형제들의 회헌"은 공동체를 도전하며 정신적기도에 4시간을 지내게 하는것이었다.

이러한 생활의 틈새를 마련하기 위해 성무일도는 노래와 장식없이 바쳐야 했고, 과도한 음성기도는 피해졌다.

형제들은 외딴곳에 살아야 했으며 개인기도와 신비적 관상은 개혁의 중심거리가 되는 것이었다.

수도생활의 관상적인 면을 강조하는 것은

포쏨브로네의 루도비꼬의 개인적인 인격과 가말돌리회의 은둔 수사들의 영향을 드러낸다.

 

로마에 있는 성 에우페미아 수도원에서 1645년 11월에 형제들이 다시 모였을 때에

관상과 봉사의 조화를 제안했다.

그러나 기도가 아직도 그들의 생각에서 우선한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기도가 형제들의 영적인 교사이므로 ,그리고 신심의 영이 미지근해지지 않도록...

우리가 미지근하고 미온적인 이들을 위해서는 적어도 2시간의 기도를 제정하는데

과연 참으로 영적인 형제들은 늘 기도하고 있을 것이다"(1535년 회헌 41조)

알바치나 문서에서 보게 되는 4시간의 묵상을 의무적인 2시간으로 줄였으며

은둔-관상의 일면을 수도회의 사도적 부르심과 균형에 두려는 노력이 있었다.

 

관상은 형제들에게 하느님의 사랑을 설교하는 이들로,

신적인 친밀감에 성장하는 방법을 가르치는 이들이 될 능력을 마련해 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활동주의에 대한 조심은 언제까지나 카푸친회 은사의 특성으로 남게 될 것이다.

다음의 원칙은 앞으로도 계속해서 카푸친 전통의 일부로 재확인 될 것이다.

 

카푸친은 자기 자신이 기도함으로써 기도의 교사가 될 줄을 배운다.

1536년의 문맥의 대부분은 아직도 우리 현 회헌에 들어 있다.

"그러므로 복되신 예수님 친히 그들로 하여금 그냥 말로만이 아니고 훨씬 더 많이 실행으로,

사랑의 충만에서부터 말하게 자극시키실 수 있도록 설교자들은 그 예수님을 그들의 마음에 새겨서

그분께 평화로운 점유권을 드리라는 권고를 받고 있다"

 

카푸친들이 반종교 개혁의 운동에 이바지한 초점은 영적 쇄신을 이루려는 그들의 노력이었다.

그들은 개인 기도와 관상의 교실에서 배웠던 그 교훈들을 말과 모범으로서 설교하고 가르쳐 주었다.

 

21세기의 카푸친들도 그 똑 같은 초점을 현대 세상에 전해 주기를 계속해서 소원하고 있다.

이것은 1973년에 떼제에서 확인 되었는데 거기서 제3차 수도회 전체 공의회는 다음의 구절들을 긍정했다.

"성령의 자극을 받아서 기도는 인간 마음의 지극한 필요를 표현하는 것이며,

사랑의 호흡 자체가 되어야 합니다"(6조)

"형제들은 어디서나 신자들 가운데와 특히 우리 형제회들과 온 프란치스칸 가족에서 일하게 될

특별히 수련을 받은 기도 및 영성 생활 고무자들을 필수적으로 경험하고 있다"(24)

1982/1990년의 회헌은 이 모든 점을 모으기도 하고 확장하기도 한다.

"기도 , 특히 내적인 기도의 영을 하느님 백성 가운데서 극진히 기릅시다"(56조 6항)

"우리는 그 분의 사랑의 증인들로서 모든 이들을 하느님께 대한 찬미에로 초대하여 평화와 참회를 전하면서

 세상을 두루 다닙시다"(46조 7항)

현대 세상은 카푸친이 품는 다음의 가장 깊은 소망을 이루어짐에 준비된 상태로 있다:

즉 기도하며 다른 사람들에게 기도 할 줄도 가르치려는 그런 소망 말이다 

(카푸친작은형제회홈에서 www.capuchin.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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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rother Sun and Sister Moon

 

 

 

 

 

 

 

 

 

 

 

 

 

 

 

 

 San Felice da Nicosia Religioso Cappuccino
31 maggio 
Nicosia, 5 novembre 1715 - Nicosia, 31 maggio 1787


San Felice Da Nicosia (al secolo Giacomo Amoroso), italiano, laico dell'Ordine dei Frati Minori Cappuccini (1715-1787). Per oltre quarant'anni ha offerto il suo servizio di mendicante svolgendo un apostolato itinerante. Analfabeta, ha avuto la scienza della carità e dell'umiltà.

Martirologio Romano: A Nicosia in Sicilia, beato Felice (Giacomo) Amoroso, religioso, che, dopo essere stato rifiutato per dieci anni, entrò infine nell’Ordine dei Frati Minori Cappuccini, dove svolse i più umili servizi in semplicità e purezza di cuore.

Giacomo Amoroso nacque a Nicosia nel 1715, il padre Filippo era calzolaio e la madre Carmela Pirro badava alla numerosa famiglia. Il padre decise di far lavorare il figlio nella calzoleria più importante del paese affinché si specializzasse in questo mestiere. Giacomo presto imparò il mestiere e nello stesso tempo si era avvicinato alla congregazione dei Cappuccinelli presso il convento di Nicosia. Era per tutto esempio in quanto la sua spiritualità la testimoniava in tutte le cose di ogni giorno. Nel 1733 decise di chiedere di entrare come fratello laico nell'ordine dei Cappuccini, ma non fu accolto, anche a causa delle condizioni economiche precarie della sua famiglia alla quale era fondamentale il suo apporto. Una volta morti i genitori nel 1743 riprovò a chiedere di essere ammesso tra i Cappuccini direttamente al provinciale che era in visita a Nicosia, e, finalmente, dieci anni dopo la sua prima richiesta venne ammesso al noviziato nel convento di Ristretta con il nome di fra Felice. L'anno seguente fece la professione e fu inviato nello stesso suo paese di origine dove per 43 anni esercitò il compito di questuante. Nel convento esercitò vari lavori, portinaio, ortolano, calzolaio e infermiere, fuori era il questuante non solo a Nicosia ma anche nei paesi vicini, Capizzi, Cerami, Mistretta e Gagliano.
Si definiva "u sciccareddu", l'asinello che carico portava quanto raccolto al convento.
Aveva una particolare predilezione per i bambini, dalle sue tasche tirava fuori una noce, delle nocciole o delle face le regalava ai fanciulli ed in base al numero di queste cose ricordava loro le piaghe di Gesù, la santissima Trinità, i dieci comandamenti, piccoli regali che però davano l'opportunità a fra Felice di fare una breve e semplice lezione di catechismo.
Se per strada incontrava poveri con carichi particolarmente pesanti dava loro una mano per aiutarli, aiutava gli ammalati e cercava di fare qualcosa per i più bisognosi. Tutte le domeniche era solito andare a trovare i carcerati.
Il superiore nonché padre spirituale spesso lo trattava duramente, lo umiliava appioppandogli nomignoli quali poltrone, ipocrita, gabbatore della gente, santo della Mecca, fra Felice rispondeva a ciò dicendo "sia per l'amor di Dio". Ancora il superiore spesso lo obbligò ad esibirsi nel refettorio del convento con abiti carnevaleschi, distribuendo una massa di cenere impastata come fosse ricotta fresca, che miracolosamente lo diventò veramente.
Fra Felice distribuiva delle striscioline di carta sulle quali erano scritte delle invocazioni alla Beata Vergine e le utilizzava come rimedio infallibile per tutti i mali, appendendole alle porte delle abitazioni dove vi erano sofferenti ammalati o poveri, contrastava il fuoco che aveva attaccato i covoni da trebbiare, oppure appendendole nelle cisterne prive di acqua. Spesso avvenivano grazie ed eventi miracolosi che non facevano altro che accrescere la fama di fra Felice.
Una volta alleggerito da tutti i servizi data l'avanzata età e la malferma salute si dedicò alla preghiera.
Verso la fine del mese di maggio 1787 mentre era nel suo orto si accasciò senza più forze e dopo alcuni giorni nel suo letto raccomandandosi a S. Francesco e alla Madonna chiese al superiore il l'obbedienza di morire. Morì il 31 maggio del 1787. Fu dichiarato Beato da papa Leone XIII il 12 febbraio 1888.
Papa Benedetto XVI, nella sua prima cerimonia di canonizzazione, lo ha proclamato santo il 23 ottobre 2005 in piazza San Pietro.
La data di culto per la Chiesa universale è il 31 maggio mentre i Frati Cappuccini lo ricordano il 2 giugno.

I poveri sono la persona di Gesù Cristo, e si devono rispettare. Riguardiamo nei poverelli e negli infermi lo stesso Dio, e soccorriamoli con tutto l'affetto del nostro cuore e secondo le proprie nostre forze. Consoliamo con dolci parole i poveri ammalati e prontamente rechiamo loro soccorso. Non cessiamo mai dal correggere i traviati con maniere prudenti e caritative.
(Beato Felice da Nicosia)


Autore: Carmelo Randello

Spunti bibliografici su San Felice da Nicosia a cura di LibreriadelSanto.it

Bertin Mario, Il santo senza parole. Fra Felice da Nicosia..., Città Aperta, 2005 - 144 pag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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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giunto il 2002-0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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